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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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작가만큼 사실적인 상황과 감정의 묘사를 그려낼 줄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그 상황이, 그 장소가, 그곳에서의 냄새가 어느새 밀려온다. 내겐 '믿고 보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신뢰가는 작가이다. 대개 단편집의 제목은 그 단행본에 실린 여러 단편 중 대표적인 것을 내세우기 마련인데, 이번 책은 그렇지 않다.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의 단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은 이 단편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관통하는 어떤 상황에 대한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의 살뜰함으로 아파트를 얻은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이를 잃은 부부(입동), 주워키운 개의 약값으로 최신형 휴대폰을 구매하는 즐거움에 빠졌다가 결국 동생같은 개를 잃은 소년(노찬성과 에반), 공시생으로 만나게 되어 동거를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현실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다시 공시생이된 남자와 결국에는 이별하는 한 여성(건너편), 다른 교수의 허물을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도 결국 그 학교에 임용되지 못한 시간강사(풍경의 쓸모), 아들의 심성이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었던 것을 의심하며 아들이 그동안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다를 수도 있음을 알아채가는 엄마(가리는 손), 제자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은 남편의 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여행을 떠나지만 결국엔 다시 돌아오고 마는 아내(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같은 시간과 공간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다른 체감을 느끼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단편들 중 <침묵의 미래>는 읽어보아도 나로써는 잘 이해가 안되는 터라 어떻게 다른 작품과 같이 연결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편들을 평범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로 여기는 것은 매우 게으른 단정이다.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상정해버리는 '평범'이야말로 개인이 이상적으로 상상하는 꽤 괜찮은 삶의 상황일뿐, 실재(實在)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평범과 비범의 시각은 다분히 상대적인 것이어서, 어찌보면 '일반'이라고 통칭해버릴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말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평범함의 반의어로서의 특별함이란 상황의 차이가 아닌 상황을 대하는 태도로 귀결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단편들에 등장하는 이들은 다른 '무리'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감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라는 작가의 말이 이 모든 상황을 표현해준다. 더욱이 그것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 계절에 대한 체감이다. 안은 무상하게 변하는데, 밖의 내게는 아직도 오지 않은 계절, 여전히 멈추어 있거나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저편... 세상은 변했으되 나만은 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정체감을 느끼고 있는 요즘의 내 머릿속에는 '바깥은 여름'이라는 이 짧은 제목이 지워지지 않은 채 계속 맴돌고 있다.

아내에게는 정착의 사실뿐 아니라 실감이 필요한 듯했다. 쓸모와 필요로만 이뤄진 공간은 이제 물렸다는 듯, 못생긴 물건들과 사는 건 지쳤다는 듯. 아내는 물건에서 기능을 뺀 나머지를, 삶에서 생활을 뺀 나머지를 갖고 싶어했다. - 16쪽

그리고 그렇게 사소하고 시시한 하루가 쌓여 계절이 되고, 계절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배웠다. - 20쪽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도 던져놓은 국화 같았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 하는 것처럼 보였다. - 36, 37쪽

보드라운 뺨과 맑은 침을 가진 찬성과 달리 할머니는 늙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 50쪽

일본 어느 도시에서는 벚꽃이 피었다 하고, 뉴욕 한낮 기온도 십팔 도를 넘었다 했다. 여러모로 올 겨울은 겨울 같지 않았다. 파이프에서 물이 새듯 미래에서 봄이 새고 있었다. - 86, 87쪽

모교에서 첫 강의를 ‘트고’, 이 고장 저 고장으로 강의를 나가기 시작했을 때, 고속도로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좀 심란했다. 여행중 몇 번 오간 길인데도 그랬다. 풍경이 더 이상 풍경일 수 없을 때, 나도 그 풍경의 일부라는 생각이 든 순간 생긴 불안이었다. 서울 토박이로서 내가 ‘중심’에 얼마나 익숙한지, 혜택에 얼마나 길들여졌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내가 어떻게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잘 보였다. - 158쪽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 173쪽

말한다고 네가 알까.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재이야,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을 대하는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 213, 214쪽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왔지? 그래, 엄마랑 아빠는...... 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 214쪽

- 밖에 있으면 안에서 쌓은 게, 안에 있으면 밖에서 만든 게 부러운 모양이더라. 공부하는 사람들. -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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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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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너무도 익숙한 제목때문에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착각하며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책도 그러하다. 최근 영화화 된 <살인자의 기억법>은 벌써 몇 년 전 그 책이 출간된 초기에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 책에서는 제목이 주는 익숙함 외에는 도무지 떠오르는 잔상이 없었다. 착오로 같은 책을 두번 읽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책을 사서 펴보았다. (다행이었다. 읽지 않았던 책이다)


5장의 목차로 구성된 이 책은 작가가 초기에 제시하는 세 편의 그림 <마라의 죽음>, <유디트>, <사르다나팔의 죽음>과 동일한 소제목을 하나씩 담고 있다. 그림이 아닌 제목은 3장과 4장의 에비앙과 미미로, 이는 유디트와 같은 등장인물(여성)의 별칭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마라의 죽음>과 <사르다나팔의 죽음> 사이에서 유디트, 에비앙, 미미라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셈이다. 남성으로 추정되는 화자가 접한 죽음들이 왜 유독 여성으로만 이루어져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작가도 화자도 남성이기에 죽음, 에로티시즘, 여성을 하나로 묶어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액자식 구성인 이 소설 1장 <마라의 죽음>에서는 자살을 기도하는 이들을 고객으로 맞이하고 그 행위를 돕는 화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를 밝힌다. 그는 신이 되고 싶어 한다. 신이 되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두 가지 일은 창작과 살인을 행하는 것이다. <마라의 죽음>은 후에 '미미의 죽음'으로 형상화 되고, <사르다나팔의 죽음>은 유디트, 에비앙, 미미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화자 자신으로 형상화된다.


한계령 어느 국도에서 폭설로 갖힌 채, 차 안에서 C와 유디트가 나누는 대화는, 현재의 밀폐된 공간에서의 탈출을 넘어선 '극'적인 장소의 갈망으로 이어진다. 이곳이 아닌 '북극'을 갈망하는 유디트와 C의 대화, 결국 사라져 찾을 수 없는 유디트의 자취는 현학적이고 몽롱하여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추후 화자는 유디트를 북극(죽음)으로 안내한다. 유디트의 만남은 그녀의 죽음으로 끝을 맺지만,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클림트의 <유디트>를 보기 위해 떠난 비엔나에서 에비앙을 만나게 된다. 비록 에비앙을 직접적인 죽음으로 이끌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홍콩으로 돌아갔을지를 궁금해 하는 그는 에비앙에게서도 죽음의 그림자를 엿보기라도 한 듯 하다.


비엔나에서 돌아온 그는 C와 유디트, 유디트와 K, K와 미미로 이어지는 관계를 통하여 다시 한번 유디트를 둘러싼 이들을 접하게 된다. K와의 관계를 제대로 풀어가지 못한 미미 또한 유디트와 같이 자살할 수 있도록 도운 후 그는 소설의 끝을 맺으며 다른 곳으로 떠나려 한다. 책을 다 읽고 덮으니 글의 맨 마지막 문장이자, 제목 밑에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 부제가 보인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그는 다른 장소에서 또다른 에비앙을, 또 다른 상처를, 또 다른 죽음을 만나게 될까.



자코뱅 당의 거두였던 마라가 죽은 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된다. 다비드는 자코뱅의 미학을 알고 있었다. 공포라는 연료 없이 혁명은 굴러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그 관계가 뒤집힌다. 공포를 위해 혁명이 굴러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공포를 창출하는 자는 초연해야 한다. 자신이 유포한 공포의 에너지가 종국엔 그 자신마저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기요틴에 의해 목이 잘렸다. - 8, 9쪽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들어 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 16쪽

"너도 똑같구나. 그런 질문이나 해대고 말야. 넌 이해 못 해. 그리고 앞으로 이딴 거 묻지 마. 난 뭐 물어보는 인간들 질색이야. 질문이 많은 남자들은 숨길 게 많은 놈들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면 될걸 꼭 남에게 묻는단 말야." - 39쪽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유쾌하다. 그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책을 읽어도 되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해도 재미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어떤 부채의식에도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다. 반대로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일은 불쾌하다. 그 시간은 사람을 조급하고 비굴하게 만든다. - 93쪽

"인간들은 불멸에 대한 강박 때문에 참된 아름다움을 박제하죠. 그들은 죽은 예술에 길들여진 노예들이에요." -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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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 하트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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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 갑작스러운 사건, 커다란 좌절, 새로운 시작.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 구성에 대한 패턴은 그의 책을 몇 권쯤 읽어보았다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어서, 언제부터인가 후반부에 있을 법한 반전에 대한 큰 기대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매번 그의 신작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소재로 일상의 소중함을, 또는 망가져버린 삶의 소생을 그렸을지를 궁금해하며 책을 구입하고 만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일상의 권태로움을 탈출하기 위하여 호주 다윈이라는 곳으로 여행을 한 주인공 닉 호손이 척박하고 낯선 환경에서 마치 과거의 어느 시점에 뚝 떨어진 것 같은 앤지라는 여자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2부에서는 울라누프라는 오지에 앤지의 남편감으로 납치된 닉이 그곳에서 겪는 고난이 그려지고, 3부에서는 앤지의 언니 크리스탈과 울라누프를 탈출하게 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삶의 소소함과 무료함은 예상치 못한 큰 고난을 겪어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 것임에도, 일상을 탈출하기 위한 여행에서 닉에게 닥친 국면은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작가는 닉의 일상을 아무런 즐거움이나 희망도 없이 한정된 사람들과 제한된 영역 내에서 단조로운 작업을 하며 매일을 맥주로 버텨갈 수밖에 없는 삶으로 전락시켜 그가 그토록 따분하게 여겼던 자신의 삶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재인식시킨다. 


결론이 해피앤딩인지 아닌지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곳을 탈출했기 때문에 해피앤딩일 수 있는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으니 해피앤딩으로 볼 수는 없는지. 어쨌거나 이 모든 상황과 감정들이 이리저리 뒤섞인 중에도 삶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작가는 자기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욕망의 충족만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관점임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이유도 어찌보면 여행지의 낯설고 신기한 경험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결국 일상으로 돌아와 또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가기 위함일 수도 있으니. 



작고 사소한 행복이야말로 우리의 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진정한 축복일진대 왜 우린 평생 어렵게 행복을 찾아헤맬까? - 22쪽

쿠누누라는 사실 아무런 매력도 없는 마을이었다. 텅빈 원생대의 땅으로 멋모르고 뛰어든 나에게는 사람 사는 마을이 제공하는 안전이 절실히 필요했다. 눈을 돌릴 데가 많은 마을이 필ㅇ했다.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되니까. 그거야말로 오지에 도사려 있는 위험이었다. 오지의 공허는 자기 자신을 더욱 의심하게 만드니까.
원시적인 대자연 속에 있다 보면 사소한 근심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은 죄다 헛소리일 뿐이었다. 내 경우에는 오히려 두려움과 자기혐오가 증폭되었다.
대자연이 내게 말했다.
‘넌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 59, 60쪽

사람들은 힘든 노동에 더욱 큰 목적이 있는 척하며 삶을 견딘다. 노동이 그저 의식주를 해결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욱 큰 목적이 있는 척한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일할 뿐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초라한지 마주하지 않기 위해 일할 뿐이다. 계속 바삐 일하다 보면 우리의 삶이 절망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사실과 우리 스스로 빠져든 막다른 길의 깊은 수렁을 들여다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204, 205쪽

나는 시간낭비를 즐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망, 가족, 애정관계 따위를 인생의 동력으로 삼았지만 나는 달리 살고 싶었다. 내 동년배들은 인생의 안정을 가져다줄 성공의 터전을 구축하길 원했지만 나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늘 흐리컹덩하게 살며 직장에서 주어진 일을 하고, 적게 벌어 적게 쓰고, 맥주를 마시고, 오다가다 만난 여자들과 섹스를 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성공에 대한 관심이 없이 시간이 마냥 흘러가도록 방치했다. - 284, 285쪽

이제 예전생활보다 더욱 의미 없는 일상에 갇힌 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며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대디가 밴을 망가뜨렸을 때 내가 왜 무기력증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깨달았다. 내가 마침내 소중한 시간을 들여 구축한 일이었기 때문이며, 혼신을 다해 일했던 성과가 눈앞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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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미래,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오는가 - "5년 뒤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선대인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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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치가 커서인지 매번 읽을 때마다 매번 실망을 함에도 불구하고, 선대인의 책은 꼭 사보게 된다. <선대인의 빅픽처>를 읽고 실망한지 몇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또 책을 사고 말았다. '일의 미래'라는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보지만, 이번에도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꽤 크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일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동시에 고려해야 할 4가지 요소로 저성장 시대, 인구 마이너스, 기술 빅뱅, 로봇화와 인공지능이라는 흐름을 강조한다. 2부에서는 어떤 일이 전망이 있을지를 기업, 개인, 사회의 관점에서 각각 예측한다. 최근 화두라 할 수 있는 4차산업혁명의 유행과 맥을 같이 하며, 이 책은 경제학의 관점에서 다가올 미래, 그리고 미래의 변화에 대한 예측을 담고 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해 충분한 근거와 통계자료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이 억지스럽거나 틀린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반대로 특별히 새로운 부분도 보이지 않는다. 한계기업의 증가라는 문제점, 한국형 패스트 팔로워 전략의 한계, 세계적인 보호무역의 강화, 인구절벽과 소비절벽의 연결, 가구형태의 변화와 그에 따른 기업의 변화, 기술발전에 따른 제조업과 같은 일자리의 수명 단축. 어찌보면 이미 추측해볼 수 있는 것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을 겨냥한 화장품 산업, 1인가구를 겨냥한 편의점이나 온라인 쇼핑, 고령화에 따른 바이오, 제약, 건강식품, 전기자동차와 그 인프라, 전기차 배터리, 사물인터넷과 3D프린팅, 산업용 로봇 등이 앞으로 부상할 미래형 일자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 목록들에는 일반 독자로서도 전혀 예측하지 못하거나 달리할 부분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는 굳이 시간을 들여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를 한다고 저자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막연한 예측에 확신을 가진 것만으로도 경우에 따라서는 큰 소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2부에는 뭔가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전망이 담겨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가 후반부에 개인에게 하는 조언들, 예를 들면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아라", "창업 DNA를 가져라", "여러 번의 생애전환기에 대비하라", 창의적 작업 영역, 사회적 상호작용 영역, 신체적 능숙성 영역에서 "오로지 '나'이기에 가능한 능력을 키워라", "자산구조와 소득구조를 바꾸고, 금융지능을 키우라" 같은 조언들은 자기계발서의 내용을 각색한 느낌마저 든다. (아니,, 이러한 주장들은 누구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진리인지도 모르겠다.)


저자에게 경제학적 분석을 할 수 있는 점쟁이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신문이나 뉴스에서 접하는 이야기들이 아닌 뭔가 색 다르고 특별한 제안을 기대한 독자의 입장에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기술적인 문제나 자율주행차의 가격, 사용자 수용성 문제보다는 사회적, 법적, 윤리적인 문제들이 해결해야 할 더 큰 숙제다. 예를 들어 어느 쪽으로 가도 사고를 피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서 어떤 피해를 선택하도록 설계할 것인가. 또 그에 따른 윤리적, 법적 책임을 누구에게 어떻게 물을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마련돼야 한다. 자율주행차가 원래 달리던 길로 가면 어른 네 명을 치게 되고, 이를 피하기 위해 다른 길로 가면 아이 한 명을 치게 된다고 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게 할 것인가. 또는 좁은 길에서 갑자기 넘어진 어린 아이를 피하기 위해 가던 방향을 바꾸면 탑승자가 다치거나 죽게 될 때 자율주행차가 어떤 선택을 하게 할 것인가. 이처럼 자율주행차의 선택을 프로그래밍하는 과정은 딜레마의 연속이다. 또한 특정한 선택을 내리도록 프로그래밍한 뒤 실제로 사고가 났을 때 그 책임을 제조사에게 물을지, 탑승자에게 물을지도 고민거리다. - 104쪽

2020년까지 7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으로 보았다. 즉, 총 5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예측한 것이다. 여기에서 얻은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관리직과 단순 화이트칼라 사무직은 사라질 위험이 큰 반면 컴퓨터나 수학 등과 관련 있는 직업은 대체되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이런 일자리 변화는 심각한 노동시장의 불균형을 가져올 것인데, 새로운 일자리에 적합한 새로운 기술을 갖추도록(reskilling)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일자리는 줄어드는 반면 세계 인구는 증가해 실업률 또한 더욱 높아질 것이므로, 일자리 변화에 맞춰 적절한 기술을 갖추지 못하면 2019년에는 일할 기회를 찾지 못하는 노동자가 많아질 것이다. 또한 인구 증가 및 여성의 경제활동 등 사회적 요인에 따라서도 일자리 수요가 변화하기 때문에 이러한 흐름들도 눈여겨봐야 한다. - 138, 139쪽

미래의 파괴적인 변화는 일자리의 수(Quantities)뿐만 아니라 일자리의 질(Qualities)과 그에 따라 요구되는 기술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러한 기술의 요구는 에너지, 금융서비스, 헬스케어, ICT 등의 분야에서는 늘어날 것으로 기대되고, 사회기반시설, 소비자, 미디어 등의 분야에서는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기술이 요구되는 직업의 대부분은 컴퓨터, IT, 엔지니어링 등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 분야인데 이러한 분야에 일하는 노동자 중에는 남자가 많기 때문에 여성의 고용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 139쪽

기업은 아니지만 도시 중에 샌프란시스코와 디트로이트의 대비되는 사례를 예로 들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디트로이트는 1950년대부터 세계 자동차 산업의 메카로 불리며 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 자동차 메이커들의 본고장이자 미국 최고의 부자 도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석유파동과 일본 자동차 업계의 거센 도전, 안이한 경영진과 과도한 요구조건을 내건 노동조합의 대립 등이 겹치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결국 2013년에 180억 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하고 말았다.
반면 샌프란시스코와 인근 지역들은 초기의 수산 및 해운물류 산업에서 벗어나 전문 서비스와 금융 산업을 키웠고, 이후에는 첨단기술 기업들의 모태가 된 실리콘밸리를 형성해 나갔다. 이런 식으로 도시의 자원과 역량이 남아 있을 때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에 나서 계속 번창하는 도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 176쪽

가진 자원이 많은 강자는 기본적으로 동질화 전략과 물량전, 전면전을 펼칠 수 있다. 기업 사례로 질레트의 면도기를 들 수 있다. 면도기 시장에 일회용 제품들이 등장해 시장을 조금씩 늘려가자 질레트는 자신들도 일회용 면도기를 더 싸게 시장에 내놓았다. 같은 제품을 내놓는 동질화 전략을 써서 일회용 면도기 업체들이 성장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다. 이는 기존 면도기 시장의 강자였던 질레트가 많은 자금력과 생산설비를 바탕으로 물량전을 펼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방법이다. 이는 기업의 세계뿐 아니라 정치,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도 똑같이 쓸 수 있는 방법이다.
만면 약자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해 차별화하는 것이다. 이는 자원이 많지 않은 약자가 제한된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을 선택해 화력을 집중하는 전략이다. 당연히 강자들처럼 전면전을 펼칠 수 없고, 국지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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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걸 2017-07-22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후반부는 내공이 딸린다는 느낌입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지음 / 봄알람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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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있는 '언어'를 '소통'쯤의 추상적 개념이라고 여기고 책을 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기에서 말한 언어라는 것은 정말 실질적인 의미의 언어, 말투, 대화 방식 또는 스킬을 의미했다. '우리에겐 소통이 필요하다'와 같이 나이브하게 제목을 읽어내려 했던 내가 틀렸다. 어설프게도 나는 처음에 이 주제를 화합의 필요성 정도로 접근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한가한 소리였다. 이 책 곳곳에는 여성혐오와 차별에 대한 매우 절박한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누군가가 ‘좋게 넘어가자’며 분노하는 이들을 온화하게 타이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분노할 필요가 없는 기득권이기 때문일 뿐"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나역시 기득권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여실히 깨달으면서 책장을 넘겼다.


"당신에게는 대답할 의무가 없다", "마음부터 단단히 여며야 한다", "내 입장부터 정확히 해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명확히 알자", "단호함은 필요하다"와 같은 목차를 따라가보면, 저자가 여성들에게 어떠한 마음가짐 혹은 대화의 전략을 주문하는지를 알 수 있다. 즉 페미니즘이나 여성혐오에 관한 대화가 내키지 않을 경우 굳이 대화를 시도하거나 설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친절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페미니즘이 뭐야?"라는 준비 안된 무지한 질문 앞에서 적절한 대답을 떠먹여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이 책을 쓰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 저자는 차별의 존재를 이해를 해야 하는 남성쪽에게 오히려 여성들이 공들여 설명해야 한다는 부당함을, 남성들이 그동안 자신이 부족했다는 점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현 상황을 답답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현 상황을 설명하기에 지치고 괴로운 이들에게 새로운 대화의 전략을 제공하기 위한 메뉴얼의 하나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다만, 메뉴얼치고는 그리 친절한 편이 아니다. 저자 스스로도 "독자를 확보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럼에도 2016 올해의 좋은 책으로 선정이 된 것을 보면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책에 (찬성이든 반대든) 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저자는 여성 혹은 페미니즘에 긍정적인 이들을 독자로 여기고, 전반부는 여성혐오에 대한 입장과 태도와 언어를 정립할 필요성에 대해, 후반부는 실질적인 대화의 스킬 또는 대응 방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성혐오와 남성혐오의 이슈에 대해 대화의 방향을 잃고 있는 이들에게는 반문하기, 인정하게 하기, 지적하기, 가로채기, 확답받기, 결정하게 하기, 선 긋기, 선공하기 등의 대응법은 우선 대화나 말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확신있는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괜찮은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나 스스로는 이런 대응법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받지는 못하였다. 단순히 내가 남성이고, 여성혐오에 대해 무감각해서라기 보다는, 논리적이고 분명하며 공격적인 대화방식이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것에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음을 지난 수 년간 경험했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대응법이 '설득'이 목적이 아니며, 내가 설득시킬 대상도 아니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이 책에 드러난 편향성이나 공격성 등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편향적이기에. 마찬가지로 어설픈 화합이나 평화의 추구를 주장하고 싶지도 않다. 느끼는 사람은 느끼는 대로 표현할 뿐이고, '왜 그런 느낌을 받느냐'는 무례한 질문에는 어느 누구라도 지쳐가기 마련일 것이기에. 어쩌면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갈급함이 이 책을 탄생시켰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제안하는 대로 남성들의 고정관념, 차별성, 무지, 무관심, 팽배해 있는 관성을 하나 둘씩 깨뜨림으로써 이미 기울어져 버린 축을 조정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또 나대로의 '언어'를 찾아봐야겠다.

생각해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대화를 마치고 ‘이해시키느라 힘들었다’는 소리가 나온다면, 상대가 해야 할 이해를 도와주는 노력을 했는데 그게 힘에 부쳤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럼 힘을 키우면 될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계속 말하겠으나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잠깐, 이해가 누구의 몫이어야 하는지 짚어둡시다. ‘이해’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누가 하고 있는지도 봅시다. - 21, 22쪽

그때 남성은 ‘내가 보기엔 아닌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동시에 가장 의미가 없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아래라 생겨나는 불평등이라는 주제에서,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채로는 영영 당사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본인이 직접 느낄 수 없으니, 일부러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혼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볼 수밖에 없는 문제를 자신은 볼 수 없다고 자기 입으로 밝혔음에도, 공신력을 얻는 쪽은 상대입니다. 내 경험의 정당성마저 남성이 결정하는 겁니다.
차별은 수치나 공신력 있는 근거로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치로도 명백히 입증되고 있으나, 당사자가 직접 느낀 고통이 먼저이며 그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쌓여 수치가 되고 기록이 되는 거니까요. 아까 말한 직관이라는 게, 바로 이 고통이 쌓여 얻게 된 결과물입니다. - 27쪽

평등이란 하나밖에 없고, 불평등은 그 나머지를 전부 포괄합니다. 상대의 태도가 얼마나 바람직한지 아닌지는 당신이 어떻게 대응할지를 결정하게 할 뿐입니다. 태도에 따라 틀린 말이 맞는 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의 질문만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완전히 평등한가?

아니라면 여전히 불평등한 상태고, 평등까지 더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본인이 무슨 노력을 했느냐 여부에 관계없이 말할 수 있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래도 이제 많이 평등해지지 않았냐고요? 맞습니다. 꾸준히 평등에 가까워졌습니다. 제법 평등해졌고, 많이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평등하다’는 말은 차별이 사라졌을 때에만 쓸 수 있습니다. - 38, 39쪽

많은 혼란이 여기에서 옵니다. 차별이 아직 존재하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으므로 ‘차별이 이제 없다고 봐야 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차별은 있거나 없는데, 누군가가 숨 쉬듯 차별을 느낀다면 차별은 있는 겁니다. 지구 상에 성평등을 이룬 사회가 아무 데도 없는데 무슨 수로 우리 사회에 차별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차별을 없는 것으로 만들려 하는 말의 힘이 이렇게나 세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차별에 무지하며 평등에 도달하려면 한참 멀었는지 보여줍니다. - 41쪽

상대에게도 내가 겪은 차별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말할 자유는 있겠지만, 그 경중을 따지고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아무리 민주주의라 한들 토론으로 결정할 게 아닙니다. 당신이 차별을 당하는 쪽으로 태어난 이상, 그게 존재하고 아니고를 말할 권리는 당신에게밖에 없으니까요. - 42, 43쪽

남성이 지금 사회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건 의미가 좀 다릅니다. 열정페이를 받는 인턴이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하는 건 자기위안이거나 더 불이익을 볼까 두렵거나 실제로 급여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겠지만, 고용주가 이대로 괜찮다고 말하는 건 자기 이익에 기반한 정당화니까요. 똑같이 기존의 차별적인 구조에 한 명 분의 힘을 싣고 있다고 해도, 덜 가진 상황을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이는 것과 더 가진 상황을 누리겠다는 말은 똑같을 수 없습니다. - 51쪽

누군가가 ‘좋게 넘어가자’며 분노하는 이들을 온화하게 타이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분노할 필요가 없는 기득권이기 때문일 뿐입니다. 기득권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기득권이 설파하는 아름다운 의도는 무의미하며,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을 좀 깨닫고 예쁜 헛소리는 넣어두어야 한다는 겁니다. - 82쪽

강남역에 모인 여성이 충분히 설득적인 어조를 취하지 않고, 남성에게 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온화하게 참고 이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전히 비난받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남성을 설득하고 포용해 이해로 나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견디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설득이 이루러진다면야 좋겠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기득권자인 남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부터가 오만한 발상입니다. 여성의 목소리와 행동은 온전한 주체가 되고자 하는 몸부림이지, 다른 주체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86, 87쪽

남성혐오의 실질적인 힘은 아주 작아서 여성혐오의 뿌리에 스크래치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발휘하는 힘의 차이, 패러디와 원본의 차이가 무시된 채 ‘한남충’이라는 말이 등장하자마자 ‘남혐’이 기승을 부리는 것이 되고 곧바로 사회문제로 부각된 현 상황은, ‘김치녀’를 위시한 온갖 여성혐오 발언이 오랫동안 아무 문제없이 널리 존재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노릇입니다.
남성혐오가 파장을 일으킨 건 남성이 겨우 여기에만 발끈해서가 아닙니까? 그걸 또 여자 탓으로, 심지어 여성혐오마저 ‘그렇게 남성혐오를 한’ 여성 탓으로 돌리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 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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