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장관 앞에서 다들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전등을 하늘로 비쳤다. 빛기둥 안에서 주먹만 한 눈송이들이 수직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순수에 압도당한 최초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그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토록 순수하게, 이토록 압도적으로 살고 싶다고,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던 걸 보면 친구들 역시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열아홉, 그때는 믿었다.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 순백의 시간을 순백으로 살아낼 수 있을 거라고. - P28

우리의 청춘은 어두운 터널에 갇힌 채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다.  - P40

옆방의 투숙객은 젊은 장병과 연인이었다. 그때는 면회도 휴가도 요즘처럼 쉽지 않았다. 교통도 불편했다. 아마두 연인은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움을 달래는 중일 터였다. 숨죽인 여성의 신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쩐지 서글픈 노랫가락처럼 들렸다. 어둠 속에서 옆방의 청춘은 숨죽여 사랑을 나누고, 우리는 소리 죽여 술을 나누었다. 서글픈 노래는 장병의 짧은 비명과 함께 허무하게 빨리도 끝났다.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뜻밖에 우리의 청춘도 저토록 짧을지 모르겠다는. - P40

쓸쓸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것, 그게 청춘이었구나, 그때는 정작 그걸 몰랐구나, 무릎을 치면서. - P41

"Time can change everything."
젊은 친구 중 누구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이십 대의 나도 그러했다. 그때의 나는 시간 앞에 굴복하는 젊은 날의 신념, 사랑, 모든 것이 혐오스러웠다. 나이든다는 것은 타락한다는 것, 그래서 늙기 전에 스스로 죽고 싶었다. 나만큼 나이 든 미국인 선생만 내 말을 이해했다. 생기 없던 그의 푸른 눈동자가 순간 반짝거렸다. - P55

취기 없이푸른 눈으로 나를 직시하며 데이브는 물었다.
"너는 왜 사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사는 이유를 알지 못했으니까. 그저 죽음을 선택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고, 나에게는 그런 용기조차 없었을 뿐이다. 지금은 조금이나마 알것 같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어찌어찌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어찌어찌 살아내야 한다.
고통이 더 많은 한 생을. 소설적 성취? 사회적 명예? 죽는 순간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안다. 그런데도 내가 요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직 살아있는 엄마 때문이고, 내가 없으면 오래 살아온 공간을 떠나야 할 나의 냥이들 때문이다. 나에게 마음 두고 있는 존재들을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이다. 데이브에게는, 그의 엄마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었을지도.. 아니, 그런 존재가 있음에도 살아내기 어려운 섬세한 마음의 소유자였을지도...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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