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사랑하면 철학자가 된다 - 만남부터 이별까지, 반려동물과 함께한다는 것
이원영 지음, 봉현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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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동물의 권리나 동물복지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터라, 이런 생각들의 철학적 배경이 궁금했다. 그래서 "철학도에서 수의사가 된"이라는 띠지 카피를 보고, 동물을 철학적으로 수의학적으로 대하는 저자의 생각을 엿보고 싶어졌다.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상적인 생활에서 한 치 더 깊게 들어간 고민을 원했는데, 수의사로서 제공해줄 수 있는 반려동물에 대한 생활밀접형 정보나 주의사항, 반려동물에 대한 감성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구매의도와는 맞지 않는 독서가 되어버렸다. 반려동물을 입양할 예정이거나 막연히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면 일독해볼 필요는 있겠다. 

무언가에 이름 짓는 방식을 보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 그 대상이 동물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다. 다만 그 대상이 동물이라면 좀더 자유롭고, 좀더 무의식의 세계가 드러날 뿐이다. 이를 통해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자신이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상대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기를 바라는지, 자신이 끝내 이 세상에서 성취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혹은 스스로가 책임과 즐거움 중 어떤 것에 무게를 두는지, 남들에게 묵지하게 보이고 싶은지 가볍게 보이고 싶은지, 남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이유도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이곳에 던져진 자신이 끝내는 어떻게 사라져가길 상상하고 있는지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 35, 36쪽

생존의 기본 조건을 제공한다고 해서 상대를 함부로 할 수 있는 권한과 자격을 가질 수 없다는 원칙이, 어째서 인간에게만 적용되어야 할까? 당연히 동물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건전한 상식에 비추어 볼 때, 내가 나의 개,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쉴 곳을 마련해준다고 해서 그들을 내 맘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직관적으로나 반려동물을 내 맘대로 해도 좋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자세다. - 69쪽

상당히 많은 반려동물들이 아주 기본적인 조건만 제공하면 놀라운 관계를 선물로 준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그들로 인해 기쁨과 행복이 저절로 생겨날 수 있다. 또한 서로의 관계가 비틀리지 않으며 즐거움, 편안함, 애틋함 등의 긍정적 감정들이 강화된다. 그들이 내 삶에 깊이 들어올수록 나 역시 그들에게 깊이 다가가게 되고, 갈수록 서로를 고양시키게 된다. 이것은 놀라운 선순환 구조다.
이렇게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서로를 고양시킬 수 있는 관계가 우리 삶에서 결코 흔치 않다. - 72쪽

개, 고양이와 나란히 누워 있거나 천천히 쓰다듬으며 고요한 분위기 속에 있다 보면, 하루 종일 자신을 둘러싸고 흔들어댔던 온갖 허울과 가식과 세속적 밀당으로부터 벗어난, 거의 완전에 가까운 자유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면 저절로 무장 해제가 된다. 진지하고 심각하게 매사에 의미를 추구하고, 몸과 마음이 온통 목적 지향적인 우리 평범한 인간들의 부담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해준다. - 97쪽

물론 개입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식의 이러한 사상들의 문제는 현재의 선과 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묻어버린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들 사상이 이야기하고자 한 바는 현재의 모습이 이상적이므로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취향에 따라 남과 자신의 주변을 강제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비롯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무리하게 개입하는 행동에 대한 경고다. 각각이 가진 내재적 메커니즘을 건드리지 말고, 당신 자신도 애초에 무리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갔더라면 현재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이제라도 자연의 순리를 따른다면 모든 것이 차차 안정적으로 흘러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120쪽

좋은 죽음은 없다. 죽음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죽음이 마치 삶에 대응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논의하는 경우가 많지만, 죽음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탄생이다. 삶의 처음이 탄생이고, 삶의 마지막이 죽음이다. 탄생도 죽음도 그 자체로는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 가치중립적인 용어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말 ‘안락사’로 번역되는 영어 ‘euthanasia’의 어원적 의미인 ‘좋은 죽음(good death)’이란 자칫 혼동을 일으킬 수 있다. ‘죽음이 좋다’는 의미라기보다, 삶의 마지막이 당사자는 물론이고 다른 누가 봐도 좋지 않은 고통스러운 상태였는데, 이제 고통이 없어졌다는 것일 뿐이다. 고통스러운 삶을 지속했던 당사자는 이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며 안락할 것은 없다. 그저 삶이 끝난 것이다.
안락사의 문제는 인간의 개입으로 그 상태를 강제 종료했다는 데서 발생한다. 개입의 정당성을 어디서도 확보할 수 없는데 개입할 수 있는 힘은 가지고 있고, 개입하면 좋아지는 당사자들이 여럿 있어서 개입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데서 발생한다. - 152쪽

한 사회에서 어떤 권리를 갖는다거나 배려의 대상이 되는 데는, 타고나거나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들, 즉 그 사람이 가진 조건이나 외양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순히 남자이기 때문에, 연장자이기 때문에, 백인이기 때문에, 돈이 많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에, 힘이 세기 때문에, 혹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편파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곤란하다. 다시 말해, 성, 나이, 인종, 재산, 권력, 물리력, 개인의 기호 등에 따라 권리와 대우가 달라지는 것은 인류의 오랜 역사를 부정하는 ‘퇴행’이며 진화의 ‘역행’이라고 봐야 한다. - 173쪽

‘종’의 차이는 사실상 인간 사회의 이러한 차이 모두를 합한 것보다도 훨씬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다른 종, 인간보다 약한 종을 보호하고 배려하는 행동이 어떤 사회에서 나타난다면, 성별이나 인종, 나이와 재산 같은 외적인 모습이나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 기반하여 타인에게 행해지는 무분별한 차별이나 배타적 행위는 더욱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동물이 학대받거나 동물의 생명이 경시되지 않고 좋은 대우를 받는 나라는 그렇지 않은 나라에 비해 위대하다고 볼 수 있다.
간디의 말은 다름에서 오는 차이를 차별로써, 통제되지 않은 물리력으로써 행사하는 것은 야만에서 조금도 진전되지 않은 것이며, 오랜 세월 일구어온 인류의 역사와 문명과 진화의 성취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행동이니, 이제 거기서 조금 더 나아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깊은 탄식으로 들린다. - 173,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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