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단상은 가수 아이유의 노래 Love wins all로 촉발되어 박지영의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로 연결된 장애인,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에 대한 소박한 상념이다. 소설집의 간략한 감상으로 시작해 본다.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는 쓸모없음과 잉여나 허수와 같은 언어를 통해 쓸모와 효용과 생산성의 언어가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어떤 균열이 있는지를 직시토록 하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들 효용이니 생산성이니 하는 언어는 하나의 언어로 집결된다고 할 것인데, 바로 쓸모있음이라는 유용(有用)’또는 소용(所用)이다. 이 단어는 인간을 구분하는 언어로 사용되어 무용(無用;쓸모없음)’한 인간을 질서에서 배제, 소외시키겠다는 폭력성을 은닉하는 지배의 기호로 이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단편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는 치매를 앓는 일흔아홉 살 아버지가 등장한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가면 실종되기 일쑤인, 아무 쓸모가 없는, 생산력도, 어떤 효용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치매 아버지와 무생물 밥솥이 나란히 거론될 정도이지만, 쓸모의 가치 측면에서만 보는 이 세계의 관점으론 언제라도 폐기처분해도 될 것만 같지 않은가? 효용 가치가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주 웃기는 모순의 언어를 이 사회는 또한 가지고 있다.

 

의사 소통능력을 상실한 치매 아버지와 함께 산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하나? 멋대로 움직이거나 아무 곳이나 드러누우려 하거나, 예기치 못한 행동으로 타인의 위협이 되거나 하는 행동들 말이다. 그런 사람을 끌고 가다시피 하는 자식들이나 배우자등 가족을 향해 사람들은 무슨 도살장에 개 끌고 가는 개장수도 아니고서야 원~, 노인 학대야라고 섣부른 비난을 퍼붓곤 한다. 이 얼마나 편리한 생각인가? 쓸모없는 것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그 쓸모없는 존재를 돌보는 이에게 쓸모없음을 잘 못 보호한다고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다. 소설은 아마 이 이중의 위선적 잣대가 우리들의 인식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가끔 TV 프로그램에는 이러한 치매환자를 돌보는 배우자나 자식들이 함께하는 매끈한 영상을 방영하면서 포장된 거짓과 위선으로 치매 가족의 현실을 미화해서 보여준다. 소설에서도 이러한 예가 등장하는데, 유튜브에 <마담 케이의 비밀 정원>이란 제목을 하고 우아한 치매할머니와 시인인 아들이 등장해서 운치있는 풍경 속에 시와 한 잔의 차가 오가는 예쁜 장면으로 연출된다. 치매가 이렇게 우아한가? 똥칠을 온갖 곳에 하고, 한 순간에 사고가 나는 예측 불가한 상황의 연속이다. 치매의 본질을 싹 걷어내고 효자이고, 지극정성의 배우자 모습만을 과시하는 이것들은 치매환자를 돌보는 다른 가족들은 물론 세상 모든 타자에게 왜곡된 이미지를 전달하게 된다. 어쩌면 가장 유해한 것들 중 하나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치매 아버지를 형과 누나를 대신해 돌보는 마흔의 아들인 주인공 강선동은 남에게 치매 아버지를 돌보는 선행을 하는 효자로 보이기 위한 많은 위선과 과장을 행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착한 아이 신드롬에 걸린 한국사회의 많은 우리들은 자기 안의 착한 아이와 싸워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을 돌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착함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착함은 양보가 아니었다. 희생이 아니었다. 투쟁하고 악착같이 싸우고

탐욕스레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 버텨내야 하는 것이었다.” -59

 

쓸모있음이라는 말은 우리네 일상 곳곳에서 그야말로 아무 쓸모없음이 드러난다. 인간 삶은 결코 유용이나 효용으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소설의 표제작인 이달의 이웃비는 지적장애와 조현병을 앓던 형이 죽자, 그 형의 내면의 어둠과 혼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이해할 생각을 하는 순간 자신도 형의 블랙홀에 같이 빠져들까 두려워 줄곧 멀리서만 지켜봐 왔음에 내재한 진실을 향한 동석이란 인물의 자기 성찰적 걸음의 이야기다.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와, 쌓인 눈을 치우고, 상점들의 짐을 거들어 날라주고, 밤새 토해낸 악취나는 말라붙은 오물을 치우는 일을 하는 부자(父子)가 등장한다. 미화원이었던 아버지 배철영은 약한 지적장애인 아들 배병식이 자기가 이 세상에 없게 되는 날 이웃으로부터 버려지지 않기 위해 이웃비()를 선() 지불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웃에게 쓸모없는 것들을 그들은 보상을 지불하고 가져감으로써 쓸모있는 이웃이 되려는 것이다. 여기서 약자들이 소용있음을 증명하는 행위는 이 세계의 극렬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반증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의 화자인 동석의 형은 함께하는 동생으로부터의 철저한 소외, 그리고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해 집에 머물면서 실내 자전거 페달을 돌리고 <무한도전>을 보며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체적을 최대한 줄이는삶을 살다가 죽었다. 그때 체중은 50Kg 남짓이었다고 동석은 말한다. 그는 이를 형과 닮은 보이지 않는 이웃 배병식을 통해 상기하는데, 그것조차 의식의 밑바닥에서는 동석 자신이라는 고작과 모자라는 병식이라는 존재의 감히의 관계를 넘지 못한다. 동석은 병식에 대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선, ‘선 밖의 이웃우리안의 이웃에 존재하는 매우 엄중한 제도 혹은 잣대가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 이 같은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인 척이라도 하는 것은 이미 기울어진 세계에 조금이라도 공평함을 돌려주기 위해필요한 것이리라. 위선적이거나 보여주기 위한 의도된 선행일지라도 진실한 수고가 뒤따른다면 그것은 이 세계의 밝음을 위해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동석의 행위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이 쓰이다는 감정을 갖는 것, 아마 여기가 훈련되고 학습되어야 하는 지점일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집의 몇 작품이라도 급하게 읽게 된 이유가 있다. 최근 예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행태가 다시금 추한 민낯을 드러내며 노래 제목조차 간섭하기 시작하는 형국을 접하며 촉발된 선 밖의 이웃 갈라치기라는 폭력성의 속살을 보다 넓게 이해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가수 아이유(IU)의 노래 <Love wins>가 성소수자 구호로 이해되어 사회에 부정적(?) 메시지를 전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수정해서 Love wins all이라는 제목으로 변경 발표되는 일이 있었다. 발표된 음악영상의 내용은 육면체 상자가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인 두 연인을 추적하며 혐오 가득한 편견으로 감시를 그치지 않는 상황 속에 끝내 서로 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두 사람이 사회로부터 버려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유튜브, IU 'Love wins all' MV영상 화면클릭(원 영상)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상자(Cube,Box)로 상징되는 것은 서구사회에선 익숙한 은유이다. 사회라는 울타리에는 동일성만 유지되고 자기와 다른 이질성에는 곧 혐오와 폭력을 가하는 억압과 편견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기호이다. 바로 그 편견의 존재를 사랑으로 이겨내자는 노래에 비난을 가하는 세계가 바로 지금 이 사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이 노래가 담고 있는 고귀한 정신을 알아본 세계인들의 높은 반향이 있다는 소식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다.

 

노래는 날 데려가 줄래? / 나의 이 가난한 상상력으론 / 떠올릴 수 없는 곳으로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그리곤 세상에게서 도망쳐 Run on / 나와 저 끝까지 가줘 My lover / 나쁜 결말일까 길 잃은 우리 둘이라는 음절로 이어진다. 그 혐오와 배제의 시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으면 자신들의 빈곤한 상상력을 벗어난 상상을 넘어서는 세계로 가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버림받은 이 세계에서 길 잃은 두 영혼은 그래서 세상 끝 다른 세계가 있는 곳을 향해 도망친다.

 

오늘 한국 사회는 장애인, 성소수자, 정신적질병자, 노인, 그 밖의 사회적 약자(경비,미화 노동자등)에게 그 어느 때보다 극렬한 혐오의 감정을 뱉어내고 있다. 그런데 실은 이러한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치매센터는 2024년 치매환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서고, 2050년에는 300만 명을 훨씬 초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2021 장애인 통계>에 따르면, 2020년 등록 장애인 수는 전체 인구의 약 5.1%26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적어도 이 두 집단의 인구만 하더라도 360만 명에 이르고, 여기에 성소수자와 독거노인등 사회안전망에서 소외된 인구까지 더하면 인구 10명에 1명은 이러한 범주에 포함된다는 말이며, 이는 둘 또는 세 가족 중 한 가족은 이들을 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일 세 세대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족이라 가정한다면 전체 인구가 모두 이들과 관련을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타자라고, 사회가 배제하여야 할 존재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부모 일수도, 자식일수도, 형제자매일수도, 삼촌이고 고모와 이모이고 사촌형제이고 조카이며 손녀손자일 수도 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알지 못하니 잃은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일 테고, 설혹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이라면 외면하는 의도의 행위일 것이다. 모르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그 결과 행위에서 동일한 양상을 낳는다. 시각장애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고 주먹질을 하는 인간의 무지나, 경비노동자에게 자기 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다고 발길질을 하고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다를 것이 없다.

 

사회 약자를 향해 저질러지는 혐오와 폭력들을 방임하는 세계에 우리는 이미 깊숙이 들어 와 있는 것 같다. 이대로가 좋은 세계인가?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진짜 마음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정한 거짓이라도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 표현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 표현에도 수고가 들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들의 누군가는 이들이 될 수 있다. 모두 늙어 노인이 된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다. 우리들의 편견과 혐오의 시선은 이 사회의 소외된 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작동한다. 왜 세계인들이 하나의 노래에 이토록 열광하겠는가? 청각장애인으로 분()한 아이유가 노래하는 오직 장애인만이 서로 의지가 되는 세상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들의 우주(유니버스)를 진지하게 탐색하는 노력, 그래서 그 다름의 불신의 정체를 해소하는 걸음을 걸어보자. 혐오와 편견을 저멀리 날려보내고 설혹 위선이라도 행해보자. 아마 우리 세상은 조금은 더 밝고 환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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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지음, 김현진 옮김 / 나남출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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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정령이 의인화된 존재로서 나는 추상성을 즐긴다.(17)”고 작가 토마스 만은 구체적 현실의 인물로서의 개별성을 지우고 인간 일반이라는 추상에 숨어드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은 나치가 패망하고 몇 년의 시간이 지난 1951년 발표된 작가의 후기 말년의 소설이다. 그는 비록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그리고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는 표면적 도피의 외형을 보였으나, 문학은 정치적 소명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는 생각을 지닌 회색지대의 인간으로 비난을 면치 못 한 것도 사실이다.

 

들어가는 말 [*소설 내용이 일부 묘사되고 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이 소설은 12세기 독일 시인 하르트만 폰 아우에의 서사시 그레고리우스를 토대로 한, 즉 신화적 소재를 끌어들여 현실적 문제를 형상화 시킨 인간애와 죄와 구원의 이야기이다. 오이디푸스 신화를 닮은 근친상간을 소재로 하여 이중의 죄악과 신성모독, 그리고 혹독한 참회와 신의 은총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해피엔딩이다. 이 거듭되는 육체의 죄악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 이야기의 정령으로 베네딕트회 사제인 클레멘스의 입을 빌린 것이나, 그가 반복하여 성스러운 띠를 두른 나로서는과 같이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는 것도 작가의 자기변명, 자기 정당화를 위한 도구라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게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를 화자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중심인물로 추정컨대 6세기 말의 기독교 세계이다. 그럼에도 화자의 주장처럼 시대의 규명은 불필요한 것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는데, 성 갈렌 수도원 도서실에 앉아 특별한 교화로서 사제 클레멘스가 이 이야기를 전하는 시대를 알 수 없다는 것과, 이야기 정령의 시간과 장소의 편재성, 20세기 어느 날이기도 하며, 21세기 바로 오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바로 오늘의 현실적 현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종소리, 도시의 하늘에, 온 도시 위에, 여운으로 가득 찬 공중에 울려 퍼지는 노도(거센 파도)와 같은 종소리! , , 수많은 종이 진동하고 흔들리고 있다.” 

- 9, 372

 

소설이 시작되는 첫 문장은 소설의 후반부에서 동일 유사하게 반복되는데, 그 의미는 아주 다르게 다가온다. 첫 문장에서는 바빌론 언어의 혼란처럼 뒤엉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치 전쟁 후 책임 소재와 그 처벌과 용서의 문제로 혼란스러운 사회에 대한 신경증적 반응같다. 그런데 이 문장이 다시 기술되는 곳에서는 하늘 자신도 이해 할 수 없는 일에 감동되어(...) 일곱 교구의 종이라는 종이 모두 저절로 힘차게 흔들리며화합과 관용을 담은 은총의 종소리가 되어 울린다. 나는 쓴 웃음과 함께 속이 거북해짐을 느꼈다.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고는 이제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내리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 초월적 관용의 도덕에 기만과 위선의 의혹을 보내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재밌다. 그래서 나는 이 혼돈의 양가감정이 작가가 의도한 것일까?라는 의혹 속에서 토씨까지 면밀히 읽었다.

 

이야기 속으로

 

이야기는 이미 거장의 솜씨로 숙성된 소설가의 재능만큼 매혹적이다. 플랑드르 및 아르투아의 군주 그리말트와 그의 부인 바두헤나는 이란성 쌍둥이를 낳는다. 바두헤나는 아이들의 출산과 함께 죽는다. 어머니의 죽음으로부터 함께 태어난 아이들, 빌리기스와 지빌라 남매는 자신들만큼 고귀한 존재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민의식과 더불어 서로의 이미지에 매료되어 깊은 사랑을 공유하며 성장한다. 아버지인 그라말트 군주가 죽은 날, 오빠가 누이동생과 남자로서 여자와 동침한다. 그때 두 사람의 침실 사이에 있던 개 하네기프가 울부짖자 빌리기스는 개의 숨통을 끊어버린다. 이야기 정령은 사랑과 살해, 육체의 위기가 뭉쳐진 덩어리였다.”고 절묘한 어둠의 미학을 뽐낸다.

 

죄악은 열매를 빨리 맺어 두 사람을 혼돈으로 몰아넣고, 군주가 된 빌리기스는 참회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성묘(聖墓) 순례길에 오른다. 지빌라는 충성스런 귀족의 수성(水城)에 은거하여 아들을 출산하지만 황제의 품위를 지닌 아이는 이 세상에 설 자리가 없는 아이다. 아이를 신의 손에 맡기기 위해 출생내력과 함께 상징적인 옷감과 금화를 넣은 통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낸다. 이에 대해 정령은 빌리기스 남매 이야기는 측정할 수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신의 은총에 관해 증명하는 것이라고, 나치의 순혈주의, 자기 동일화라는 복제적 생산 행위가 신의 은총을 입증하는 행위라는 괴변(怪變)을 주절거린다. 역겨움이 올라오지만 이야기의 재미를 그칠 수 없다는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계속 읽어나간다.

 

순례길에 나섰던 남편이자 오빠인 빌리기스의 죽음 소식이 전해오고 지빌라는 분명 죄 많은 여인임을 자인하지만 오빠의 죽음이라는 신의 권고를 영원히 부인하겠다고 다짐한다. 생명이 끊어진 수녀 같은 군주로서 죄를 범했던 벨라페르 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항만에 있는 브뤼주성에서 은둔하며 참회하는 금욕 생활을 한다. 뛰어난 미색의 여자 군주를 손에 넣으려는 뾰족수염의 로저라는 아레라트 왕위를 계승한 악마같은 놈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플랑두르를 무력 침공한다.

 


일명 연애전쟁으로 불리는 저주스런 전쟁이 계속된다. 바다로 띄워 보냈던 아기는 폭풍우 치는 둘 째 날 어부들에 발견되어, 노르만 군도의 작은 외딴 섬 성둔스탄의 아고니아 데이(신의 고뇌) 수도원 원장 그레고리우스에 의해 거두어진다. 통 속에 아이와 함께 발견된 아이는 부모의 형제이며 조카가 된다는”  서판의 내용을 읽고는 신은 우리의 죄를 당신의 고난으로 삼으셨다.”, 명백하게 계시된 신의 계획에 따라 신중하고 현명하게 아이를 양육한다.

 

아이는 성장하여 젖형제로 키워진 플란의 코에 집중된 일격을 가한 우연의 사건으로부터 출생의 모호한 비밀과 주변 인간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자기 억압의 의혹으로부터의 해방을 맞는다. 수도원장의 위엄있는 이름을 물려받은 아이, 그레고리우스는 통 속의 옷감으로 기사의 옷을 지어입고, 원장이 증식시켜 놓은 금화를 지니고 삼촌이자 고모이며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알지 못하는 부모를 찾아 길을 떠난다. 성장한 아이 그레고리우스가 수도원장에게 자신의 괴물성이 지닌 죄악을 말할 때 네가 과장해서 괴물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아주 고귀한 태생이라는 사실이라며 그의 입을 통해 다시금 나치의 파시즘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게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안개 낀 바다를 표류한지 17일 만에 저항하는 최후의 도시에 도달하게 되고, 구혼을 받아들이지 않는 여 군주를 손에 넣기 위해 전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청년기사, 자칭 물고기 기사인 그레고리우스는 참회의 일환으로 기꺼이 여 군주를 위해 적과 싸울 것을, 군주의 승인을 청하고, 그것은 수락된다. 남자대 남자로 뾰족수염 로저와 싸우는 것이 단지 여왕을 위해서싸우는 것일 뿐 아니라 여왕을 얻기 위해싸운다는 것을 암시한다. 절대적으로 온힘을 집중해 꼭 쥔 손을 통해 폐허가 된 나라에 새로운 삶을 선사한다.

 

여왕은 결사적으로 자기편에 섰다는 사실로 인해 끓어오르는 자부심을 느낀다. 여왕은 통 속에 넣었던 똑 같은 옷감이라는 사실을 단호히 부인하며, 조롱하듯 타오르는 망상, 사라져버린 이성에 의해 스스로 낳은 죄악의 자식을 남편으로 맞이한다. 또 하나 숨겨진 야만을 발견하게 되는데, 순혈주의에 도전한 인접국의 구혼자를 뾰족 수염 로저라고 당대를 휩쓸던 사회생물학의 우생주의가 유대인에게 덧씌운 이질적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곤 여지없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그레고리우스에게 포획되는 것으로 그려, 나치의 유대학살을 미화한다. 지독하고 집요한 독일의 순혈주의, 타자에 대한 극렬한 혐오가 여전히 토마스 만 의식의 저류를 차지하고 있음을 본다.

 

두 사람은 국가적 결혼을 치루고 거짓으로 세워진 행복 위에서 두 아이를 낳는다. 진실은 다시금 드러나고, 두 사람, 아들이자 조카이며 남편 그레고리우스와 어머니이자 고모이며 아내인 지빌라는 생각의 몰락, 세상의 몰락이 닥쳐왔음을, 첩첩이 쌓인 죄악과 신성모독에 대한 참회의 길만이 자신들의 앞에 드리워졌음을 인정한다. 여기서 이야기 정령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절망할 수 있어도 신과 그의 충만한 은총에 대해서는 절망 할 수 없다.”, 그들의 죄과를 신의 초월적 구원에 맡겨 구원의 길을 열어놓는다. 문학 거장으로서의 미학적 성취와 달리 토마스 만이라는 한 인간의 기울어진 도덕성을 발견하는데 모자람이 없는 생각으로 읽힌다.

 

그레고리우스는 여왕의 남편, 대공의 자리를 버리고 혹독한 참회의 길에 나서고, 여왕은 나라를 사촌에게 위양하고 노숙자, 병자, 불구자, 나환자들을 위한 보호소에서 그들을 위한 낮은 자리에서 20년의 일생을 바친다. 그레고리우스는 지독한 불신자인 성인에 대한 혐오와 증오로 가득한 어부에 의해 호수 가운데 외따로 높이 솟은 바위에 사슬에 매여 버려지고 그렇게 그는 17년을, 퇴화된 사지를 지닌 고슴도치 같은 작은 몸이 되어 참회의 시간을 보낸다. 이 지독한 참회의 세월을 보내고 신의 계시에 의해 선택된 자가 바로 역사에 써진 교황 그레고리우스다.

 

마치면서

 

크나큰 지옥의 열매들에 내려지는 구원의 은총, 이야기 정령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행복할지어다.”라고, 17, 20년의 참회는 엄청난 것이라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라며 이 만큼의 시간으로 신에 참회하면 모든 죄과는 용서될 수 있는 것이라고. 어느 누가 정신으로 하여금 정의를 잊으라고 말 할 수 있는가?”라고 외쳤던 카뮈의 목소리가 이 파렴치한 목소리에 대항하여 들린다. 나는 이 소설이 노회(老獪)한 작가 토마스 만의 자기기만, 자기 사면의 언어로 읽힌다. 어찌 이 자기 동일성 반복의 폭력, 타자 배제의 참혹한 역사의 당사자들을 위해 환희의 종소리가 울리고 영광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이야기 정령에 은닉된 목소리들에서 인류의 오래된 전체주의적 욕망만을 보았다고 한다면 과연 오독일까? 인류에 혹독한 과오와 죄악을 저지른 인간들에 면죄부를 주려는 이 세련된 수사에 지옥 불이 내려치기를! 이 작품은 이러한 파렴치의 존재가 언제나 인간의 윤리를 혼돈으로 내몰고 있음의 증거로서 거듭 읽혀야 할 악마의 이야기 일 것이다. 자기 참회의 길을 걷는다면 그 어떤 죄악도 용서되어야 하는, 즉 자연의 절대 진리가 되었건 우주 창조의 유일자가 되었건 그 무엇으로 표현되던 신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영예와 은총을 부여하는 관용의 윤리에 나는 결코 동의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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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28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회한다고 그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죠.

필리아 2024-01-28 19:16   좋아요 0 | URL
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죠.
용서한다고 죄가 없었던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죄 지은 자의 내면의 문제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보이는 문제인 죄 지은 자가 타자에 저지른 해악의 당사자로서 ‘응당의 처분‘에 관한 것이 이 구원으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수백명을 학살하고 그 응당의 처벌이 사라지는 것이 정당한 윤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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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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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토리노 태생의 유대계 이탈리아인 프리모 레비(1919~1987)’의 인간 조건에 대한 명상록이자 회고록이기도 한 주기율표는 독특한 구성으로 역사와 철학과 윤리의 성찰로 독자를 이끈다. 주기율표상의 원소마다 유년시절의 추억과 유대인 마을의 아버지의 아버지들과 어머니의 어머니들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회상을 엮어 이 세계와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경쾌하게 써내고 있는 저술이다.

 

내 학부시절은 군사계엄이 연속되는 시대를 관통했다. 대학 정문은 계엄군이 가로막고 서있어 출입이 불가능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대자보에는 파쇼라는 수식어가 붙어 당시 군사독재 권력의 성격을 규정하곤 했다. 파시스트라는 말이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다. 대중을 향한 언어는 단순 명쾌해야 한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한 마디로 모두가 하나같이 똑같아야 한다는 말이며, 그 하나에는 어떤 불순물도 섞여서는 안 된다는 이념이다. 즉 한 집단의 순수성을 유지키 위해 권력이 요구하는 단 하나의 정체성 이외의 그 어떤 다름도 부정하겠다는 말이다.

 

바로 작금의 검찰 독재권력이 요구하는 것이 이러한 자기 동일성의 강요이다. 때문에 무수히 다양한 국민적 요구는 자기들과 다른 것이기에 부정되고 배척되어야 하는 것이며, 급기야는 폭력과 살상까지도 정당화하게 된다. 프리모 레비는 파시스트 권력에 저항하다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기 전 토리노대학 화학과 최우등 졸업생으로 유망한 미래가 기대되던 청년이었다. 때문에 이 저작이 화학 원소마다에 꼬리를 문 회상으로 이어지는 구성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연(Zn)의 장에 있는 글인데, 그의 학부시절 실험수업의 한 장면으로부터 이어지는 회상이다. 실험 조교는 그에게 아연을 주고는 황산아연을 제조하라는 과제를 부과했다. 실험실에는 황산용액이 이미 준비되어 있기에 쉽사리 주어진 과제를 제조할 수 있다. 즉 황산과 아연을 결합시키면 되는 것이니 단순하게 보인다. 그런데, 순수한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하는 물질이다. 따라서 아연은 황산과 반응하지 않는다. 변화를 일으켜 서로 다른 물질이 결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생성하려면 불순물, 즉 다른 물질이 존재하여야만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아연이 담긴 묽은 황산용액에 황산구리 용액을 한 방울 떨어뜨린다. 불순물이 첨가되자 반응이 시작된다. 하얀 모피처럼 수소기포가 아연을 둘러싸고 황산아연으로 결합 반응을 시작한다. 우리네 삶과 사회의 생명력이란 이처럼 불순물이 필요하다. 사실 땅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키워내려면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불일치, 다양성, 소금과 고춧가루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파시즘, 검찰 독재권력은 이러한 것들을 원하지 않는 것은 물론 금하고 배제하기까지 한다. 이 세계에는 결코 얼룩하나 없는 미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게 존재한다면 정말 역겹고 혐오스러울 것이다. 생존과 진화의 토대를 이루는 자연의 법칙은 이처럼 다름과 차이의 수용과 결합이 중추를 이룬다.

 

프리모 레비에게는 화학, 분명하고 경계가 뚜렷하여 단계마다 검증이 가능하고, 방송이나 신문처럼 거짓말과 공허함이 난마처럼 뒤얽힌 것이 아닌 화학이야말로 파시즘의 해독제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인간의 조건, 윤리적 성찰로 견인하는 사유들이 빼곡한 이 저작이 지금 내 시선에 들어 온 것이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이 세계의 바퀴가 돌아가고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순물중의 불순물이 필요하다.

잘 알고 있듯이, 땅도 무엇을 키워내려면 그래야 한다.”

-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52,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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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 그림으로 읽는 욕망의 윤리학
백상현 지음 / 책세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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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란 지식 체계에 뚫린 구멍이다.” - Jaques Lacan

 

책의 제목에 라캉(Jaques Lacan)’이 있다고 겁낼 것 없다. 현학(玄學)의 언어로 지식을 뽐내는 그런 책이 아니니까 말이다. 특히 그런 지식의 기만과 불완전성을, 그러한 지식들이 이 세계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음을, 그래서 그런 지식체계의 균열과 틈으로 드러난 텅 빈 구멍, 허무의 진리와 마주하여 삶을 갱신토록 안내하고 있는 저작이기에 더욱 그렇다. ‘유령은 이 세계를 매끈하게 완전하다고 설명하는 지식들이 그 존재를 부인한 것들에 대한 명명이다. 유령의 출몰은 세계를 설명하는 지식체계를 무너뜨리고 등장하는 진리로의 초대이다, 어두운 심연, 텅 빈 구멍으로 다가감으로써 이 세계를 구성하는 지배 지식이란 환영에 불과함을.

 

바로 이 유령을 책의 저자는 미술의 역사를 수놓은 예술작품들의 비유를 통해 세계의 진실로 다가가려는 끊임없는 인류의 노력을 차단하려는 지배질서의 기만과 거짓을,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없음의 있음을 알려주는 유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진리에 대한 욕망을 그칠 수 없음을 말한다. 특히 책의 제목처럼 미술관의 유령들이니 시각 이미지(회화,사진,영상etc.)’를 이러한 지식과 대립항으로 세계의 진실을, 진리를 향한 소재들이 되어 이 세계-현실을 직조하는 지식의 장막, 그 허구성을 감각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써 장막 너머 진리를 마주하게 되고, 우리는 삶에 대한 겸허와 갱신의 욕망을 다지고 지속하게 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것, 즉 배우고 경험한 것, 그래서 습관화된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라캉은 이를 시관(視觀)적 장(champ scopique)’이라 하여 눈은 단지 시각적 인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자 하는 욕망과 보이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충동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시관충동의 영향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계 지식 내의 관점을 이탈하여 그 바깥을, 지식의 균열점을 보기위해서는 비상한 노력과 고통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불규칙을 지우고 기하학적 원근법과 같은 규칙과 지엄한 유일신 종교의 규범이 세계 이미지를 억압하고 길들이던 세계라면 더욱 진리로의 접근은 어려운 길일 수밖에 없다. 길들여진 세계 내 지식과 진리의 길을 보기위해 유령이 출현하는 두 회화작품의 비교는 이 대립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훌륭한 비유가 되어준다.

 

파울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 1450년경, 본책 53쪽에서


먼저 이미지 통제, 즉 지배질서에 대한 열망이 넘쳐흐르는, 모든 불규칙 요소를 말끔히 제거하고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든 것을 향하게 하는 원근법의 철저한 반영으로 그려진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파울로 우첼로의 그림 <산로마노 전투,1450년경>는 혼돈의 속성을 박탈하고 죽은 병사와 투구들을 소실점을 향해 인위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당대에는 이 그림이 세계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재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1602, 본책 91쪽에서


이와 대비되어 카르바조의 그림 <의심하는 도마, 1602>는 당대를 지배하는 부르주아 귀족사회의 종교적 담론의 안정된 일관성을 찢고 어두운 심연, 진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원근법을 파괴하고 있을 뿐아니라 천박하고 경박한 당대 부랑인의 모습을 한 이들이 신성에 대한 의심을 보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써 지식체계의 기만을 고발한다. 두 그림 중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진실에 근접하고 있는가? 카라바조는 자신을 지배하는 체화된 지식을 벗어나 완전한 백지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현실을 스냅 사진 찍듯 담아낸 극단적 리얼리티 기술인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해 신체에 새겨진 역사의 문신을 단 번에 뛰어넘었으며, 그 대상은 범속함, 세계의 지식으로는 결코 알아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출현하는 진리의 사건을 묘사했다. 초라함과 기괴함의 형상으로, 조야함으로 출현해 지식의 장막을 찢는다.

 

길들여진 눈, 닫힌 눈을 이탈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실을 쫓으려는 윤리적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 세계를 구성하는 지배지식이란 한결같이 매끈한 아름다움만을 말하려하고, 그래서 낯선 것, 이질적인 것,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을 억압하고 길들이며, 이에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하여 버리고는 마치 이 세계는 늘 완전하게 매끈한 실재의 세계라고 허구를 주장한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이렇게 다른 것들을, 출몰하는 유령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계는 필연적인 폐쇄적 세계이고, 자기 동일성만을 인정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결국 전체주의의 잔혹성이 지배하는 파시즘의 무도한 세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책은 이렇듯 진실을 거세하고 자기 체계를 유지하려는 지배 지식이 수행하는 일관된 억압과 방어의 장치들을 만나게 한다. 정상과 비정상(광기)이라는 과학적 근거가 취약하기 그지없는 악착스러운 분류와 범주화에서부터 오늘날 텔레비전 영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상품 질서의 패러다임이 지배규범과 닮지 않은 이미지들에 대해 철저한 배제와 억압은 물론, 자유와 박애, 평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들까지 상품 속으로 매몰시켜 본래 의미의 사유 가능성을 파괴 상실시키는 현장을 목도케 하기도 한다. 인간의 지식이란 언제나 이처럼 인간의 가능성이기도한 공백을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것이고, 억압함으로써 자기 체계의 완결성이라는 환상을 유지하려 하는 것임을 납득케 한다.

 

아마 이 저술의 하이라이트는 인문학적 전회(轉回)라 할 수 있는 현대 미술이 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대로의 세계 재현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왜 유독 유령들의 출몰이 캔버스와 화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가에 대한 탐색일 것이다. 저자는 20세기 이전까지의 미술의 관점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초월적이며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가 있다는 믿음에 의한 진리 실체를 그리려는 행위였다면, 20세기 이후 인간들은 보이는 것 너머의 초월적 무언가의 존재 역시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우쳤기 때문이라 말한다. 대면하게 된 것은 바로 텅 빈 공허, 검은 심연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허무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사라짐에 대하여라는 저술의 <서문>을 쓴 프랑수아 리보네는 그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공허와 함께 춤을 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위대한 유희이고, 위대한 양식이다. (...), 허무주의? 아니다. 허무주의는 엄밀히 말해 공허의 망각이다. 허무주의적인 것은 시스템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관심으로 돌려버리는 힘으로 인해 허무적이다.”

-출처: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프랑수아 리보네 <서문> 민음사 2012

 

이제 미술은 세계의 진실인 공허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행위가 된 것이다. 진리, 텅 빈 구멍을 표현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다. 지배 지식의 장막이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쳐진 오늘의 세계에서 그 허방을 상상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하리만큼 난해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소멸의 정서를 듬뿍 담고 있는 사진 예술가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의 유령의 속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를 시작으로, 자본주의가 통제하거나 억압하려는 욕망의 실패를 드러내는 앤디 워홀의 복제 이미지들 속의 우연한 얼룩의 형태처럼 미세하고 보잘 것 없어 무시되거나 억압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부터 이 두 반복 사이에서도 완전함의 균열을, 이 세계 지식의 불완전성과 허구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유령을 출몰시켜 진리의 허방으로 우리의 인식을 데려다주려는 허무의 형식으로 규범의 해체로 이끄는 소피칼의 사진 이미지에서, 비상식적 시간성을 통해 질서가 부재하는 공간으로 우리들을 내던지게 하는 빌 비올라의 영상 이미지까지 공백을 소환하는 절차를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촉구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타자로부터 주어진 이미지와 의미에 속박되어 세계를 오인하는 우리들을 건져낸다. 이렇게 이 책을 통해 공백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계에 둘러쳐진 장막(스크린) 안에서 머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들 일상의 토대를 채우는 모든 가치 체계는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에 안주하고 갇히는 순간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의 모습처럼 처절한 퇴행과 독단의 폭력이 점령하게 될 것이다. 사실 유령이란 그 속성처럼 포착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불가능을 인정할 때, 우리는 보다 창조적이고 사랑과 정의, 진리가 인정되는 세계를 살아 갈 수 있으리라.

 

고작 죽은 문자인 텍스트를 읽는 뉴스 앵커의 이미지는 어떠한 진리도 말하지 않을뿐더러 바로 그 이미지가 시대의 보편적 진리 형상과 만나고 있다는 환상임을 입증하고 있다. 대항하는 모든 비판적 견해에 대해 격렬한 폭력을 행사하는 파시즘의 욕망구조를 여실히 드러내는 폭력사회에 들어선 오늘 한국사회에서 우리들은 실재와 환상을, 진실과 거짓이미지를 분별하기 위해, 지배질서 저 너머를 보기 위해 공백의 자리를 찾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세계에 안주하여 지배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 듯하다. 이를 넘어서 보지 않으려하면 결코 진실의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억압과 공포만이 넘실대는 세계만이 주위를 포획할 것이다.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지식체계의 허구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이 저술은 그 어떤 지식체계도 그 자체로 완전한 체계로 존재할 수 없음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유령 이미지로의 초대장은 그 어느 때보다 시의성을 지니고 다가온다. 미술 작품과 함께 라캉적 사유를 함께하며 닫힌 인식 세계를 활짝 개방하여 새로운 삶의 시선으로 갱신하는 기회가 되어 줄 터이다. 아름다운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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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 라이브 이론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윤동민 옮김 / 책세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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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의 저술들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저작들을 둘러싼 수많은 이론(異論)들과 비판으로 오류와 오해로 가득한 방해로 차단되곤 했던 것이 대중적 읽기의 실상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진리와 기성의 제도들에 대한 일종의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바이러스라고 보는 일체의 현상유지 수호자들의 근거가 취약한 비난들이기도하고, 논설과 담화의 지면 등 매체를 장악한 이들의 데리다를 읽는 어려움을 회피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현상학과 프랑스 철학을 연구해온 미국 캘빈대학 철학교수인 저자 제임스 K.A. 스미스는 이처럼 데리다에게 부여된 괴물성의 신화에 깃든 오류를 벗겨낸다.

 

데리다를 비판한 이들은 데리다의 사상을 괴물로 명명함으로써 길들이고, 그 괴물성에서 자신들과 다른 것, 즉 두려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 동종화하려 하는 익숙한 기득권적 욕망을 본다. 이 책은 이 만연한 데리다에 대한 신화를 탈신화하여 그 괴물성을 제거하기 보다는 괴물성의 본질을 이해하려 한다. 다시 말해 데리다의 원저작과 기획으로의 너그럽고 호의적인 초대이다. 해서 이 저작은 데리다를 읽기위한 대중적 입문서이자 하나의 촉매 역할을 위해 써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저술의 미덕을 하나 집고 가야겠다. 그간의 라이브 이론(Live theory)>시리즈로 간행되어왔던 저작들과 달리 평이한 일상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난해하다고 걱정하던 데리다 독자들의 선입견을 불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제임스 교수와 번역자의 노고에 고마움을 먼저 표현한.

 

책은 서론과 에필로그를 비롯 총 5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서론>1장인 <말과 사물>은 그야말로 데리다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서론>은 데리다에 씌워진 괴물성과 신화가 무엇인지를 밝혀냄으로써 오히려 그 매도된 비난의 내용들로부터 데리다의 사상적 지향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명료성과 같은 말은 데리다가 가장 싫어하는 말일 것이다. 발화된 언어의 다의성을 일의성이라는 권위적 고착관계로 몰아가는 언어이니 말이다.

 

괴물이란 서로 다른 것들로 이뤄진 혼종적 생명체가 불러일으키는 불길함과 처음으로 나타난 신기함과 낯섦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즉 규정할 수 있는 범주의 부족과 결핍 때문에 그 모호성에 붙이는 무지의 익숙한 기호이다. 이러한 거북함과 공포와 달리, 데리다의 사상을 야기한 수많은 철학적, -철학적 유령들의 영향을 도외시하고 마치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읽는 이들이 읽는 오류도 있다.

 

특히 데리다의 곡해를 두드러지게 표명했던 사건이 소개되고 있는데, 데리다에게 케임브리지가 명예 학위 수여를 결정하자 수여반대자들이 극렬하게 표명한 내용들이다. “그의 작업 모두는 모든 학문분과가 기초하고 있는 증거와 논증의 기준들을 부정하고 폐기하는 것이라고 해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이들의 악의적 선전이 그 하나이고, ‘뉴욕 리브 오브 북스 사건으로 명명된 데리다의 사전 승인없이 리처드 월린이란 인물이 자기 논문집에 임의로 데리다의 글을 편집 출간한 일로 발단된 사건이다. 이에 항의하자 텍스트와 저자 사이의 모든 관계를 산산조각낸 해석학적 괴물이 갑자기 저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론과 수행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 문화, 정치적 영향력을 장악한 이들이 데리다를 길들이려는 악의에서 비롯된 천박한 공격들이다.

 

이들을 통해 저자는 해체가 단순한 어떤 부정적 파기가 아님을, 파괴의 단순한 동의어거나, 분해하다라는 잘못된 의미로 전유되어 사용되는 오해를 바로잡는다. 해체는 재구축을 위해 분해하는, 즉 재구성적 의미를 가진 비판적 재구성이다. 해체는 무질서나 상대주의적 이해가 아니라 더 정의로운 제도를 위하여 제도적 틀을 부수고 개방시키는 행위이다. 특히 해체에 대한 아주 중요한 언어 표현이 있다. 해체는 타자의 부름에 대한 긍정적 응답이며, 본질적으로 타자에 답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 소명이라는 것이고, 무엇보다 사랑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은 타자를 위해 자리를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배제되고 소외된 것에 대한 근본적인 환대와 환영이다. 결국 기성의 권위가 수호하려는 불완전하고 불의한 것들이 은폐한 것들의 수많은 영역을 철저하게 분해하고 파괴함으로써 도래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니 그 반대는 치졸하고 악의에 찬 것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 학교에서 추방되고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체류 외국인이라는 낙인을 경험해야만 했던 알제리계 유대인 데리다를 읽기위한 예열이 충분히 된 것 같다. 1~3장은 데리다의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을, 4장은 데리다와 여타 사상가들의 관계를 개관하고, 5장은 해체에 대한 일종의 사례연구로서 인터뷰의 형식을 취해 주제들을 확장 사유토록 안내한다.

 

1<말과 사물>은 대다수의 학자나 비평가들이 간과하거나 알지 못하고 넘어갔기에 특히 중요한 부분이다. 데리다의 사상적 환경의 토대가 된 현상학, 특히 그의 스승인 후설의 비판을 통해 현상학의 공리들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 그가 오해하거나 도달하지 못한 순수한 정신, 신체와 물질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려한 플라톤주의의 이데아가 결국은 신체라는 물질성 없이는 성취될 수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은 기하학적 진리라는 것, 즉 순수 정신인 이데아라는 것도 최초 고안자의 정신인 의식의 영역 내 형성물이다.

 

이렇게 내적 근원인 주관적 산물인데. 이것이 어떻게 객관적 진리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해보면 이 기하학적 통찰을 공유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공동체가 창조되어야 하고, 언어를 통해 상호주관적으로 소통될 때에서 비로소 객관적 의미로 존재하게 된다. 플라톤(소크라테스)에서 헤겔, 후설에 이르는 서구철학의 전통은 그들이 그토록 멸시하던 신체와 물질성이라는 오염을 은폐한 것으로 이데아를, 순수 정신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서양 철학 전통에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이념들의 부패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결국 서구 철학이 욕망하는 순수하고 신체화되지 않은 객관성이라는 것에 해체를 수행하는 것이다. 진리와 객관성을 성취하기 위해 구체화와 물질성을 말소하려는 욕망에 깃든 타자성에 대한 반감, 즉 로고스중심주의의 자민족중심주의와 서구형이상학의 강박증에 도사린 타자에 대한 폭력성을 읽는 것이다. 그것을 데리다의 표현으로 한다면 사유는 언어 없이 지속하지 않으며 언어가 공동의 산물인 한 자아는 사유하기 위해 타자에 의존한다.(비밀의 취향P84)”를 인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데리다는 왜 해체하려 한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언어의 객관성이란 것은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소통의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와 ()쓰기는 매개와 해석의 필연성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은 곧 공동체 안에 존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된다.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폭력의 구조 안에 얽혀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하니 이 얽혀있는 폭력성을 찾아내기 위해 해체해야 하고 그 폭력으로 인해 빼앗겼던 타자들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해체의 개념에 가까이 다가가는 데 이보다 좋은 설명은 없을 것 같다. 데리다의 주저(主著)목소리와 현상, 그마라톨로지의 상당부분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진 것이다라 할 수 있다.

 

2<다른 문학, 문학으로서의 타자>철학의 여백들우편엽서등에 대한 간접적 읽기가 될 수 있는데, 물론 그마라톨로지를 비롯한 방대한 데리다의 논문들과 여타 저술들이 망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왜 데리다가 문학을 특권을 가진 철학의 타자로 삼았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미 소개되었지만 해체는 다른 것의 여지를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배제되었던 것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도의 틈과 균열에 집어넣은 것이다. 타자성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해체의 방법에서 결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서구 철학은 일의성의 사유이다. 즉 타자성을 부정한다. 그런데 문학은 일의성이라는 단일한 의미들의 이상과 사물의 일대일 대응의 이상인 철학의 이상을 넘어서 흐르는 언어의 양태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문학이 특권을 갖는 이유는 오염으로 여기는 문학을 통해 철학의 욕망을 심문하려는 것이고, 철학 스스로 자기-비판에 참여토록 하는 기획이랄 수 있다.

 

이로서 직접성(일의성)과 순수성에 대한 철학적 열망, 동일자의 공간으로 하고자 하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공동체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종의 방언으로서 문학은 훌륭한 해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또한 이 장에서는 철학이 은유의 교통을 거부하면서도 닳아빠져 못쓰게 된 은유를 은근히 이용하는 역사적 행태에서 철학 그것이 억압하고자 했던 것이 자신의 중심부임을 밝혀내기도 하고, 그 유명한 문장인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는 맥락에 대한 통찰의 중요성의 설명도 있다. 아마 저자의 의도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식의 악의적 오독을 넘어서 비판적 독해로서 저자의 의도를 데리다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의 핵심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3<타자를 환영하기-윤리학, 환대, 종교>는 데리다의 사상을 관통하는, 레비나스의 타자를 승계하는 해체의 윤리적, 정치적 함의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해체가 타자에 대한 사랑이며, 타자를 위한 자리 내기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해체가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라는 말이 새삼스럽지만, 기성의 학문과 비평의 세계에서는 1989년 카르도조 법학대학원 컨퍼런스에서 해체는 정의(Justice)!”고 말한 데리다가 비로소 공적 정치적 물음으로 전회하였다고 해석하였던 모양이다.

 

데리다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자들의 오류가 이때에야 자기 오류를 인식하였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라는 말처럼, 데리다는 해체할 수 없는 것(정의)의 이름으로 해체 작업에 착수한다. 해체는 정의의 해체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 사이를 구분하는 그 간격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정의로 법과 제도들을 괴롭히고 잠 못들고 깨어있도록 괴롭히는 작업임을 밝힌다. 수구적인 기득권 집단이 데리다의 해체를 그렇게 폄하하고 조롱하며, 괴물 취급을 하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멋진 정의의 역설, 세계의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데리다는 윤리적 책임을 이렇게 정의(定義)한다. 결정을 해야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출구 없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속박에서 결정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규칙에 괄호치기이고, 정의롭고 책임 있는 결정이 있다면 적절한 순간에 규제없이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며, 법을 보존하고 또한 파괴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법을 다시 고안해야 할 정도로 충분히 유연하게 사유되고 결정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윤리는 당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를 때, 앎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있을 때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 

시작된다.(...) 보증이 있는 윤리가 아니다. (...) 윤리는 위험하다.”

- 데리다, <이론을 쫒아서, P31~32>, 본문 173

 

만일 어떤 판사가 규칙을 단순히 적용한다면 그는 계산하는 기계일 뿐이고, 정의를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나 법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또한 정의의 꼬리표는 주어지지도 않는다. 결국 정의로운 법 판결에 내재된 이 역설은 어떤 결정이 정의라고 말 할 수 있는 순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정의와 윤리적 책임의 조건은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동시에 결정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이중적 상태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코 의무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책임의 체험이 곧 정의의 윤리임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해체는 환원할 수 없는 무한한 정의의 이념에 작동하고 운동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우리는 나름 해독할 수 있게 된다.

 

4<데리다의 타자들>5<저자, 주권, 인터뷰에서 자명한 것들>, 우선 4장에서는 데리다의 작업에 흔적을 남긴 소수의 특권적 타자들인 몇 명의 철학을 설명한다. ()쓰기의 유한성이라는 신체성과 물질성을 평가절하한 플라톤으로부터 그라마톨로지영문판 서문을 쓴 가야트리 스피박이 주장한 니체의 영향력이 근거가 취약한 비판임을 증명하고, 오히려 니체의 초인은 데리다의 타자에 굴복했음을, 레비나스의 목소리에 묻힌 존재임을 설명한다. 한편 하이데거는 데리다에게 해체의 공간을 열어주었으며, 심지어 하이데거의 해체였다고 데리다가 말했음을 전하기도 한다.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부모와 자식의 완벽한 본보기였다는 것이다.

 

특히 4장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학계와 비평계의 데리다 수용사이다. 다시 말하자면 각 계의 해체에 대한 반응의 역사라 할 수도 있겠다. 예일학파, 즉 미국 문학이론가들을 중심으로 한 수용사인데, 이들은 후설과 하이데거를 모른 채 데리다를 읽음으로써 매우 비-맥락적으로 읽었기에 무수한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독일의 경우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반목과 교류로 이루어졌음을, 초기에 하버마스와 가다머를 중심으로 데라다를 반혁명적, 보수주의자로, 권위주의적 정치 구조를 복권하려는 불순한 인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후 해체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계몽주의의 지속임을 이해하고 공동의 노력을 하는 동맹관계가 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디우, 지젝, 이글턴 등의 인사들에게서는 오해와 오류가 여전함을 발견하게 된다. 적절한 비판을 정초하는 데 요구되는 보편성을 거부하는 이론(바디우)”이라던가, 폭력에 대항하는 가치를 보여주기보다 전체주의 공간을 열어준다(지젝)”고 주장하기도 하고, 차이의 철학들은 시장주도의 세계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데 적응케 하는 전술(이글턴,바디우)”이라는 뚱딴지같은 비난으로 점철되어있다. 이들은 데리다를 얼마나 읽었을까?

 

5장은 데리다를 수용하는 이 세계의 현실을 살펴보고, 데리다는 이제 살아있지 않지만, 그가 남겨 놓은 여전히 많은 과제들이 있음을 상기하는 장으로, 그리고 심화된 학습의 장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서문>과 함께, <에필로그>도 중요한 장이라 할 수 있는데, 데리다는 유행이 아니다!”는 저자의 선언처럼 제도에 대한 비판, 텍스트들에 작동하는 힘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면밀한 재생산을 위해 끊임없이 읽어야 하는 인류의 부채이기도 하다. 타자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기라도 했나? 여전히 타자는 존재한다. 아무쪼록 학자의 야심을 억제하고, 데리다의 읽기로 이끄는 이 아름다운 저술물을 생산해 낸 제임스 K.A. 스미스교수와 윤동민 번역자에 감사를 전한다.

 

언어적 전희가 언어를 망각하거나 폄하하는 경향, 철학은 단지 담론이라는 매체에서만 발생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언어의 2차적 성격, 진리에 대한 순수한 접근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 폄하하는 서구 사상의 오랜 전통을 거스르는 방식으로서 해체를 주장했던 20세기 타자의 자리를 주목했던 위대한 사상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되었다. 내게 잠복했던 데리다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읽기를 회피하며 정당화했던 편협한 정신을 털어내기에 충분한 읽기가 되었다. 우선 가지고 있는 비밀의 취향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라마톨로지를 다시 펼쳐들어야 할 것 같다. 조금 인내가 필요하겠지만, 그 수고가 결코 낭비는 아닐 것이다. 아마 이 저술을 읽는 독자는 데리다 읽기에 나처럼 나설 것이 틀림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만큼 이 책은 일반 독자에게 접근 가능한 수월함이 있다. <라이브 이론> 시리즈의 단연 최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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