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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평점 :
책을 읽으면서도, 번역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예전에 한창 일본 소설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번역가가 궁금해진다.
글에 묻어나는 특유의 감성은 번역가에 따라 달라지는 걸 알게 되어서 일까.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권남희의 에세이집 [귀찮지만 행복해볼까]를 읽었다.
귀찮지만,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내 인생의 행복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귀찮음이 앞서는 이런 제목. 끌린다. 정말.
귀찮지만 뭘 먹어야 하니까 먹는, 귀찮지만 안 할 수는 없으니까 하는, 내 인생 같은 제목ㅎ
정세랑 소설가의 평 "권남희 번역가의 글은 정말 재미있다!" 가 표지에 크게 쓰여있다.
정말?
배송을 받고 먼저 가볍게 훑어보려고 했다가 완전 훅 빠져버린 에세이 집이었다.
에세이집은 특히 처음부터 별로면 끝까지 별로다.
내가 읽은 에세이집 중에 손에 꼽히는 책 중 하나가 될 이 책.
28년 차의 번역가의 내공인가.
글이 참 재미있다. 억지로 짜낸 재미가 아니라, 그녀의 일상에 소소한 재미가 느껴진다.
번역가로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집순이로서, 눈물이 많은 여자로서, 강연할 때 덜덜 떠는 그냥 인간미 넘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막막한 바다를 바라보는 누군가에게,
그 바다를 건너는 누군가에게
한 줄쯤은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시작한다."
로 시작하는 이 책은, 빨간 펜으로 줄 치며 읽고 싶은 책이다.
차례
프롤로그_사실은 사실이다
1장 하루키의 고민 상담소
(하루키의 고민 상담소/무라카미 하루키와 노벨문학상/하루키가 마음을 허락한 사람/무라카미 하루키식 긍정적으로 생각하기/일본 편집자가 주고 간 책/이동진의 빨간 책방/아메리카노와 생과일주스/쫄보지만 화를 낼 때도 있다/카모메 식당의 그녀/오해를 남기고 떠나지 말기/이런 데서 위로를)
2장_잡담입니다
(애플과 구글/인맥인가 팔로맥인가/오가와 이토 씨의 메일/그녀의 시집 제목/무지한지 무례한지/타 업종 사람들의 습격/퇴사 위로 멘트/발 끼우고 문 닫기/헷갈리는 제목/눈의 치매/잡담입니다)
3장_남희 씨는 행복해요?
(그런 아이였다1,2/덜덜 떨었던 첫 강연/번역하는 아줌마/이제 인정하자/나무 늘보가 느린 이유/이번 생, 망작은 아니었다/남희 씨는 행복해요?/동창회에 가지 않는 이유/사람 잡는 갱년기/이놈의 슬럼프/내게도 익숙한 새벽 세 시)
4장_자식의 마음은 번역이 안 돼요
(사진은 사절/주객이 전도하다/너의 엄마를 졸업한다/우리 동네 훈육대장/21년 동안 냉동된 인연/알바 선배로서의 조언/사랑하는 강아지, 나무/그게 그렇게 울 일이야?/자신의 마음은 번역이 안돼요/관계)
5장_신문에 내가 나왔어
(내 팔자가 부럽다니/효도와 디스의 경계/알면서 왜 그랬어/엄마 이야기/신문에 내가 나왔어/그리운 아버지/할머니의 썸/맺힌 한마디를 날릴 때는/95세에 갖고 싶은 것/추억의 사오정 소환)
6장_가끔은 세상을 즐깁니다
(나이 50에 국카스텐 덕질을 하다/츠바키 문구점의 가마쿠라/특가 마쓰오카 2박 3일/더 늙기 전에 한 곳이라도/여행은 타이밍/곁을 내어 준다는 것/동유럽 여행의 발견/다시 돌아온 내 자리)
에필로그_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공감되는 이야기가 참 많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도 있었지만, 그냥 권남희 작가의 생각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그중 '발 끼우고 문 닫기'
유태인은 싸우고 돌아서서 "너랑 다시 안 볼 거야!"하고 집으로 들어오며 문을 '쾅!'닫는 게 아니라, 한쪽 발을 살짝 끼우고 닫는다고 한다.
마지막 말만은 입이 찢어져도 하지 말라는 조언.
지금은 마음이 그래도, 조금 지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될 수도 있으니까.
살아가면서 한 번쯤, 겪었을 이야기다. 나는 한 몇 번쯤...
헤어지더라도 열린 관계로 헤어지는 게 어떨까.
어찌 보면 치사한 방법이라지만, 언제 어떻게 마주칠지 모르니까.
남녀 관계는 예외!
앞 이야기와 연관 있다면 있을 수도 있는 이야기.
'오해를 남기고 떠나지 말기'
나한테 가장 인상이 깊은 이야기였다.
역자 후기를 보냈는데, "선생님, 더 추가해주실 거죠?^^"라는 글을 써서 되돌아왔다.
완성 원고에 그리 말하니, 권남희 작가의 기분은 살짝 상했던 터.
"선생님, 더 추가'해주실 거죠?'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빨간 펜으로 고쳐 보냈단다.
글을 받은 편집자는 또 열심히 역자 후기를 추가해서 수정했다.
권남희 작가는 내 후기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다시 또 본인 스타일로 고쳐보냈다.
이 모든 건 서로의 오해였던 거다.
권남희 작가가 습관처럼 "역자 후기는 교정볼 때 생각나면 더 쓸게요."라고 했고,
편집자는 그 말 때문에, "선생님, 더 추가해주실 거죠?"라고 써놓은 거다.
그런데 빨간 펜으로 "더 추가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오니,
편집자는 나름 역자 후기를 수정해본 것.
이 오해는 다행히 풀렸지만, 세상에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겠냐는 거다.
내 입장에서, 내 나름대로의 해석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꺼내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을.
사람들은 오해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며 산다.
나도 그러고 사는 게 아닐까.
끝내 풀리지 못한 채 묻혀 버린 세상의 오해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오해라는 게 참 어렵지만, 풀지 못할 건 또 뭔가 싶기도 하고...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에피소드였다.
자신을 번역하는 아줌마로 칭하는 사람.
'번역가의 서재'를 취재하고 싶다는 의뢰가 가끔 들어오는데, 서재가 없다고 거절한다는 저자.
저자가 설명하는 작업 공간은 정말 인간적이다.
책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주방, 오른쪽에 거실.
앞에는 텔레비전,. 옆에는 소파,
발밑에는 멍멍이.
주부미가 철철 넘치는 공간.
그래서 따뜻한 번역이 나오는 것 같다는 멘트까지.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내 주위를 둘러보니 웃음이 난다.
아줌마의 공간. 주부미. 뭔지 너무 알 것 같아서....^^;
'관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좋은 관계 나쁜 관계가 있을 뿐이다.
흔히 관계가 파괴된 후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하고 상대방을 비난하지만
관계가 나빠진 것이지 사람이 나빠진 건 아니다.
뭐 사람이라는 게 항상 그렇게 해도
틀어질 수도 있는 거다.
게다가 점점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아도 사는 데 불편이 없다는 저자.
그래서 귀차니스트인 나는 쉬이 관계를 끊는다는 말.
귀차니스트인 나는 너무 공감이 된다.
점심을 같이 먹을, 어디 같이 가야 할 친구가 필요하다고 여겼던 때도 있었지만
점점.
그런 관계가 없어도 불편함이 없어진 지금.
오히려 편함을 느끼기도 하는 지금이다.
저자의 딸이 "다른 사람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너도 행복해 보여. 원래 남들은 행복해 보이는 거야."라고 대답을 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남들도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사실.
인생의 조증도 아니고 어떻게 행복하기만 하겠는가.
서로 행복한 시기가 다를 뿐.
자기가 행복할 땐 남을 보지 않아서 서로 엇갈릴 뿐이다.
인터넷에서 '행복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하는데, 지금부터 행복해 볼까. 아, 귀찮은데...
라고 마무리를 지은 이 멘트.
정말 내가 힘들 때 남의 행복만 보이는 법인 것 같다.
들여다보면 모두 똑같은데.
알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다.
SNS가 특히 그렇다.
나는 힘든데, 다른 사람은 정말 행복하게 지낸다.
그래서 마음이 가라앉을 때도 있다.
작가의 말대로 어떻게 사람이 행복하기만 하겠는가.
불행을 꺼내놓지 않아서 그렇지.
남들 앞에 보여주는 게 '행복한 모습'이었을 뿐.
맺힌 한마디를 날릴 때는 일이 끊길, 인연을 끊을, 냉전 할 각오를 하고 말하라는 조언.
그러나 맺힌 한 마디를 날린다고 좋은 일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현실적인 이야기.
정말 인간적인 에세이 한 권을 읽었다.
평범한 아줌마라고 하는 권남희 작가가 참 특별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