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 라이브 이론
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윤동민 옮김 / 책세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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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의 저술들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 그의 저작들을 둘러싼 수많은 이론(異論)들과 비판으로 오류와 오해로 가득한 방해로 차단되곤 했던 것이 대중적 읽기의 실상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진리와 기성의 제도들에 대한 일종의 허무주의를 야기하는 바이러스라고 보는 일체의 현상유지 수호자들의 근거가 취약한 비난들이기도하고, 논설과 담화의 지면 등 매체를 장악한 이들의 데리다를 읽는 어려움을 회피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현상학과 프랑스 철학을 연구해온 미국 캘빈대학 철학교수인 저자 제임스 K.A. 스미스는 이처럼 데리다에게 부여된 괴물성의 신화에 깃든 오류를 벗겨낸다.

 

데리다를 비판한 이들은 데리다의 사상을 괴물로 명명함으로써 길들이고, 그 괴물성에서 자신들과 다른 것, 즉 두려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여 동종화하려 하는 익숙한 기득권적 욕망을 본다. 이 책은 이 만연한 데리다에 대한 신화를 탈신화하여 그 괴물성을 제거하기 보다는 괴물성의 본질을 이해하려 한다. 다시 말해 데리다의 원저작과 기획으로의 너그럽고 호의적인 초대이다. 해서 이 저작은 데리다를 읽기위한 대중적 입문서이자 하나의 촉매 역할을 위해 써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저술의 미덕을 하나 집고 가야겠다. 그간의 라이브 이론(Live theory)>시리즈로 간행되어왔던 저작들과 달리 평이한 일상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난해하다고 걱정하던 데리다 독자들의 선입견을 불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제임스 교수와 번역자의 노고에 고마움을 먼저 표현한.

 

책은 서론과 에필로그를 비롯 총 5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서론>1장인 <말과 사물>은 그야말로 데리다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서론>은 데리다에 씌워진 괴물성과 신화가 무엇인지를 밝혀냄으로써 오히려 그 매도된 비난의 내용들로부터 데리다의 사상적 지향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명료성과 같은 말은 데리다가 가장 싫어하는 말일 것이다. 발화된 언어의 다의성을 일의성이라는 권위적 고착관계로 몰아가는 언어이니 말이다.

 

괴물이란 서로 다른 것들로 이뤄진 혼종적 생명체가 불러일으키는 불길함과 처음으로 나타난 신기함과 낯섦에 부여되는 이름이다, 즉 규정할 수 있는 범주의 부족과 결핍 때문에 그 모호성에 붙이는 무지의 익숙한 기호이다. 이러한 거북함과 공포와 달리, 데리다의 사상을 야기한 수많은 철학적, -철학적 유령들의 영향을 도외시하고 마치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읽는 이들이 읽는 오류도 있다.

 

특히 데리다의 곡해를 두드러지게 표명했던 사건이 소개되고 있는데, 데리다에게 케임브리지가 명예 학위 수여를 결정하자 수여반대자들이 극렬하게 표명한 내용들이다. “그의 작업 모두는 모든 학문분과가 기초하고 있는 증거와 논증의 기준들을 부정하고 폐기하는 것이라고 해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이들의 악의적 선전이 그 하나이고, ‘뉴욕 리브 오브 북스 사건으로 명명된 데리다의 사전 승인없이 리처드 월린이란 인물이 자기 논문집에 임의로 데리다의 글을 편집 출간한 일로 발단된 사건이다. 이에 항의하자 텍스트와 저자 사이의 모든 관계를 산산조각낸 해석학적 괴물이 갑자기 저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이론과 수행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 문화, 정치적 영향력을 장악한 이들이 데리다를 길들이려는 악의에서 비롯된 천박한 공격들이다.

 

이들을 통해 저자는 해체가 단순한 어떤 부정적 파기가 아님을, 파괴의 단순한 동의어거나, 분해하다라는 잘못된 의미로 전유되어 사용되는 오해를 바로잡는다. 해체는 재구축을 위해 분해하는, 즉 재구성적 의미를 가진 비판적 재구성이다. 해체는 무질서나 상대주의적 이해가 아니라 더 정의로운 제도를 위하여 제도적 틀을 부수고 개방시키는 행위이다. 특히 해체에 대한 아주 중요한 언어 표현이 있다. 해체는 타자의 부름에 대한 긍정적 응답이며, 본질적으로 타자에 답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 소명이라는 것이고, 무엇보다 사랑의 일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은 타자를 위해 자리를 만드는 것이고, 그래서 배제되고 소외된 것에 대한 근본적인 환대와 환영이다. 결국 기성의 권위가 수호하려는 불완전하고 불의한 것들이 은폐한 것들의 수많은 영역을 철저하게 분해하고 파괴함으로써 도래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하니 그 반대는 치졸하고 악의에 찬 것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 학교에서 추방되고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체류 외국인이라는 낙인을 경험해야만 했던 알제리계 유대인 데리다를 읽기위한 예열이 충분히 된 것 같다. 1~3장은 데리다의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을, 4장은 데리다와 여타 사상가들의 관계를 개관하고, 5장은 해체에 대한 일종의 사례연구로서 인터뷰의 형식을 취해 주제들을 확장 사유토록 안내한다.

 

1<말과 사물>은 대다수의 학자나 비평가들이 간과하거나 알지 못하고 넘어갔기에 특히 중요한 부분이다. 데리다의 사상적 환경의 토대가 된 현상학, 특히 그의 스승인 후설의 비판을 통해 현상학의 공리들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 그가 오해하거나 도달하지 못한 순수한 정신, 신체와 물질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려한 플라톤주의의 이데아가 결국은 신체라는 물질성 없이는 성취될 수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같은 기하학적 진리라는 것, 즉 순수 정신인 이데아라는 것도 최초 고안자의 정신인 의식의 영역 내 형성물이다.

 

이렇게 내적 근원인 주관적 산물인데. 이것이 어떻게 객관적 진리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해보면 이 기하학적 통찰을 공유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공동체가 창조되어야 하고, 언어를 통해 상호주관적으로 소통될 때에서 비로소 객관적 의미로 존재하게 된다. 플라톤(소크라테스)에서 헤겔, 후설에 이르는 서구철학의 전통은 그들이 그토록 멸시하던 신체와 물질성이라는 오염을 은폐한 것으로 이데아를, 순수 정신을 말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서양 철학 전통에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이념들의 부패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결국 서구 철학이 욕망하는 순수하고 신체화되지 않은 객관성이라는 것에 해체를 수행하는 것이다. 진리와 객관성을 성취하기 위해 구체화와 물질성을 말소하려는 욕망에 깃든 타자성에 대한 반감, 즉 로고스중심주의의 자민족중심주의와 서구형이상학의 강박증에 도사린 타자에 대한 폭력성을 읽는 것이다. 그것을 데리다의 표현으로 한다면 사유는 언어 없이 지속하지 않으며 언어가 공동의 산물인 한 자아는 사유하기 위해 타자에 의존한다.(비밀의 취향P84)”를 인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데리다는 왜 해체하려 한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언어의 객관성이란 것은 공동체의 상호주관적 소통의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와 ()쓰기는 매개와 해석의 필연성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은 곧 공동체 안에 존재함으로써 가능한 것이 된다. 공동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폭력의 구조 안에 얽혀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하니 이 얽혀있는 폭력성을 찾아내기 위해 해체해야 하고 그 폭력으로 인해 빼앗겼던 타자들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해체의 개념에 가까이 다가가는 데 이보다 좋은 설명은 없을 것 같다. 데리다의 주저(主著)목소리와 현상, 그마라톨로지의 상당부분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진 것이다라 할 수 있다.

 

2<다른 문학, 문학으로서의 타자>철학의 여백들우편엽서등에 대한 간접적 읽기가 될 수 있는데, 물론 그마라톨로지를 비롯한 방대한 데리다의 논문들과 여타 저술들이 망라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왜 데리다가 문학을 특권을 가진 철학의 타자로 삼았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미 소개되었지만 해체는 다른 것의 여지를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배제되었던 것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도의 틈과 균열에 집어넣은 것이다. 타자성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해체의 방법에서 결정적인 것이다. 그런데 서구 철학은 일의성의 사유이다. 즉 타자성을 부정한다. 그런데 문학은 일의성이라는 단일한 의미들의 이상과 사물의 일대일 대응의 이상인 철학의 이상을 넘어서 흐르는 언어의 양태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문학이 특권을 갖는 이유는 오염으로 여기는 문학을 통해 철학의 욕망을 심문하려는 것이고, 철학 스스로 자기-비판에 참여토록 하는 기획이랄 수 있다.

 

이로서 직접성(일의성)과 순수성에 대한 철학적 열망, 동일자의 공간으로 하고자 하는 헤게모니를 장악한 공동체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종의 방언으로서 문학은 훌륭한 해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또한 이 장에서는 철학이 은유의 교통을 거부하면서도 닳아빠져 못쓰게 된 은유를 은근히 이용하는 역사적 행태에서 철학 그것이 억압하고자 했던 것이 자신의 중심부임을 밝혀내기도 하고, 그 유명한 문장인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는 맥락에 대한 통찰의 중요성의 설명도 있다. 아마 저자의 의도라는 것은 존재한 적이 없다는 식의 악의적 오독을 넘어서 비판적 독해로서 저자의 의도를 데리다가 말하고자 했던 의미의 핵심으로 다가갈 수도 있다.

 

3<타자를 환영하기-윤리학, 환대, 종교>는 데리다의 사상을 관통하는, 레비나스의 타자를 승계하는 해체의 윤리적, 정치적 함의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해체가 타자에 대한 사랑이며, 타자를 위한 자리 내기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해체가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라는 말이 새삼스럽지만, 기성의 학문과 비평의 세계에서는 1989년 카르도조 법학대학원 컨퍼런스에서 해체는 정의(Justice)!”고 말한 데리다가 비로소 공적 정치적 물음으로 전회하였다고 해석하였던 모양이다.

 

데리다를 제대로 읽지도 않은 자들의 오류가 이때에야 자기 오류를 인식하였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라는 말처럼, 데리다는 해체할 수 없는 것(정의)의 이름으로 해체 작업에 착수한다. 해체는 정의의 해체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 사이를 구분하는 그 간격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정의로 법과 제도들을 괴롭히고 잠 못들고 깨어있도록 괴롭히는 작업임을 밝힌다. 수구적인 기득권 집단이 데리다의 해체를 그렇게 폄하하고 조롱하며, 괴물 취급을 하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멋진 정의의 역설, 세계의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데리다는 윤리적 책임을 이렇게 정의(定義)한다. 결정을 해야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출구 없는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중속박에서 결정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규칙에 괄호치기이고, 정의롭고 책임 있는 결정이 있다면 적절한 순간에 규제없이 규제되어야 하는 것이며, 법을 보존하고 또한 파괴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법을 다시 고안해야 할 정도로 충분히 유연하게 사유되고 결정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윤리는 당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모를 때, 앎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있을 때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규칙을 만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때 

시작된다.(...) 보증이 있는 윤리가 아니다. (...) 윤리는 위험하다.”

- 데리다, <이론을 쫒아서, P31~32>, 본문 173

 

만일 어떤 판사가 규칙을 단순히 적용한다면 그는 계산하는 기계일 뿐이고, 정의를 보증하지 못한다. 그러나 법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또한 정의의 꼬리표는 주어지지도 않는다. 결국 정의로운 법 판결에 내재된 이 역설은 어떤 결정이 정의라고 말 할 수 있는 순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정의와 윤리적 책임의 조건은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동시에 결정해야 할 의무가 있는 이중적 상태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코 의무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책임의 체험이 곧 정의의 윤리임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해체는 환원할 수 없는 무한한 정의의 이념에 작동하고 운동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우리는 나름 해독할 수 있게 된다.

 

4<데리다의 타자들>5<저자, 주권, 인터뷰에서 자명한 것들>, 우선 4장에서는 데리다의 작업에 흔적을 남긴 소수의 특권적 타자들인 몇 명의 철학을 설명한다. ()쓰기의 유한성이라는 신체성과 물질성을 평가절하한 플라톤으로부터 그라마톨로지영문판 서문을 쓴 가야트리 스피박이 주장한 니체의 영향력이 근거가 취약한 비판임을 증명하고, 오히려 니체의 초인은 데리다의 타자에 굴복했음을, 레비나스의 목소리에 묻힌 존재임을 설명한다. 한편 하이데거는 데리다에게 해체의 공간을 열어주었으며, 심지어 하이데거의 해체였다고 데리다가 말했음을 전하기도 한다. 하이데거와 데리다는 부모와 자식의 완벽한 본보기였다는 것이다.

 

특히 4장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학계와 비평계의 데리다 수용사이다. 다시 말하자면 각 계의 해체에 대한 반응의 역사라 할 수도 있겠다. 예일학파, 즉 미국 문학이론가들을 중심으로 한 수용사인데, 이들은 후설과 하이데거를 모른 채 데리다를 읽음으로써 매우 비-맥락적으로 읽었기에 무수한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독일의 경우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반목과 교류로 이루어졌음을, 초기에 하버마스와 가다머를 중심으로 데라다를 반혁명적, 보수주의자로, 권위주의적 정치 구조를 복권하려는 불순한 인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후 해체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하는, 계몽주의의 지속임을 이해하고 공동의 노력을 하는 동맹관계가 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디우, 지젝, 이글턴 등의 인사들에게서는 오해와 오류가 여전함을 발견하게 된다. 적절한 비판을 정초하는 데 요구되는 보편성을 거부하는 이론(바디우)”이라던가, 폭력에 대항하는 가치를 보여주기보다 전체주의 공간을 열어준다(지젝)”고 주장하기도 하고, 차이의 철학들은 시장주도의 세계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데 적응케 하는 전술(이글턴,바디우)”이라는 뚱딴지같은 비난으로 점철되어있다. 이들은 데리다를 얼마나 읽었을까?

 

5장은 데리다를 수용하는 이 세계의 현실을 살펴보고, 데리다는 이제 살아있지 않지만, 그가 남겨 놓은 여전히 많은 과제들이 있음을 상기하는 장으로, 그리고 심화된 학습의 장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서문>과 함께, <에필로그>도 중요한 장이라 할 수 있는데, 데리다는 유행이 아니다!”는 저자의 선언처럼 제도에 대한 비판, 텍스트들에 작동하는 힘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면밀한 재생산을 위해 끊임없이 읽어야 하는 인류의 부채이기도 하다. 타자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기라도 했나? 여전히 타자는 존재한다. 아무쪼록 학자의 야심을 억제하고, 데리다의 읽기로 이끄는 이 아름다운 저술물을 생산해 낸 제임스 K.A. 스미스교수와 윤동민 번역자에 감사를 전한다.

 

언어적 전희가 언어를 망각하거나 폄하하는 경향, 철학은 단지 담론이라는 매체에서만 발생한다는 점을 망각하고 언어의 2차적 성격, 진리에 대한 순수한 접근으로부터 동떨어진 것으로 폄하하는 서구 사상의 오랜 전통을 거스르는 방식으로서 해체를 주장했던 20세기 타자의 자리를 주목했던 위대한 사상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되었다. 내게 잠복했던 데리다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읽기를 회피하며 정당화했던 편협한 정신을 털어내기에 충분한 읽기가 되었다. 우선 가지고 있는 비밀의 취향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라마톨로지를 다시 펼쳐들어야 할 것 같다. 조금 인내가 필요하겠지만, 그 수고가 결코 낭비는 아닐 것이다. 아마 이 저술을 읽는 독자는 데리다 읽기에 나처럼 나설 것이 틀림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만큼 이 책은 일반 독자에게 접근 가능한 수월함이 있다. <라이브 이론> 시리즈의 단연 최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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