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의 딸에게도 따스했던 사람이니 상처받아 잔뜩 독 오른 아이가 당신의 호의를 가뿐하게 저버린 것도 혹 이해해주지 않으려나. 선생이라면 호의를 받아들이는 데도 여유가 필요함을 알았을 것이다. 그때의 나에게는, 열넷의 나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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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에는 똑같이 민족의 통일과 평등을 주장했으나 두 사람의 끝은 전혀 달랐다. 나는 실패한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삶이 늘 애달프고 서글펐다. 아버지 스스로 당신의 삶을 쓸쓸해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맥켈란 1926을 마시며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결말이 내 취향에 더 걸맞다는 것을. 아버지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리라는 것을. 참으로 다행 아닌가? 성공할 기회가 없어 타락할 기회도 없었다는 것은!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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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장관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전등을 하늘로 비쳤다. 빛기둥 안에서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순수에 압도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던 걸 보면 친구들 역시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열아홉, 그때는 믿었다.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 순백의 시간을 순백으로 살아낼 수 있을 거라고. - P28

우리의 청춘은 어두운 터널에 갇힌 채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 P40

옆방의 투숙객은 젊은 장병과 연인이었다. 그때는 면회도 휴가도 요즘처럼 쉽지 않았다. 교통도 불편했다. 아마두 연인은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움을 달래는 중일 터였다. 숨죽인 여성의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쩐지 서글픈 노랫가락처럼 들렸다. 어둠 속에서 옆방의 청춘은 숨죽여 사랑을 나누고, 우리는 소리 죽여 술을 나누었다. 서글픈 노래는 장병의 짧은 비명과 함께 허무하게 빨리도 끝났다.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뜻밖에 우리의 청춘도 저토록 짧을지 모르겠다는. - P40

쓸쓸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것, 그게 청춘이었구나, 그때는 정작 그걸 몰랐구나, 무릎을 치면서. - P41

"Time can change everything."
젊은 친구 중 누구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이십 대의 나도 그러했다. 그때의 나는 시간 앞에 굴복하는 젊은 날의 신념, 사랑, 모든 것이 혐오스러웠다. 나이든다는 것은 타락한다는 것, 그래서 늙기 전에 스스로 죽고 싶었다. 나만큼 나이 든 미국인 선생만 내 말을 이해했다. 생기 없던 그의 푸른 눈동자가 순간 반짝거렸다. - P55

취기 없이푸른 눈으로 나를 직시하며 데이브는 물었다.
"너는 왜 사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사는 이유를 알지 못했으니까. 그저 죽음을 선택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고, 나에게는 그런 용기조차 없었을 뿐이다. 지금은 조금이나마 알것 같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어찌어찌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어찌어찌 살아내야 한다.
고통이 더 많은 한 생을. 소설적 성취? 사회적 명예? 죽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안다. 그런데도 내가 요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직 살아있는 엄마 때문이고, 내가 없으면 오래 살아온 공간을 떠나야 할 나의 냥이들 때문이다. 나에게 마음 두고 있는 존재들을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이다. 데이브에게는, 그의 엄마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었을지도.. 아니, 그런 존재가 있음에도 살아내기 어려운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였을지도...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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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채색 삶이라고 생각했지만
김동식 지음 / 요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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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닿지 않아 소설 읽기를 미루고 있었는데, 소설보다 에세이를 먼저 읽었다. 김동식이라는 작가의 탄생기를 엿본 느낌이다. 그의 평범함, 솔직함, 겸손함, 관대함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가 작가가 되는 극적인 모습을 꿈꾸게 했는지 모른다. 누군가의 바람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니,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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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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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은 ‘시‘를 읽었지만, 나는 ‘그‘를 읽었다. 그를 읽느라 시에는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가 쓴 한 단어, 한 문장, 한 페이지를 읽는 내내 나는 설랬고, 그를 시샘했고, 결국 그의 시선과 사색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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