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에세이 <개인주의자 선언>을 매우 공감하며 읽었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쓴 소설까지도 특별한 기대를 한 것은 아니다. 이적의 <지문사냥꾼>이나 이석원의 <실내인간> 같은 등단한 작가 아닌 이들이 쓴 소설을 몇 권쯤은 읽어보긴 했었는데, 편견인지는 몰라도 과도하게 독창성을 어필한다거나 불필요한 곳을 공들여 쓰는 등 소설가가 아닌 작가들의 소설은 뭔가 아쉽거나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이 소설의 단점에 대해 말하자면, 다소 산만하다는 아쉬움을 들 수 있겠다. 이는 너무 '단편스러운 단편'을 좋아하지 않는 성향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이나 숨겨진 이유를 밝히며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 듯 하다. 지하철 성추행, 식당에서의 상해, 직장상사로부터의 정신적 피해, 잊혀질 권리, 이혼 후 양육권, 전관예우, 원인에 이어서 자유로운 행위, 폭행에 대한 정당방위 등  마치 TV 미니시리즈를 엮어 놓은 것 처럼 몇 편 분량의 스토리를 풀어놓고, 스토리에 캐릭터가 묻히는 것을 우려한 나머지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캐릭터(몸싸움도 서슴치 않은 행동파이자 초미니를 입고 출근하는 여성판사, 미스 함무라비)를 탄생시킨 것 같다.


어려운 분쟁과 소송을 쉽게 풀어 제시한다는 것도 특징이기는 하지만, 사건에 얽힌 이들이 아니라 그 사건을 접하고 판결을 해야 하는 판사들을 중심에 놓았다는 것은 이 소설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판사의 관점에서 실제 재판과정에서 고려하거나 고심할 것 같은 상황들이 그려져 있어, 사건을 분쟁당사자가 아닌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는 한다.

기록은 판사 소유의 물건은 아니다. 오히려 ‘판사의 삶을 소유하고 있는 물건’인지도 모른다. 전통적으로 판사의 삶이란 기록을 보는 삶이다. 판사가 보는 기록은 타인의 삶, 그중에서도 갈등, 분노, 의심의 장면들을 기록한 것이다. 그것도 객관적인 제3자가 아니라 갈등의 당사자 각자가 자기 시각에서 바라본 모습들을. - 136쪽

인간의 기억이란 참 묘해서 완결된 것은 곧 망각하고, 미완의 것은 오래오래 기억한다. 해피엔딩을 이루고는 익숙해져만 가는 사랑과 안타깝게 못이루어 평생 그리워하는 사랑 중 어느 것이 더 달콤한 것일까.
아니, 어느 것이 더 슬픈 것일까. - 170쪽

경제학가 토비 모스코비츠와 존 베르트하임은 야구, 축구 등 스포츠의 홈 어드밴티지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통계적으로 어드밴티지가 존재함을 밝혀냈는데, 그 원인은 응원 때문에 선수들이 더 열심히 뛰어서가 아니었다. 선수들이 아니라 심판들이 열광적인 응원에 반응하여 자기도 모르게 홈팀에 유리한 판정을 하곤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싶어한다. ‘인지상정’이란 심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판사도 인간이고 온갖 인지적 오류의 영향을 받는다. - 25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다. 최소한 그것이 인간 사회의 약속이다. 그런데, 나약한 인간을 수렁 속에 방치하는 사회는 어떤 책임을 지는 걸까. - 30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경 끄기의 기술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는 힘
마크 맨슨 지음, 한재호 옮김 / 갤리온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초라서 그런지 또 자기계발서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꽤 오랜기간 자리를 잡고 있던 이 오랜지색 표지에 적잖이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목차를 보니 여타의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애쓰지 마, 노력하지 마, 신경 쓰지마, 해피엔딩이란 동화에나 나오는 거야, 왜 너만 특별하다고 생각해?, '고통을 피해는 법'은 없어, (...) 결국 우린 다 죽어. 9장으로 구성된 목차들 중 많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보면 결국 인생에서 겪는 대다수의 문제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남들과 달리 내가 특별하다는 착각, 어떠한 목표든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착각, 현재 머물고 있는 이런 곳에서 썩을 사람이 아니라는 착각, 가슴이 시키는대로 살아야 성공한 삶이라는 착각, 내면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착각, 나는 결코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지금껏 이런 비현실적인 나르시즘에 빠진 채 작은 실패 하나에도 허덕이며, 실패를 죄악시하며, 자신의 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길을 흘끔거리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주워담을 만한 적절한 충고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제2장 표지에 나오는 '실망 판다'가 한 말이다. "문제 없는 삶을 꿈꾸지 마. 그런 건 없어. 그 대신 좋은 문제로 가득한 삶을 꿈꾸도록 해." 저자가 만들어낸 가공의 슈퍼히어로인 실망 판다는 뚱뚱한 몸집에 두꺼운 뿔테안경 같은 눈가면을 쓰고, 배가 꽉 끼는 셔츠를 입은 채로 사람들에게 가혹한 진실을 전한다. 그가 전하고 있는 한 마디 속에는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적인 요소들이 담겨있다: 문제가 없는 삶은 없다. 부풀려진 '성공'이라는 이상에 매달려 그것을 쫓느라 좌절하지 말고, 지금 눈 앞에 닥친 문제에 집중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이것이 곧 성공으로 향하는 길이다.

모든 걸 가지려는 사람, 즉 인생의 버킷리스트를 모두 채우려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부족함도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 모든 걸 가져야 한다는 믿음이 인생을 ‘지옥의 무한궤도’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경 끄기의 기술’이다. 이 기술은 삶의 방향을 재조정하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해주는 단순한 방법이다. 이 능력을 발달시키면, 이른바 ‘실용적 깨달음’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 실용적 깨달음이란, 삶이 늘 어느 정도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즉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든 인생은 실패, 상실, 후회를 수반하고 마지막엔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엄청난 고난들을 순탄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천하무적이 될 수 있다. 단언컨대 고통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 11, 12쪽

그가 성공한 건 ‘위너’가 되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루저임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숨김없이 글로 풀어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코스키는 한평생 자신이 생겨 먹은 대로 살았다. 그의 천재성은 엄청난 역경을 극복했다거나 출세해서 당대의 문호가 되었다는 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부코스키는 자신을, 특히 가장 못난 모습을 숨김없이 오롯이 드러냈으며, 결점을 태영하게 세상과 나누었다. 그의 천재성은 이런 단순한 능력 안에 있다.
부코스키가 성공한 진짜 이유는 자신의 실패에 초연했기 때문이다. - 19쪽

좋은 삶을 살려면, 더 많은 신경 쓸 게 아니라, 더 적게 신경 써야 한다. 요컨대, 오로지 코앞에 있는 진자 중요한 문제에만 신경을 쓰라는 말이다. - 22쪽

더 긍정적인 경험을 하려는 욕망 자체가 부정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부정적인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긍정적인 경험이다. - 26쪽

어떤 예술가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문제가 없으면 자동으로 문제를 만들어낼 방법을 찾는다. 내 생각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사실 그들에게는 그보다 중요한 걱정거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부작용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 중요하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가장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길일 것이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을 찾지 않는다면, 무의미하고 하찮은 것에 신경이 쏠릴 테니까 말이다. - 34, 35쪽

반평생 넘게 품어왔던 꿈은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 몸부림친 뒤에야 마침내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사실 음악가가 되길 원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난 결과를 사랑했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무대를 휘저으며 혼신을 다해 연주하는 내 모습을 말이다. 하지만 과정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패했다. 그것도 여러 번. 젠장. 심지어 실패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을 만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사실 안 한 거나 마찬가지다. (...) 내 꿈은 거대한 산과 같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난 그 산을 오를 마음이 별로 없다는 것을. 그저 정상을 상상하는 걸 좋아했을 뿐이었다. - 41, 42쪽

성공을 결정하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즐기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고통을 견딜 수 있는가’다. 행복으로 가는 길에는 똥 덩어리와 치욕이 널려 있다. - 43쪽

충고하건대,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남다르다는 생각을 버려라. 삶의 기준을 평범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다시 정하라. 자신을 유망주나 재야의 천재로 보지 말라. 비참한 피해자나 형편없는 실패자로도 여기지 말라. 그보다 훨씬 평범한 정체성인 학생, 배우자, 친구, 창작자와 같은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라.
자기의 정체성을 좁고 희귀한 것으로 규정할수록, 더 많은 삶의 요소들이 위협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되도록 단순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규정하라. - 82쪽

엉터리 가치를 선택하면, 다시 말해 자신과 타인에 대해 잘못된 기준을 세우면, 중요하지 않은 것과 삶을 사실상 망가뜨리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된다. 하지만 더 나은 가치를 선택하면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쏟게 된다. 중요한 것, 즉 삶에 안정감을 주고 그 결과로 행복과 즐거움, 성공을 전해주는 것에 신경을 쏟을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자기계발’이라는 건 곧 더 나은 가치를 우선하는 것이며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더 나은 것에 신경을 써야 더 나은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은 문제를 다뤄야 삶이 나아진다. - 109쪽

마이클 조던은 "난 살아오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다. 그게 내가 성공한 이유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음, 난 살아오면서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다. 그게 내 삶이 개선된 이유다.
성장은 끝없는 반복 과정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될 때 ‘틀린’ 것에서 ‘옳은’ 것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틀린 것에서 약간 덜 틀린 것으로 나아간다. 또 다른 것을 알게 되면 약간 덜 틀린 것에서 그보다 약간 덜 틀린 것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이 반복된다.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와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만 실제로 거기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결정적인 ‘정답’을 구할 게 아니라, 오늘 틀린 점을 조금 깎아내 내일은 조금 덜 틀리고자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성장은 상당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우리가 받아들이는 가치가 가설이다. 즉 이런 행동은 좋고 중요하지만 저런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판단이 가설이다. 그리고 우리는 행동으로 그것을 실험한다. - 140, 141쪽

"너 자신을 믿어",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 우리는 이런 달콤한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듣는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면 오히려 자신을 덜 믿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마음이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더 많이 의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이란 항상 틀리기 마련이라면, 자신의 믿음과 가정을 꼼꼼히 따져가며 자신을 의심하는 것 외에 발전하기 위한 논리적인 방법이 달리 있겠는가? - 152쪽

그런 의미에서 ‘자아를 찾아라’와 같은 말을 따르는 건 위험하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스스로를 특정한 역할이나 쓸데없는 기대에 옮아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잠재력과 기회를 자기 발로 차버릴 수도 있다. 너 자신을 절대 알지 말라. 그래야 끊임없이 노력해 깨달음을 얻게 되며,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지 않고 타인의 생각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 162쪽

난 되도록 적은 원칙을 따르며 살아가려 노력하는데, 그중 하나가 이거다. 맛이 간 게 나 아니면 나를 제외한 전부 둘 중 하나일 때는, 내가 맛이 갔을 가능성이 아주아주 크다. 난 경험을 통해 이걸 배웠다. 난 불안과 엉터리 확신에 휘둘려 수도 없이 헛짓거리를 벌이는 얼간이었다. 젠장.
물론 다른 사람들이 늘 옳다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틀리고 당신이 옳을 때도 있다. 내가 보여주려는 건 평범한 현실이다. 당신이 세상과 대결하는 느낌이 든다면, 실제로는 당신과 당신 자신이 대결하는 게 현실일 가능성이 크다. - 166, 167쪽

완전한 자유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자유는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기회를 주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의미 있고 중요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은 수많은 선택지들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자유의 범위를 좁히는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를 선택해 몰입해야 한다. 하나의 장소, 하나의 믿음, 하나의 사람을 말이다. - 192, 193쪽

자신이 결국 소멸하리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해보는 게 중요한 이유는, 그 행위가 덧없고 피상적인 엉터리 가치를 삶에서 싹 없애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더 버느라, 명성을 조금 더 얻고 주목을 조금 더 받느라, 또는 자기가 옳거나 사랑받고 있다는 걸 조금 더 확신하느라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축내는 동안, 죽음은 우리에게 훨씬 더 고통스럽고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 22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상중 답지 않게 요즘 트렌드에 맞게 제목을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일본 원제는 <逆境からの仕事学>, 굳이 번역하자면 '역경으로부터의 일에 대한 학(문)'이된다. 그러면 그렇지. 제목 자체에 눈이 가도록 수정한 역자나 편집자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기는 하다. 역자는 뜻을 정확히 하려는지 仕事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일'보다는 범위가 좁은 공적 영역에서의 일을 의미하므로 이를 그냥 '시고토(학)'이라고 해설하고 있는데, 뭔가 좀 어색하다. 제목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에서의 '일'을 직업으로서의 일로 좁혀보면 될 것 같다. (띠지에는 '인생 철학으로서의 직업론'이라고 보다 적절한 제목이 달려 있다.) 


나를 지키며 일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즉각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 싶어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그리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저자의 성향대로 보다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고민으로부터 자신과 일에 관한 접근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금과 같이 불확실한 시대에 학력사회의 모델마저 붕괴하고 있는 시점에서는 일에 관한 세 가지 관점을 유지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 세 가지란 바로 일의 의미를 생각해볼 것’, ‘다양한 시점을 가질 것’, ‘인문학을 배울 것’이다. 이는 '나다움'과 '쓸모없음'의 효용, '고전'과 '역사'로부터의 학습이라는 말로도 치환된다.


"그래서, 결론은 또 인문학이냐?"라고 반문하거나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겠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이와 다른 차원에서 각주 하나 없이 이렇게 스스로 문답하며 글을 써내려가는 저자의 박식함과 사회를 바라보는 일관된 스스로의 관점을 정립한 것에는 고개를 숙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한결같이 기본을 강조하고 인문을 강조하고 고전을 강조하는 것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책을 다 읽고도 정말 그래도 될 것인지, 혹은 다른 방식을 찾고 싶은 마음에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주저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만 남게될 뿐.

저는 일이란 ‘나다움’이나 인생 그 자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일에 쏟고 있으며 직장 동료들은 개인의 인격이나 사고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일에서 얻는 기쁨과 행복은 삶의 보람이기도 할 터입니다. 또 일을 통한 자신의 성장 역시 기대할 수 있겠지요.
오늘날처럼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일을 그저 생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내 삶의 방식을 만드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기회가 늘어날 것입니다. 일에 임할 때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이 일을 통해 나는 어떻게 변화하고 싶은지, 또 사회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매일매일 원점으로 돌아가 진지하게 질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18, 19쪽

다양한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는 것은 편견 없이 대상을 본다는 뜻이며, 이는 곧 객관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뜻입니다. 당연하게도 우리의 눈은 두 개뿐입니다. 이 두 개의 눈은 주관적인 눈입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세 번째 눈, 네 번째 눈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쉽지 않지만 세 번째, 네 번째 눈을 가지려 노력하는 일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21, 22쪽

우리는 일을 통해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얻습니다. 단지 입장권을 얻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상관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을 통해서 ‘나다움’도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 41쪽

그렇다면 이런 중압감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처방전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 처방전은 바로 하나의 영역에 자신을 100퍼센트 맡기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일에 임하는 자세도 그렇고, 삶의 방식도 그렇습니다. 하나의 일에 전부를 쏟아 붓지 않는 것, 스스로를 궁지로 내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 47쪽

‘선택과 집중’은 기업 활동에서 자주 거론되는 말입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선택과 집중’의 배후에 실은 더욱 근원적이며 쓸모없는 것을 포함한 중층적인 부분이 넓게 퍼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도 전공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교양 수업을 먼저 들어 폭넓은 지식을 쌓습니다. 이처럼 쓸모없어 보이는 것을 포함한 토대가 생긴 다음에야 비로소 무언가를 선택하고, 무언가에 집중하는 다음 단계로 걸음을 옮길 수 있습니다. - 99쪽

‘날 것’이란 방금 말한 ‘말린 것’의 반대로 지금 유행하는 현상이나 최신의 사상, 리얼 타임으로 움직이는 정보 등을 다루는 책이며 ‘탄력적인 독서’에서 말한 세 번째 그룹에 해당합니다. 오늘날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신조어가 등장하므로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날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날 것’은 먹거리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듯이 ‘제철음식’이니 당연히 맛은 있지만 익히지 않았으므로 가끔 먹고 배탈이 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안전성과 영양가라는 면에서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비해 ‘말린 것’은 안전성이 검증된 몸에 좋은 것입니다. 신선하지 않고 자극도 없지만 물기기 다 빠져 더 이상 부패할 걱정도 배탈이 날 염려도 없습니다. 소화하기 쉽고 몸에 양분이 되어 먹는 것만으로도 몸에 좋습니다. - 120, 121쪽

따라서 지성의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멀리 내다본다면 기초가 되는 부분은 ‘말린 것’을 통해 견실하게 취하는 것이 좋겠지요. 그런 후에 필요에 따라 ‘날 것’을 받아들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몇 번이고 말씀드리지만 특히 지금 이 시대는 바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조차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인 만큼 더욱 의식적으로 ‘말린 것’을 취하는 데 신경을 쓰고 착실하게 고전에서 예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훌륭한 말이 있습니다. 그 이상의 견실한 지성은 없을 것입니다. - 121쪽

이 책에는 "‘내가 인생에 아직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지금에서야 ‘인생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라고 물을 뿐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불우함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과제를 스스로 묻고 그것에 대답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뜻이지요.
삶을 통해 주어진 과제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 책에는 자기 일은 시시해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하는, 양복점에서 일하는 한 청년의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프랭클은 이에 관해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 자신의 활동 영역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일 뿐입니다. 활동 범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략) 개인의 구체적인 활동 범위 안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 그러합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직업에는 각각 커다란 책임이 부여된 것이지요. 이를 깨달은 사람은 그 책임의 크기를 두려워하면서도 그 안에서 어떤 종료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125, 12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작 <편의점 인간>에서 전체의 일부, '부품'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현대인의 세계관을 표현한 무라타 사야카의 새로운 책을 읽었다. <편의점 인간>이 사회(직장)와 개인이라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소멸세계> 전작의 연장선상에서 가족과 개인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렇게 작가의 세계관은 작품을 통해 계속 연결되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이 책에서 현재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연애, , 결혼, 출산과 같은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의 삶의 방식이나 상황이 전혀 다른 형태로 유지되는 또 다른 세계 - 그러나 머지 않은 미래에 점차 현실이 될 것 같은 세계 - 를 묘사한다. 부부로서 지위는 유지하지만 부부가 아닌 타인과 각각 연애를 하고, 부부끼리의 섹스는 근친상간으로 인식되고, 임신과 출산은 인공수정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남자도 몸에 자궁을 달아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한 아이들은 가족이 아닌 정부차원에서 관리되는 사회. 암울한 미래를 그린 많은 소설과 영화들에서 한번쯤은 보았을 법한 규칙적이고 획일적인 '관계'이다.


새롭게 등장한 이 '실험도시'를 유토피아라고 불러야 할지 디스토피아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주인공 아마네의 고민은 어머니와의 갈등을 통해 극대화 된다. 남편과의 섹스를 통해 자기를 임신하고 출산한 어머니로부터 강조되어 온 예전 사람들이 살아왔던 '정상적인 삶'에 대한 의문과 반감은 커져만 가고, 섹스를 통해 '사랑의 도피'를 완성한 어머니와 달리 실험도시에 입주해 인공으로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정부가 아닌 자신이 키우려는 계획을 통해 사랑의 도피를 완성하려 한다. 이를 단순히 구 세대 vs 신세대의 충돌로 보아야 할 것은 아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어머니도 아마네도 각자가 사회가 인정하는 '정상'에 대한 균열을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획했던 출산과 육아의 실패로 그가 추구하였던 이상은 좌절되지만, 그는 다른 방식의 금기를 실행한다. 정상을 강요하는 어머니를 계획도시로 유인.감금하여 비정상에 적응시키는 한편, 획일적으로 양육되고 있는 '아가'와의 섹스를 통해 자신을 새로운 균열로 연결한다. 프롤로그 한 장에 담긴 금단의 열매를 먹고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후예들이 다시 낙원으로 돌아간다면, 낙원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섹스를 한 사람들이 인류의 아담과 이브로 남게 될 것이라는 말이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사회의 미래는 낙원으로 변모해가고 있는가, 아니면 점차 소멸하고 있는 것인가. 낙원이든 소멸세계든 그 변모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는 기꺼이 아담과 이브가 되고자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안전한 발정 같은 건 없다니까. 인간은 점점 진화를 거듭해서 영혼의 형태며 본능도 바뀌어가잖아. 완성된 동물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으니 완성된 본능도 존재하지 않지. 누구나 진화의 과정에 있는 동물일 뿐이야. 그러니까 세상의 상식과 부합하든 하지 않든 그건 우연에 불과하고, 다음 순간에는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어지는 거지."
"......"
"우리는 진화의 순간을 살아가는 거야. 언제나 그 길을 가는 ‘도중’이라고."
"잘... 모르겠어. 그럼 인간은 언제 완성되는데?"
"완성은 없어. 크로마뇽인이었을 때는 그게 완성형이라 여겼을 테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던 시절에도 그랬겠지. 두개골과 장기의 형태도 손발의 길이도 계속 바뀌었잖아. 그에 수반하는 영혼이나 뇌 같은 건 그보다 더 쉽게 변화한다고. 올바르다는 개념 자체가 환영이야. 끝없이 추구해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을걸." - 107, 108쪽

엄마가 믿는 ‘올바른’ 세상도 이 세상으로 이어지는 그러데이션의 ‘도중’이었을 뿐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우리는 언제나 ‘도중’에 있다. 어떤 세상에 세뇌되더라도 그것으로 누군가를 심판할 권리 같은 건 없는 것이다. - 158쪽

정상이라는 것만큼 소름 끼치는 광기는 없다. 이미 미쳐있는데도 이렇게 올바르다니. - 25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을 사랑하면 철학자가 된다 - 만남부터 이별까지, 반려동물과 함께한다는 것
이원영 지음, 봉현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동물의 권리나 동물복지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터라, 이런 생각들의 철학적 배경이 궁금했다. 그래서 "철학도에서 수의사가 된"이라는 띠지 카피를 보고, 동물을 철학적으로 수의학적으로 대하는 저자의 생각을 엿보고 싶어졌다.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상적인 생활에서 한 치 더 깊게 들어간 고민을 원했는데, 수의사로서 제공해줄 수 있는 반려동물에 대한 생활밀접형 정보나 주의사항, 반려동물에 대한 감성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구매의도와는 맞지 않는 독서가 되어버렸다. 반려동물을 입양할 예정이거나 막연히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면 일독해볼 필요는 있겠다. 

무언가에 이름 짓는 방식을 보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 대상이 동물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다만 그 대상이 동물이라면 좀더 자유롭고, 좀더 무의식의 세계가 드러날 뿐이다. 이를 통해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자신이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상대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기를 바라는지, 자신이 끝내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혹은 스스로가 책임과 즐거움 중 어떤 것에 무게를 두는지, 남들에게 묵지하게 보이고 싶은지 가볍게 보이고 싶은지, 남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이유도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이곳에 던져진 자신이 끝내는 어떻게 사라져가길 상상하고 있는지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 35, 36쪽

생존의 기본 조건을 제공한다고 해서 상대를 함부로 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을 가질 수 없다는 원칙이, 어째서 인간에게만 적용되어야 할까? 당연히 동물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내가 나의 개,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쉴 곳을 마련해준다고 해서 그들을 내 맘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직관적으로나 반려동물을 내 맘대로 해도 좋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자세다. - 69쪽

상당히 많은 반려동물들이 아주 기본적인 조건만 제공하면 놀라운 관계를 선물로 준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들로 인해 기쁨과 행복이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 또한 서로의 관계가 비틀리지 않으며 즐거움, 편안함, 애틋함 등의 긍정적 감정들이 강화된다. 그들이 내 삶에 깊이 들어올수록 나 역시 그들에게 깊이 다가가게 되고, 갈수록 서로를 고양시키게 된다. 이것은 놀라운 선순환 구조다.
이렇게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서로를 고양시킬 수 있는 관계가 우리 삶에서 결코 흔치 않다. - 72쪽

개, 고양이와 나란히 누워 있거나 천천히 쓰다듬으며 고요한 분위기 속에 있다 보면, 하루 종일 자신을 둘러싸고 흔들어댔던 온갖 허울과 가식과 세속적 밀당으로부터 벗어난, 거의 완전에 가까운 자유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면 저절로 무장 해제가 된다. 진지하고 심각하게 매사에 의미를 추구하고, 몸과 마음이 온통 목적 지향적인 우리 평범한 인간들의 부담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해준다. - 97쪽

물론 개입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식의 이러한 사상들의 문제는 현재의 선과 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묻어버린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들 사상이 이야기하고자 한 바는 현재의 모습이 이상적이므로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취향에 따라 남과 자신의 주변을 강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비롯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무리하게 개입하는 행동에 대한 경고다. 각각이 가진 내재적 메커니즘을 건드리지 말고, 당신 자신도 애초에 무리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갔더라면 현재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이제라도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면 모든 것이 차차 안정적으로 흘러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120쪽

좋은 죽음은 없다. 죽음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죽음이 마치 삶에 대응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논의하는 경우가 많지만, 죽음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탄생이다. 삶의 처음이 탄생이고, 삶의 마지막이 죽음이다. 탄생도 죽음도 그 자체로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가치중립적인 용어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말 ‘안락사’로 번역되는 영어 ‘euthanasia’의 어원적 의미인 ‘좋은 죽음(good death)’이란 자칫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죽음이 좋다’는 의미라기보다, 삶의 마지막이 당사자는 물론이고 다른 누가 봐도 좋지 않은 고통스러운 상태였는데, 이제 고통이 없어졌다는 것일 뿐이다.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했던 당사자는 이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며 안락할 것은 없다. 그저 삶이 끝난 것이다.
안락사의 문제는 인간의 개입으로 그 상태를 강제 종료했다는 데서 발생한다. 개입의 정당성을 어디서도 확보할 수 없는데 개입할 수 있는 힘은 가지고 있고, 개입하면 좋아지는 당사자들이 여럿 있어서 개입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데서 발생한다. - 152쪽

한 사회에서 어떤 권리를 갖는다거나 배려의 대상이 되는 데는, 타고나거나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들, 즉 그 사람이 가진 조건이나 외양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순히 남자이기 때문에, 연장자이기 때문에, 백인이기 때문에, 돈이 많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힘이 세기 때문에,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편파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곤란하다. 다시 말해, 성, 나이, 인종, 재산, 권력, 물리력, 개인의 기호 등에 따라 권리와 대우가 달라지는 것은 인류의 오랜 역사를 부정하는 ‘퇴행’이며 진화의 ‘역행’이라고 봐야 한다. - 173쪽

‘종’의 차이는 사실상 인간 사회의 이러한 차이 모두를 합한 것보다도 훨씬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다른 종, 인간보다 약한 종을 보호하고 배려하는 행동이 어떤 사회에서 나타난다면, 성별이나 인종, 나이와 재산 같은 외적인 모습이나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 기반하여 타인에게 행해지는 무분별한 차별이나 배타적 행위는 더욱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동물이 학대받거나 동물의 생명이 경시되지 않고 좋은 대우를 받는 나라는 그렇지 않은 나라에 비해 위대하다고 볼 수 있다.
간디의 말은 다름에서 오는 차이를 차별로써, 통제되지 않은 물리력으로써 행사하는 것은 야만에서 조금도 진전되지 않은 것이며, 오랜 세월 일구어온 인류의 역사와 문명과 진화의 성취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행동이니, 이제 거기서 조금 더 나아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깊은 탄식으로 들린다. - 173, 17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