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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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몇 권의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읽으며, 이 사회의 남성으로서 너무 당연하게 살아왔던(젠더 감수성 없는) 나로써는 이해할 수도 없는 담론(록산 게이의 표현을 빌자면 대문자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척'하느라 피곤했었는지, 올해는 페미니즘 관련 도서는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명확히 이분된 성 대립 구조 속에서 생물학적으로 여자도 아니고 남자들의 사회적 관계에 잘 적응하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인 내가 과연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재어보는 일은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내가 '한남충'이거나 '꼰대'인 것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반면, 일반적인 남자들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주장하기에는 그 근거가 매우 불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이 사회 남성들의 어떤 면이 싫다고 해서, 남성보다는 여성과 대화하거나 일하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가사 분담을 상대적으로 많이 한다고 해서, 내가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몇 달간은 차라리 내가 남자이고, 아재이자, 꼰대의 길을 차근차근 밟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게 오히려 나았다. "남자들이란..."으로 시작되는 비난에 '나는 아니'라며 손사래 치는 대신, 나라는 사람이 포함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로 했다. 몇 권의 책을 읽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의 상황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가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기존의 책들보다는 조금 가벼운 담론을 접하고 싶었고, 마침내 적당한 책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는 '남자인 너는 모른다. 그러니 배워라' 같은 논조가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거부감이나 부담을 갖지 않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은 결혼 후 아이를 낳아 전업주부의 생활을 하고 있는 김지영 씨의 일대기를 그렸다. 일대기라고는 했지만 1982년 출생부터 2016년 현재까지를 몇 토막으로 나누어 이 사회에서 여자로서 살아가는 그의 삶을 엿보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주인공인 82년생 김지영 씨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작가가 설명하듯 82년생 중에서 가장 많은 여성의 이름을 선정한 것에는, 그만큼 이 여자의 삶이 특별하거나 독특한 것이 아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임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무척이나 사실적이다. 읽다보면 이것이 소설이라기보다는 현실을 그대로 베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우리가 비현실적인 (혹은 소설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인지 모르지만.


태어날 때부터 성별이 무엇인지를 걱정해야 하고, 형제 중 남자가 있다면 당연히 후순위로 밀려나야 하고, 괴롭히는 남자아이가 있어도 그것이 좋다는 표현으로 여기며 감내해야 하고,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위협을 받았을 때에는 오히려 자신의 행실에 대한 꾸지람을 듣고, 여자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은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왜 그리 많은지... 가부장적 제도의 정점인 결혼 이후에는 자신은 가사의 주된 존재로, 남편은 돕는 존재로 구분되어 모든 일을 당연히 처리해야 하고, 직장에서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성을 버린 채 악착같이 매달려야 하고, 육아를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의 적성과 일을 포기해야만 하는 김지영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생의 전주기, 삶의 곳곳에 묻어 있는 여성으로서의 불리함과 차별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당연시되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언젠가 생각 없이 "나도 여성으로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만약 이러한 현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과연 그렇게 쉬운 말이 나왔을까 싶다. 내게는 그동안의 책 속에서 읽었던 정돈된 이론과 논리적 표현들보다도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여자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비단 한 여자에만 국한된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더 큰 울림으로 와 닿았다.

할머니의 억양과 눈빛, 고개의 각도와 어깨의 높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까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현하자면,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김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 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 25쪽

"은영 아빠가 나 고생시키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둘이 고생하는 거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혼자 이 집안 떠메고 있는 것처럼 앓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러라고 한 사람도 없고, 솔직히, 그러고 있지도 않잖아." - 32쪽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구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궁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되짚어 봤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그래야 하는 거다. 그게 여덟 살 김지영 씨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 41, 42쪽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의 상황은 정말 심각했다. 옷차림이나 근무 태도를 핑계로, 알바비를 담보로 접근해 오는 업주들, 돈을 내면서 상품과 함께 어린 여자를 희롱할 권리도 샀다고 착각하는 손님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갔다. - 64, 65쪽

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 자신도 많이 겪었다고, 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자의 말을 듣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꺽꺽 울음을 삼키느라 아무 대답도 못하는 김지영 씨에게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덧붙였다.
"근데,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 69쪽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할지 안 할지, 애를 낳을지 안 낳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의 일에 대비하느라 지금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살아야 해?" - 72쪽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100, 101쪽

김은실 팀장은 여자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회식자리에 끝까지 남았고, 야근과 출장도 늘 자원했고, 아이를 낳고도 한 달 만에 출근했다. 처음에는 자랑스러웠는데, 여자 동료와 후배들이 회사를 나갈 때마다 혼란스러웠고, 요즘은 미안하다고 했다. 회식은 사실 대부분 불필요한 자리였고,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 출장은 인원을 보강해야 하는 문제였다. 출산, 육아로 인한 휴가와 휴직도 당연한 것인데 후배들의 권리까지 빼앗은 꼴이 됐다. 관리직급이 된 후로 가장 먼저 불필요한 회식이나 야유회, 워크숍 등의 행사를 없앴고, 남녀 불문 출산휴가와 육아휴직도 보장했다. - 112, 113쪽

안 그래도 김지영 씨는 졸업반이 되어 취업 준비를 시작한 남자 친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했다. 같은 상황일 때, 남자 친구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손끝이 저리도록 애틋했다. 하지만 김지영 씨의 일상도 전쟁이었고, 긴장을 놓으면 당장 피투성이가 될 순간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안위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서운함은 냉장고 위나 욕실 선반 위,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계속 무심히 내버려두게 되는 먼지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두 사람 사이에 쌓여 갔다. - 119쪽

"그냥 하나 낳자. 어차피 언젠가 낳을 텐데 싫은 소리 참을 거 없이, 한 살이라도 젋었을 때 낳아서 키우자."
정대현 씨는 마치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사자, 라든가 클림트의 ‘키스‘퍼즐 액자를 걸자,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큰 고민 없이 가볍게 말했다. 적어도 김지영 씨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구체적인 가족계획이라든가 출산 시기를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정대현 씨도 김지영 씨도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정대현 씨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 135쪽

김지영 씨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출산 이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벌써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정대현 씨는 차분히 아내의 말을 듣고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대?"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 136, 137쪽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 144쪽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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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에게 고맙다 : 가장 흔한 말, 정작 나에게 하지 못한 인사
전승환 지음 / 허밍버드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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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내가 산 책은 아닌데 책장에 이런 제목의 책이 꽂여 있는 것이 의아했다. 모르긴 몰라도 혜민 같은 이들을 좋아하는 집의 누군가가 사 놓고 구석에 박아둔 것이리라. 책장 자리도 확보할 겸 책을 빼서 한번 훑어보았다.

 

사소함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게으르게 살아도 괜찮다, 빈틈이 필요하다, 누구나 외롭다, 힘들 땐 힘들다고 해라, 진심이 통한다고 믿는다 따위의 말에 살을 붙이고 줄바꾸기를 많이 해서 서너 페이지로 편집하였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패러디 한 것 같은 "내가 만일 삶을 다시 살수 있다면 (...) 삶의 매 순간순간 집중하리라" 같은 구절을 시처럼 써 놓은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뿜고 말았다. 자기 블로그에나 게시할 이야기를 이렇게 책으로 펴내다니... 게다가 누구의 사진인지도 모를 예쁜 사진들을 군데군데 배치해서 페이지 수를 늘리고 (이런 사진들을 무료로 공개하는 경우가 많으니 저작권 문제는 해결을 한 건가?), 어디서 들었을 법한 말들을 몇 줄씩 써 놓는 그런 류의 책이었다.

 

일단 책을 폈으면 끝까지 읽는다, 아무리 안 좋은 책이라도 한 대목 정도는 내게 도움이 될만한 것을 남긴다는 스스로의 원칙을 고집스럽게 지킨다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은 몰랐다. 재빨리 읽고 덮어버렸다. 요즘은 어째 이런 말랑말랑한 글이 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두 "힘내"라고 말을 건네지만
어떻게 힘을 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위로라고 건네는 한마디일지 몰라도
최선을 다해 힘을 낸 나에게는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나는 단지,
‘힘‘을 낼 수 있는 힘이 없어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는 건데... - 84쪽

책도 비슷하다. 낯설게 느껴지는 책도 막상 읽다 보면, 단 한 줄이라도 배울 수 있는 구절이 있고 영감을 주는 단어가 있다. 이처럼 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당신이라는 사람, 한번 읽어 내려가 보자‘라는 마음만 갖는다면, 적어도 알게 모르게 품고 있던 상대에 대한 선입견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 1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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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03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장 수집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좋아하겠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본 문장들이 제법 많을 것 같아요. 요즘 짧은 문장이 SNS 글쓰기의 대세라고 하지만, 출처 없이 문장만 달랑 올리는 모습이 탐탁치 않습니다.

lemonakt 2017-09-18 0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느낀 바를 그대로 적어주셨네요. 정말 공감합니다.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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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라는 만화를 즐겨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내게도 몇몇 장면은 떠오른다. 항상 '글쎄다'라고 말하는 통통하고 등이 구부정한 매튜 아저씨의 마차를 타고 초록색 지붕 집으로 오면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앤, 엄격한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혼줄이 나서 울먹이던 앤, 앤의 빨간 머리를 빗대어 '홍당무'라고 놀리던 길버트의 머리를 간이 칠판으로 내리치던 앤, 소매가 부푼 블라우스를 입고 싶다고 종종대던 앤, 다이애나와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던 앤... 제목만 떠올리더라도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이런 장면들에 나 스스로도 놀라며 책을 집어 들었다. 단순한 스토리를 짜집기한 책이었다면 휙 한번 훑어보고 그대로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 페이지 남짓한 프롤로그를 읽은 후에는 빨강머리 앤의 장면과 작가의 삶의 관점을 한번 따라가며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목차는 크게 다섯 장으로 나누어진다. 각 장의 제목은 그 장에 속한 대표적인 에피소드의 제목이다. '우연을 기다리는 힘'은 앤이 마릴다의 집에 입양되면서 벌어지는 낯설고 어색한 몇 가지의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앤의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는 '빨강머리'에 대하여 컴플렉스를 없애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던 앤이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지금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라는 생각이라는 것. '고독을 좋아한다는 거짓말'에서는 앤이 유리에 비친 자신을 캐시 모리스라는 상상속의 인물로 설정하고 그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었다고 마릴라에게 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작가는 '고독을 좋아한다는 말은 이미 같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는 통찰을 제시한다. 이어지는 '슬픔 공부법', '더 잘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변한다' 또한 앤이 성장해가면서 익숙했던 에이본리를 떠나 퀸 학원이 있는 대도시로 가고, 그동안 경쟁관계로만 의식하고 있던 길버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매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장면과 이에 대한 관조적 서술이 포함되어 있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실패하고 지쳐버린 자신의 인생에서 앤의 말을 되새긴 것이 끝내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앤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스스로를 치유하면서, 앤의 말을 받아적던 작가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실망할 것도 없으니까."라는 린드 아주머니의 말에 반대하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한심한 일'이라고 했던 앤처럼 다시 한 번 실망하더라도 그동안 꿈꾸어 왔던 것을 다시 한번 기대해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앤이 스스로 '고독'이라로 칭했던 자아의 내피를 비로소 벗고 자신의 삶을 직면한 것과 같은 작가 자신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기다리고 고대하는 일들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게 실제 우리의 하루다. 하지만 그럴 때 앤의 말을 꺼내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희망이란 말은 희망 속에 있지 않다는 걸.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이라는 걸. 그 꽃에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일 거라고. - 22쪽

시간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똑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게 하는 힘 아닐까. 시간은 느리지만 결국 잎을 키우고, 꽃을 피우고, 나무를 자라게 한다. 나는 그것이 시간이 하는 일이라 믿는다.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강퍅한 마음을 조금씩 너그럽고 상냥하게 키운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거울을 보며 어느 날 당신도 이렇게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아! 정말 좋다! 까지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이 정도도,
나쁘지 않아... - 27, 28쪽

야망에는 결코 끝이 없는 것 같아.
바로 그게 야망의 제일 좋은 점이지.
하나의 목표를 이루자마자
또 다른 목표가 더 높은 곳에서 반짝이고 있잖아.
야망은 가질 값어치가 있지만 손에 넣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야.
자기부정, 불안, 실망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장애물을 거쳐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이니까. - 52쪽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보다 중요한 건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오늘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세상을 천천히 응시하는 일은 나의 마음을 꼼꼼히 읽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정말로 ‘나의 야망‘인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몰려 쫓기듯 하고 있는 일을 자기 의욕적으로 착각하고 나를 소진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는 일이다. -55,56쪽

삶을 야구에 비유하자면, 나는 이제 홈런을 치겠다는 야망보다는 출루율을 높이기 위해 연습을 거르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다. 살면서 중요한 건 어쩌면 타율이 아니라 출루율일지도 모른다. 살다보면 좋은 볼을 보고 ‘안타‘를 욕심내기보다, 먼저 출루해 나간 사람을 위해 ‘번트‘를 쳐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안타‘ 찬스에 ‘번트‘를 칠 수 있는 선수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더 큰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사람은 종종 다른 사람이 내리지 못하는 판단을 하기도 한다. 야망의 기준이 ‘나‘에게서 ‘우리‘로 확장되는 것이다. - 56쪽

이제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멸의 역작을 쓰길 바라기보다, 차라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매일 쓰고, 매일 읽는 사람이게 해달라고 말이다. 타르코프스키가 그의 영화 <희생>에서 말한 것도 그런 것이다. 화장실 변기 안에 물 한 컵을 붓는 사소한 행위조차 매일 하는 것에는 신성함이 깃든다. - 60쪽

삶은 내가 원하던 것과 늘 다른 식의 선택을 요구했다. - 96쪽

우리가 사랑이란 명사에 ‘빠졌다‘는 조금 특별한 동사를 쓰는 것은 사랑이 ‘젖어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나와 만나, 크나큰 낙차를 경험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에 풍덩~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쿨‘하고 ‘드라이‘한 사랑 같은 건 이제 잘 믿지 않게 됐는데, 그건 물기가 없는 곳에선 어떤 생명도 자라지 않는 이치와 같다. 생명이라곤 자라지 않을 것 같은 사막에 선인장이 존재하는 건, 어딘가에 있을 오아시스 때문이다. 진짜 사랑은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 - 113쪽

무엇을 원한다는 건 그것에 따른 고통도 함께 원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 171쪽

내가 좋아하는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자아 중심적인 강박이 나를 망치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정말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현재를 망치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좋아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아닐까. - 181, 184쪽

나는 직업을 꿈과 연결시켜 내가 하고 싶은 일, 가슴 뛰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치 실패자인 것처럼 좌절하게 만드는 요즘 세태를 생각했다. 그리고 직업이란 ‘내‘가 아니라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합당한 대가를 받는 일이란 생각에 이르자, 사람들이 느끼는 ‘자아실현‘과 ‘직업‘ 사이의 괴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 184쪽

누군가에게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어준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막아주겠다는 뜻이다. 누군가의 결핍을 누군가가 끝내 알아보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결핍 안에서 공기가 되어 서로를 옥죄지 않고, 숨 쉬게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해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위성처럼 내 주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힘이 되고 따뜻해지는 사랑. 이것이야말로 떠날 필요가 없는 관계이다. - 218쪽

앞일을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에요.
이루어질 수 없을지는 몰라도 미리 생각해보는 건 자유거든요.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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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2-01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간머리 앤> 완역본이 제대로 나왔으면 좋겠어요. 동서문화사 번역본이 개판이라고 들었거든요.. ^^;;
 
나의 친애하는 적
허지웅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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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그의 두번째 책을 읽는 것이지만, TV를 보지 않는 나는 여전히 허지웅을 잘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그의 책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나 낯설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여기고 싶은 부분들이 더러 있었다. 때문이 이 책을 선택하는 데에는 별 다른 주저함은 없었다. 제목 또한 눈길을 끌었다. '나의 친애하는 적'. 나는 유무형의 싸움에 있어서 한번도 내 상대편을 존중할만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비뚤어진 것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내가 그동안 상대해 왔던 이들의 수준이 다 고만고만해서 였을 수도 있다. 저자는 이 제목을 통하여 "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심취하는 일"을 경계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어려운 신독(愼獨)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3부 '끓는점'이라는 소제목은 거기에 속한 대표적인 글의 제목을 땄다. 물론 이러한 소제목들이 각 부에 속한 글들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굳이 대강적인 분류를 하자면, 1부는 저자의 생활과 연관된 개인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2부는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다'라는 제목 아래 그의 아버지, 엄마(나의 가장 친애하는 적), 데이비드 보위, 팀 커리, 도널드 서덜랜드, 신해철, 앤서니 퍼킨스 등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감을 주었던 이들에 대한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3부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들이 주로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아, 책의 구성을 나, 나의 주변, 사회로 확장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주간지와 월간지 기자로 일했다는 경력 때문인지,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매우 많다. 영화의 내용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글도 있고, 영화의 감독이나 배우에 대한 강한 호감을 드러내는 글도 있고, 영화의 존재가치와 사회와의 연계성에 대해 언급한 글도 있다. 저자가 언급한 영화들을 다 섭렵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영화적 취향이 그리 강하거나 필수적인 영화들을 찾아 보는 성격이 아닌, 더군다나 가끔 서평은 읽고 참고하지만 영화평은 전혀 읽지 않는 나로서는 그것들을 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였다. 만약 이 책이 영화에 대한 그동안의 평론을 엮은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나는 이 책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나 고시원 이야기 같이, 매스컴을 통해 그를 잘 접하지 않는 내게 익숙한 에피소드가 있다는 점은,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그의 첫 에세이인 <버티는 삶에 관하여>에서 언급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이다. 신해철과의 인연, 그와의 안타까운 이별에 대해서는 공감하겠으나, 그와 관련된 에세이가 2편이나 (그것도 상당히 중복적인 표현으로) 된다는 점, 후반부로 갈수록 앞 뒷글의 흐름에 맞지 않는 한 페이지정도의 글이 드문드문 보인다는 점은, 책의 처음에 비해 뒤로갈수록 안타깝게도 글의 분량이나 짜임새가 성기어진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에세이를 쓸 때 그것을 어떤 소재로 구성할지는 무척 중요한 것 같다. '악의 평범성' 같은 소재는 다른 사회적인 에세이에서도 너무 자주 접하는 소재여서 식상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아버지, 엄마, 청소, 편의점 아르바이트, 트위터 등 개인적인 배경과 일상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 몇 편은 꽤 마음에 들었다(덕분에 밑줄을 많이 그었다). 처음 책을 폈을 때는 개성이 강하고 편향적인 것 같았던 그의 시선이, 책을 덮으면서는 결국 자신을 경계하며 남을 살펴보게 하고,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하고, 거듭된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도록 당부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런 시선과 더불어 한정된 분량 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결하고 정확하게 이끌어내는 그의 재량이 부럽기도 했지만, 만약 그의 세번째 에세이가 나온다면 굳이 읽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질수록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나 자신에 지나치게 심취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에 심취하면 쉽게 뜨거워지고 자기 사정과 감정만이 특별한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 사정에만 너그럽다보면 남의 사정은 나보다 덜한 별것 아닌 게 되고, 그러다보면 어느새 괴물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주변 세계를 친애하는 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확실히 도움이 되어주었습니다. - 6쪽

남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남 탓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은 쉽게 불행해지지 않는다. 불행할 시간이 있으면 더 많은 걸 책임지고 노력한다. 어른스러운 길이란 건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선택과, 이후 어른스럽게 책임지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 45쪽

청소란 그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게 만든다. - 50쪽

돌이켜보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되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늘 너무 오랫동안 분개했던 것 같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랬다. 거기에는 어떤 오해나 실수가 있더라도 어찌됐든 돌이킬 수 있어야만 진짜 우정이고 진짜 사랑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사랑과 진짜 우정이란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서로 다른 논리들 앞에서 유명무실해진다. 사실 언제든 돌이킬 수 있다는 믿음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게 하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좀 비겁하게 만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최소한 내가 실패한 관계들은 대개 그랬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모두 순순히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가 필요하다. 돌이키고 되돌리는 것에 대한 집착은 좀 느슨하게 내버려두고 말이다. - 53쪽

아마도 사람들은 엄청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면서 구덩이 안에서 모래를 퍼내는 일을 매일같이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지루하고 의미 없는 반복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조차 마침내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심지어 자아를 성취하며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분투하는 사람보다 일상에 침몰된 사람이 더 행복해 보인다. 다시 꺼내볼 때마다 전율한다. 마침내 구덩이 밖으로 나설 기회를 가지게 되었음에도 다시 들어가 당장의 목적에 만족하고 설레어하는 풍경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어느 쪽이 더 옳은 선택일까. 더 권할 수 있는 삶일까. - 112쪽

살다보면 삼루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신이 흡사 삼루타를 쳐서 거기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만나기 마련이다. 나는 평생 그런 사람들을 경멸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 돌아보니 내가 딱히 나은 게 뭔지 모르겠다. 나는 심지어 삼루에서 태어난 것도 삼루타를 친 것도 아닌데 아무도 필요하지 않고 여태 누구 도움도 받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혼자 힘만으로 살 수 있다 자신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자신감이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에 와서야 그것이 착각이라는 걸 깨닫고 있다. - 126쪽

어떤 면에선 아버지 말이 맞았다. 그게 누구 덕이든, 나는 독립적인 어른으로 컸다. 아버지에게 거절당했듯이 다른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게 싫어서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하거나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멀쩡한 척 살아왔다.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도, 타인의 호의를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혼자서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 좋은 어른은커녕 이대로 그냥 독선적인 노인이 되어버릴까, 나는 그게 너무 두렵다. - 127쪽

결국 남은 건 뒤의 말뿐이었다. 맥락은 결코 기록되지 않는다. 과격한 말이었다. 어쩌면 과격하고 선정적인 나중의 말만 남은 게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르겠다. - 190쪽

전에는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쉽게 까먹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살아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까먹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까먹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까지 함께 잊어버리기 마련이더라. 그리고 그렇게 까먹은 중요한 것들은 너무 중요하고 소중해서, 반드시 훗날 가슴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 어쩌면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 필요한 건 망각이나 체념이 아니라 이해하는 태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그 입장이었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이해 말이다. - 191, 192쪽

좋은 다큐는 반드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진실에 관해 스스로 한번 더 의심한다. 그리고 그런 의심의 사유를 통해 관객이 영화를 찬양하게 만드는 대신 관객이 영화에 당황하게 만든다. 그런 종류의 당황은 필연적으로 관객의 고민과 깊은 울림을 이끌어낸다. - 229쪽

무엇을 다루었느냐가 중요하지 작품의 함량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이 엄혹한 세상에, 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나는 별로 대화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다큐 <자백>에서 과거 군부 독재 시대를 비판하는 등장인물의 대사처럼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상관없다‘는 태도다. 내가 편들고 싶은 것을 위해서라면 프로파간다라도 상관없다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이들과 동업자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 소재를 다루는 다큐들을 모두 퉁쳐서 함량 미달이라는 편견을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좋은 다큐가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세상을 망치는 건 그런 사람들이다. - 229, 230쪽

악의 평범성 개념은 아이히만의 말년 인터뷰와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통해 반박되거나 보충되고 있다. 그러나 위계와 시스템, 적극적인 동조자들이 발견되는 이와 같은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악의 평범성 논쟁, 그리고 <엑스페리먼트>가 남긴 가장 중대하고 어려운 화두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 말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란 그렇게 힘들다. - 261, 262쪽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난다.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 힘들고 어렵더라도 자폭하기보다 설득하고 싸워나가기를 포기할 수 없다. 요즘은 그렇게 원론적인 것들에 자꾸 마음이 간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던 가장 기본적인 믿음들이 세상을 더 많이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아직도 그런 걸 믿느냐는 사람들에 의해 수시로 훼손되어 버려지고 있다. 나는 그게 너무 슬프다. - 3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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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여행 2017-01-26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 몇개일까 궁금했는데 3개. 만족스런 글은 아니었나봐요. 빨간 커버 느낌은 좋았는데..
자기 생각만이 특별하다고 느끼지 않도록 계속 소통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생각이 늙지 않도록 하는 가장 쉬운 길이 아닐까요?

희망여행 2017-01-2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루에 혼자 서 있는건 사실 힘든 일이예요. 상대팀 관중의 야유가 계속 들리죠.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데...
 
편의점 인간 - 제155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석희 옮김 / 살림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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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하릴 없이 서적 코너에 있는 책들을 훑어보았다. 요즘 통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가볍게 읽을 소설을 찾던 중에 마침 적당한 제목과 두께의 책이 눈에 띄었다. 잠깐동안 서서 책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4분의 1 정도를 읽어버렸다. 이 자리에서 끝까지 읽을지를 고민하다가 돌아갈 시간이 되어 구입한 책이다.

 

다수의 일본 소설처럼 이 책도 별다른 구성이나 목차가 없다. 주인공(후루쿠라)의 회상과 시선에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이야기는 평범이나 보통이라는 범주에 편입되지 못한 주인공이 그래도 자신의 본질 혹은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게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사건'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책의 설정들은 편의점이라는 장소에서 일어날 법한 그리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일들이다. 다만, 편의점 내의 한 부품으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 주인공에게 던져지는 세상의 낯선 시선과 평범함의 강요라는 것에 대해서는 현대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생각해볼 여지를 제시하는 것 같다.

 

더 이상 바라는 것 없이 서른 살이 훌쩍 넘도록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그에 대해서, 이제 제대로 된 직장도 잡고 결혼도 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그 주변인들과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은 왜 안된다는 것인지에 대한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자신이 가장 편하게 느끼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주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그에게 연민을 느끼다가도, 그 불편한 시선을 떨어내고자 억지스럽게 동거를 하려는 후루쿠라의 선택에는 혀를 끌끌 차기도 한다.

 

'나는 나의 본질을 어떻게 찾아야 할까?'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나역시 그처럼 조직이나 단체의 일원으로 속해 있을 때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낀 적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강하게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여전히 그런 안도감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후루쿠라의 삶을 불편하게 읽었다면, 내가 이미 평범이나 정상이라는 범주를 당연스럽게 수용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그를 둘러싼 시선들에 반감을 느꼈다면, 내 마음 속 어딘가에는 지금의 평범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내가 가려는 곳이 평범의 기준에서는 한참 수준 미달의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가끔씩 느끼는 '적어도 저런 사람처럼 살지는 않는다'라는 안도감을 경계하기로 다짐한다. 이런 생각의 기저에는 '저런 사람'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내 평범함의 범주로부터 타인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나를 굳이 평범함의 범주에 밀어넣지 않으면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이 새는 작고 귀엽지? 저쪽에 무덤을 만들고, 모두 함께 꽃을 바치자꾸나"하고 열심히 말했고, 결국 그 말대로 되었지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두 입을 모아 작은 새가 불쌍하다고 말하면서, 흐느껴 울며 그 주위에 핀 꽃줄기를 억지로 잡아 뜯어 죽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이네. 분명 작은 새도 기뻐할 거야"라고 말하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다들 머리가 이상한 것 같았다. - 13쪽

그때 나는 비로소 세계의 부품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정상적인 부품으로서의 내가 바로 이날 확실히 탄생한 것이다. - 27쪽

아침이 되면 또 나는 점원이 되어 세계의 톱니바퀴가 될 수 있다. 그것만이 나를 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 30쪽

지금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거의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다. 3할은 이즈미 씨, 3할은 스기와라 씨, 2할은 점장, 나머지는 반년 전에 그만둔 사사키 씨와 1년 전까지 알바 팀장이었던 오카자키 군처럼 과거의 다른 사람들한테서 흡수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35쪽

같은 일로 화를 내면 모든 점원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직후의 일이었다. 점장이 버럭 화를 내거나 야간조의 아무개가 농땡이를 부리거나 해서 분노가 치밀 대 협조하면, 불가사의한 연대감이 생기고 모두 내 분노를 기뻐해준다. - 39쪽
이즈미 씨와 스기와라 씨의 표정을 보며 아아, 나는 지금 능숙하게 ‘인간‘이 되어 있구나 하고 안도한다. 이 안도를 편의점이라는 장소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 40쪽

빨리 편의점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편의점에서는 일하는 멤버의 일원이라는 게 무엇보다 중요시되고, 이렇게 복잡하지도 않다. 성별도 나이도 국적도 관계없이, 같은 제복을 몸에 걸치면 모두 ‘점원‘이라는 균등한 존재다. - 50쪽

아, 나는 이물질이 되었구나.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가게에서 쫓겨난 시라하 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음은 내 차례일까?
정상 세계는 대단히 강제적이라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그런가? 그래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지 않으면 정상인 사람들에게 삭제된다.
가족이 왜 그렇게 나를 고쳐주려고 하는지, 겨우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98쪽

손님들만은 변함없이 가게에 오고, ‘점원‘으로서의 나를 필요로 해준다. 나와 같은 세포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모두 차츰 ‘무리의 수컷과 암컷‘이 되어가고 있는 불쾌감 속에서 손님들만은 나를 계속 점원으로 있게 해주었다. -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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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6 15: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공동체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혼자만 누릴 수 있는 세계를 찾습니다. 평범함을 추구하면서, 특별함을 찾으려고 살아가는 것, 고민을 동반한 삶의 방식이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연휴 잘 보내세요. ^^

희망여행 2017-01-26 1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편의점 인간 살까 고민했었는데... 전달 플리즈

희망여행 2017-01-26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품으로의 삶이 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책을 읽은 후엔 생각이 바뀔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