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이 닿는 순간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 - 촉각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의 과학
마르틴 그룬발트 지음, 강영옥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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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는 정념과 감정의 거울이다.”

                                     - 애슐리 몬터규 터칭(Touching)에서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그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면을 만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예견할 수 있다.”라고 주체의 몸’, 고유한 몸의 종합으로서 신체접촉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선언하기도 했다. 나는 내 신체가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 관념적 실체가 달리 실재하고 있어 그것이 사유하고 판단하며 반성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내 신체의 종합을 인지함으로써 나는 외부 세계의 공간과 시간적 관계를 연결시킬 수 있으며 이로써 나의 실재함, 실존적 느낌을 갖는다. 내 몸을 촉각으로 감지하며 어느 것이 나의 신체 부위에 속하고 아닌지를 구분할 줄 안다. 만일 이러한 촉각체계가 없었다면 나는 나의 실존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내 실존에 대한 이해와 달리 지금 우리의 세계는 몸을 소비의 대상, 기계화된 물질, 한낱 대상화된 무엇으로만 이해하며, 타인의 몸은 경계와 혐오, 두려움, 회피의 대상으로 치닫는다. 이제 접촉이라는 언어는 한없이 낯설고 어떤 흉물(凶物)의 인상까지 덮어쓰고 있다. 접촉, 촉각을 폄훼하고 지워버리는 세계, 감각의 현재성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나와 너, 인간관계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를 생각게 된다. 그럼에도 오늘날처럼 감각이 차고 넘치는 세상은 일찍이 없었다는 주장이 들려오기도 한다. 아마 무진장한 시각적 감각에 쇄도해오는 다양한 감각채널들을 염두에 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결코 옳지 않다.

 

이 주장은 감각의 외피에 싸인 지식과 정보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단말기와 데이터 중심의 문명은 감각을 열등한 것으로 밀어젖힌다. 개인과 개인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감소시키는 문명이다. 접촉 상실의 문명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곳에서 인간의 신체는 소외되고 고립된 채 실존적 위기로 고통스러워한다. 바로 오늘 한국인의 삶을 대표하는 어휘가 혐오, 비혼, 혼밥인 것은 접촉이라는 타자와의 관계가 이질적이 되어버린, 실재적 감각의 세계를 상실해가고 있는 세계의 다른 표현이지 않겠는가? 손을 잡고 포옹할 때 애정의 온기와 볼을 만지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인정과 칭찬의 기쁨, 이들 긍정의 감정들이 균질화되고 통제된 주장들에 의해 왜곡되어 멸실되고 있지 않은가?

 

서두가 지나치게 길어졌다. 나는 이 책을 이처럼 상실되어가는 인간 신체의 접촉을 회복시키기 위한, 즉 타자성의 회복을 통해 삭막한 인간세계가 관계가 넘쳐나고, 사랑과 존중, 안락함이 풍부한 세계로 전환해 나가는 근원으로서 촉각의 체계, 피부자극이라는 접촉의 생물학적, 인류학적 반전의 세계를 그려보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책은 인간 개체에 있어서 제2의 뇌, 혹은 피부의 정신으로 불려야 하는 촉각체계가 지니는 생명체의 성장과 발달에의 의학적, 생리학적 영향에서 심리학적, 문화적 영향의 양태에까지 광범위한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피부는 신체에서 가장 넓은 감각기관이며, 감각은 피부에 가장 밀접하게 관계한다. 더구나 촉각은 인간 배아에게서 가장 먼저 발달하는 감각이다. 왜 촉각이 처음으로 발달해야하는 것일까? 촉각을 통해 태아는 끊임없는 자극의 반복 학습을 통해 신체인식, 위치탐색 등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초지식은 물론 감각구조의 협력 체제를 완성해 나간다. , 지속적인 자기 접촉은 신체와 동작과 자의식을 형성시키는, 자아개념을 각인하는 과정이랄 수 있다. 그래서 접촉은 태초의 지식으로 불린다.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시작되는 태초의 촉각 체험들은 이처럼 자아와 신체도식의 형성, 신체적 친밀감, 긍정적 감각의 깨우침으로, 모방이라는 사회적 학습과 인식으로, 지각, 인지 능력은 물론 사회적 판단과정에 전방위적인 영향을 미친다. 받은 촉각 자극의 질은 유기체 전 기관계의 질적 발달에 직접 관계한다. 그렇다면 피부접촉의 자극이 없는 인간 유기체에게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게 될까? 지속적 접촉 결핍을 겪는 아이는 신체, 사회, 감정, 인지 능력의 저하는 물론 뇌의 발달이 지연된다. 친밀감과 애정이라는 식량, 신체적 친밀감의 결핍은 발달장애는 물론 영유아의 사망까지 불러온다. 책은 촉각의 감각이 인간생명체 활동의 원천적인 자양분임을 입증하는 사례들이 이처럼 빼곡하다. 굳이 스킨십이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을 분비해서 심리적 이완을 돕는다라든가, 성행위 후 옥시토신 농도가 가장 높아 느슨한 황홀경의 마비로 긴장완화에 유익하다든가, 혹은 접촉자극이 면역체계를 안정시켜 염증억제 가속화 효과가 있다와 같은 인체 약국작용으로서의 신체접촉을 수다스럽게 늘어놓지는 않겠다.

 

그러나 빼놓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 오늘의 인간이 물질시대에 살고 있음을 부정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음에도 인간 개체는 물론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실로 지대한 영유아의 촉각자극은 타자성 상실과 관련하여 사유의 방편을 제공한다. 엄마와 아빠의 부드럽고 애정어린 손길, 모유 수유와 관련하여 아기가 체험하는 신체자극이 어떤 인간들을 만들어 내는지를 알게 된다면, 유모차에 분리되어 앉아있는 아기들, 출산하자마자 엄마와 분리되어 육아실에 격리되는 아기가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 놓이는지 알게 된다면, 그러한 시대에 성장한 아이들로 구성된 오늘의 사회가 왜 이처럼 접촉을 부정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는 내내 타인과의 접촉을 이어가야하는 개체에게 촉각 욕구를 빼앗는 세계에서 이상 행동이 나타나는 것은 어쩜 지극히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스마트폰 터치패드에 연신 검지손가락을 문지르는 소외된 인간들, 기술을 매개로 하는 세계는 사건을 지각하는 과정을 대폭 축소시킨다. 활동과 활동의 연쇄적 반응, 연결관계는 훨씬 어렵지만 그만큼 인간 개체의 성장과 개체들간의 관계 발전을 돕는다. “만지는 것이 곧 앎이다.”라는 말만큼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문장은 없을 듯하다. 지구촌 곳곳에서 미투운동의 바람이 거세다. 여성차별의 오랜 역사적 굴레를 벗어던지고 평등한 성의 구현을 실현하자는 윤리적 외침이 이제는 성()간의 혐오와 파멸로 치닫는 양상마저 보인다. 이들 세계에서 접촉, 터치의 세계는 범죄가 되고 만다. 과연 촉각이 문제인 것인가?

 

책은 이외에도 촉각 경험이 지니는 일상의 실용적 사례들도 그득하다. 특히 산업부분에서 촉각이 발하는 유용한 효과들, 협상과 설득에서, 촉각 광고문구나 제품 디자인에 있어서 촉각호기심 자극이나 촉각체험의 마케팅적 활용의 가치를 소개하기도 한다. 비교적 작은 분량의 소책자이지만 인간 촉각체계에 대한 다양한 사유의 가지를 뻗어나게 하는 터전을 제공하는 시의성 있는 저작이라 할 수 있겠다. 각양의 분야, 다양한 관점에서 촉각, 접촉의 세계를 감각하는 시간이 되어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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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신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0
손보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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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우연이오. 그리고 우리를 지속시키는 건 우리 자신 뿐이오˝ - 존 파울즈 [마법사]中에서
존 파울즈를 읽으며 손보미의 소설 [우연의 신]을 발견한 것은 오직 ‘우연‘이라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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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기체 - 곤충 사회의 힘과 아름다움, 정교한 질서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32
베르트 횔도블러.에드워드 윌슨 지음, 임항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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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類比)를 가정할 수 있다면 지구상의 유일한 지성적 존재로 자임하는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진화적 상상을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책은 벌, 말벌, 개미를 포함하는 ()사회성을 지닌 벌 목()과의 곤충들, 특히 초유기체로 명명할 수 있는 종들의 사회성을 통해 이들의 진화적 과정에서 발견되는 개체 또는 군락(집단)의 다양한 사회적 양상들을 추적하고 있다.

 

아마 이 책을 과학 연구의 전범(典範)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세심하고 주의 깊으며, 겸허한 과학자의 연구태도로부터 가설과 실험, 관찰을 통한 발견과 이론의 정립, 동일 유사 연구들의 상호비교와 비판적 수용, 풍부하게 인용되는 유관 연구사례와 대립 이론들의 반복되는 과학적 성취를 포함하는 위대한 두 과학자의 일생을 바친 연구에 머리를 조아리게 한다. 사회생물학, 혹은 생태사회학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의 업적인 이 책은 인간의 행동, 정신의 형성, 사회기능체계를 사유하는 데 무한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으며, 궁극적 초유기체라 할 수 있는 아타니족 잎꾼개미를 비롯하여 침개미인 하르페그나토스에 이르기까지 학문적 성과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움과 지적 허영을 만족시키는 데 어떠한 부족도 없다고 하겠다.

 

[오이코필라속 일꾼 개미의 협동; P 195 발췌 수정 인용]

 

 

도심의 한적한 여느 길가에서 빵부스러기 혹은 나뭇잎 조각들을 부지런히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나르는 개미의 작은 행렬을 우연히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저들은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까, 저 일꾼개미와 여왕개미는 어떤 관계일까, 번식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그리고 운반한 먹이는 어디에 저장되고 어떻게 배분되는 것일까, 아니 그들의 농장 사료는 아닐까, 그들의 집단은 또한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하는 질문들이 꼬리를 잇는다. 더구나 이성(理性)이 게재할 여지가 없는 저 작은 미물이 조직화된 사회를 구성하고 축조할 수 있는지에 이르면 자연이 부여한 놀라운 경이로움에 매혹되곤 한다.

 

어떤 집단의 일부로서 서로 협동하며 노동을 분담하여 수행하는 듯한 이 곤충들에서 사회성을 보게 되는 것이고, 이들이 이루고 있는 소위 군락이라는 전체적인 어떤 기능체계들의 상상에 이르는 것이다. 바로 이처럼 사회를 형성하고 특성화된 사회계급을 가진 개체를 생산하는 곤충집단을 사회성 곤충이라 부른다. 여기에는 개미를 비롯하여 사회성 벌, 사회성 말벌 등 벌목 곤충들과 흰개미(흰개미는 벌목이 아님)가 포함된다. 특히 진사회성이라 불리기 위해서는 첫째, 조직의 성체는 번식 전담계급과 부분 또는 완전 불임 계급으로 분리되어야 하고, 둘째 한 군락 안에 두 세대 이상의 성체가 함께 살아야 하며, 셋째 완전 또는 불임 계급이 어린 개체(, 애벌레)를 돌봐야한다는 학계의 합의된 정의가 있다.

 

단연 시선을 잡아채는 항목은 기능별로 구분되는 계급이 있어야 진사회성 곤충이라 불릴 수 있다는 지점이다. 그리고 어린 개체를 돌봐야한다는 정의에서 계급 분리의 기원을 발견하게 되는 부분일 것이다. 결국 이들의 사회성이란 어떤 개체인가가 돌봄이 역할을 분담하고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 진사회성 곤충이 개체 사이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군락과 군락간의 경쟁에서 가장 효율적인 형질을 지니도록 선택된 일꾼계급의 생산과 같은계급 조절의 결정규칙이라는 발달 알고리즘을 가지며, 자연 선택의 대상이 되는 군락, 알고리즘 자체의 유전적 진화를 하는 진사회성 곤충을 초유기체라 정의하고 있다.

 

개체가 태어나서 알, 애벌레 등의 단계를 거치며 성()과 계급이 순차적으로 조절 결정되는 일종의 발달 알고리즘의 연구사례를 읽고 있을 때는 신비를 벗겨내는 과학의 지고한 연구관찰과 그 통찰력에 감탄을 연발케 된다. 특히 하나의 동일 집단을 구성하는 개미의 무리인 군락마다 실로 다양한 진화적 차이를 보이는 것에서 자연 선택의 대상이 되는 것은 군락(群落)’이다라는 다수준 자연선택이론을 접할 때에는 협소한 대중적 상식에 머물던 내 사유의 경계가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할 만큼 과장된 기쁨을 얻게도 된다.

 

이 걸출한 책은 이처럼 두뇌 아니, 이성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곤충이 어떻게 인류와 같은 문명을 건설할 수 있는지, 그들이 자연의 무한한 생태적 압력 속에서 여하히 유효한 선택을 통해 초유기체로 불릴 수 있는 진화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지를 탐색, 규명하는 일련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즈음에 이르면 진사회성이라는 문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앞선 진사회성의 세 가지 조건에서 보여 지듯이 번식 분담이라는 노동 분담의 전()적응특성을 가진 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이들 분담적 특성을 가진 개체가 급기야 해부학적으로도 구별되는 계급으로 생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이것을 진화적 귀환 불능점이라고 부른다. 더 이상 이전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생태적 사건이랄 수 있다.

 

처녀 생식과 양성생식을 모두 하는 반수-배수체 유전을 통해 성별을 결정하는가하면, 발달 중인 암컷 알이나 애벌레가 결정 단계마다 개체의 생리적 조건에 따라 그야말로 단순한 이분법적 경로의 선택으로 계급이 조절 결정되는 이들의 사회계급 생산시스템은 입을 쩍 벌리게 한다.

 

[액상 먹이를 담고 있는 일꾼개미, 일생 저장고 기능을 수행 ; P177 발췌 수정 인용]

 

 

여기서 올더스 헉슬리멋진 신세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예정된 사회계급별로 인공배양과 부화의 조건을 차별하여, 알파, 베타, 감마, 엡실론 등 사회계급에 따라 배양되고 양육된 인간들은 동일한 일의 반복된 노동과 직업에 배치되어 일생을 마친다. 내적 동요가 말살되어 사회는 동요하지 않는다. 즉 필요성의 장치에 의해 유지되는 새로운 세계를 말하는 소설이다. 책에 소개되는 진사회성 벌목 곤충 중 가장 진화된 초유기체인 아타니족 잎꾼개미의 사회가 이러하다. 일꾼개미는 병정개미와 단순한 채집개미, 쓰레기 처리 개미, 알을 돌보는 일꾼 개미, 액상을 저장하는 저장개미로 노동이 세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체구도 해부학적으로 완전히 구분되어 있으며, 이들은 평생을 반복된 노동을 하다가 일생을 마친다. 귀환 불능점을 넘어선 고도로 진화된 개미 종의 사회성은 사실 그리 찬탄과 자연의 경외에 탄복하는 것에 의구심과 거부감을 자아낸다.

 

이들 사회성 곤충의 의사소통과 계급체계의 연구로 집대성된 이 책의 수많은 사례들, 번식 독점을 위한 경쟁, 개체 사이의 공격적 상호작용이 노동 분담을 강화하며, 쓰레기 내버리는 개미가 군락 동료들의 적대행동으로 계속 그 일을 하도록 강요되는 고찰, 합의 도출과 같은 의사결정 체계가 아닌 단지 동료와의 접촉수 감지에 의한 정족수의 다수가 결정하는 혼란 속의 질서, 버섯 농장을 가꾸며, 기생 곰팡이와 벌이는 군비경쟁이나, 둥지의 환기 시스템, 이산화탄소농도조절, 극미한 페로몬의 성분차이가 만들어내는 조직과 번식의 행동 변화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작업마다 최적 효율 달성을 위해 어떻게 융통성있는 행동프로그램으로 노동을 분담하는지에 대한 수천의 사례는 저자들의 주장처럼 인간 두뇌 속 뉴런들의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나 각종의 컴퓨터 알고리즘의 설계에까지 그 통찰의 결과물이 도움을 주고 있음과 같은 기술적 실익을 획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또한 수많은 종의 진사회성 개미 군락마다 그 사회성 진화정도가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어, 진사회성 사회가 밟아온 진화과정을 이해하고, 그 결과 결정 규칙을 밝히는 데 인간 사회의 진화와 관련하여 유비적 미래 예측의 수단이 되어 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들이 지니고 있지 못한 선()할 수밖에 없는 선천적 이성(理性)이라는 고유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 과학이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 있다. ‘귀환 불가능점이란 것은 인류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사회성 곤충들과는 달리 되돌릴 수 없는 진화적 강을 건널지 말지의 선택이 자연이 아닌 인간 자신이 쥐고 있다는 것이다. 최고의 진화종인 아타니족 잎꾼개미와 대비되어 소개되는 침개미 속들의 개미들에서 관찰되는 번식 계급을 위한 투쟁, 일꾼 개미들의 경쟁처럼 고착된 계급사회로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발견되는 술수와 폭력성은 과연 부적응적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야야 할 것 같다.

 

변화 없는 삶, 매일이 동일한 삶, 아마 이러한 영원성, 동일성이란 시간이 멈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살아있는 것일까? 죽은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시간이 백 년 동안 멈추었을 때를 회고하는 백팔십사 세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성중작가의 이슬라라는 소설이 있다. 멈춘 백년이 과연 인간의 삶을 얼마나 의미 그득한 것으로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또 다른 야만과 폭력, 살아 있음에 대한 고통의 외침이 있을 뿐이다. 너무 나간 것 같다. 말하자면 이런 생각이다. 이들 진사회성 곤충들의 사회성 진화와 관련한 유전체적 지식의 습득, 단순한 되먹임 혹은 본질적 행동의 의례화에 따른 신호 의미의 축적과 같은 의사소통의 행태학적 이해, 의사결정의 단순성과 그 규칙의 이해처럼 인간이 미쳐 발견해내 못했던 기술적 이해의 확장과 같은 인류의 반성적 삶의 도움이 아니라, 과학 만능적인 발상에 의거한 인간과 인간사회의 사물적 이해와 자연선택은 곧 옳은 것이라는 논리로 진행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지적 혼돈으로 보이는 상태로부터 어떻게 전체적으로 질서가 창발 되는가? 와 같은 의문에서 출발되는 단순한 결정규칙들의 합리성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곤충생물학의 발전적 연구에 갈채를 보낸다. 여기에는 인류의 반성적 삶에 의미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모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생물학, 특히 진사회성 곤충에 대한 최고의 연구 업적을 담고 있는 인류의 위대한 저작이다. 개미의 생태적 진화의 모든 것을 접할 수 있는 걸작임에 매 페이지마다 탄성을 지르지 않은 곳이 없다. 그만큼 이 책이 지닌 권력은 엄청나다 할 수 있다. 또한 그 만큼의 인간과 인류 사회에 대한 책임도 지니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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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19-01-12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보시다니 대단합니다

필리아 2019-01-12 14:47   좋아요 1 | URL
우연히 기회가 닿았네요. 의사소통과 진사회성의 조건등을 설명하는 장은 가히 독서의 시간이 아깝지않네요. 고맙습니다. 닷슈님~

얄라알라북사랑 2019-03-09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파노라마섬 기담 / 인간 의자 대산세계문학총서 15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단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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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이셔널한 촉각 관능의 세계, 그로테스크한 인체예술적 취미의 전형을 볼 수 있다. 농축된 모조품으서의 현실을 황당한 유토피아로 그려낸 수작(秀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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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go 2019-03-01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몰라서 여쭙습니다
대개 수작은 한자를 秀作 이라고 쓰는 것 같은데
殊作이라고 쓰신 이유가 달리 있는지요?

필리아 2019-03-0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vango님이 맞습니다. 한자변환을 무심코 해버렸네요. 수정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미스 플라이트 오늘의 젊은 작가 20
박민정 지음 / 민음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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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공동체라는 말에 어떤 기쁨도 위안도 느끼지 못할 것 같아요.”

- P133 유나의 편지에서

 

 

요즘 들어 세상이 두렵다는 생각을 부쩍 많이 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이 사회가 공감 능력이 부재한 인간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깊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감정과 말을 쏟아내면 그뿐, 타인의 느낌과 표현에는 무감하다. 아마 미투’, ‘갑질과 같은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언어들이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타자란 내 욕구를 받아내는 대상일 뿐, 게다가 라는 에고이스트에 방점을 찍어대며 자기애를 부추기는 정신병적 미디어 세계는 세상의 더러움, 사회적 불의에 자신의 공모 사실을 인식할 능력조차 앗아가 버린다. 우리 모두는 공모자다.

 

소설은 감정 노동에 시달리는 항공 승무원 여성의 공포와 불안 가득한 절망적 다짐의 일기로부터 시작된다. “아빠, 여기서 실패하면 군말 없이 삶으로 돌아갈게요.” 그리곤 불명예 제대한 공군대령 홍정근이 자살한 딸아이의 장례식장이라는 낯섦과 혼란의 지대에서 손님처럼 서성거리며 타자성(otherness)과는 괴리된 투박하고 어설프며 고집스럽게 뱉어내는 중얼거림의 장면으로 이어진다. 아내와 딸아이와 결별한 채 10여년의 시간이 지나 주검이 된 딸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성장과정과 일상의 삶, 그녀의 생각과 환경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인 유나의 일기, 유나의 연인이었던 주원’, 정근의 관사시절 운전병이자 유나와 같은 항공사 부기장이었던 영훈, 그리고 유나의 죽음을 이해해보려는 정근의 목소리를 오가며, 오늘 우리네가 상실한 것들, 그래서 추하고 무서운 세상, 그렇게 되어가는 공동체 공모자들의 민낯을 살펴보게 한다.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인 우리들이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고.

 

정말 무심히 저지른다. 타자의 배제와 몰인식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인간들로 넘쳐난다. 타인과의 정서적 교감, 타인의 언어와 표현에 대한 숙고적 경청(reflective listening)이란 말이 생소할 것이다. 이것은 곧 자신의 생각과 감정관리의 미숙함과 자아통제의 어려움으로 나타나곤 한다. 소설 속 정근은 오늘 우리네들의 초상일 것이다.

 

전투기 도입과 정비와 관련한 부정 자금의 수수를 관행처럼 여기던 정근은 내부고발자인 윤 대령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곤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았으므로 결백하며, 어떠한 도의적 책임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부당한 불명예를 뒤집어쓴 자신은 위로받고 이해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 대령의 죽음이라는 세평에 대한 딸 유나의 의문에 정근은 극악한 폭력으로 대응한다. 아내 지숙과 딸을 향한 무자비한 폭행은 정근과 모녀와의 이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정근이 딸의 자살 원인 규명에 나서는 모습은 주변 인간들에게 공감을 지펴내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의미하는 본질을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마 이 본질의 규명은 유나의 일기와 주원의 회고, 영훈의 기억을 통해 바로 지금 오늘의 공동체가 상실한 가치를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타자성이라는 궁극의 가치를 알려주는 듯하다. 그것은 대령 사모의 차량을 운전하는 영훈의 입을 통해, 혹은 유나의 기억을 통해 운전석 옆자리에 앉기를 고수하는 어린 소녀의 배려와 존중의 의미에서, 임신상태에서 상사의 대소사에 노동력을 동원해야하는 병사의 아내인 혜진의 유산을 돌보는 유나의 엄마, 대령 정근의 아내인 지숙의 속 깊은 자기 이해와 배려의 행위에서 인간의 접촉, 그 따스한 정서 교감의 빛을 보여준다.

 

소설의 서사는 이처럼 정근의 자기애와 대척점에서 타자성을 부각하기도하지만 유나를 죽음으로 내몬 사회적 공모관계를 엄폐물인 구조적 형태에서 끌어내 가시화해내기도 한다. 자신의 무능과 배척을 벗어나기 위해, 직장에서 쫓겨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유나와 부기장의 불륜관계라는 누명을 씌워 고발하는 항공사의 엑스맨 제도(숨은 감시자)와 이를 교사하는 임원의 행위, 이를 모른척하는 동료집단의 행태는 인간사회, 그 공동체의 역겹도록 더러운 현실을 드러낸다. 타인의 진심과 비극을 이용하는 인간들의 사회, 우리는 그런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다.

 

박민정 소설의 문장들은 더할 수 없이 나지막하고 조용하다. 그러나 소박한 어느 문장에도 강직한 의미들이 날카롭게 꽂혀있지 않은 곳이 없다. “상대가 아픈 이야기를 할 때 쓸데없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지 않는 것처럼 타자성이란 타인에 대한 정감 깊은 배려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갓 태어난 아기시절, 엄마의 젖가슴에 작은 손을 올려놓고 그 품에서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안정감을 느끼던 그 기억을. 내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타인의 피부와 체온을 느끼며 교감할 줄 아는 그 정감의 무의식이 아닐까? 아기의 작은 동작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베풀어주던 타인, 그 배려의 손길을.

 

내가 살기 위해서 동료를 죽이는 것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것, 사회적 불의에서 자신만은 쏙 빠져나와 타자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것, 자기를 알려고 해 본적이 없는 결코 반성적 사유라는 것이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것, 이 세상의 더러움에 자신도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능력이 없는 것, 정근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아니 우리가 느껴야 할 것들이지 않을까? 유나가 느껴야 했던 분노와 배신, 그리고 그녀가 넘어서 마주한 슬픔과 그 책임감의 실체란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이지 않을까?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유나의 글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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