"길은 길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한번 놓친 길은 다시 걸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이 시는 말하지만, 작품은 길과 달라서, 우리는 시의 맨 처음으로 계속 되돌아가 작품이 품고 있는 여러 갈래의 길을 남김없이 다 걸어도 된다. 다행이지 않은가.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 P246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머리말에서 글쓰기의 단계별 준칙을 이렇게 정리해본 적이 있다. (물론 내가 쓴 글들은 내가 설정한기준에 언제나 미달한다.) 첫째,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할 것. 좋은 글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뜻한 바를 백 퍼센트 담아낼 수 있는 문장이 써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모든 문장이 제자리에 놓이도록 만들어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건은 내가 윤상의 음악에서 경탄하며 발견하곤 하는 것들이다 - P253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자신의 전부를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보들레르의 시나 모리 오가이의 소설을 읽을 때의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었고, 그것이 자기라는 존재를 긍정하는 입구였다고 고백한다.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나란 무엇인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덕질은 우리에게 그런 덕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자꾸만 나를 혐오하게 만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 세계와 맞서고 있다. - P254

그러니까 사랑은 누구도 완전히 절망할 수는 없게 만드는 이상한 노래를 함께 부르는 일같은 것이리라. 죽을 때까진, 살아가는 것이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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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가장 주의하는 게 오만함, 겉멋 같은 것들이다. 항상 ‘난 별것 아니다‘란 생각으로 사는 편이 제일 안전한 길이라고 믿는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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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란 책에 의하면 인간이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가 그저 유전자를 이어가기 위함이라는 삭막한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그렇게 정의 내리고 싶지 않다면, 결국 인간은 정체성이다. 단지 유전자를 옮기기 위한 그릇에 불과한 게 아닌, 하나의 고유한 객체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다양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삶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사소하더라도 내가 어떤 존재인지 하나하나 정체성을 채워갈 때 본능적으로 행복한 거다.  - P183

자존감이라는 게 어떻게 형성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내 경우에는 내가 잘하는 무언가를 내가 뿌듯해할 때 형성됐다. 혹 잘하지 못하더라도 남들보다 더 잘 ‘아는‘ 것에서도 난 뿌듯함을 느꼈다. 그게 게임이든 예체능이든 당장은 무익해 보이는 어떤 ‘덕질‘이든 남들보다 더 좋아하고 잘하고 잘 알게 되는 일이 아마도 한 사람의 인생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자존감의 기틀이 되는게 아닐까.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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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나는 이렇지 않았다. 어떤 제안이나 부탁이 들어왔을 때 안 할 이유가 정말 많이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객관적으로 그게 정말 ‘안 할 이유였을까? 아니다. 두려움, 귀찮음, 자신 없음 모두 단지 내가 만들어낸 안 할 이유였을 뿐이다. 지금은 그것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점검한다. 정말 안 할 이유인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이유인가. 그러면 답이 나온다. ‘안 할 이유가 없네? 그럼 해야지.‘ 이런 생각은 이제 내 유무의식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 P6

내가 좋아하는 인터뷰 영상 중에 김연아 선수의 것이 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하느냐는 질문에 김연아 선수가 답한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정말 완벽한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출근길 작은 눈사람이 쓰러져 있는 걸 보면 그냥 일으켜 세우고 지나간다. 아무 이유 없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세우는 거다. 기찻길 선로 위로 추락한 사람을 구하려고 뛰어든 영웅들을 인터뷰하면 하나같이 똑같은 말이 나온다. 그냥 몸이 움직였다고. 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점이 바로 이런 ‘그냥‘에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안 할 이유를 찾고할 시간에 그냥 해버리는 것 말이다. - P7

실제로 내가 글을 쓸 때 절대적으로 지키는 원칙 하나는, ‘내가 아는 건 보는 사람도 안다‘이다. 내가 아는 건 보는 사람도 다 알 테니까 가르치려 들지 말자, 뻔한 거 말고 나도 몰랐던 걸 쓰려고 노력하자. 그렇게 글을 썼더니 정말 좋은 결과가 돌아왔다.
나는 당연히 특별한 사람이지만, 생각보다는 별거 아니다. 내가 별거 아니란 생각, 남들도 나와 같다는 생각은 평화로운 삶에 꽤 도움이 된다.  - P19

귀함은 가난과 부를 차별하지 않는다. - P29

인간이 무형의 총을 쏠 수 있다면 그 총알은 의심일 거다. - P30

어떤 위치에 선다는 것은 누군가의 입장에는 무감각해지는 일인가 보다. - P51

궁금해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때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사랑이구나. ‘사랑하니까 궁금하다‘가 유일하게 말이 되는 설명이었다. 생산성 없는 궁금증을 설명하기 위해 사랑이 쓰인다면,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생산성 없는 궁금증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게 사랑이란 서로를 궁금해하는 일이다. - P61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원래 어떤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지는게 아닐까 싶다. 원래부터 어떤 사람인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내가 관리하고 싶은 내 이미지는 분명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일 테고, 그럼 그런 모습이 되기 위한 관리는 절대 나쁜 게 아닐 거다. 가식도 죽을 때까지행하면 진짜가 된다지 않는가. - P130

일은 원래 견디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결론지은 까닭은 평생 한 번도 일을 좋아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일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로 나뉠 뿐, 좋아하고 말고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서른두 살에 기적처럼 좋아하는 일이 찾아왔다. - P151

내 꿈이 작가가 아니었는데도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내가 작가가 되는 모습을 그분들이 꿈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분들은 내가 작가가 되기를 나보다도 더 간절히 바랐고, 실질적으로 분명한 도움을 주었다. 내 책 1쇄를 사흘 만에 다 구매해줬다는 것만 봐도 증명이 되는 이야기다. 내가 작가가 되는 걸 마치 본인의 일•처럼 기뻐해주던 그분들의 모습은 분명, 내가 작가가 되는 모습을 꿈꾸었기에 나올 수 있었으리라. 그러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 작가가 꿈이 아니었던 사람이 작가가 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분들의 꿈이 내가 작가가 되는 것이었기에 작가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꿈이 이루어진 거다. - P159

생각해보면, ‘망설임‘이란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게 정말 행복한 일이다. 돈이 주는 만족의 결을 들여다보면 결국 물질보다 감정의 영역이다. 어떤 사치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사소하게라도 무언가 소비할 때 ‘잘못사도 괜찮아‘란 마음이 정말 좋다.  - P167

금전적 여유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만족은 실패해도 된다는 안정감과 자신에 대한 관대함이었다. 실패하면 끝장이라고만 말하는 세상에서 비록 작은 것일지언정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상황이 주는 기쁨은 크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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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가장 마음에 든다. 그런 나로 살 수 있게 해 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이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지도 이해할 수있다. 그를 잃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 생성된 나의 분인까지 잃는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그 사람과만 가능했던 관계도 끝난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 P131

내 속에는 많은 내가 있다. 고통과 환멸만을 안기는 다른 관계들 속의 나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신과 함께 있을 때의 내가 나를 버텨주기 때문이었다. 단 하나의 분인의 힘으로 여러 다른 분인으로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죽을 때 나 중에 가장 중요한 나도 죽는다. - P131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라는 불에 대해 문학은 맞불이라는 것. 그렇구나. 나를 태우는 불을 끄기 위해 나는 타오르는 책들을 뒤적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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