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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평짜리 숲 ㅣ 트리플 30
이소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3월
평점 :
어쩌면 이 소설은 또 하나의 사고(思考) 실험일지도 모르겠다. 이상적 사회와 삶의 구조와 형태에 대한 문학작품들이 수많이 등장했음에도 우리들은 여전히 그것들에서 디스토피아의 모습을 발견하고 아연실색하곤 한다. 평등이 주어지면 자유가 실종되고, 자유가 주어지면 계급과 불평등, 착취의 구조가 은연히 드러나기 일쑤다. 문학평론가 조대한이 해설에서 샹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말한 ‘사회적 적대들(antagonisms)'을 인용하여, “사회 체제 속 내재된 모순과 균열, 틈이 바로 사회의 원동력을 지속케 하는 조건 그 자체”임을 말하듯, 우리들이 희구하는 이 세계의 무수한 균열들과 모순을 깨끗이 없애는 것이 과연 정말의 이상적 사회일까 하는 물음이다.

소설집은 3편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된, 궁극에는 이 같은 하나의 물음으로 모아지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열두 개의 틈」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미 ‘틈’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틈이란 지구가 자전축을 잃고, 이로 인해 해수면 상승과 공기층이 무너져 난파된 구조선 같은 열두 개의 에어포켓에 난민처럼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임시 거주지를 의미할 것이다. 이 단편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이처럼 “더는 살 곳이 못 된 지구”에서의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상황을 선명하게 인식한 사람들,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할 신이란 없다는 깨달음에 이른 자들은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거나 앎의 의지가 없기에 자신들의 믿음을 대신해 줄 누군가를 만들어내고, 그 존재를 추앙하며 자신들 몫의 앎을 떠넘기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며 알량한 생을 이어간다. 만일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천문학자라는 아감마는 무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과학을 그들을 기만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신적 존재로 군림한다. 이 맹목성은 눈먼 재물을 빼앗는 더없이 좋은 방편이다. 소설은 궁극적 물음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 ‘아진’과 ‘이린’이라는 열일곱 소녀들과 그 가족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에어포켓이 더는 살 수 없는 곳이 되기에 두 곳의 장소, 데저트랜드와 아이스랜드로의 이주라는 최후의 선택이 주어진다. 낮만 지속되는, 가끔 비가 오고, 몸 뉘일 공간이 기본 옵션으로 제공되지만, 돈이나 다른 재산을 내면 보다 넓은 곳으로 이주할 수 있다는 데저트랜드와, 식사와 직업도 제공되고 시설은 아주 좋지만, 극야로서 밤만 계속되는 영하 58도의 아이스랜드에서 택일하여야 한다. 가족 간의 논의 끝에 아진네는 데저트랜드로, 이린네는 아이스랜드로 이주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아진이 헤어지기 전에 이린에게 건네는 책이 바로 이 소설 『세 평짜리 숲』이다. 이 책은 매우 의미심장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만 남기기로 한다.
단편 「세 평짜리 숲」은 데저트랜드로 이주한 아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진 모녀가 할당받은 공간은 각자 한 평의 마굴이다. 몸을 뒤척일 수도, 화장실도 없는 공간, 일자리도 구하기가 어려워 생계도 곤란해지는 그야말로 철저한 각자도생의 세계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반타 빌리지라는 철저히 경계가 세워진 궁전 같은 주택들이 있는 부유층의 거주지가 있다. 돈을 벌지 않으면 한 평의 공간마저도 잃고 죽음의 길만이 열려있는 이주자들의 삶과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아진은 아감마가 에어포켓에서의 대중들을 기만하고 착취한 재화로 반타 빌리지에서 고고하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믿음조차 연명할 수 없는 곳임을 암시하는 것일 게다.
아진은 생존을 위해 남의 것을 훔치는 일을 하는 데드샌드에 가입한다. 광케이블을 훔치는 일의 망보는 일부터 시작하지만, 이내 공기가 희박한 에어포켓에서의 삶에 익숙한 신체를 이용하여 심해에서 케이블을 찾아 훔쳐내는 일을 맡고, 목숨을 건 행위의 대가로 방 한 평, 두 평을 모은다. 그곳은 오직 자본에서만 비롯되는 삶의 영위만이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진과 데드샌드의 보스와 주고받는 흥미로운 대화가 있다.
“돈으로 못사는 자유가 있다고 그랬어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자유를 사, 바보 아니야?
자유를 주지, 돈이 있어야 자유를 살 수 있을 거잖아. 난 돈을 줄게. 넌 그걸 착실히 모아서 자유를 사는 거야.“ -66쪽
아진은 보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충성을 다한다. 반타 빌리지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대가로 받은 부동산을 절약하며, 악착같이 모아 스물 네 평짜리 집을 가졌을 때, 아진은 보스가 나누던 대화를 엿듣게 되고, 돈을 다 모으면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상층과 하층을 연결하는 브릿지 노릇을 하며 부를 모아 반타빌리지에서 살며, 자유와 부의 여가를 누리는 삶을 위해서 주인과 하인의 그 시원적 원칙인 춘권과 엘리스의 이야기를 실천에 옮긴다. 이렇게 이야기를 서술하고 보니, 아진이라는 인물이 뚜렷하게 그려진다.
철두철미한 자본지상의 세계, 자유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세계, 아진은 그 체제가 지닌 모순에 직면해 주저앉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친다. 그런데 그 부딪침이란 모순과 부조리를 전복하여 새로운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그저 자신만의 돈이자 곧 자유의 권리를 위해 그 자리를 빼앗는 것으로 돌파한다. 결국 내재적 한계를 지닌, 즉 모순과 균열을 그대로 유지하는 체재내적 홍길동식 출세주의로 보인다. 모든 것이 봉쇄된 삶의 조건을 가진 자로서 불가피한 것이라고 옹호하고 싶지만, 그런 세계는 결국 다수의 노예화와 약자의 착취와 희생을 거름으로 한 악취가 맴돈다. 지극히 경쟁과 이기주의를 기초로 한 체재내적 보수적 선택.
세 번째 단편인 「창백한 푸른 점」은 아이스랜드로 이주한 이린네 가족의 생활기이며, 소설의 대단원이자 세 편 소설의 주제를 하나로 결집한 장이기도 하다. 아진은 아홉시부터 다섯시까지 컨베이어벨트를 오가며 단순노동을 한다. 엄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밥공장에서 밥순이를 한다. 가족 모두 동일한 일을 단순반복하며 살지만, 아주 깜깜한 밤만 지속되고, 일렬로 무한한 듯 길게 열 지어져 지속되는 컨테이너 밖은 별을 보러 나가기 어려운 그런 곳이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다른 꿈도 허가되지 않으며, 오직 아이슬랜드 설비사인 YK건기라는 기업의 규칙뿐이다. 이 규칙에 도전하는 자는 맨 몸으로 밖으로 나가 얼어 죽는 형벌이 기다린다. 얼어붙어 부서져 존재조차 찾을 수 없는 형벌.

어느 날 아버지는 딸 이린에게 말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인데, 어째서 여기는 전부 하나처럼 보일까? 넌 이상하지 않니?”, 이 체제 저항적인 말은 쥐가 듣고, 재판에 부쳐진다. 재판관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진정한 자유 시간이란 내가 원하는 때에 가지는 것이고 진정한 상상이란 내가 이룰 수 있을 정도의 꿈에 가까워야 한다.” 그리고 “다 같이 가난한 것이 다 같이 잘 사는 것인가요?”라고 항변한다. 재판관은 답한다. “그럼 버는 만큼 부자가 된다는 데저트랜드로 가지, 왜 이곳에 왔나? 최소한의 인권보장을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나?” 이 대화만을 보면 분명 딜레마다.
그러나 그 보장된 인권이란 것이 오직 샌드위치와 하룻밤 자는 것이고 꿈꿀 자유의 박탈과, 평생 단순노동이며, 오직 밤만 존재하는 삶의 지속이라면 과연 그것이 정말 보장된 인간의 권리라 할 수 있는가라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남의 것을 훔쳐 자기 배만을 불리는 것이 ‘버는 만큼 부자’라는 그릇된 정의에 기초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순이고 부정의다. 부정의를 전제로 한 자유의 박탈에 기초해 오직 생존의 가능성만 주어진 평등을 평등이라 부르는 것도 이율배반이고 모순일 것이다. 아무튼 아진의 아버지는 밖으로 내쳐져 이내 바닥에 얼어붙어 다리조각만 남긴 채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삼일간의 가족 애도기간인 휴가가 주어지고 이린은 특수복을 입은 채 컨테이너가 늘어선 길을 걸어본다. 그때 아진은 인공 햇빛을 구현한 가짜 창문도 달려있는 컨테이너를 발견하고 모두가 평등하다던 이곳에도 결국에는 계층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 느끼게 된다. 이린은 아진이 주었던 책과 샌드위치를 한 덩이 특수복 안에 넣은 채 컨테이너의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무엇이 있는지, 그가 발견할 앎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발길을 걷는다. 그녀가 향하는 미지의 미래를 향한 걸음은 아진과 같이 주어진 시스템에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부딪쳐 맞서는 것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여리고 작은 걸음의 행보에 더 마음이 간다. 설혹 그녀가 미래를 향한 걸음 중 얼어붙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어쩌면 작가도 나의 믿음에 기울었다고 믿는다. 두 번째 단편인 아진의 시스템 내 단순한 자리바꿈을 향한 투쟁이 아니라 이린의 미지를 향한 걸음을 마지막이자 서사의 총체를, 그 최종적 이야기로 삼은 것은 끊임없이 희망을 향해 걸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운명이며, 후대를 위한 책임의 행보라고 말이다. 샹탈의 체재 내 균열과 모순이 사회의 항구적 존속을 위한 원동력이라는 말은 일견 그럴듯한 말처럼 들린다. 그 모순과 이율배반에 저항함으로써 인간 사회는 조금씩 윤리적으로 진전해 나가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오직 시적 정취로서 푸르고 창백한 지구를 우아하게 표현했던 칼 세이건은 아마도 상처로 시퍼렇게 멍든 상흔, 오직 어둠의 그림자와 극한의 추위로 얼어붙어 시퍼래진 손상된 지구, 해수면 상승으로 온통 바닷물만 넘실대는 지구를 상상하지 못했다. 소설은 두 개의 커다란 축을 지닌 물음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그 한계에 이른 생태계 파괴로 인한 근미래에 닥칠 위기라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인류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그리고 자유와 평등, 즉 자본이라는 물질 만능과 이의 공평 분배라는 그 끝없는 조화와 갈등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들일까 하는 의문이 앞선다.
아마 자유와 평등, 생태계 파괴의 물음은 동일한 근원에 대한 다른 관점의 의문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의 모든 것, 인간도, 자유도, 평등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의 근저에는 방임되는 생태계, 즉 자연 자원의 화폐화라는 동인이 있으니 말이다. 일종의 사고실험인 이 소설을 읽으며 오늘의 우리네 삶의 태도와 세계의 정의와 자유, 평등,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막론한 생각을 해보는 시간이 되어 줄 것 같다. 젊고 발랄한 기운이 넘치는 문장들이 주제의 무거움을 느낄 수 없을 만큼 경쾌하다. 그리고 호흡이 짧은 단편으로 구성되어 어느새 작품을 내쳐 읽는 자신을 발견케 하는 작품이다. 트리플 시리즈는 일상에 바쁜 사람들도 출퇴근시간, 짧게 주어지는 짬에 읽을 수 있는 책형과 분량으로, 부담 없는 한국문학의 접근 통로이기도 하다. 시인이 쓴 첫 소설이 아닌가 한다. 건강한 r느낌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