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쩐지 내가 잃은 사람들은 새로운 인물로 대체되지가 않았다. 그렇게 특별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비슷한 사람이, 그런 온도를 가진 이가 분명 어딘가 있을 것 같은데. 내 앞에 나타나진 않았다. 아마도 인생은 실전, 기회는 한 번뿐이라는 뜻 같았다. - P62

물건에 대한 애착도 그다지 없는 편. 대신 그런 생각은 자주 한다. 가진 것은 적게, 그리고 내가 가진 것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 P106

우리가 스스로 이루었다고 믿는 것은 사실 착각이 아닐까. 그것들은 다만 우리에게 주어졌던 것이 아닐까. 잠시 주어졌다가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 것들이 아닐까. 그리고 결국 무엇이 손에 남게 될지는, 누구도 모르는 게 아닐까. - P117

나는 조용히 집중하는 그 내성적인 행위를 사랑했다. 끝나고 나면 ‘의미 있는 시간이었어‘ 하고 누군가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듯 그럴듯한 결과물들이 만들어져 있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연필을 깎는 일도 그것과 비슷했다. - P127

실수는 무를 수 없고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아이들 마음의 깊숙한 곳을 물들인다. 다시 돌아가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실은 다시 돌아가도 똑같을 것이다. - P129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 P129

사용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물건을 사용하지 않고 보관하는 것은 그 물건 자체를 사랑하겠다는 선언이다. 혹은 혼자 맺는 서약.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기도. 모순적이게도 수집가는 그 물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쓸모를 발휘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물건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랑하겠다는 선언이 정말 사랑인지는, 글쎄. 오히려 이것은 그 물건을 자신의 정체성 안에 머무르게 하겠다는 욕심이 아닐지. 물건의 본성을 풀어 주지 않고 하나의 오브제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집착이 아닌지. 그것은 한심한 일이 아닌지. 그러나 한편으로 물건을 물화시키는 일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나는 스스로 묻는다.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면 도시에서 방황하는 이 마음을, 어쩌란 말이냐고. - P136

수집가에게 그 물건이란 쓸모 있기 때문에 가치 있다. 그는 쓸모 있는 물건을 쓰지 않기를 ‘선택‘한다.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는 것이 선택이지,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그리고 이 선택 때문에, 있을 수 있었던 그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수집은 무용해서 아름다운 일이 된다. 쓰인 적 없는 연필, 그어지지 않은 성냥, 수신인에게 도달한 적 없는 우표. 완결되지 않은 무한한 가능성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사용 대신 소유를 선택한다. - P138

때로 어떤 것들은 부재함으로써 더욱 간절히 자신을 드러낸다. - P138

어쩌면 쓰인 적 없는 연필, 그어지지 않은 성냥, 수신인에게 도달한 적 없는 우표는 그 자체로 무한한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 연필은 무엇이든 쓸 수 있었다.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그 부재하는 세계를 간절한 마음으로 들여다보면 수집가가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평생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으나 결코 버릴 수 없었던 어떤 마음이 거기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차마 물어볼 수는 없겠으나, 혹은 그 자신도 잘 모를 수도 있겠으나. 거기에 아무 것도 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다만 그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남겨두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부재함의 겸손이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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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십 대 내내 심통이 나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손에 꼭 쥐고 이렇게 맛있는 게 줄어든다는 걸 믿을 수 없어 우는 어린 애처럼. 쓸데없이 슬퍼하는 일이 잦았다. "왜 내가 좋아하는 건 다 사라져요?"
덜 슬퍼지기 위해 좋아하는 것들을 통제가 가능한 구역 안으로 하나씩 옮겼다. 망가지거나 사라지는 건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으므로, 사라진 것을 대체할 무언가를 찾았다.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우는 이유는, 그것과 같은 맛을 영원히 느끼지 못 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은 안다. 집 앞 슈퍼에만 가도 똑같은 게 몇 십 개씩 있다는 걸. 설사 아주 똑같은 것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대충 비슷한 걸 찾아 입에 물면 그럭저럭 울음을 그칠 수 있게 된다는 걸.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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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되어버리는 이런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열심히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걸 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이런 말은 지금 대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체가 될 것을, 심지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주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말이다.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 P43

그러나 혜화는 삶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 안간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건은, 그것을 감당해낸 사람만을, 바꾼다.  - P47

‘우리에게 닥쳐오는 슬픈 일을 미리 알고 막아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을 어떻게 겪어내느냐에 있는 것이다.‘ - P52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 P53

이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 허둥대는것이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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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이렇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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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슬픔 중에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많지 않겠으나, 그런 논리들이 그 슬픔에 ‘위로‘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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