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위원회 모중석 스릴러 클럽 20
그렉 허위츠 지음, 김진석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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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법체제가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로서 어떤 흠결도 없는 것인가? 또는 법이 구현하지 못하는 정의를 실현키위해 보다 상위의 도덕적 신념을 우리는 인정해야하는가? 만일 그러한 신념의 행동을 방임할 경우 사회질서의 유지라는 공공의 안정성과 건강성에 어떤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닌가? 사실 이 작품이 던지는 정의에 대한 파문은 실로 곤혹스러운 것이다. 정의는 공공선이라는 때론 모호하기 그지없는 집단적 질서에 우위를 인정하다가도 개인이나 가족의 연대에 대한 미덕과 충돌할 때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최근‘마이클 샌델’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행복과 자유와 미덕의 이상(理想)을 통해 고민하는 바로 도덕적 딜레마에서 정의를 생각게 하는 바로 그 실제를 표현하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일곱 살 여아의 무참한 살인, 아이의 아빠인 연방법원 부집행관‘팀 랙클리’와 엄마인 군 보안관‘드레이’부부에게 자식의 죽음을 알리는 음울한 전언으로 이 작품은 시작된다.

내 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범에 대한 증오, 그리고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부모로서의 정신적 고통이 처음부터 독자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른다. 완벽한 살인증거물들과 현장, 그리고 용의자의 자백으로 쉽사리 매듭 될 듯이 작품은 빠르게 전개되지만, 여기서 작가는 첫 번째로 법과 정의에 대한 시험으로 우리들의 사유를 주춤거리게 한다. 범인을 체포한 아내의 동료들인 군 보안관들이 내밀하게 직접의 복수를 가할 기회를‘팀 랙클리’에게 제공한 것이다.

법의 판단에 앞서, 경찰력의 비호(庇護)하에 내 아이의 참담한 죽음에 직접적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어떤 결정을 하여야 하는가? 놈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가슴이 찢어들듯 울부짖는 아내의 슬픔과 사무치게 그리운 딸아이의 모습, 그리고 갈기갈기 찢긴 아이의 시신이 교차되어 이성이 마비될 것 만 같은 자신의 증오에 위로가 될까? 공공의 이성, 즉 사법부의 정의로운 판결에 맡겨야 할 것인가? 살인범을 앞에 두고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돌아오지만 결단에 대한 갈등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이 이어지는데 아이를 추행하고 토막 살인한 살인범이 법집행절차의 흠결로 인하여 무죄판결을 받는다. 귀머거리인 범인에게 미란다수칙을 지키지 않는 수색과 체포의 결과물은 법적 증거물로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살인행위와 법집행절차의 충돌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살인용의자의 인권, 그리고 제도로서의 법적장치 수호와 개인의 행복과 자유의 충돌이기도 하다. 명백한 살인자이지만 단지 집행절차의 문제로 범인이 풀려나는 것이 과연‘정의’인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인 것이다. 내 아이를 죽인 살인자가 법의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아이의 죽음에 대해 우리사회는 더 이상 무어라 할 수 있을까?

결국 사법제도는 무능력한 것이고, 정의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법집행절차를 비롯한 사법제도의 자기갈등 요소로 인해 세상에서 격리되고 처벌되어야 할 흉악범들이 자유롭게 활보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율에 상처임이 분명하다. 표제인『살인위원회; The Kill Clause』의 등장은 그래서 소설의 구조상 적절함을 넘어 주제를 선명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극악한 살인의 증거와 정황이 명료함에도 법적용의 흠결이나 하자, 오심으로 인해 풀려난 살인자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척결하기 위한 은밀한 조직이 법집행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는 정의에 대한 판단을 누가하는 것인가? 인간사회가 합의한 질서를 초월하여 정의를 주장할 수 있는 존재란 가능한 것인가? 하는 어려운 질문이 된다.

사회심리 및 범죄심리학계의 유명교수가 중심이 되어 가족의 일원이 살해되는 고통을 안은 전직 FBI, 형사로 구성된‘살인위원회’의 활동이 갈등 끝에 합류한 주인공‘팀 랙클리’의 민완한 행동으로 본격화된다. 희대의 살인마들이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도 살해되고 사회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행동에 정의라는 이름으로 찬사를 보내지만, 법질서의 훼손을 방치할 경우 사회치안의 부재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법이 방치한 흉악범들에 대한 처단의 치밀한 전개가 기막힌 액션과 사실적 묘사를 통해 소설의 재미를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 아마 책 읽는 자들의 쾌락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폭력성과 보복의 처참함으로 필름 느와르적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으나, 이보다는 고귀한 주제의식과 완벽함에 가까운 플롯으로 인해 장르소설이 지니는 주변적 시선을 완전히 극복하고 있어 여느 정통소설 못지않은 작품성을 확보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또한 밀리터리 액션을 중심으로 한 고도의 서스펜스와 스릴, 범인 소탕을 위해 벌이는 현장감이나 세밀한 디테일에서 상당히 뛰어난 서술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초법적인 팀의 행동을 다시금 제도 내에 복귀케 함으로써 경직되고 냉정한 법 체제에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고자 하는 작가의 인본주의적 신념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정의는 항상 갈등하지만 장기적으로 도덕적이다. 작가는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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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별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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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처럼 튀어나오는 격한 증오”, “다이아몬드 같은 증오”에 휩싸이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새로운 갈망의 대상을 끊임없이 쫓아대는 사람들은 어떤 존재들일까? 이러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사막이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낯설다. 북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의 사막풍경과 이슬람의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뒤엉킨 도시, 생의 열기로 가득하지만 죽은 자들의 광장이라 불리는‘자마 알프나’의 어수선한 노점시장이 보인다.

첫 문장부터 내 머리는 소설과 겉돌기 시작한다. 너무 민감해서,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감상적이어서, 게다가 자의식이 유별나게 불거지는 주인공을 보면서 대체 감정의 선을 따라잡지 못하고, 아니 공감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하여야 할까. 사막여행의 현지 가이드인‘승’이란 남성이 배출하는 메마르고 황폐함만이 느껴지는 감정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쾌감, 저항감 이었을까.

아랍인, 베르베르인이 얽혀 사는 사막지대의 한 뒷골목에 한국인 소녀‘보라’가 헤나로 타투를 그리며 관광객을 호객하고 있는 장면 또한 그리 용이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감성이 융화하고 교감하지 못한다. 내심 이렇듯 작품 초반에 소설을 읽어낼 자신이 없었다. 이들이 대체 왜 사막의 도시에 있는지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없었으니 말이다.
결국 전 재산과 아내까지 믿었던 친구 'K'에게 빼앗기고, 감당할 수 없는 채무의 그늘과 복수의 증오를 안고 허겁지겁 도망쳐 그네들을 쫓아 나선 곳이 북아프리카의 마그레브 지역, 황폐한 사막이라는 구절에 이르러서야 사하라 사막의 삭막하고 후텁지근한 모래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역시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파생하는 감정의 찌꺼기들, 그리고 그런 시간의 흐름이 바로 인생이고, 그러면서 마주치는 삶의 편린들이 방향을 바꾸게도 하고, 씻어내지 못할 것만 같은 앙금이 가라앉기도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들.

“극한의 황량함에 조응하는 폐허를 가슴에 감추고 있는 사람만이 그 지독한 사막 자체를 견뎌낼 수 있다.”는‘승’의 생각은 그자신의 반영일 뿐이다. 소설에서 사막은 이처럼 메마르고 건조한 황폐함이기도 하지만, “사막이 제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다 알 수 없어서 사랑”하는 인간도 등장한다. 모래에 갇혀 2000여년을 잠들어 온 고대 유물에 대한 욕망, 어떤 것에 사로잡히고 그것들을 소유하는 첫 순간의 느낌을 찾아 헤매는 사람. 운명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그 느낌의 촉발을 위해 사막에 머무는 사람이 있다. 이렇듯 황폐한 내면의 조응이든, 탐욕이든 사막은 사랑에 빠지게 하고 중독 시키는 기호로 통한다.

“누군가에게 제대로 버림받은 것들은 초라해지고 누추하며 하찮아진다. 운명이 누락시킨 자가 되어 버린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얘기인가! 거울을 보듯 서로에게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는 아비와 딸(승과 보라)의 상처가 사막의 풍경과 어우러져 버림받고 방황하는 이의 고통으로 짓무른 가슴을 드러내 보인다. 또한 최후의 선택, 새로운 갈망의 대상을 끝없이 쫓는 눈먼 매혹, 아름다움에의 맹목이 도달하는 궁극의 허무함에 이르기도 한다.

소설의 종반에 이르면 고가의 도기(陶器)를 둘러싼 쫓고 쫓기는 관계에서 욕망의 네트워크로 연결된 인간들의 적나라한 본성, 그리고 뒤늦은 삶의 각성을 보여준다. 지독한 현세성을 보여주는 바바의 아버지 무스타파, 아름다움이란 존재 자체라는 로랑, 여기에 승과 보라에서 삶의 미로를 읽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의 초상을 보게 된다. 돌아가고 싶은데 장소가 아니고 시간이 된 사람들, 제 삶에서 도망치려 안달하는 우리네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인생이란 결국 모두 제 마음이 만들어 낸 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음을 깨닫는 것은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일까?... 사실 이 소설은 느닷없는 질문처럼 무방비 상태에서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하다. 내 마음이 허공에 슬쩍 떠 있던 것도 아닌데, 소설이 나를 스르르 주저앉힌 걸 보면 무언가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의 매혹이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가본 적도 없는 사막의 허영, 그 황량한 풍경을 대고 카메라를 눌러대는 감정의 과잉들이 괜스레 싫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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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고 잘 파는 법 - 롯데홈쇼핑 이부장이 들려주는
이상발 지음 / 지식노마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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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할인점, 홈쇼핑분야에서의 바이어 및 MD(Merchandiser;판매기획)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형제처럼, 친한 선배처럼, 삼촌처럼 들려주는 쇼핑의 비밀 이야기다. 이래저래 소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우리네에게는 알아서 손해 볼 일 없는 요긴한 귀띔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유통업의 산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전문가적 조언들은 자신의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대형 할인점이나 홈쇼핑방송에 진출하는데 요구되는 노하우에서 소매상을 시작하는 이들을 위한 필수적 매장 진열을 비롯한 잘 파는 지식까지 제공해주기도 한다.

사실 시장자본주의의 최선단에 있는 현장이 바로 저자가 일했던 할인점이요, 홈쇼핑방송 판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보니 치열한 경쟁을 본성으로 하는 무대에서 생존을 위한 기예가 남다를 도리 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는 상품(물건)에 대한 신앙심으로 이어져 물질 가치의 인식과 거래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을 체득케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가계소비 주체로서의 비중이 높은 주부들이나, 일반 소비자에게는 잘 사는 비법을, 제품 판매 및 도소매업을 하는 이들에게는 잘 파는 법이 더욱 실체감 넘치게 전달된다.

일례로 사는 자나 파는 자 모두에게 공히 유용한 정보인 상품 진열 전략의 설명과 같이, 진열대의 좌우, 고저의 위치에 따른 상품의 가격과 판매이윤, 상품의 성격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소비자로서의 구매식견을 제고시켜 주는가하면, 판매자에게는 상품진열의 중요성을 재차 인식시켜준다. 이처럼 이 저작은 소비자와 판매자, 즉 사는 자와 파는 자 모두에게 현명한 선택을 위한 현실적 수단과 이해를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할인점등의 매대 양쪽 끝에 있는  한두 가지의 상품을 볼륨감있게 진열한 매대인“‘엔켑’을 노려라!”는 것처럼 이는 상품을 사야하는 소비자는 물론 할인점에 입점하여야 하는 판매자 모두에게 중요한 포인트라 알려주는 것과 같다.

한편 할인점이나 홈쇼핑, 인터넷에서 동일 제품을 저렴하게 구입하는 요령에 대한 조언은 지금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들이어서 책 읽기에서 의외의 소비지혜를 발견하게 해주는데, 계산대에서 캐셔에게 말만 잘하면 할인키를 눌러 계산 받을 수 있다는 것이나, 할인점에서 판매행사를 하는 도우미가 있는 상품의 경우 추가할인이나 별도의 판촉상품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으며, 상담원이 나와있는 코너의 경우에는 파격적인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월말로 갈수록 세일의 폭이 커지고, 마지막 주에 쇼핑을 해야 하는 할인점등 유통업의 실상을 통해 소비자의 알뜰한 소비지혜를 알려준다.

이에 상응하여 판매자들을 위한 판매 전문적 식견으로 갈수록 짧아지는 상품의 라이프사이클로 인한 제품의 적정한 시장 진입기의 설정이나 가격설정 방법, 홈쇼핑에 진출하는 절차와 방법, 상품이 상품으로 가치를 충분하게 발휘하기 위해 구비되어야 하는 유용성, 안정성, 운반성, 대체성, 창조성 등 9가지의 상품성 특성과 더불어 제품별 핵심 소구 포인트를 예시하여 판매자들을 위한 실천적 방법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이 저작은 우리들의 실질적인 소비생활이나 생업으로서의 판매를 위한 방법들을 실제의 현장감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공급과잉의 시대, 극한적 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또한 소비자이기도 하지만 일면 생산자이자 판매자이기도 한 우리네에게‘잘 사고 잘 파는’지혜는 어쩜 생존의 절대적 지혜인지도 모르겠다. 운명을 바꾸는 큰일, 큰 목표도 중요하지만 우리들은 의외로 작은“디테일에서 무너져”내린다는 저자의 삶의 통찰처럼, 소박한 지혜들이 모여 삶을 보다 윤택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리라는 점에 공감한다.

비록 지나치게 자기중심적 물질지향의 관점이 다소 근본주의적 시장주의자처럼 비추어져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하지만, 생산과 소비라는 인간을 지탱하는 본질적 현상에서‘효율적’이고,‘합리적’이라는 가치를 피할 수 없듯이 저자가 알려주는 진심의 지혜와 정보는 분명 가정경제에 일조하고 있다 할 수 있다. 할인점에서도 깍을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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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인형 모중석 스릴러 클럽 23
제프리 디버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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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프리 디버’의 야심찬 새로운 시리즈라 할 수 있다. ‘「링컨 라임」시리즈’에 열광하였던 독자들은 아마 신선하고 독특하기조차 한 ‘「캐트린 댄스(Kathryn Dance)」시리즈’의 시작에 매혹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캐트린 댄스란 인물은 링컨라임 시리즈 중 『The Cold Moon』에서 독자들에게 선보인 적이 있으며, 드디어 이 작품 『잠자는 인형(The Sleeping Doll)』으로 자신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내걸게 되었다. 이후 캐트린 댄스 시리즈의 본격적인 두 번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도로변 십자가; Roadside Crosses』가 출간되었으며, 링컨라임 시리즈『Burning Wire』에 등장해 활약하기도 한다. 사실 이 작품에도‘아멜리아 색스’와‘링컨 라임’이 살짝 등장하여 캐트린의 수사 상담에 조언을 해주기도 하는 것을 보면 두 시리즈의 주인공은 각자의 독특한 전문분야에서 협조하는 우호적 관계를 지속할 것 같다.

이 작품이 하나의 시리즈 출발을 알리는 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판단 할 수 있는 것
은 주인공‘캐트린 댄스’의 전문분야가 시사(示唆)하는 참신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동작학>이라는 “상대의 몸짓과 표정을 분석해 그들의 심리상태와 생각을 정확히 간파해 내는”범죄자 심문의 한 장을 열고 있다는 데 있다. 소설은 컴퓨터분야의 떠오르는 부자인‘크로이튼 일가’를 무참히 살인하여 복역 중인‘다니엘 펠’이라는 희대의 살인마를 캐트린이 심문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컬트 패밀리의 리더로서 사람의 마음을 마음대로 조정하는 펠과 작은 손동작이나 스트레스의 포착에서도 상대의 심리를 파헤치고 무너뜨릴 수 있는 댄스와의 취조실 대화는 이미 폭발직전의 아슬아슬한 긴장으로 몰아넣는다.


이에 더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사이코패스와 연쇄살인범, 그리고 컬트 범죄의 백과사전이라 할 정도로 세기적인 살인마들의 사건 프로파일이 등장하여 작중 인물들의 행동예측이나 낯선 전문수사내용의 이해를 돕기도 한다. 물론 함정과 복선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리얼리티를 제고하여 더욱 작품에 몰입하게 해준다. FBI의 추정으로 200여명을 살인한 사이코패스의 전형인 ‘테드 번디’나, 20세기 최악의 살인자로‘맨슨 패밀리’라는 컬트를 조직하여 거장‘로만 폴란스키’감독의 임신한 아내와 가정부를 살해한‘찰스 맨슨’까지 등장하여 수사 진영과 다니엘 펠의 대립에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다니엘 펠의 죄목은 크로이튼 일가족 살인이지만 사건은 이러한 펠의 탈옥으로부터 시작된다. 두 명의 교도관을 순식간에 살해하고 수사관까지 중태에 빠뜨린 채 유유히 사라지면서, 캘리포니아 연방수사국 수석수사요원인‘캐트린 댄스’가 현장에서 바로 수사지휘의 책임을 맡게 된다. 외부 조력자를 통한 탈출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수사하지만 좀처럼 흔적을 찾지 못한다. 여기에 크로이튼 사건 당시 펠이 구성한 컬트의 구성원들을 수소문해 사건의 작은 단서라도 확보하기를 기대한다. 취조과정에서 오고간 한 마디 한 마디, 그리고 미세한 표정의 변화까지도 범죄자의 행동 예측에 결정적인 실마리가 되고, 사건의 수사는 컬트집단 범죄의 전문가인 FBI 요원‘켈로그’가 가세하면서 속도감을 높이고 활기를 띤다.

사건은 컬트의 특성에 집중되고, 크로이튼 사건당시의 멤버인 리더 펠과 린다, 레베카, 사만다의 관계성을 조명한다. “이슈를 분극화시키고 멤버들을 흑백논리로 몰아 갈등을 유발하며, 리더 자신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끊임없이 시험하여 절대복종과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한다”는 컬트 리더의 보편적 조직운영 행태를 넌지시 흘리고, “리더는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습니다.”라고 펠의 컬트 내 권위에 대해 확인시켜준다. 작가의 세련된 트릭이 여기에도 숨겨져 있었음에 나중에 아~하고 탄식을 할 정도가 된다. 신비스럽기만 한 소설의 제목‘잠자는 인형’은 아빠와 엄마, 형 제들이 살해될 때 침대에서 잠든 어린 소녀로서 죽음을 피하였기에 붙여진‘테레사 크로이튼’의 별명이다. 철저하게 비밀리에 보호되고 있던 이 소녀의 등장과 사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지만 수사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제프리 디버’의 존경할 만한 상상력과 기지는 아마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만 같다. 펠과 무관한 살인이 있던 이전의 시간에 대한 기억에서와 같이 사고의 혀를 찌른다.

논리적 우연성이나 모호한 상황인식 등처럼 석연찮은 반전으로 찝찝한 기운을 주는 그런 이류의 반전이 아니다. 기막힐 정도로 정교한 논리와 서사에 내재한 완벽하다는 이상의 표현이 불가능한 극적 대반전에 이르면 그만 제프리 디버를 숭배하고픈 심정이 된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스릴러 작품들이 있지만 이 작품은 그야말로 서스펜스의 품질을 몇 단계 올려놓은 작품이라 칭송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상상력의 한계를 초월한 작품이다! 후속작인‘도로변 십자가(roadside crosses)'의 조속한 출간을 재촉하고 싶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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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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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로맹가리’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 ‘에밀 아자르’를 부여하고 출간한 최초의 작품이다. 더구나 결말 부분이 잘려나간 채 출간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까지 더해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그의 당시 사적 상황을 이해하면 자신의 소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기대해서였다는 그 자신과 세간의 주장을 조금은 전복하고 싶어진다.

첫 번째 아내를 떠나 당대 스크린의 아이콘이었던‘진 세버그’와의 염문과 재혼, 그리고 다시금 이혼이란 결과는 그의 신분상 명예(외교관으로서 또한 존경받는 작가로서)에 흠집을 안겨주었던 것이 사실이고, 또한 문단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더 이상 매혹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자르라는 변신은 비우호성을 돌파하기 위한 작가적 수단이 아니었을까하는 억측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작가 주변의 환경은 그에게 새로운 언어의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는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언어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작품 『그로 칼랭』의 주인공‘쿠쟁’이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어법과는 사뭇 다르며, 그 소통의 단절은 내면의 과잉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일반적인 현상, 세계는 흘러 나가지 못해 공격적으로 경쟁하게 된 사랑의 초과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면의 요새 안에서 엄청나게 축적된 애정의 자산이 쇠퇴하고 손상된다.”즉 감정의 잉여를 해소하지 못하는 대 도시 평범한 사람들의 소외와 단절로 인한 배출구의 차단 말이다.

어쨌든 이 미터 이십 센티미터의 비단뱀과 자신의 서식지(방 두 개의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쿠쟁이라는 사내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그 사람은 아무도 마음에 두질 않아...”라는 말을 듣게 될 정도로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애착이 깊다. 그리고는 “약간은 자기 나름의 내면생활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공공연한 소외의 소문을 떨치기 위해 자신에게도 “누군가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비단뱀‘그로 칼랭’의 사진을 꺼내어 내미는 것처럼 그의 언어는 세상과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쿠쟁의 다른 언어는 경찰서 서장과의 대화에서 엉뚱한 제안으로 자신의 언어에 공포에 질린 것 같았음을 느끼고 있음에도 “나는 아주 쉽게 애착을 느낀다.”고 하는 것과 같이 외려 세상 사람들의 독해가 잘 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이러한 역설적이고 뒤틀린 쿠쟁의 말을 듣다보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이 쿡쿡하고 터져 나오게 되는데, 이 코미디와 같은 언어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세련된 비판, 아니 조롱이라 하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어떤 위대한 프랑스인은‘어려움을 꾹 참아야 한다.’는 훌륭한 말을 했지요. 만약 우리 아버지들이 참을성이 없었다면 분명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겁니다. 주민 머릿수와 국민총소득 얘기입니다.”처럼 ‘인구 통계학’적이라는 쿠쟁의 반복되는 비유는 그 근원의 불완전성을 보잘것없게 보이게 하는 식이다. 결국 우리들이 잃어버린 진정한 언어, 즉 본질에 대한 제대로의 살펴보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한편, 그로칼랭의 탈피 장면이 거듭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쿠쟁은 경이로워하며 이유 없이 행복한 느낌에 젖어든다. 그리곤 “생애의 지극히 낙관적 사건, 재생, 부활절, 욤 키푸르(대속죄일), 희망과 약속 ”이라고 해석하고, 이는 “진정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비단뱀이 새로운 삶을 얻을 때가 되었음을 느끼는 감동적인 순간”이라고 경탄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변신, 즉‘에밀 아자르’로의 새로운 탄생, 즉 작가 자신의 재생을 위한 간절한 희구를 보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언어는 마침내‘불가능의 끝’이라는 그로칼랭이 자신(쿠쟁)에게 인간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주는 것과 같이 도달이 묘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작가가 자살하면서 남긴 <결전의 날>이라는 유언의 쪽지 마지막 문장,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고 한 것이야말로 바로 이‘불가능의 끝’을 완성한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이 작품의 문장들 하나하나 마다에는“본성에 대한 진정한 승리가 열어주는 지평과 전망”을 일깨우고, 추가된‘생태학적’이라고 불리는 결말부분과 같이 자연보호라는“미래가 기대되는 예외와 도약의 순간”처럼 의미심장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밀도 높은 주제가 내재되어 있다. 가엾은 흰쥐 블롱딘을 그로칼랭에게 먹이로 주지 못해 고통 받는 쿠쟁에게 “생쥐를 무더기로 주세요. 알아보기 힘들 겁니다. ~ 中略 ~  개성이 생기는 거지요. 개성 없는 다수로 받아들이면 훨씬 인상이 희미해 질 겁니다.”에서와 같이 우리의 인식에 대한 역설적 반성을 요구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이 주게 하세요.”처럼 본질은 변화된 것이 없음에도 주체만을 바꾸어 합리화시키는 어리석은 세상을 조롱하기도 하는 것이다.

“확실히 현 상태에서는 애무가 부족하다.”라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들어서지 못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비단뱀과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이르는 쿠쟁이라는 현대인의 위태로운 소외의 강박이 해학적이고, 또는 변태적으로 , 그러면서 진중한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다. “즉각적인 우정을, 자발적인 뜨거운 격정을, 일종의 상호관계 같은 감정”이 세상에 창궐하기를 바라면서.
아마 출생 전 의식 상태인‘프롤로고맨’을 이해하기위해서라도, 비단뱀이 동물이 아니고 하나의 인식임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몇 번의 재독이 필요한 작품이다. 어쩜, 순수한 상태의‘로맹 가리’를 비로소 읽고 있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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