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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작년에 몇 권의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읽으며, 이 사회의 남성으로서 너무 당연하게 살아왔던(젠더 감수성 없는) 나로써는 이해할 수도 없는 담론(록산 게이의 표현을 빌자면 대문자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척'하느라 피곤했었는지, 올해는 페미니즘 관련 도서는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명확히 이분된 성 대립 구조 속에서 생물학적으로 여자도 아니고 남자들의 사회적 관계에 잘 적응하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태인 내가 과연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재어보는 일은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내가 '한남충'이거나 '꼰대'인 것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반면, 일반적인 남자들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주장하기에는 그 근거가 매우 불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단지, 이 사회 남성들의 어떤 면이 싫다고 해서, 남성보다는 여성과 대화하거나 일하는 것이 편하다고 해서, 가사 분담을 상대적으로 많이 한다고 해서, 내가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몇 달간은 차라리 내가 남자이고, 아재이자, 꼰대의 길을 차근차근 밟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는 마음을 갖기 시작했다. 그게 오히려 나았다. "남자들이란..."으로 시작되는 비난에 '나는 아니'라며 손사래 치는 대신, 나라는 사람이 포함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로 했다. 몇 권의 책을 읽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의 상황에 공감하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가식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기존의 책들보다는 조금 가벼운 담론을 접하고 싶었고, 마침내 적당한 책을 발견했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는 '남자인 너는 모른다. 그러니 배워라' 같은 논조가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거부감이나 부담을 갖지 않고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은 결혼 후 아이를 낳아 전업주부의 생활을 하고 있는 김지영 씨의 일대기를 그렸다. 일대기라고는 했지만 1982년 출생부터 2016년 현재까지를 몇 토막으로 나누어 이 사회에서 여자로서 살아가는 그의 삶을 엿보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주인공인 82년생 김지영 씨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작가가 설명하듯 82년생 중에서 가장 많은 여성의 이름을 선정한 것에는, 그만큼 이 여자의 삶이 특별하거나 독특한 것이 아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임을 밝히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무척이나 사실적이다. 읽다보면 이것이 소설이라기보다는 현실을 그대로 베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만큼 우리가 비현실적인 (혹은 소설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인지 모르지만.
태어날 때부터 성별이 무엇인지를 걱정해야 하고, 형제 중 남자가 있다면 당연히 후순위로 밀려나야 하고, 괴롭히는 남자아이가 있어도 그것이 좋다는 표현으로 여기며 감내해야 하고,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위협을 받았을 때에는 오히려 자신의 행실에 대한 꾸지람을 듣고, 여자이기 때문에 할 수 없은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왜 그리 많은지... 가부장적 제도의 정점인 결혼 이후에는 자신은 가사의 주된 존재로, 남편은 돕는 존재로 구분되어 모든 일을 당연히 처리해야 하고, 직장에서 욕을 먹지 않기 위해서는 여성성을 버린 채 악착같이 매달려야 하고, 육아를 위해서는 당연히 자신의 적성과 일을 포기해야만 하는 김지영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생의 전주기, 삶의 곳곳에 묻어 있는 여성으로서의 불리함과 차별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당연시되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언젠가 생각 없이 "나도 여성으로 한 번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만약 이러한 현실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과연 그렇게 쉬운 말이 나왔을까 싶다. 내게는 그동안의 책 속에서 읽었던 정돈된 이론과 논리적 표현들보다도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 여자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비단 한 여자에만 국한된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더 큰 울림으로 와 닿았다.
할머니의 억양과 눈빛, 고개의 각도와 어깨의 높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까지 모두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최대한 표현하자면, ‘감히‘ 귀한 내 손자 것에 욕심을 내? 하는 느김이었다. 남동생과 남동생의 몫은 소중하고 귀해서 아무나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고, 김지영 씨는 그 ‘아무‘보다도 못한 존재인 듯했다. - 25쪽
"은영 아빠가 나 고생시키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둘이 고생하는 거야.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니까 혼자 이 집안 떠메고 있는 것처럼 앓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러라고 한 사람도 없고, 솔직히, 그러고 있지도 않잖아." - 32쪽
"남자애들은 원래 좋아하는 여자한테 더 못되게 굴고, 괴롭히고 그래. 선생님이 잘 얘기할 테니까 이렇게 오해한 채로 짝 바구지 말고, 이번 기회에 둘이 더 친해지면 좋겠는데." 짝궁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되짚어 봤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그래야 하는 거다. 그게 여덟 살 김지영 씨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 41, 42쪽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의 상황은 정말 심각했다. 옷차림이나 근무 태도를 핑계로, 알바비를 담보로 접근해 오는 업주들, 돈을 내면서 상품과 함께 어린 여자를 희롱할 권리도 샀다고 착각하는 손님들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에 대한 환멸과 두려움을 가슴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아 갔다. - 64, 65쪽
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 자신도 많이 겪었다고, 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자의 말을 듣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꺽꺽 울음을 삼키느라 아무 대답도 못하는 김지영 씨에게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덧붙였다. "근데, 세상에는 좋은 남자가 더 많아요." - 69쪽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할지 안 할지, 애를 낳을지 안 낳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의 일에 대비하느라 지금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살아야 해?" - 72쪽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100, 101쪽
김은실 팀장은 여자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회식자리에 끝까지 남았고, 야근과 출장도 늘 자원했고, 아이를 낳고도 한 달 만에 출근했다. 처음에는 자랑스러웠는데, 여자 동료와 후배들이 회사를 나갈 때마다 혼란스러웠고, 요즘은 미안하다고 했다. 회식은 사실 대부분 불필요한 자리였고,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 출장은 인원을 보강해야 하는 문제였다. 출산, 육아로 인한 휴가와 휴직도 당연한 것인데 후배들의 권리까지 빼앗은 꼴이 됐다. 관리직급이 된 후로 가장 먼저 불필요한 회식이나 야유회, 워크숍 등의 행사를 없앴고, 남녀 불문 출산휴가와 육아휴직도 보장했다. - 112, 113쪽
안 그래도 김지영 씨는 졸업반이 되어 취업 준비를 시작한 남자 친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했다. 같은 상황일 때, 남자 친구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손끝이 저리도록 애틋했다. 하지만 김지영 씨의 일상도 전쟁이었고, 긴장을 놓으면 당장 피투성이가 될 순간순간에 다른 누군가의 안위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서운함은 냉장고 위나 욕실 선반 위,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계속 무심히 내버려두게 되는 먼지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두 사람 사이에 쌓여 갔다. - 119쪽
"그냥 하나 낳자. 어차피 언젠가 낳을 텐데 싫은 소리 참을 거 없이, 한 살이라도 젋었을 때 낳아서 키우자." 정대현 씨는 마치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사자, 라든가 클림트의 ‘키스‘퍼즐 액자를 걸자,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큰 고민 없이 가볍게 말했다. 적어도 김지영 씨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구체적인 가족계획이라든가 출산 시기를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정대현 씨도 김지영 씨도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정대현 씨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 135쪽
김지영 씨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출산 이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벌써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정대현 씨는 차분히 아내의 말을 듣고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대?"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 136, 137쪽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 144쪽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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