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에 대하여
라헬 베스팔로프 지음, 이세진 옮김 / 미행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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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고뇌하며 산다, 진정한 평등은 이것 말고 다른 근간이 없다.”

- 76,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만찬에서

 

라헬 베스팔로프’(1895~1949)는 자유와 윤리의 사유를 치열하게 고뇌했던, 잊혀진 사상가이며 비평가이자 문필가다. ‘지성과 영혼자체라 일컬어졌던 인물이 어떻게 50년 이상 도서관 아카이브에 잠들어, 사장되어 있어야 했는지 참으로 인간 세계의 아이러니는 차고 넘치는 듯하다. 그녀가 비평 활동을 하던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시기를 대표하는 여성 사상가로서 잘 알려진 한나 아렌트와 시몬 베유와 대비하면 말이다.

 

Rachel Bespaloff, 1895~1949

 

프랑스어로 글을 쓴 유대계 사상가와 문필가들의 글을 수집하던 텔아비브대학 교수 모니크 쥐트랭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수년 전에 시몬 베유가 쓴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와 동시대에 동일한 대상을 주제로 발표된 글이라는 점이었고, 베스팔로프는 이 동일한 텍스트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러한 호기심을 훌쩍 뛰어넘는 독창적인 깊이와 또 다른 윤리적 통찰을 보게 됨으로써 한 지성의 지난한 통회(痛悔)의 응시에 잠겨들었다.

 

아름다움과 힘에 관해서는 충분하다가 절대로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과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그리스의 지혜다.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없다. 힘 자체는 죄과(罪科)의 결정에서 벗어나 있다.” - 6쪽에서

 

베스팔로프 또한 일리아스서사의 궁극을 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시몬 베유와 같이한다. 그러나 시몬 베유가 말하는 은 힘 자체라기보다는 힘의 불순한 행사, 힘의 비윤리적 행사에 기초하지만, 베르팔로프는 힘 자체, 그 무엇으로부터도 비난당하지 않는 절대적이고 본질적 운동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구별된다. 시몬 베유가 일리아스에서 발견한 힘은  사람을 종속시키고, 그 앞에 서면 움츠러드는 힘"이지만, 베스팔로프는 삶의 궁극적 현실이고, 궁극적 환상인 존재들의 심원한 본성이다. 그래서 시몬 베유가 말하는 아킬레우스의 야만적 힘에 대한 저주 섞인 비난의 말은 여기서 자리를 잃고 만다. 헥토르의 지키려는 힘이나 다 부숴버리고 자신마저 부수는 아킬레우스의 힘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 된다. 고대 음유시인 호메로스에게는 지키는 것과 파괴하는 것은 하나로 구성된 세계 일 뿐이며, 그들의 불행한 행위로 인해 생이라는 평등함, 경험을 통해 생성된 본질, 존재로의 생성의 소산을 보게 한다.

 

베스팔로프는 여기서 인간이 처한 세계의 현실을 마주보게 한다. 해결도 구원도 없는 우주적 공포의 토대가 되는 악몽같은 세계.제 힘을 마음껏 뽐내기 위해 원한을 돌보며 위대함을 향한 의지를 마구 휘두르는 아킬레우스인가, 아니면 백성,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과 아내를 지키기 위해 행복을 향한 의지에 나서는 헥토르인가는 사실 무용한 물음이 되고 만다. 생 자체를 바쳐서라도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고 묻고는, 헥토르의 용기가 아킬레우스의 영웅심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답하는 것은 괜한 생각이 된다. 하지만 인류사의 문제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행복의 의지라는 수호자의 도약은 거칠고 억센 공격자의 쉴 새 없는 힘의 의지, 위대함을 향한 의지에 패배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나치의 공포에 좌절했던 유대인 베스팔로프는 어느 한 편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펼쳐진 인간 세계의 실체를 그대로 들여다보고 바로 그 실재의 양상으로부터 인간의 윤리와 종교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베스팔로프는 호메로스가 전사들의 아름다움을 기림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을 결코 이상화하거나 양식화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생성 그 파괴적 창조의 원천으로써, 혹은 이 원죄적 실체를 통해서 윤리의 원천을 발굴하는 것이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대결에 이르는 가히 공포의 전율이 지속되는 장면이 있다. 아킬레우스는 그날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헥토르를 따라 잡지 못했고.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의 추적을 벗어나지 못했다.”, 약탈자의 추적과 피해자의 도주가 영원히 계속되는 악몽에 이어, 아레스는 공평하시니 죽이는 자들을 죽이신다.”는 말이 맴돈다.

 

베스팔로프는 이러한 힘의 공격적 행사가 없는 세계는 평화의 권태로  마비될 것이라 말하지만, 아마 이것은 겉보기일 것이다. 힘의 아름다움은 생기를 불어넣고 고양하지만, 동시에 불길하고 두려운 것이다. 결국 인생의 부침이란 정복하고 파괴하지만 풀어주고 해방하는 심오한 필연적 숙명이라는 것일 게다.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한 해독은 헥토르, 테티스와 아킬레우스, 헬레네....프리아모스와 아킬레레우스의 만찬과 같이 인물 개인에 대한 성찰을 중심으로 하듯 그녀는 개인의 의지에 중심을 둔 영원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트로이에서 모스크바까지신들의 희극, 두 글이 있지만, ‘힘의 숙명을 말하기 위해 비교 작품으로써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공통점과 차이를 부각하여 호메로스의 정신을 선명하게 말하거나 신이라는 한 존재자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테티스와 아킬레우스에서는 우주의 힘과 인간의 정념에 동시에 연결하는 이중의 유대를 지닌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우화와 실존에 맞닿게 하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한편 헬레네는 완벽한 미모가 어떻게 완벽한 불행의 의미가 되는 지, 흰 베일을 두르고 통렬한 고뇌에 싸인 노예보다 자유롭지 못한 신세의 여인이어야 하는지를 읽게 된다. 아름다움이 죽음과 기묘하게 들러붙는 그 필연, 아름다움이 닿은 것은 전부 시커멓게 타버리거나 돌처럼 굳어졌다.”, 아름다움에는 힘의 아름다움과 같이 필요악이 있음이다. 호메로스가 아름다움에 힘의 준엄성을 부여하고 숙명의 부류에 넣었다고 해독한다. 아름다움은 마치 힘이 그렇듯 정복하고 파괴한다. 헬레나의 아름다움이 숙명 앞에 서 생성의 막연한 죄의식에 휩쓸리는 것은 그렇기에 불가피한 것이 된다.

 

어쩌면 베스팔로프가 일리아스에서 읽어낸 정말의 사유는 신들의 희극이라는 글일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평화의 사교계 파티 장면처럼, 신들이 모여 전쟁터가 된 도시 트로이아를 내려다보며 그 어떤 진지함도 없이 웃고 떠드는 것이, 마치 모든 것의 원인이면서도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은 전쟁과 평화속 귀족들이 보여주는 이 세계의 희극성과 같은 것이라는 말일 게다. 진지함의 부재는 호메로스나 톨스토이에게 인간 이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책임은 모순의 승리를 승인하는 신들의 웃음 속에 흩어지고 만다고.

 

아마 호메로스의 탁월한 장치였을 것이다. 제우스를 비롯한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이들 신들은  선동분자이고 영리한 선전가이며, 살육의 냄새와 비극적 정념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싫어하지 않는.  그들은 안전하기에 전쟁이 없으면 심심해 죽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베스팔로프는 관조 하는자 제우스를, 다만 정신적 외관으로서 나타내긴 하지만 결코 구현하지 않는 현실의 상징임을 읽어낸다. 역사를 힘의 비극들, 집단적 정념의 연극이 벌어지는 장소로 본다고,  멀리서 벌어지는 일을 높은 곳에서 담담하게 내려다보는 시선만으로도 전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우주적 차원으로 되돌려 놓는 동시에 인간의 실존에 형이상학적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이다. 즉 호메로스가 고양하고 신성화했던 것은 힘의 승리가 아니라 불행에 처한 인간의 에너지, 희생당한 영웅의 영광, 후대에 전해질 시인의 노래임을 통해 숙명에 패하지만 여전히 숙명에 도전하고 뛰어넘으려는 존재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존재의 소멸에 임박한 순간 가장 자기 자신답다.” -65쪽에서

 

아마 인간은 극단적 위협에 처했을 때 비로소 자기 세계의 중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 존재인 모양이다. 때문에 죽음으로 가득한 서사시는 끊임없이 개조되는 생성으로서의 존재, 세상을 변모시킬 진실, 새로운 현실을 수립하겠다는 원동력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제한된 시각의 오류들을 발견하고, 그 널브러진 잔해 속에서 구해낸 시험 재료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넘어서게 된다. 사실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는 그녀의 사후인 1945년 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책의 번역자는 1939년이라 쓰고 있다.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하여1943년 출간 발표되었다. 장 그르니에를 통해 베스팔로프는 1941년 시몬 베유가 일리아스를 읽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하지만, 발표되지 않은 책을 베스팔로프가 읽었으리라는 억측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읽는 이의 관점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베스팔로프의 글은 철학적 이해와 깊이에서 시몬 베유의 그것을 몇 차원 능가한다고 말하고 싶다.

 

철학자 장 발의 서문이나 모니크 쥐스랭의 짧은 베스팔로프에 대한 전기와 그녀의 미출간 원고- 하이데거, 샤르트르, 카프카, 카뮈 등의 비평문 등 - 에 대한 소개와 비평의 글, 베스팔로프가 남긴 또 하나의 사유인 비극의 정신에 대한 성찰은 자유가 명확해지는 시련과 자유가 휘청거리는 함정을 동시에 제공함을 통찰한 실존주의자로서의 인간조건에 대한 절창의 글도 수록되어있다. 나는 신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죽은 것은 내가 신에 대해 품었던 이미지다. 다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신의 몫이다.”, 이 문장에서 베스팔로프의 쇼아에 대한 무기력과 신의 침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처절한 고뇌를 우리는 읽게 된다. 비극을 무시하고 생명을 축복할 수 있는가라는 이 윤리적 물음에 우리는 답할 수 있을까? 최후의 선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가스실에서, 인간이 자신의 파괴를 넘어서까지 과연 자기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궁극적 방편을 찾아낼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다.

 

일리아스에 대한 6편의 글과 이 글들의 총체적 윤리적 사유인 한 편, 그리고 두 철학자의 각기 한 편씩의 글로 구성된 힘의 이원성이 투쟁하는 인간 세계의 진실을 엿보는 탁월한 저술이다. 또한 한 편의 대()古典 작품에 대한 절대적 침묵의 장면에서조차 힘의 사태를, 인류의 오래된 힘과 협잡사이의 협약까지 읽어내는 가히 독보적인 문학비평이기도 하며, 실존주의의 비판적 수용자로서의 심원한 윤리적, 종교적 사유를 읽을 수도 있다. 불행에 처한 인간의 에너지, 후대에 전해질 시인의 노래로써 숙명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와 그것의 영원성을 생각게 하는 호메로스(일리아스)를 이 책을 참고 삼아 읽어보는 것도 썩 괜찮은 취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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