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 그림으로 읽는 욕망의 윤리학
백상현 지음 / 책세상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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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란 지식 체계에 뚫린 구멍이다.” - Jaques Lacan

 

책의 제목에 라캉(Jaques Lacan)’이 있다고 겁낼 것 없다. 현학(玄學)의 언어로 지식을 뽐내는 그런 책이 아니니까 말이다. 특히 그런 지식의 기만과 불완전성을, 그러한 지식들이 이 세계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음을, 그래서 그런 지식체계의 균열과 틈으로 드러난 텅 빈 구멍, 허무의 진리와 마주하여 삶을 갱신토록 안내하고 있는 저작이기에 더욱 그렇다. ‘유령은 이 세계를 매끈하게 완전하다고 설명하는 지식들이 그 존재를 부인한 것들에 대한 명명이다. 유령의 출몰은 세계를 설명하는 지식체계를 무너뜨리고 등장하는 진리로의 초대이다, 어두운 심연, 텅 빈 구멍으로 다가감으로써 이 세계를 구성하는 지배 지식이란 환영에 불과함을.

 

바로 이 유령을 책의 저자는 미술의 역사를 수놓은 예술작품들의 비유를 통해 세계의 진실로 다가가려는 끊임없는 인류의 노력을 차단하려는 지배질서의 기만과 거짓을,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없음의 있음을 알려주는 유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진리에 대한 욕망을 그칠 수 없음을 말한다. 특히 책의 제목처럼 미술관의 유령들이니 시각 이미지(회화,사진,영상etc.)’를 이러한 지식과 대립항으로 세계의 진실을, 진리를 향한 소재들이 되어 이 세계-현실을 직조하는 지식의 장막, 그 허구성을 감각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써 장막 너머 진리를 마주하게 되고, 우리는 삶에 대한 겸허와 갱신의 욕망을 다지고 지속하게 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것, 즉 배우고 경험한 것, 그래서 습관화된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라캉은 이를 시관(視觀)적 장(champ scopique)’이라 하여 눈은 단지 시각적 인지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자 하는 욕망과 보이고자 하는 욕망 사이의 충동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시관충동의 영향력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세계 지식 내의 관점을 이탈하여 그 바깥을, 지식의 균열점을 보기위해서는 비상한 노력과 고통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불규칙을 지우고 기하학적 원근법과 같은 규칙과 지엄한 유일신 종교의 규범이 세계 이미지를 억압하고 길들이던 세계라면 더욱 진리로의 접근은 어려운 길일 수밖에 없다. 길들여진 세계 내 지식과 진리의 길을 보기위해 유령이 출현하는 두 회화작품의 비교는 이 대립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훌륭한 비유가 되어준다.

 

파울로 우첼로, <산 로마노 전투>, 1450년경, 본책 53쪽에서


먼저 이미지 통제, 즉 지배질서에 대한 열망이 넘쳐흐르는, 모든 불규칙 요소를 말끔히 제거하고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든 것을 향하게 하는 원근법의 철저한 반영으로 그려진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파울로 우첼로의 그림 <산로마노 전투,1450년경>는 혼돈의 속성을 박탈하고 죽은 병사와 투구들을 소실점을 향해 인위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망가뜨린다. 당대에는 이 그림이 세계의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재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1602, 본책 91쪽에서


이와 대비되어 카르바조의 그림 <의심하는 도마, 1602>는 당대를 지배하는 부르주아 귀족사회의 종교적 담론의 안정된 일관성을 찢고 어두운 심연, 진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원근법을 파괴하고 있을 뿐아니라 천박하고 경박한 당대 부랑인의 모습을 한 이들이 신성에 대한 의심을 보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써 지식체계의 기만을 고발한다. 두 그림 중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진실에 근접하고 있는가? 카라바조는 자신을 지배하는 체화된 지식을 벗어나 완전한 백지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현실을 스냅 사진 찍듯 담아낸 극단적 리얼리티 기술인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해 신체에 새겨진 역사의 문신을 단 번에 뛰어넘었으며, 그 대상은 범속함, 세계의 지식으로는 결코 알아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출현하는 진리의 사건을 묘사했다. 초라함과 기괴함의 형상으로, 조야함으로 출현해 지식의 장막을 찢는다.

 

길들여진 눈, 닫힌 눈을 이탈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실을 쫓으려는 윤리적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 세계를 구성하는 지배지식이란 한결같이 매끈한 아름다움만을 말하려하고, 그래서 낯선 것, 이질적인 것, 흐릿하고 불분명한 것을 억압하고 길들이며, 이에 저항하는 것들을 제거하여 버리고는 마치 이 세계는 늘 완전하게 매끈한 실재의 세계라고 허구를 주장한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이렇게 다른 것들을, 출몰하는 유령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세계는 필연적인 폐쇄적 세계이고, 자기 동일성만을 인정하는 세계일 수밖에 없으며, 결국 전체주의의 잔혹성이 지배하는 파시즘의 무도한 세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책은 이렇듯 진실을 거세하고 자기 체계를 유지하려는 지배 지식이 수행하는 일관된 억압과 방어의 장치들을 만나게 한다. 정상과 비정상(광기)이라는 과학적 근거가 취약하기 그지없는 악착스러운 분류와 범주화에서부터 오늘날 텔레비전 영상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상품 질서의 패러다임이 지배규범과 닮지 않은 이미지들에 대해 철저한 배제와 억압은 물론, 자유와 박애, 평등과 같은 형이상학적 관념들까지 상품 속으로 매몰시켜 본래 의미의 사유 가능성을 파괴 상실시키는 현장을 목도케 하기도 한다. 인간의 지식이란 언제나 이처럼 인간의 가능성이기도한 공백을 은폐하거나 억압하는 것이고, 억압함으로써 자기 체계의 완결성이라는 환상을 유지하려 하는 것임을 납득케 한다.

 

아마 이 저술의 하이라이트는 인문학적 전회(轉回)라 할 수 있는 현대 미술이 왜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대로의 세계 재현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가? 왜 유독 유령들의 출몰이 캔버스와 화면,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가에 대한 탐색일 것이다. 저자는 20세기 이전까지의 미술의 관점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초월적이며 변하지 않는 어떤 실체가 있다는 믿음에 의한 진리 실체를 그리려는 행위였다면, 20세기 이후 인간들은 보이는 것 너머의 초월적 무언가의 존재 역시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우쳤기 때문이라 말한다. 대면하게 된 것은 바로 텅 빈 공허, 검은 심연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허무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아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사라짐에 대하여라는 저술의 <서문>을 쓴 프랑수아 리보네는 그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공허와 함께 춤을 출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위대한 유희이고, 위대한 양식이다. (...), 허무주의? 아니다. 허무주의는 엄밀히 말해 공허의 망각이다. 허무주의적인 것은 시스템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관심으로 돌려버리는 힘으로 인해 허무적이다.”

-출처: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에 대하여, 프랑수아 리보네 <서문> 민음사 2012

 

이제 미술은 세계의 진실인 공허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행위가 된 것이다. 진리, 텅 빈 구멍을 표현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다. 지배 지식의 장막이 어느 때보다 촘촘하게 쳐진 오늘의 세계에서 그 허방을 상상하는 것은 실로 불가능하리만큼 난해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소멸의 정서를 듬뿍 담고 있는 사진 예술가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의 유령의 속성을 보여주는 이미지를 시작으로, 자본주의가 통제하거나 억압하려는 욕망의 실패를 드러내는 앤디 워홀의 복제 이미지들 속의 우연한 얼룩의 형태처럼 미세하고 보잘 것 없어 무시되거나 억압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부터 이 두 반복 사이에서도 완전함의 균열을, 이 세계 지식의 불완전성과 허구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유령을 출몰시켜 진리의 허방으로 우리의 인식을 데려다주려는 허무의 형식으로 규범의 해체로 이끄는 소피칼의 사진 이미지에서, 비상식적 시간성을 통해 질서가 부재하는 공간으로 우리들을 내던지게 하는 빌 비올라의 영상 이미지까지 공백을 소환하는 절차를 이 세계의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촉구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타자로부터 주어진 이미지와 의미에 속박되어 세계를 오인하는 우리들을 건져낸다. 이렇게 이 책을 통해 공백을 본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계에 둘러쳐진 장막(스크린) 안에서 머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들 일상의 토대를 채우는 모든 가치 체계는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에 안주하고 갇히는 순간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의 모습처럼 처절한 퇴행과 독단의 폭력이 점령하게 될 것이다. 사실 유령이란 그 속성처럼 포착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불가능을 인정할 때, 우리는 보다 창조적이고 사랑과 정의, 진리가 인정되는 세계를 살아 갈 수 있으리라.

 

고작 죽은 문자인 텍스트를 읽는 뉴스 앵커의 이미지는 어떠한 진리도 말하지 않을뿐더러 바로 그 이미지가 시대의 보편적 진리 형상과 만나고 있다는 환상임을 입증하고 있다. 대항하는 모든 비판적 견해에 대해 격렬한 폭력을 행사하는 파시즘의 욕망구조를 여실히 드러내는 폭력사회에 들어선 오늘 한국사회에서 우리들은 실재와 환상을, 진실과 거짓이미지를 분별하기 위해, 지배질서 저 너머를 보기 위해 공백의 자리를 찾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주어진 세계에 안주하여 지배적 패러다임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 듯하다. 이를 넘어서 보지 않으려하면 결코 진실의 세계는 열리지 않는다. 억압과 공포만이 넘실대는 세계만이 주위를 포획할 것이다. 이 세계의 리얼리티를 구성하는 지식체계의 허구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이 저술은 그 어떤 지식체계도 그 자체로 완전한 체계로 존재할 수 없음을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유령 이미지로의 초대장은 그 어느 때보다 시의성을 지니고 다가온다. 미술 작품과 함께 라캉적 사유를 함께하며 닫힌 인식 세계를 활짝 개방하여 새로운 삶의 시선으로 갱신하는 기회가 되어 줄 터이다. 아름다운 저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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