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 폴리틱스 -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
프란스 드 발 지음, 장대익.황상익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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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등동물인 영장류 침팬지에 대한 행동연구과정에서 발견된 이들의 사회적 행동 패턴을 통해 정치적 행위의 기원을 탐구한 저작이다. 20여 마리의 암수 침팬지로 구성된 하나의 집단을 가능한 자연적 조건에서의 자발적 행동을 6년여에 걸친 관찰 속에서 그들의 행동을 해석한 동물 행동 연구이다. 사실 동물행동학(ethology)의 결과를 인간의 행위 해석에 전용하는 것에 대한 반대론이 만만찮다. 일례로 침팬지가 갈등 후에 적수 사이에 이뤄지는 접촉 행위를 화해(reconcilation)’와 같은 인간 용어로 사용하는 것에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거나, 인간에게 이(齒牙)가 동물에겐 이빨이어야 하고, 키스는 입과 입의 접촉일 뿐이며, 얼굴은 주둥이 부위라는 중립적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극렬하게 싸운 뒤 두 적수가 첫 접촉을 통해 털고르기를 해주며 입을 맞추고 이후 평화로운 관계를 갖게 된다면, 이는 곧 화해가 아닌가? 이것을 인간 중심주의의 위엄을 지킨답시고 싸움을 한 뒤의 첫 접촉이라 고 길게 표현하는 것만이 정당한 것인가? 저자 프란스 드 발 머리를 모래에 처박아서 되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얄팍한 수의 기만이 아니냐고. 물론 침팬지의 어떤 행위를 인간의 언어로 해석할 때 옳거나 그른 해석이 있을 수 있으며, 이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차별화된 선입견을 사전에 개입시킬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권력투쟁의 동물적 기원이라는 부제를 하고 있듯, 성장한 네 마리의 수놈과 열아홉 마리의 성숙한 암놈, 그 새끼들 각각의 개성과 상호작용의 여러 패턴, 몸짓이나 음성과 같은 의사소통 신호들을 식별하여 일관된 해석을 함으로써 이들 사회의 안정과 안녕의 균형유지와 경쟁행위를 통한 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일련의 행위들을 추적 묘사하여, 인류 정치 기원의 형태를 발견해 내고 있다. 7개 장()과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는데, 개성, 권력교체, 불안한 안정, 성적 특권, 사회생활의 원리, 정치의 기원이 그것인데, 수컷과 암컷 집단의 각 개체들을 마치 졸업앨범 사진처럼 증명사진 크기로 이름과 함께 그 모습이 실려있는 개성(個性)’에 대한 장은 그야말로 이 관찰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토대일 것 같다. 저자는 자신 있는’, ‘자긍심 높은‘, ’계산이 빠른과 같은 주관적 인상을 과감하게 침팬지의 개성에 반영하여 굳이 인간 행위를 비교할 필요조차 없게 만들어버린다.

 

본문 80~81쪽에서


주요 개체 하나 마다 그네들의 개성을 설명하는데, ‘여장부 마마로 불리는 침팬지부터 설명이 시작된다. 가장 나이 많은 암놈으로 눈빛에 큰 힘이 담겨있으며, 특유의 예리하면서도 모든 걸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눈빛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공동체 안에 최대의 존경을 받고 있는 개체이다. 그리고 성장한 수컷 클럽을 이루는 이에룬, 라윗, 니키, 단디, 네 마리의 수놈 각 개체에 대한 독특한 개성들이 이어지는데, 천성적으로 계산이 빠르고, 신경질적이며 이해관계에 민감한” ‘이에룬부터, 놀기 좋아하고 장난기 많으며 생기발랄한 라윗이 이어지고, 정말 독특한 암놈인 파위스트의 암놈에 적대적인 성격과 그 어떤 성적 접촉도 거부하는 친()수컷 행동을 보이는 개체의 설명으로 이어진다.

 

아마 저자와 연구진은 이 파위스트라는 암놈을 가장 싫어했던 모양인데, 위선적이고 비열함에서 단연 독보적 행태를 보였던 모양이다. 수놈이 암놈들을 공격하면 다른 암놈들은 서로 힘을 합치는 데 반해 파위스트는 실제로 수놈들에 협력하여 암놈을 공격하는, 정말 기이한 성격의 암놈이다. 스물세 마리가 이렇게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개성들의 존재로서 그들의 이후 합종연횡의 배경이 된다. 마치 인간 사회의 여느 소집단의 인간 구성원들의 개인적 특성를 묘사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로 그 유사성의 매혹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 이 책은 단연 훔쳐보기의 가장 멋들어진 재미로 가득해서 일견 사회적, 정치적 상호작용의 발견과 같은 짐짓 무거운 주제를 쉽게 이해가능하게 해준다.

 

권력교체의 장은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될 것 같은데, 사실 침팬지라는 영장류에 대한 동물로서의 편견이 여지없이 전복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놀라운 사회적 조작 사례가 목격되고, 고도로 지능적인 '목적성을 가지고 생각하는(think purposefully)'능력에 대한 행동 특징들을 입증한다. 특히 높은 수준의 협력을 달성하기 위한 공동연대의 형성과, 경쟁적 경향성을 극복하고 의식화함으로써 전략적 연대를 취하는가 하면, 아주 교묘한 삼각관계를 통해 소위 최소승리의 연합이라는 인간들이 즐겨 쓰는 합리적 행동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을 최고 권력자의 힘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인지시키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예측과 계획능력을 이들이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장을 읽고 있다 보면 불현 듯 진화한 유인원 리더 '프록시무스'가 활약하는 혹성탈출이라는 영화 장면들을 떠 올리게 된다. 침팬지라는 동물의 우두머리는 육체적 힘이 가장 센 놈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깨지는데, 지도자로서의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는 연합에 바탕을 둔 서열구조의 전제 하에 개체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이 당연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두 수놈의 리더자리를 놓은 싸움의 승패 결과가 그들의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싸움의 결과를 결정한다는 집단 구성원 전체에 대한 세심한 사회적 관찰을 통한 선행적 이해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리더인 이에룬을 전복시키고 권좌에 오르기 위한 라윗의 수개월에 걸친 사회적 책략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하는 털고르기, 입의 접촉, 옆에 앉아있기, 함께 걷기, 지원하기 등 그 자체로는 하잘 것 없어 보이는 행동 모두가 복잡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행위임을 알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어떤 행동이 어떤 결과를 야기할 것인지를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도 성취 가능한 목표에 효과적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꾀로 상대방을 이기고, 속임수로 전략을 감지하고, 상호이익이 되는 타협을 이루며 자신의 삶에 이득이 되는 사회적 연대를 증진시키기 위한 필요로서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지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권좌를 차지했다고 리더의 권한이 연속되는 것이 아니다. 1인자였던 이에룬이 2인자였던 라윗에게 자리를 빼앗긴 것은 그가 라윗과 니키, 두 수놈의 구성원에 대한 공격을 효과적으로 지켜내지 못한 이유 때문이다. 해서 새롭게 리더가 된 라윗은 패자의 지원자가 됨으로써 질게 뻔한 놈의 편을 들어 평화와 안녕의 투사로 자신을 확립한다. 여기서 1인자의 보안관 역할은 호의(好意)라기보다는 의무(義務)에 가까운 행위이며, 이를 실천하지 못하면 그 권좌는 위태로워졌음을 보여준다.

 

우열관계는 계속 증명되고 확인받아야만 했는데, 확립된 서열관계는 자동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윗, 니키, 이에룬의 삼각구도는 늘 불안정적으로 흔들렸으며, 절대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한 상호위협의 과시가 빈번하게 자행됨으로써 그 위기상태를 노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니키는 이에룬의 라윗과의 연대를 방해하고 두 수놈을 분리함으로써 위협을 증대시켜 이에룬을 라윗으로부터 멀어지게 함으로써 신체적 힘의 우위로 라윗을 굴복시키고 권좌에 오른다. 그러나 구성원은 니키의 폭력적 성향 때문에 그를 존경하지 않는다.

 


아마 내겐 정말 놀라울 만큼 교활한 행위를 접하게 되었는데, 몰락하여 3인자 자리로 물러나게 된 이에룬의 전략이다. 2인자가 된 라윗과 접촉 할 수 있는 문을 열어둔 채, 1인자인 니키와 은연히 접촉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니키의 지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구성원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니키의 공백을 자신이 채워주며, 실질적 권력을 공유하는 것이다. 니키는 라윗의 도전에 대해 이에룬과 공동전선을 결성해 방어하며, 구성원에 대한 반발까지 통제하며 리더자리를 수호하는 것이고, 이에룬은 그가 결여한 부분을 자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각인시킴으로써 1인자에 준하는 권력을 누리는 것이다. 이 정교하고 치밀한 정치적 전략에서 오늘 인간들의 정치적 술책의 역사적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의 공유는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설파한 논리에서도 드러난다. 귀족의 원조를 받아 군주권을 얻는 것은 평민들의 지원을 받아 군주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왜냐하면 귀족들은 군주와 동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군주는 원하는 대로 그들을 지배하거나 통제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귀족인 이에룬이나 라윗의 원조로 권좌를 차지하면 구성원들의 지원을 받아 리더가 된 것과 달리 그들을 온전히 통제, 지배할 수 없다는 이 말이 니키 권좌의 고질적이고 태생적 불완전성이다. 민주주의 어렴풋한 그림자를 보게 된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책은 이렇듯 침팬지들의 행동특성과 권력투쟁의 과정, 그들의 사회생활을 관찰함으로써 침팬지 사회의 정치적 활동 요소를 추출해내고 있는데, ‘서열은 승인되어만 하며 불명확해지면 권력투쟁이 벌어지는양상으로부터 공식화(公式化)’의 중요성과 권력상승을 위한 기회주의적 유형의 개입인 연합’, 사회적 연대성과 상호간 연합과 같은 지지기반의 확립인 균형’, 그리고 안정과 사회적 호의의 교환, 합리적 전략, 특권, 술수 등을 열거하고 있다. 결국 유인원인 침팬지들의 사회생활을 통해 우리 인간의 정치적 활동은 진화적 유산의 일부처럼 여겨지며, 정치의 기원은 이처럼 석기 시대 원시 인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정치를 이처럼 영향력있는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사회적 술수라고 정의한다면 정치의 기원은 이처럼 인류 역사보다 오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정치적 교훈같은 것을 건져낼 수 있는데, 그 첫째는 모든 것을 독점하려는 리더는 곧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다, 착취적 연합과 기회주의라는 속물 정치만을 지향하는 자의 권력은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긍정적이었건 부정적이었건 호혜성은 중대한 정치적 필수 행위라는 것인데, 티보(J. Thibaut)와 켈리(H. Kelly가 저술한 집단의 사회 심리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개인은 보상과 대가의 측면에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때에만 자발적으로 관계를 맺고 유지한다.” 고 했듯, 호혜성의 원리는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기억돼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작용은 일종의 손익거래임을 정치가 망각하는 순간 권력은 몰락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작금의 검찰 독재 권력이 정권을 차지하기 무섭게 이 상호 호혜성을 부정하고 소수 기득권자들을 위한 부의 집중 배치에 전념함으로써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것과 같을 것이다. 권력의 균형은 매일매일 시험되며 그것이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도전이 일어나고 새로운 균형이 찾아온다고 한다. (4.10) 이 균형을 위한 시도가 과연 어떤 결과를 보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정치적 기원의 교훈으로는 아마 놀라운 결과로 드러날 것 같다.

 

네덜란드 아른험 소재 뷔르허스 동물원(Burgers Zoo) 침팬지 대규모 사육장에서 펼쳐지는 파란만장한 침팬지들의 정치적 행동 양태를 보고 있노라면 욕망이 난무하는 한 편의 인간 정치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에 빠져들 정도다. 대중적 과학 연구 논문이지만 반전을 거듭하는 여느 미스터리 소설 뺨치는 권력투쟁의 스토리가 어쩌면 이 책 입소문의 본질일 것만 같다. 침팬지들의 행동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인간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통찰을 전해준다. 누가 정치를 인간만의 영역이라 말했는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인간이란 말은 더 이상 진실이 아닌 말이 되었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를 다시 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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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성비판』 강의 원전디딤돌 2
이수영 지음 / 북튜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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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형식적 윤리명령’, 그 신성한 도덕법칙의 의무를 사유하며>

 


"일단 칸트를 견뎌낼 수 있다면 그 어떤 철학의 가시밭길도 걸을 수 있으리라. 

칸트는 통과의례다."  -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진은영, 그린비


칸트가 땡기는 시절이다. 특히 도덕법칙이 경험주의적 광신에 찌들거나,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도덕적으로 위장된 행위가 이즈음처럼 난무할 때면 더욱 내 심난한 도덕 감정을 정화하기위해 칸트를, 특히 실천이성비판을 펼쳐든다. 엄격하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온 도덕철학의 정수에 집중하면서 현상적 대상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욕망이나 애착 등 내게 유리한 정념적 질료를 윤리의 기초로 삼으려는 경험주의적 도덕의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반성한다. (*실천이성비판은 도덕법칙에 대한 세심한 논의를 한 저술이다.)

 

실천이성비판을 대표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은 정언명령이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 하라.” (A-54),

이를 순수실천이성의 원칙이라고도 부른다. 이 정언명령에는 어떠한 행위의 내용도 없으며, 그저 형식만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고, 그 형식의 내용은 보편성임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보편성의 형식을 확보하지 않으면 어떤 행위도 윤리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천명이다. 내용이 비워져 있고 오직 절차와 형식만 존재하는 이것이 칸트의 윤리적 명령인 것이다.

 

보편적 수립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작동하여야 한다는 것은 개인의 호불호나 정념의 지배를 받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무쌍한 것을 원인으로 해서 행위 하면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장 흔한 예로 행복이 과연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는가를 파악해보면, 우선 행복이란 이성적 인간의 현존에 부단히 수반하는 쾌적한 삶에 대한 의식이라 정의할 수 있다. 즉 행복이 도덕법칙을 행하는 의지의 근거로서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가이다. 행복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표상이 인간 개체에게 얼마만큼의 만족을 줄 수 있는가라는 양적 문제임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개체마다 동일한 표상에 대해서도 그 만족의 정도는 모두 다를 것이다. 결국 행복은 보편성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주관적 규정 근거들에 따라 무수한 양태가 존재하는 것은 결코 도덕법칙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보편적 법칙의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현상계에서 감각 또는 지각할 수 있는 표상을 질료라 부르는데, 이러한 것들은 의지의 원인성에 의해 무엇이 벌어지는가에 따라 천태만상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정언명령에서 보았듯 순수 이성의 실천법칙은 이러한 원인성에 개의치 않고 오로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위(shall), 혹은 명령(imperative)의 형태를 지니고, 욕구나 쾌나 불쾌와 같은 정념적 조건들로부터 해방된 순전한 형식이다. 이를 순전한 법칙 수립적 형식이라하며, 이 형식만이 의지의 충분한 근거임을 전제로 하는 실천 법칙만이 도덕법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자유(의지)’에 대한 깨달음이 생겨난다. 의지가 오직 형식에 의해서만 작동한다면 자연현상인 자연인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말이며, 이는 다시 말해 자연의 인과성으로부터 자유의 상태에 처하게 된다는 말이다. 의지는 형식의 지배를 받을 때만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자유로운 의지만이 도덕 법칙으로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자유의지가 중요한 이유는 만일 어떠한 도덕법칙의 실천에 이 자유가 없다면 사실 도덕법칙이란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상해한 자가 자유의지 없이 그저 자연의 필연성에 의해 저지른 것이라면 어떻게 징벌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의 자유란 소위 심리적이거나 경험적 인식 가능한 그런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인과에 종속된 자연 현상계 너머의 예지계에서만 가능한 선험적 자유를 뜻한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이 자유를 생각할 수는 있으나 인식할 수는 없다. 이 자유는 도덕법칙이 아니었다면 결코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을 작동인(作動因)이다.

 

하나의 실험사고를 해보면, Y라는 최고 권력자가 권력의 독점에 방해가 되는 정적을 제거하고 싶어 B라는 누군가에게 그 정적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을 수 있는 증언만 해준다면 B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위협하였다고 하자. B는 고뇌하기 시작할 것인데,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무언가가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인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경향성과 동시에 거짓말을 해서까지 구차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도덕법칙이 내면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고뇌가 도덕법칙에 의한 자유의 표현이다. 우리는 자유를 먼저 경험할 수 없으며, 도덕법칙을 통해서만 자유로운 상황에 놓인다. 자유란 언제나 우리가 도덕법칙에 놓여 고뇌에 처했을 때 비로소 작동하는 것이다. 극단적인 해석을 하자면, 어떤 인간이 이와 같은 도덕법칙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번뇌하지 않는다면 그 인간에게는 자유가 부재한, 즉 자연적 인과성에 종속된 기계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더 끌고나가기 전에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준칙과 법칙을 구별하여야 하는데,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타당한 것으로 인식되는 객관성을 실천 법칙(laws)’이라 하며, 특정한 주체의 의지만을 규정하는 원칙을 준칙(maxims)’이라 한다. 라는 개인의 정념적이거나 경향성에 의해 촉발된 의지는 준칙이어서, 이것은 수시로 법칙들과 충돌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행복은 부를 쌓는 것을 준칙으로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이 준칙은 무수한 타자들과 극한의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극단적으로는 전쟁을 낳기까지 한다.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는 실천 법칙과 충돌을 일으킨다. 즉 준칙이란 개체들의 특수성에 의거한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불화와 폭력을 낳는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 반례, 최악의 상충과 의도의 완전한 절멸로 이어진다. 칸트가 왜 형식만이 순전한 도덕 법칙을 위한 의지의 근거라 주장했는지의 일례 일 것이다.

 

그런데 칸트는 인간 개체는 개인적 준칙을 수립할 때 이미 내면에 그에 대한 보편화 작업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행위를 해도 좋을까?’하는 반성이 개입되지 않은 그 어떤 준칙의 채택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이미 선험적 보편성과 대조하는 작업을 ()의식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경험을 우리들은 모두 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 의지 앞에 일종의 타자처럼 나타난 우리를 괴롭히는 무자비한 타자처럼 나타나 그 행위를 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정언명령이다. 물론 우리는 최고의 예지자(절대자, )처럼 일체의 정념성 없는 존재일 수 없기에 온갖 필요 욕구들과 감성적 동인(動因)에 의해 자기 합리화로 준칙을 정당화하곤 한다. 우리 인간은 신성한 의지만으로 구성된 존재가 아니기에 도덕법칙은 정언적으로 명령으로 강제하는 것일 게다.

 


이제 칸트를 다시 꺼집어내 읽고자 한 의도에 도달한 것 같다. 자유로운 의지란 도덕법칙만을 의지의 의무로 간주하는 사태를 가리킨다. 우리는 도덕법칙 앞에서 강요와 의무 아래 있게 된다. 앞선 사고 실험의 예처럼 정념적으로, 질료로부터 촉발된 의지는 실천 이성의 저항 앞에 부딪친다. 실천 이성, 도덕법칙은 모든 정념을 일소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때 인간 개체들은 어떤 의무감과 숙명의 마주함을 회피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실천이성의 법칙인 보편성을 갖는 것처럼 속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특히 자기 행복의 원리가 윤리성의 원칙과 상충할 때 인간은 기만과 위선을 자행한다. 칸트의 윤리학은 지극히 엄격한 도덕철학이라 말했다. 도덕적인 것은 결과가 아니라 동기(動機)의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때문에 법칙에 맞아도 도덕적이지 않은 경우 비윤리적이라 한다.

 

칸트의 결과적 도덕이 아닌 동기의 도덕은 오늘날 매우 중대한 시사점을 던진다. 바로 도덕의 오용과 남용이다. 특히 정치사회의 현장에서 이용되는 도덕법칙은 그 형식에 있어 보편성과 정언적 형태를 띠고 도덕법칙의 합법성으로 이면의 동기를 감춘다. 그래서 비윤리적이라는 조롱과 혐오를 면치 못한다. 이들 대부분은 일종의 인정요구인 자신의 인상을 좋도록 꾸며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려는 동기를 지닌 비윤리성 뒤에 숨어 도덕법칙을 말한다. 이를테면 상대를 향해 도덕적 수치를 모르는 몰염치라고 비아냥대며, ‘검찰에 기소된 자가 어떻게 선거에 출마할 수 있나?’라고 공격한다. 거친 욕설과 조롱의 언어에 도덕성을 입혀 마치 자신은 높은 도덕적 자질을 가지고 있는 듯 행세하는 것이다. 칸트는 동기에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것은 결코 도덕법칙이 아니라며, 특정한 경향성, 즉 욕망이나 기호에 대한 애착을 설명한다.

 

실천이성이 다루는 대상과 관련된 문제란 행위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차원의 질문이며, 실천 이성의 대상들에 대한 판별은 행위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가치를 따지는 작업이라 했다. 우선 오늘날 그랜드스탠딩(grandstanding)이라 명명된 도덕의 정치적 오남용 이면에 있는 동기의 경향성들을 살펴보면, 자기인정이 되었건 그 무엇이 되었건 이들 경향성들의 만족이라는 이기심인 자기애와 자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순수실천이성은 도덕법칙과 일치하는 조건에 국한된 자기애 이외에는 단절시켜버린다. 그리고 자만은 아예 타도해 버린다. 도덕법칙과 합치하기 이전에 생긴 모든 요구들은 법칙 수립의 의지 근거의 권한이 없는 까닭이다. 도덕법칙을 위해하는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경향성의 동기다. 칸트는 이같은 모든 참칭(僭稱)은 법칙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매우 중요한 말을 한다. 윤리법칙과 합치하는 마음씨에 대한 확신이 모든 인격가치의 첫째 조건이라고. 도덕법칙이란 자만을 약화시키고 타도함으로써 우리를 겸허하도록 하는 존경(respect)’의 대상이라는 적극적 감정의 근거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존경은 누군가를 존경한다고 할 때의 그런 경험적 존경이 아니다. 이는 선험적으로 인식되고 그 필연성을 통찰할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라 말한다. 이것은 오로지 이성의 그것도 실천적 순수이성의 지시 명령 편에만 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라고. 도덕법칙은 주관적인 존경(외경)의 근거이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자신의 감성적 성향을 도덕법칙과 비교하게 하면서 겸허하게 만드는 그런 표상인 것이다. 동기가 불순한 실천 법칙은 바로 이러한 도덕법칙에 대한 외경이 부재하기에 겸허를 찾아 볼 수 없다. 도덕 감정이란 법칙이 저항을 제거함으로써 그 법칙이라는 원인성을 적극적으로 촉진하는 그것이다. 결국 법칙에 대한 존경의 감정은 윤리를 위한 동기가 아니라 윤리 그 자체임을 의미한다. 아마 정치 현장의 난무하는 추악한 도덕적 위선의 언어는 이러한 동기의 비윤리성과 아울러 도덕법칙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는 뜻도 될 것이다.

 

칸트가 도덕법칙 동기의 윤리성을 강조한 이유는 이러한 도덕적 기만인 남용보다는 도덕적 광신을 예방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욱 컸던 것 같다. 도덕법칙의 정신은 법칙에 복종하는 마음씨에 있으며, 동기를 법칙에 두지 않고, 자신의 정념에 두면서 도덕적 행위를 모방할 때 광신이 자란다.”고 지적했다. 작금의 검찰권력은 자신들의 도덕적 무오류를 주장하면서 그 어떤 지시명령도 자신들에게는 불필요하다며 선량함을 선전한다. 칸트는 바로 이 순간 그들은 도덕법칙과 책무를 망각하는 것이라며, “의무의 법칙은 지시 명령하는 것이지 우리의 성향에 맞을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우리의 임의에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며, 이것이야말로 순수이성이 인간성에 부여한 한계를 벗어난 도덕적 광신이라 질책한다. 도덕적 동기를 법칙이외의 다른 것에 두는 한 그것은 결단코 도덕법칙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지금의 정치권력의 혐오스러움이 있는 것이다.

 

"적의 독단과 궤변보다는 자신의 가슴 안에 숨어있는 

독단과 궤변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칸트


칸트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을 우리 인간은 겉으로 보류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느끼는 것 자체를 막을 수 없는 것이라 말했다. 따라서 이 존경의 독특한 감정은 부정하려해도 할 수 없는 고매한 공물과 같은 것이라 비유한다. 사실 도덕법칙에 대한 이 존경은 욕망과 정념의 동물인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어서 하시라도 덜어버리게 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없나하고 찾아다닌다고 한다. 즉 윤리적 본보기로 인해 우리가 감수한 겸허에 대해 보상을 해줄 흠을 늘 찾아 나선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도덕적으로 뛰어난 인물로부터 작은 오점이 발견되었을 때 무수히 달려들어 한 인간과 그 가족을 도륙하다시피 공격해 댄 사실이 있다.(실정법을 떠나 도덕의 문제로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엄격하게 꾸짖는 가혹한 도덕법칙의 존경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욕망을 볼 수 있다. 엄혹한 도덕법칙의 짐으로부터의 시련을 타자에게 투사해버림으로써 마치 자신의 도덕성이 나아질 수 있다는 듯, 그렇게 어리석은 것이 우리들 인간 군상이다. 한 술 더 떠 도덕법칙을 친근한 경향성 정도로 깎아내리거나 한낱 지시규정 정도로 취급해버리는 짓거리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은 가장 나쁜 비윤리적 행위를 넘어 도덕법칙을 허영 프로젝트로 격하시켜 사회에 해악과 손실을 야기하는 위험사회의 신호이다. 비근한 예가 공정과 상식이라는 도덕적 언어를 표면에 내세우고는 가장 더러운 행위를 그치지 않음으로써 이 도덕적 언어가 더 이상 도덕이기를 멈추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네가 하고자 하는 행위가 네 자신이 속한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면 과연

그 행위를 네 의지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네 자신에게 물어보라.” (A122)

 

이 문장은 예지계에 속한 도덕법칙을 감각계인 인간의 지성과 어떻게 연결 실천할 수 있는가라는 조금은 어려운 문제의 해법으로 칸트가 도입한 도덕법칙의 범형(type)'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기를 치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해보자. 사기 치는 것이 자연의 인과성에 따른 불가피한 것이라 해도 이 행위가 정말 해도 되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과연 그것이 상식적이라 하겠는가라는 물음이다. 당연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실천 영역에서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기에 우리는 이미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적합한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장착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는 충분히 신성하지는 못해도 인격에 있어서는 신성한 존재들이다. 우리 인간은 자유 의지의 힘에 의해 신성한 도덕법칙의 주체가 된다. 인격성이란 특정한 존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정도의 이성을 소유한 인간 모두에 있다. 그래서 자신을 심사하는 내적 시선 앞에 부끄럽지 않았다는 의식만으로도 우리들은 스스로를 다독이곤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는 것은 매 한가지라 한다. 그렇지 않다. 그저 사는 것과는 다른 도덕법칙에 대한 의무의 존경에 입각한 삶이 있는 법이다.

 

그 어느 때 보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요구되는 시절이며, 이러한 겸허와 존경이 모든 인간들에 내면화되는 성숙한 도덕성의 사회를 향해 우리는 한 걸음 고양되어야 할 지점에 서 있다. 그 전환의 국면이다. 여기서 주저하면 아마 영원한 도덕적 퇴락의 시대가 가져오는 억압과 폭력의 오랜 터널을 관통해야 할 것이다. 칸트의 이성비판은 우리네 삶과 동떨어진 낯선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이성의 능력과 활동조건과 그 한계를 규정하고 이성의 인식 범위와 이성의 지배 속 우리 의지의 자율성을 탐사하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작업이다. 가까이 두고 지성과 인식능력, 의지에 대한 반성의 요구가 있을 때면 그의 사유를 따라가며 함께 생각해보는 것은 좋은 위로와 성장의 시간이 되어 주리라 믿는다.()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내 마음 속의 도덕법칙"

- 칸트, 실천이성 비판 마지막 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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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한 멜모스·아듀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파롤앤(PAROLE&)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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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사건 재현의 한계를 기억과 서사측면에서 성찰한 오카 마리의 저술 복간과 때를 같이해 리얼리티 문학에 비판적 시선을 던졌던 발자크의 대표적 두 작품이 번역 출간되었다. <회개한 멜모스><아듀> 두 작품은 발자크의 인간극에 속하는 세 개의 하위 연구(풍속, 철학, 분석연구)’ <철학연구>에 속하는 작품으로, 환상과 기억, 현실의 관계성과 그 재현 ()가능성에 대한 고찰을 거의 직접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소설이다. 오카 마리는 기억서사의 한계를 논의하는 한 축으로 발자크의 <아듀>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쟁이라는 인간의 가장 잔혹한 폭력행위와 그 폭력적 사건 내에 존재했던 인간 고통의 기억 문제를 다룬다. 이것은 재현성의 문제로 부상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물론 특히 역사 서술에 있어 극한적 대립을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아듀를 읽게 된 동기다.

 

1. 소설, <아듀(Adieu)>에 대해

 

발자크의 소설 모두가 인간극이라는 인간에 대한 전반적 통찰인 까닭에 그는 인간심리에 대해서는 여느 과학적 연구를 앞서고 있다고까지 여겨진다. 때문에 읽는 사람들의 집중을 쥐어 채는 데 있어 달관의 경지를 보인다. 작품 도입부에는 필리프 드 쉬시 대령과 친구인 달봉 후작이 실패한 사냥을 거두고 이동 수단 하나 없이 지친 몸으로 낯선 황폐한 건물을 발견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단지 건물과 주변 풍경의 묘사에서 마주하게 될 사건이 비유의 언어로 촘촘하게 박혀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어떤 인위적인 손질도 닿지 않은 (...) 야생의 은둔지에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세상의 풍문이 이 안식처에 다가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아름드리나무들발치에 서면 인간사 희로애락은 가뭇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100쪽 에서

 

야생’, ‘막아주는 역할’, ‘사라진 희로애락등의 표현은 등장인물들의 속성이나 전개될 사건의 내용을 이미 함축 예시한다. 어쨌든 이러한 폐허의 풍경들이 매혹적 시정(詩情)과 더불어 몽환적 관념을 독자가 공유하게 하며 텍스트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특히 달봉 후작은 일찌감치 저주의 시선으로 바뀌어 그 집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사는 궁전이로군.”이라며 망령들의 세계에 속한 미지의 여인이 스쳐지나갔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윽고 그 미지의 여인은 두 남자와 얼굴이 마주치자 달려가며 아듀!”라 말하고 사라져간다.

 

이때 필리프 대령은 풀밭위에 죽은 사람처럼 뻗어버리는데, 그는 패퇴한 전쟁의 퇴각 길에서 이별하고 이미 죽었다고 여긴 연인을 상기했음에 분명한 충격을 상징하는 장면일 것이다. 병석에 누운 필리프에게 달봉은 그녀가 실성한 방디에르 백작부인이라 전한다. 여기까지가 작품의 주요 도입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는 영화감독 스필버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시작 장면을 가득 채운 전쟁터의 리얼한 재현을 통해 전쟁의 폭력성을 노출하였듯이 발자크는 작품의 중간에 나폴레옹 군의 러시아에 패퇴한 전쟁 중 하나인 베레지나 강 도하 전투를 재현한다.

 

허기와 갈증과 피곤과 수마로 빈사 상태에 빠진 병사들 (...) 최악의 지경까지 몰린 그 무리에 끝도 없이 떨어지는 포탄들은 그저 불편함이 또 하나 추가되는 것일 뿐이었다.며 극한 상황에서 눈 덮인 광막한 허허벌판에 자신들의 목숨을 잔혹한 무관심에 맡긴 채 아무 곳이나 누워 잠들어 죽음으로 돌진하는 3만 명의 불쌍한 군인들의 전경이 흐른다.  제아무리 전쟁의 참혹성을 사실에 근접하도록 재현하더라도 손가락 사이로 무수한 사실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발자크는 리얼리티한 재현이란 것의 한 실례를 보여주려 한 것이라 여겨지는데, 대체 그것이 전쟁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적 반증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다의적 주제를 담고 있는데, 그 하나인 전쟁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후대의 사가들은 발자크의 베레지나 퇴각 장면의 묘사를 칭송한 것 같은데, 이는 작가의 의도와는 아마 상당히 동떨어진 이해였을 것이다.

 

방디에르 백작부인인 스테파니는 당시 필리프 드 쉬시 중령의 정부(情婦)였으며, 그녀는 남편인 방디에르 백작의 종군에 동행한 비방디에르(vivandiere)’였다. 이는 군인 남편을 따라 부대에서 세탁, 간호 업무를 지원하는 종군 아내를 이르는데, 프랑스는 20세기 초에 이 관행을 폐지하였다니 여성이 이러한 성적착취 대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불과 100년 전이었음을 시사한다. 손에 닿을 정도로 근접한 러시아군을 피해 도주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혹한의 강을 건너야 하고, 필리프는 연인을 위해 마차를 부수고 잔해들을 그러모아 뗏목을 만들지만 생존을 위해 몰려든 병사들로 인해 가까스로 방디에르 백작부부만 승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때 스테파니는 필리프에게 몸을 던지고 으스러지도록 껴안으며 입술을 맞추면서 아듀!”를 남기고 떠나지만, 남편은 도하(渡河)중 강물에 떨어져 죽고, 그녀는 러시아 군대에 2년 동안 끌려 다니면서 비루한 인간들의 노리개로 착취당한다. 전쟁이 끝나고 10여 년이 지난 스테파니가 실성한 사람이 되어 오직 본래의 뜻을 상실한 아듀만을 소리내는 이유는 이 같은 전쟁의 폭력성에 기인한다.

 

 

여자는 그 엄청난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이 충실하게 재현됨으로써 과거가 현실의 세계로 회귀하는 것을 차단, 철저하게 망각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었음을 신체가 자각했다는 의미이다. 오직 실성만이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것인데, ‘사건의 기억이란 그녀에겐 곧 폭력이며, 그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극한의 고통 그 자체임을 가리킨다. 소설은 이 폭력으로서의 사건을 통해 또 다른 주제를 역설하는데, 실성한 연인 스테파니를 전쟁 전 파리 무도회의 여왕이었던 바로 그 여인으로 돌리고자 하는 필리프의 욕망에 깃든 젠더(性化)의식에 대한 비판이다.

 


필리프는 그녀를 길들이기로 마음먹는데, 그것은 자기 정부의 본능에 대한 지배이며, 여성으로서의 복원에 대한 갈망이다. 필리프가 스테파니를 보호하고 있는 숙부인 의사에게 하는 말 속에 이러한 이기심이 드러난다. 그녀가 미쳤더라도 여자다움을 조금이나마 간직했다면 난 어떤 일이든 견뎠을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야만적이고, 심지어는 수치심도 모르는 그녀를 바라보자니,..”와 같이 지난날 자신의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서 아름다움을 간직하던 여성성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결국 스테파니를 죽이려 하지만 의사의 방해로 미수에 그치고 추방된다. 의사는 그를 신랄하게 꾸짖는데, 그러니까 당신에게는 오페라에나 나오는 그런 터무니없는 사랑이 필요했던 거군요.”라며 실성한 스테파니를 하나의 인간 존재로서가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필리프는 고아(高雅)한 여성으로서의 스테파니를 잃을 수 없는 것이고, 의사 몰래 베레지나 강을 도하 하기 위해 이별할 때의 장면을 위한 대규모 재현 작업에 돌입한다. 이로써 재현된 장면은 리얼리티에 대한 발자크의 냉혹한 비판 의지였던 것 같다. 필리프는 19세기판 스필버그로서 행위하는데, 실상에 가깝게 하기 위해 운하를 파고 폭약을 터뜨리고, 눈이 내려 벌판을 덮는 계절과 당시의 시간까지 정교하게 맞추는가하면, 복식과 병사들의 남루한 상태까지 그야말로 실감나게 형상화한 것이다. 스테파니를 잠에 취하게 한 후 마차에 태워 재현 장소로 달려가 그녀를 깨우고 준비된 뗏목을 두고 끔찍했던 진상의 재현 속에 빠뜨린다.

 

스테파니는 생생하게 되살아난 기억 속 현장에 자신을 옮겨놓고 필리프를 바라본다. 순간 아름다운 얼굴에 화색이 돌고, 눈부시게 빛나는 젊은 여자의 광채를 되찾는다. 재현된 그 리얼리티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육체를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여자는 드디어 말한다. ! 필리프 당신이군요.” 그리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축 늘어지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듀, 필리프. 당신을 사랑해, 아듀!”, 여자는 필리프 대령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다. 그녀는 말 할 수 없어 망각으로 지워버렸던 사건이 의식의 표면에 이르는 순간 죽은 것인데, 끝을 알 수 없는 사건의 흔적인 아듀라는 말만 남은 폭력적 사건으로서 기억은 완결되지 않는 채 하나의 정신적 외상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전이시키곤 소설은 종결된다.

 

이 소설은 몇 가지 고발을 하고 있는 것인데, 물론 전쟁의 폭력성은 주된 한 가지이고, 두 번째는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비판이다. 온전한 재현의 확실성을 주장하는 리얼리티란 것이 엄청난 틈새, 사건 자체가 지니고 있는 정작 중대한 사실성들이 다 빠져나가고, 그럴듯함만 남겨진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여성의 젠더화에 은폐된 남성적 욕망의 이기주의적 시선에 대한 비판이다. 결국 기억의 서사를 표상하는 문제에 있어 발자크는 재현의 과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것이고, 또한 그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을 내포하고 있음에 대한 사유의 촉구였을 것 같다. 리얼리티라는 사실성 재현의 욕망에는 필리프의 그것처럼 항시 불순한 동기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경종의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2. 소설 <회개한 멜모스>에 대해

 

이 작품은 몇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어떤 환유(換喩)로서의 사유를 제안하는 것으로 갈음하려 한다. 발자크는 그의 인간극에 대한 보조적 참고서로서 일련의 생리학 시리즈를 썼다. 이 작품의 도입부는 이들 중 <공무원 생리학>을 연상시키는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그 신랄함이 가히 현대적이어서 비판의 대상 주체만을 바꾸면 그 의미가 손상됨 없이 그대로 전해질 것만 같다. 소설의 첫 문장부터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데 다음과 같다.

 

식물계에서 화초재배업자가 (...) 번식시킬 수 없는 희귀한 잡종을 온실 교배를 통해

새로 만들어내듯이, 사회계에도 문명이 빚어내는 희한한 인간종이 하나 있다.”

-회개한 멜모스, 첫 문장에서

 

희귀한 잡종이자 희한한 인간종에 대한 구체적 인물에 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지는데, 악행의 손으로 자잘하게 가지치기되면서 (...) 참한 아내와 성가신 아이들에 둘러싸여 나무처럼 자란다.”, 한마디로 악행의 손길에서 나무처럼 자라는 불의하고 부도덕한 관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 인간종을 떠올려보라며, 덫에 갇힌 생쥐를 앞에 둔 고양이처럼 항상 돈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며, 선박 조타실에 못 박혀 있는 항해사보다도 덜 움직이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고, 왜소하다고 할 만한 몸집을 가진피조물이다. 왠지 저절로 온갖 도덕적 규범으로 지탄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는가? 이러한 신랄한 언어로 악덕에 대한 대담성과 법망을 빠져나갈 교묘한 능력까지 갖춘 패덕한 인간을 사회적 생리에 만연한 덕에 출현한 생태계로 그려나간다. 이것은 소설의 사건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예비고찰로서 써 진 것인데, 특히 폐쇄된 공적 권력 조직에 일찌감치 소집된 젊은이들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어떻게 부패하며 재능을 소진하는 가를 오늘 한국의 정치검찰과 비교하며 읽어나가면 꽤나 흥미로운 읽기가 될 것 같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문명의 진정한 상처를 미리 내다볼 만큼 뛰어난 통찰력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라고. 허튼 소리가 아니라 정말 믿어도 될 만큼 흥미로운 작품이다. 글자 조합에 절대 누설될 수 없는 비밀이 담겨있고. 단조(鍛造) 흔적이 역력한 캐비닛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금융공무원이다. 금융공무원의 자리에 어떤 부패하거나 불의한 인간 무리를 대입해도 의미는 통할 것이다.  ‘멜로스는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를 연상시키는 악마에 가깝지만 발자크는 환상론자가 아니기에 현실 감각으로 환상을 끌어내린다. 사실주의 비판자이기도 했지만 환상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자로서의 관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의식이나 줄거리는 독서의 흥미를 위해 남겨놓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아무튼 꽤나 흥미를 돋우는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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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서사 교유서가 어제의책
오카 마리 지음, 김병구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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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주된 물음은 이것이다. 어떤 부조리한 폭력적 사건의 당사자 혹은 그 사건의 내부에 존재함으로써 정신적 외상이라는 고통을 입은 사람의 기억, 그 증언이 말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는가와, 외부에 있는 사람이 그 사건을 표상하는데 어떤 결여도 없이 온전하게 모두를 재현할 수 있는가의 논의다. 그 답은 물론 불가능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말 되어지지 않는다면, 불의하거나 부조리한 사건외부에 있는 우리들은 타자에 이르는 길을, 그 회로를 영영 알 길이 없어지며, 지금 존재하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무관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의와 부조리한 폭력이 반복되는 세계의 도래에 무능과 무력함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억의 표상과 그 표상인 서사의 한계란 무엇인지를 사유하고, 말로 이야기 할 수 없는 사건의 잉여, 바로 이 말로 표상될 수 없는 잉여를 잉태하는 사건의 표상 불가능성을 넘어서 어떻게 이를 타자와 나누어 가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비평적 논설은 1982년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 때 베이루트 시내에 있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기습한 레바논기독교민병대의 남녀노소를 불문한 무차별 대학살 사건으로 시작된다. 유대인 군사조직의 이같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학살은 반복되어 온 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세계에 전달되지 못한 망각된 과거였다. (나누어 갖지 못한 기억이 그 불의가 반복 실행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여성 작가 리아나 바드르1991년에 발표된 소설 거울의 눈(The eye of the mirror)을 통해 전해지는데, 이는 베이루트 난민촌인 탈 자아타르포위와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7년에 걸친 인터뷰 끝에 얻어낸 증언들을 토대로 픽션으로 재구축한 작품이다. 소설의 서문에서 작가는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아 썼으며, 겪어 온 고난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망각하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사건의 기억을 공유해주기를 바라는 절박한 요청을 담아내려 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의 중요한 점은 사건을 재현하려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뜨거운 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은 찬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과 똑같이 느낄 수 없다.”는 것, 사건의 외부에 있는 사람은 내부에 있는 사람과 다르다는 것으로서, 사건의 참혹한 고통은 결코 말로, 글로 표현된 것을 넘쳐흐르는 잉여, 그것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경험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리얼(real)하게 보이는 서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사건그 자체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금지명령을 텍스트에 써 넣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주제의식을 대변한다. 책은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1장에서는 말 되어지기의 한계와 2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가지기 위한 서사를 사유한다.

 

1. 기억의 표상과 서사의 한계

 

일본군 위안부였던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인 듯한데, 탈출하다 붙잡혀 일본군 병사에 의해 태워지던 동료 위안부여성의 신체가 타는 냄새로 인해 고기 타는 냄새조차도, 그래서 고기조차 입에 대지 못한다는 증언을 통해 기억의 폭력성을 우선 문제시 한다. 잊어버리고 싶은 폭력적 사건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되살아와 폭력적 사건 전체가 그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과거로만 순치할 수 없는 생생한 폭력으로 그녀의 신체에 살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무언가 근원적일 경우, 먼저 느낄 수밖에 없는 사실은 인간의 언어가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며, 우리가 가진 언어의 윤곽 속에 완전히 담기지 않은 채 흘러넘치는 사건의 조각, 잘려나간 부분에 많은 것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고 사유한다.

 

어쩌면 이 책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부분인데, 1830년에 발표된 발자크의 소설 아듀(Adieu)를 통해 바로 이와 같은 신체에 세차게 흐르는 강물이 되어 회귀하는 기억 또는 그 기억이 매개하는 사건을 나누어 갖는 것의 불가능성을 탐사하는 여정이다. 혹독한 전쟁에서의 후퇴 길에 이별한 연인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만났지만 여인은 정신을 잃은 미치광이 여인이 되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듀라는 낱말만을 반복한다. 남자는 여자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지만 여인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최후의 방법으로 이별 당시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 장면에 놓이자 여자는 기억을 되찾지만 아듀를 외친 그 순간 여자는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기억의 문제를 우리들에게 당혹스럽게 던지는데, 여자에게 과거 이별의 사건이 가하는 폭력에서 육체가 오랫동안 살아남게 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몸에 일어난 모두를 잊어버려야만 했던 것이고, 그래서 철저하게 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충실하게 재현됨으로써 과거가 현실의 세계로 회귀했을 때 그 엄청난 폭력을 그녀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돌연 도래하는 사건의 기억은 곧 폭력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인 것이다. (작품의 세부 내용은 후일 별도 논의할 기회로 미룬다.) 소설에서 아듀라는 말은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말, 자신에게 들씌워져 놓아주지 않는 말,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건의 흔적인 것이다. 이 소설의 위대성은 전쟁이라는 폭력적 사건을 완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작품 자체를 하나의 사건으로서 독자의 정신적 외상으로 전이(轉移)시킨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대한 물음을 던지는데, 전쟁과 같은 폭력적 사건을 리얼하게 표상하려는 욕망의 불순함을 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 오카 마리는 이 리얼리즘을 예리하게 비판하는데, 표상과 실제를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이 단어에 숨겨진 확신의 오만이다. 소설 아듀의 주인공 남자는 충실하게, 즉 리얼하게 장면을 재현한다.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첫 장면에 전장의 리얼리티한 재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고 묻는다. 아듀의 남자는 여자에게 연인이었던 자신을 인지시켜(즉 여자가 상실한 여성성의 복구)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며, 스필버그는 재현 불가능한 실제와 사건의 잉여, 타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로써 전쟁이라는 폭력의 기억을 억압하기 위한 욕망으로서 과잉의 리얼한 재현을 사용한 것이라 비판한다. 즉 서사는 근원에서부터 사건의 폭력성을 부인하고 있기에 과잉으로 리얼리티하게 폭력을 재현하고 보충한 부인(否認)된 사건의 폭력성 자체라는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쉰들러 리스트>는 사건의 기억으로서 고통을 외면하고, 인간의 숭고한 사랑의 찬가로 소비함으로써 사건의 폭력성을 그로테스크한 희화(戱畵)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스필버그와는 그 접근방법에서는 다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의 <원더풀 라이프(1998)> 또한 사자(死者)들의 기억이라는 영상을 통해 전쟁이나 위안부의 폭력적 사건에 도사린 무의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죽음이라는 사건자체에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의미를 채워 넣음으로써 사건 자체를 부인하는 기만, 즉 그것에 내셔널한(national;국수주의적) 욕망이 마치 없는 것인 양 부정하는 토대로 삼고 있는 기억의 횡령”, “서사의 횡령이라 비난하고 있다. 이처럼 사건의 충실한 재현들이 모두 기만이고 위선에 머물 수밖에 없다면, 다시 말해 이러한 사건의 폭력성들이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표현되고 표상할 수 없는 사건기억이라면 대체 이것을 어떻게 타자와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인가?

 


2. 표상 불가능을 넘어 - 어떻게 기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가?

 

사실 이러한 사건으로서의 역사를 구성, 기술하는 존재는 사건과 기억을 경험하지 않은 살아남은 우리들, 곧 타자들이다. 때문에 비록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현실에 재현될 수 없는, 근원적으로 표상의 한계를 가진 사건을 이 외부에 있는 타자에게로 이르는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기억의 문제를 둘러싼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이 수시로 사건을 부정하고 터무니없는 의미를 쑤셔 넣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현실을 볼 때 이는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논의이다.

 

이러한 역사 왜곡의 양상을 표현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사건의 기억이 타자와 공유되지 않고 사건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가 외부 세계에 방치되어 온 그 자체와, 사건이 타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자리매김 되고 서술되어 왔다는 것 자체로서 타자에 의한 일방적 표상이라는 폭력의 뜻으로서 타자에 의한 표상의 폭력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을 비롯한 이에 뇌동하는 오늘 한국사회의 역사 부정주의자들인 뉴라이트라 자처하는 친일집단들이 이러한 표상의 폭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무리는 위안부 여성이었던 최후의 생존자였던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모두 부정하고, 식민지 여성에 대한 그 어떤 폭력도 존재치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증언이란 본성상 수동적이고 주체의 언설 무능성에서 나온다는 점이기에,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의혹은 의미를 상실한다.

 

저자는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사람이 사건을 영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사람을 영유한다.”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폭력적 사건으로서의 기억은 당사자의 의사에 의해 떠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불현 듯 심연에서 돌연 도래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사건과 이의 기억은 그것이 억압된 존재를 통해 결코 말로 표현되지 못하고 항상 표현되지 않은 잉여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폭력적 사건의 희생자들과 그 관련자들을 인물로 하는 서사를 아주 많이 접할 수 있다. 이들 작품들은 우리에게 이해와 감동을 주기는 하지만 결코 묘사되는 사건에 빠뜨려 불안이나 위협하는 일 없이 알 수 없는 끈으로 이어져있다는 공감과 실감을 준다. 그럼으로써 무자비하게 낯선 폭력의 사건을 보편성의 시각으로 안전하게 감상하게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적되어 온 사건의 잉여, 그 사건의 본질이라는 불가능한 진실을 영원히 막아버리는 봉인 행위가 되어, 한낱 지나간 과거의 일화로 휘발시켜 버리고 만다.

 

바로 이같이 인간이 영유할 수 없는 사건의 기억을 말하고자 의도적으로 써진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칠레의 지진사건기억이 소유하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타자에 의한 표상으로서의 폭력의 서사로서 관동(關東)대지진으로 무참하게 학살되는 조선인 사건과 함께 인용되는데, ‘사건기억을 마치 한 때의 추억으로 서사와 한께 과거로 매장시켜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행위에 내재된 폭력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칠레의 지진1647년 칠레 산티아고에 발생한 대지진을 배경으로 하는 픽션이다. 수녀원에서 수녀가 임신함으로써 남자를 수녀원 정원에서 처형하려는 날 대지진이 발생한다. 이 엄청난 혼란으로 남자와 수녀인 여자는 수녀원을 벗어나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출산과 행복한 날을 보낸다. 그리고 지진이 끝나고 일상을 되찾아가던 어느 날 성당 미사에 참석하게 되지만, 사제는 대지진이 부도덕한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며 수녀원 정원에서 일어난 신에 대한 모독행위 탓이라 비난한다. 이 규탄행위는 성난 폭력으로 발전하여 두 남녀는 맞아 죽고, 갓난아기는 교회기둥에 휘둘러 머리를 박살내 조각이 나도록 내려쳐진다. 뇌수가 흐르고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사람들은 현장을 물러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하는데, 바로 두 남녀와 갓난아기의 두개골을 박살내 죽인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억 속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은 정신적 외상이어야 하는 그 기억을 역설적이게도 기쁨이라 명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이스트는 사건에 위장 플롯을 부여함으로써 결코 매듭지을 수 없는 사건을 어긋나게 함으로써 우리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사건에 다른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사건의 폭력을 망각하도록 하는 것인데, 작가는 이렇게 폭력의 기억을 부정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더욱 비장하게 사건에 사람들을 빠뜨려 신체화 한다. 반면에 관동대지진시 난무했던 일본인들의 기만적 플롯인 조선인이 공격해 온다.”는 서사는 후일 일본의 방송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한 여성의 옛날 하나의 삽화로 추억을 완결하듯등장해 사건의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역사의 한 사건을 기억, 증언한다는 것은 타자와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라 한다. 역사를 결정하는 저 높은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견뎌내고 있는 낮은 곳에 몸을 두는 것이라고.

 

소설 칠레의 지진과 일본 방송 프로그램 서사의 공통점은 인간을 영유한 대지진이라는 사건의 폭력에 대해 인간 스스로 그 압도적인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사건에서 부정된 자신들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체성을 징벌한 기만적 플롯(신이나, 헛소문)이 행한 폭력으로서 사건 자체가 지닌 폭력의 기억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음이 하나 떠오른다. 어떤 기억 서사도 그 사건의 당사자에 포함될 경우 그 서사를 자명한 것으로 읽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명한 것으로 향유하고 있던 것이 모두 내팽개쳐지고, 의미는 희미해져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되고,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 어떤 서사에서 우리가 자명성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건의 나누어 가짐이 아니라 한낱 이야기의 소비로 멈추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표상 불가능한 사건을 표상하는 것, 말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건의 말할 수 없음 자체를 증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어떤 주체의 의사와 상관없이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신체에 습격해오는 폭력적 사건인 역사의 기억에 대한 우리 인간의 언어인 서사적 한계를 사유함으로써,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세계의 사람들이 나누어가지는 서사로 말해지고 써질 수 있는가의 진지한 탐구이다. 대체 어떻게 사건에 있지 않은 외부자인 사람들이 그 사건의 기억과 증언의 표현과 표상을 함부로 재단하고 정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리얼리티라는 그 터무니없는 재현의 온전함을 확신하는 신화적 기만은 역겨움이라 할 것이다. 역사의 기억과 그것의 재현을 위한 서사의 정의를 향한 긴요한 사유의 단서를 제공하는 저작이라 하겠다. 이 기억과 서사와 관련된 많은 논의가 이미 존재하지만 이 저술은 특히 그 한계를 냉정하고 날카롭게 파헤쳐 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이 저술을 읽고 나면 아마도 여타 문학과 역사 읽기의 안목이 이전과는 결코 같을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절판되었던 책을 이렇게 다시금 출간한 출판사에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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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쓰는가 - 사람의 뇌가 반응하는 12가지 스토리 법칙
리사 크론 지음, 문지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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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행위는 결코 수동적이지 않아요. 오히려 독자는 서사 속에서 맞닥뜨린

각각의 새로운 상황에 대해 능동적으로 정신적 시뮬레이션을 하게 되지요.”

-신경과학자 니콜 스피어, 113쪽에서

 

책의 제목은 어떻게 쓰는가?’라고 글 쓰는 이가 주체로 내세워져 있지만, 실은 글 읽는 이, 즉 독자를 주체로 하여, 독자의 기대를 지속케 하여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끌기 위해 이야기를 창작해 내는 주의깊은 코칭이라 하겠다. 결국 독자인 대다수의 사람들이 왜 이야기를 읽으려고 하며, 읽음으로써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라 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이들이 호기심을 갖고 계속해서 읽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요인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그 요인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해 나가는가에 대한 방법론에 대한 강의라 하겠다.

 

인용한 니콜 스피어의 말처럼 읽는 행위는 능동적인 정신 작업이다. 그저 종이 위의 글자를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넋 놓은 행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산문 문학의 경우, 독자는 해당 작품을 통해 감정적 이해 능력의 폭을 넓히고, 평범한 삶에서라면 결코 마주하지 못할 낯설고 두렵기조차 한 인물들과 교감함으로써 타인들과의 공감 능력을 키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타인의 욕망과 의도들과 우리들이 좀처럼 마주하지 못할 삶의 장벽을 헤쳐 나가는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 안전한 장소에서 그러한 행동 방식이나 삶의 태도를 이해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자 리사 크론은 이미 세계적인 문학 편집인이며 영화 시나리오 컨설턴트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이론적 근간을 이루는 신경과학과 심리학과 이야기의 상관관계에 대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지닌 연구가(*TED 강연 참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읽는 사람의 심리적 욕구와 신경과학의 이론들을 배경으로 ’, 그렇게 써야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과학적 입증이기도 하. 때문에 독자는 첫 문장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기를 원한다.”는 문장은 인간의 뇌가 그렇게 생겨먹은 까닭에 근원하는 것이다. 인간의 적응 무의식(또는 인지적 무의식)이나 직관은 어떤 이야기이든 첫 문장이나 첫 장면에서 좋고 나쁨을 바로 판별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여부를 곧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진화한 뇌의 반응 방식 때문이다.

 

신경생물학적 심리에 토대를 둔 이야기 창작의 글이기에 기성의 많은 글쓰기 관련 도서들과 그 구성 방식이나 견인해나가는 힘에서 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우리들이 이야기를 읽을 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를 생각하며 저자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곧 즐거움이 되고, 마치 재미있는 소설을 읽을 때와 같이 저자의 글에 코를 빠뜨리게 된다. 강력한 이야기는 뇌를 재설계하는 힘을 지녔다.”고 하듯, 이 책 또한 어쩌면 이야기를 창작하고픈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만드는 재주를 지닌 뇌로 재부팅 해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만큼 저자의 조언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신체에 와 박힌다.

 


우리들이 읽으려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그저 누군가의 일상적 뒷담화같은 너절한 흔한 담화는 아니다. 여기서 이야기란 달성하기 어려운 어떤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며, 나중에 그를 어떤 모습으로 변화시켜주는가를 보여주는 일이다. 독자는 아무나의 지루한 이야기를 읽으려 문학이나 영화를 찾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독자들은 문학작품 읽는 것 말고도 삶 그자체로 바쁜 존재들이다. 때문에 소설이나 시나리오가 되는 이야기란 삶에서 지루한 부분을 뺀 나머지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의 뇌는 생존과 이에 이익(보상)을 주는 것을 즉시 구별한다. 즉 뇌가 작동할 욕망을 자극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첫 문장은 독자의 주의를 재빨리 낚아채는 것이어야 한다.

 

책의 내용은 이렇게 추상적 이론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책은 아주 구체적이고 예시적이며, 실제적이다. 재빠르게 낚아채기 위해서 첫 페이지의 문장들에 담겨 있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한다. 누구의 이야기인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위태로운 일이 일어날 것인지 세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것을 주인공의 문제, 주제, 플롯이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때 어우러져야 할 삼 요소라 한다. 이 베테랑 편집자자는 놀라울 정도의 뇌과학자이자 심리학자처럼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다.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문학적 쓰기와 수단들을 설명한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읽을 것을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공항 내 서점에서 읽을거리를 빨리 찾아내야 한다, 문학이론가 스탠리 피시는 책의 첫 문장을 읽고는 바로 엘리자베스 조지의 소설을 골랐다, 그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당시 열한 살이었던 조지 캠벨은, 버스에 타는 것으로 끝내 살인까지 이어지는 추락을 시작했다.”, 삼요소가 모두 있다. 주인공 조지 캠벨, 버스에 올라타고, 그를 살인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숨이 위태롭다. 여기에 이야기의 맥락, 일어날 일에 대한 어떤 정서적 의미까지 하도 강력해서 나라도 이 책을 집어 들었을 것 같다.

 

우리 뇌는 언제나 구체적 맥락 속에서 사건을 평가한다.”는 신경정신학자 리처드 레스탁을 인용하며, 뇌는 유용한 정보를 찾기 위해 의미를 찾으므로 의미를 부여하는 맥락은 이처럼 강한 흡입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뇌의 비밀과 이야기의 비밀을 오가며 리사 크론은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야기의 초점과 주인공의 목표를 만들고, 변화와 갈등은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지, 하다못해 주인공을 어떻게 상처 입혀야 하는지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론 간과하기 쉬운 부분들까지 놓치지 않는다.

 

플롯, 서브플롯, 전제와 플래시백의 사용은 어느 순간에 필요한지, 또 어떻게 사용되면 이야기가 망가지는지, 또한 복선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언제, 어떻게 사용돼야 가장 효과적인지를 우리들은 바로 뇌의 신경망 덕에 더욱 쉽게 납득하게 된다. 아마 독자가 지닌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이익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행동 이유와 그 아래 감춰진 문제를 탐구하기 위해 이야기를 읽을 것이다. 사실 커다란 범주에서 이 같은 이야기의 본질인 뇌의 인지적 무의식의 작동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면 아마 끌리는 이야기를 쓰는 방법론은 그 어떤 새로운 책도  더 이상 이 책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글을 쓴다는 것, 끌리는 글을 쓰는 이 끌리게 쓴 글쓰기 방식의 설명이 왜 그 수많은 글쓰기 책들 중에서 현대의 고전이 되었는지 절로 수긍하게 된다. 이야기를 인식하고 처리하는 우리들 뇌가 지닌 능력과 한계의 비밀을 토대로 써진 이 독특한 설명은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믿음을 선사해 주리라 믿는다. 우리의 삶과 이야기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타인의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라는 사실 하나의 이해만으로도 작가나 독자 모두에게 이 책은 이야기에 대한 매혹적인 접근법이 되어 줄 것 같다.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저술이다.

 

우리의 뇌는 미래에 닥칠 어려운 일을 미리 경험해보기 위해 이야기를 사용한다.

(...) 이야기의 역할은 주인공을 꿈에서도 통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시험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9시험 들기와 상처 입히기, 274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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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4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피지기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리게 합니다.ㅎㅎ 멋진 리뷰입니다.

필리아 2024-03-24 11:0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책에는 ˝타인의 욕망과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추론하는 데 도움을 주는˝ 모든 사람들의 뇌에 있는 ‘거울 뉴런‘을 설명하고 있어요. 아마 말씀하시는 ‘지피지기‘도 이것 때문이겠지요? 아무튼 리사 크론의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혹은 이야기 읽기에 어떤 빛을 비추어주는 저술임에 틀림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