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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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강포에 어린 여자아이를 안고 등 뒤에는 커다란 봇짐을 메고 원청이라는 도시를 찾아 회오리바람이 부는 어느 날 시진에 도착한다. 하지만 원청이 어디 있는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원청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황허 북쪽마을에서 부유하게 자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롭지만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린샹푸의 집에 어느 저녁 아창과 샤오메이라는 남매가 찾아온다. 아주 먼 남쪽 원청이라는 도시에서 경성의 이모부를 찾아 북으로 가는 길이라는 두 사람은 다음날 아침 아픈 샤오메이를 남기고 아창만 떠난다. 아청을 기다리며 두 사람은 결혼을 하지만 얼마 후 기쁨을 상징하는 까치 두건과 경사스러움을 뜻하는 사자 두건만 남긴 채 린샹푸 집안의 대대로 모아온 재산의 일부와 함께 샤오메이는 사라진다. 샤오메이의 배신에 분노와 회한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린샹푸는 목공기술을 배우고 농사를 하며 집사인 텐다와 또 묵묵하게 살아가던 중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며 샤오메이가 돌아오고, 그와 다시 결혼을 하고 딸을 낳은 후 그녀는 또다시 사라진다. 

돌아온 샤오메이에게 린샹푸는 다시 사라지며 딸과 함께 어디든 그녀를 찾아가겠노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 약속처럼 갓난아이인 딸을 안고 집 만한 큰 봇짐을 메고 걷고 마차를 타고 강을 건너 샤오메이와 원청을 찾아 지금까지 자신이 이루워왔던 것들과 익숙하고 소중한 것들을 뒤로 하고 기나긴 여정을 떠나 아창과 아침내 샤오메이가 이야기한 모습과 비슷한 시진이라는 도시에까지 오게 되고 결국 그 마을에 정착하여 딸을 키우며 샤오메이를 기다린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 속에는 샤오메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설립되던 혼란의 시기, 군벌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토비들로 인해 약탈과 살인이 무분별하게 일어나는 속에서도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한파 속을 헤치고 딸을 위해 젖을 구걸하던 중 만난 천융량과 리메이롄, 그들의 아들 천야오우와 천야오원, 시진 상인회 회장 구이민과 그의 아들, 딸들, 그리고 린샹푸의 딸 린바이자. 자연과 사람이 만들어낸 힘든 환경 속에서 그들의 삶은 먹먹하고 외롭고 또 의연하고 담담하며 강인하다. 

살아간다는 건 힘든 일이다. 원청 속 인물들의 삶은 더더욱 그렇다. 그렇기 때문일까, 한페이지, 한페이지 읽는 내내 먹먹하다는 감정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린샹푸의 곧고 의연함이, 천융량의 강인함이, 샤오메이의 슬픔이, 톈다와 형제들의 우직함이 그들과 함께 나 역시 슬프고 기쁘게 만든다. 운명이란, 삶이란 무엇일까. 린샹푸는 샤오메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고향에서 평온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삶을 크게 뒤바꾼 그들의 운명같은 만남은 린샹푸를 새로운 토지와 여러사람과의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주었고, 다음 세대인 린바이자와 천야오우 역시 자신의 운명과 삶을 이어갈 것이다. 아무리 혼란스럽고 힘든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은 결국 살아가는 것이다. 다만 힘든 순간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옳은 선택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하고 또 선택할 뿐이지 않을까. 

‘원청이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원청>은 중국 3대 현대 작가로 손꼽히는 위화의 첫 전기(轉奇)소설이라고 한다. 현실적으로 믿기 어려운 괴이하고 신기한 내용을 다루는 전기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지만 이야기 전체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가히 전기소설이라고 불리기 손색이 없다고 느껴진다. 린샹푸가 찾아 헤메는 원청은 샤오메이를 찾으러 가는 희망의 길로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신기루 같기도 하다. 아무도 모르는 곳, 하지만 언젠가 꼭 도달하고 싶은 장소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을 덮은 후 꽤 오랜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책 표지를 바라보았다. 표지를 가득 채운 산들 너머로 어쩌면 원청에 다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매 작품마다 긴 여운과 감동, 그리고 먹먹함을 안겨주는 위화는 이번에도 역시나 위화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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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역사 - 연기 신호에서 SNS까지, 오늘까지의 매체와 그 미래
자크 아탈리 지음, 전경훈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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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디어만큼 우리에게 크고 빠르게 영향을 주는 매체도 드물 것이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은 물론, 소셜네트워크의 발달로 넘쳐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지니게 되었고, 인터넷,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전세계 어디에서나 원하는 시간에 필요한 정보를 찾아볼 수 있고 다른 이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정보 중에 과연 어떤 정보가 진짜인지 허위인지 구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론매체의 기사나 뉴스에 대해 의문이나 거짓뉴스라는 의심을 가지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지 않은가.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다방면에서 유럽 최고의 석학으로 손꼽히는 자크 아탈리는 기원전 3만 년부터 현재까지 유럽과 북아메리카, 아시아 등을 대상으로 한 미디어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미디어의 미래의 비전을 제시한다.



미디어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사용되었던 연기, 외침 신호에서 시작한다. 기호와 문자의 발명, 말의 가축화, 바퀴의 등장으로 봉화, 전령과 전서구, 우편, 아비조(상인들이 필사하여 동료들에게 판매한 우편 소식지) 등 소수에 의해 전달되었던 수단들은 인쇄술의 발달로 17세기 초 신문이라는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저널리스트가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신문 역시 이전의 정보 전달 수단처럼 권력에 통제 당하기도 하고 거짓정보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대량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고, 멀리 있는 소식을 빠르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소리로 전달하는 라디오와 영상을 제공하는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미디어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15세기 인쇄술의 등장을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 여러나라의 신문의 역사와 각 나라의 정치상황이나 권력자의 모습에 따라 검열 또는 권력에 억압당해 정치선전에 이용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고, 반대로 언론의 자유를 통해 미디어가 발전하기도 하는 다양한 상황을 비교해서 볼 수 있어 국가의 정치 상황과 미디어의 상호작용을 잘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하나 더, 재미있는 점은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같은 미디어는 모두 개인간의 소식을 전하기 위한 사적 수단이 대중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미디어’란 정보를 전송하는 매체를 말한다. 미디어의 기능은 정보의 제공, 감시와 통제, 오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저자는 정보가 ‘정치에서는 권력의 원천이고, 그 소유주에게는 수익의 원천이며, 그 고객에게는 오락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슬프게도 과거부터 현재까지 미디어의 역할을 보자면 이 글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조지 오웰의 ‘1984’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세계가 소설 속 허구로만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는 과연 빅브라더에게서 자유로운가. 가끔 기사나 뉴스를 보다보면 내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거대 언론과 권력자가 원하는 형태로 미디어를 소비하고, 근거 없는 거짓 뉴스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무서운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저자는 전통적인 미디어의 소멸과 디지털 기술을 독점하는 거대 기업이 우리의 모든 정보와 자유를 제어하고, 기술의 발달로 결국 어떠한 매체를 통하지 않고 사람의 뇌와 뇌 사이의 정보 전달이 가능해지면 생각 자체도 통제당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인터넷의 등장 이후 미디어의 형태는 너무 빠르게 변화해왔고 팬데믹으로 인해 더 가속화되고 있다. 이제 인터넷을 통해 온라인으로 서로를 연결, 소통하고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누구나 정보를 제공받는 것뿐 아니라 정보를 생산하고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생산자가 많아질수록 저자의 말대로 진정한 저널리스트의 역할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진실과 거짓정보을 구별하고 소셜네트워크에서 제공하는 알고리즘에 갇혀 자신만의 옮음을 주장하지 않으며 미디어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숙고하고 타인과 자신을 향해 관심을 가지라는 자크 아탈리의 글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점점 더 방대하고 편리해지는 미디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나 자신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미디어가 나 자신에게도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는지,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이 책을 통해 다시한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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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다투다가 하나 되는 무대 클래식 아고라 2
일연 지음, 서철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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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 대해 교육과정에서 배웠으니 당연히 잘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새로 출간된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삼국유사가 이런 내용이었나? 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 정도로 새삼 모르는 내용들이 가득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삼국유사는 대체 무엇이었던걸까...



보통 삼국사기가 왕권과 정치사를 중심으로 한 정사라면, 삼국유사는 불교, 민간 신앙, 설화가 중심이 된 야사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유사’라는 단어 자체가 빠뜨린 일, 남겨둔 일, 버려진 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유교적 관점으로 쓰여진 삼국사기에서 배제된 부분들을 삼국유사가 보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단군신화, 처용, 구지봉신화처럼 신비한 요소들과 환상 속 존재들과 불교와 관련된 민간의 이야기들처럼 다양한 계층, 풍부한 세계관, 입체적 역사를 담은 삼국유사는 역사서나 설화집이라는 면 이외에도 이야기로서의 재미 역시 훌륭하다.



이번에 아르떼에서 클래식 아고라 시리즈로 출간된 삼국유사는 읽기 쉬운 번역과 이야기의 출처, 자세한 해설을 통해 고전임에도 어렵게 느껴지기보다는 편하면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다른 문헌과의 비교나 최근의 고고학 발굴 성과까지 반영하여 새로운 고전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신화나 다양한 설화들, 그 당시 삶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이야기들을 통해 과거 시대에 이념과 사상이 조금은 가깝게 다가오는 듯 하다.



1, 2편 기이, 정치 현실과 신성한 환상에서는 고조선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여러나라의 건국 신화와 여러 왕들과 얽힌 신비한 설화들, 3편 흥법, 불교의 전래, 4편 탑상, 탑과 불상, 5편 의해, 불교의 뜻, 3편을 통해 불교에 대한 이야기, 6편 신주, 밀교의 신통력은 불교와 주술의 병행, 7편 감통, 여러 세상의 공감과 소통은 다른 세계의 존재들과의 만남과 소통, 8편 피은, 숨은 은자들은 속세를 벗어난 비범한 이들의 이야기, 9편 효선, 효도와 선행의 실천에서는 윤리와 효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단군신화를 시작으로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 알에서 태어난 가야, 고주몽같은 건국신화에서 삼국시대 왕들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기이하고 신묘한 이야기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신통력을 부린다거나 죽은 왕이 생시의 모습으로 찾아와 도화녀와 동침을 하고 그 후 태어난 미형랑이 귀신을 부리는 이야기, 신라를 치기 위해 쳐들어온 당나라 군대를 비법으로 물리치거나 신비한 사람이 나타나 해준 조언에 따라 황룡사에 탑을 쌓아 왕조를 지킨 이야기, 수양을 하지 않아도 진심어린 마음의 염불만으로 극락을 간 욱면의 이야기처럼 나라의 건국부터 전쟁, 종교, 평범한 이들의 삶까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다양한 이야기 속에 정치권력과 특정 계층 이외의 삶이라는 양측의 모습, 노래, 악기, 벽화와 같이 예술을 통한 신비한 환상, 불교와 다른 사상과의 공존, 다양성과 평등, 불평등의 모습까지 모두 담겨있다.



삼국유사는 고려시대 쓰여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서서 중 하나이다. 자유로운 서술 형태로 고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 고대사회의 역사, 종교, 문화, 풍습들을 전해주고 있다. 일연이 이 책을 출간한 시기는 몽고의 침략으로 강화도 천도가 이루어졌던 시기로 나라와 국민들이 고난을 겪던 시기였다.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일수록 자주성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훌륭한 민족의 역사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유사를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책 속 이야기들은 신화나 설화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어떻게보면 허무맹랑하고 지금의 관점으로는 납득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 선조들이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내왔는지, 자신과 다른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존중하고, 편견없이 융화되어 살아왔는지 본받을 점 역시 많다. 역사서로든, 오래된 이야기로든 우리나라와 과거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삼국유사는 언제든 한번은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닐까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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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이라는 신화 - 인류를 현혹한 최악의 거짓말
로버트 월드 서스먼 지음, 김승진 옮김 / 지와사랑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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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에 유네스코는 모든 인간이 동일한 종에 속하며, '인종'은 생물학적 실재가 아니라 신화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인류학자, 유전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 등이 모인 국제 패널에서 방대한 연구를 일별해 발표한 성명이었다. (서문 中)

생물학적으로 인종 간 차이는 종으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는 없다. 오히려 인종 간의 차이보다 집단 속의 개인 간 차이가 현격히 크다. 하지만 슬프게도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의 과학적 테이터를 바탕으로 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인종'이란 실재가 아닌 허구의 문화적 개념이라는 성명이 세상에 발표된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인종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 곁에 건재하고 있다. 

세계적인 인류학자 로버트 월드 서스먼은 이 책을 통해 스페인 종교재판, 식민지시대와 노예제, 근대의 우생학과 나치즘, 현대의 반이민 정책까지 미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인종주의의 역사를 통해 15세기부터 현재까지 인종주의의 형태와 왜 사람들은 인종주의를 믿어왔으며, 어떻게 변화해왔고, 어째서 지금까지도 만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인종주의는 크게 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환경적, 사회적 영향으로 점차 퇴락한 인종이 발생했다라고 주장하는 '일원발생설(퇴락설)'과 인류와는 다른 별도의 기원에서 유래하는 후손이 존재하여 인종마다 생물학적으로 고정되어 있다라고 하는 '다원발생설(선아담인류설)', 두 가지 가설로 나눠진다. 초기에는 일원발생설이 좀더 영향력이 컸지만 점차 인종간의 생물학적 능력이 다르고 위계가 존재하며 태생적으로 백인이 아프리카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 아시아인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다른 인종에 대한 인간성을 부정하는 가혹한 대우는 정당하다는 다원발생설이 우세하게 된다. 흄이나 칸트 같은 저명한 철학가들도 인종주의적 인류학을 주장했으며 다윈의 종의기원이나 멘델의 유전학 역시 인종주의를 주장하는데 사용되었다. 

인간을 여러 인종으로 분류하고, 그 인종 간의 위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우생학은 유럽에서 싹을 틔우고 미국에서 발전했으며 결국 독일에서는 아리아인만이 우월하다는 히틀러의 논리아래 유태인, 집시 등 타민족을 박해하고 제거에까지 이르는 나치즘으로, 미국에서는 단종법 같은 최악의 형태로 나타났다. 독일의 나치와 미국의 우생주의자들의 교류와 상호작용은 결국 강제적 단종수술, 집단학살 같은 끔찍한 만행을 이라는 형태로 이어졌다. 

독일 나치의 특정한 민족 집단들에 대한 절명 정책은 말할 것도 없이 잔혹하고 절대 일어나선 안되었을 일이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더 놀라운 것은 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이러한 사실이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이후에도 미국의 인종주의적 우생학자들은 인류는 생물학적으로 여러 인종 집단이며, 집단 간의 역량은 유전적이고 선천적인 것이기때문에 환경이나 문화적 개입으로 변화하지 않으며, 노르딕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기 때문에, 인종의 퇴락을 가져오는 인종 간 혼합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아래 우생학자들이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민족 집단, 정신박약자, 빈민처럼 사회적으로 부적합한 집단으로 분류되는 이들에 대해 강제로 혼인이나 출산을 금지하는 혼혈 금지법, 단종법, 이민 금지법 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실행해왔다. 

하지만 미국 인종주의적 우생학은 인종을 인류학적 문화 개념으로 인식하고 각 민족 집단의 차이는 타고난 능력 때문이 아닌 환경적, 역사적, 문화적 차이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를 시작으로 점차 늘어나는 과학적 연구와 객관적 탐구를 바탕으로 우생학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학자들과 각각의 민족은 서로 다른 문화가 존재할 뿐이며 대부분의 정신적, 신체적 특징은 유전자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 그가 자라나는 문화와 역사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문화인류학과 환경결정론에 밀려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흔히 백인, 흑인, 유색인이라고 구분하는 가장 큰 외관적 특징인 피부색은 태양 복사 에너지 양과 관련되어 있으며,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라시아, 아메리카, 대륙 각지로 이주 하면서 그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따라 적응의 결과일 뿐이다. 인종적인 특질이라고 여겨졌던 요소들은 환경적, 행동적 요인일 뿐 특정한 유전적 요인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지속적으로 과학적 발견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하지만 인종주의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다. 반이민 정책이나 극우주의, 민족 집단 사이에는 다름만 존재할 뿐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음모론으로 몰고, 과학적 인종주의를 통해 신체적, 기질적 특질과 유전적인 상관관계를 주장하며 인종 간 혼합이 퇴락을 가져오기 때문에 분리하고 추방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과거와 비슷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행하는 크고 작은 행동들을 보자면 인종주의는 여전히 우리 인식 속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종주의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도덕적 판단과 과학적 사실들을 통해 인종이라는 단어를 통해 일어났던 차별과 혐오의 역사를 이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 역시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인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일군의 특정한 유전자빈도를 가진 인구 집단일 뿐이며 이주, 자연선택, 사회적, 및 성적 선택, 돌연변이, 무작위적인 유전적 부동 등으로 유전자빈도는 계속해서 달라진다.(Farber 2011)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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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프, 혐오와 매혹 사이 - 악마의 무늬가 자유의 상징이 되기까지
미셸 파스투로 지음, 고봉만 옮김 / 미술문화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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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무늬는 인간과 공간 사이의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공간은 기하공간이자 사회적 공간이다.' (P215)

스트라이프는 우리에게 무척 친숙하며, 자주 사용하는 무늬 중 하나이다. 줄무늬가 들어가 의복, 장신구, 실내장식, 기호나 표지, 심지어 줄무늬 마을로 불리는 곳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런 줄무늬가 서양 중세시대에는 타락, 혐오, 스캔들의 상징이었다면 믿어지는가? 


중세 문장학의 대가이자 색채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이며, 서양 중세 상징사, 파랑의 역사, 빨강의 역사 등을 통해 색과 상징, 기호에 대한 책들을 다양하게 저술한 미셸 파스투로가 우리에게 이번에 들려주는 주제는 <스트라이프>다. 12~13세기부터의 방대한 자료를 통해 줄무늬에 담긴 사회적, 문화적, 기호학적 역사는 스트라이프가 단순한 무늬를 넘어 사회적 구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으로 얼마나 유용하였는지, 시대에 따라 얼마나 변화무쌍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중세에서 21세기까지 시대의 흐름 속 변화의 과정을 다양한 사료, 칼라 도판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줄무늬의 역사는 그야말로 시대별 다채로운 상징성 만큼이나 역동적이다. 서양 중세시대 문학작품, 예술, 도상 등에서 등장하는 줄무늬를 착용한 사람들은 대체로 악마, 반역자, 창녀, 광대, 수형자, 사생아, 불구자, 집시 같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배척받는 사람,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거나 타락시키는 자들이다. 단순히 관습적으로 배척된 것만이 아니라 14세가 프랑스에서는 종교적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공의회에서 명령한 줄무늬, 체크무늬 옷을 금지를 어겼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한 기록도 있다고 한다. 다른 지역들에서도 배척받고 사회에서 제명된 위치의 사람들에게 줄무늬 옷을 착용하게 하거나 장식품을 걸치게 하는 등의 의복에 대한 규제가 법률로 규정되어 있었다. 문학이나 예술에서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중세에도 모든 줄무늬가 부정적, 배척의 이미지만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가문이나 집단을 상징하는 문장에서 사용되는 줄무늬는 높은 지위나, 가문의 체계적인 구분이 가능하도록하는 표상이기도 했다. 


줄무늬는 하인들의 제복으로 주로 사용되면서 예속의 상징이기도 했다가 이후 점차적으로 귀족적이고 가치 있는 무늬로, 부정적인 의미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어갔으며, 16세기부터 19세기 유럽이 근대에 들어서고 낭만주의 시대를 거쳐가며 줄무늬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 그 의미 뿐만 아니라 구조적 형태, 사용처, 색이나 배열 등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을 통해 줄무늬는 혁명 이데올로기의 상징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당시에 사용된 국기, 휘장, 깃발, 의복, 다양한 장식에서 줄무늬를 볼 수 있다. 특히 줄무늬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준 프랑스 혁명 당시 줄무늬는 과거 중세 시대에 소외,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는 것과는 또 다르게 혁명이라는 가치에 대한 동조의 표현, 집단과 본인의 사상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줄무늬의 경멸과 배척의 의미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긍적적, 부정적인 상반된 두 의미 모두로 사용되어갔다. 근대의 죄수복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줄무늬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또한 유럽어권의 언어에서 ‘줄을 긋다’는 배척하거나 삭제, 금지의 의미를 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한국에서도 ‘줄을 긋다’가 사람에게 사용되는 경우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경멸과 배척, 예속과 속박, 귀족적인 의미, 낭만과 혁명, 자유, 보호, 천박함과 고상함, 위생적, 시각적 의미까지, 줄무늬에 담긴 역사는 실로 다채롭고 흥미롭다. 줄무늬라는 상징을 통해 사상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 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류를 고정된 가치관과 굴레에서 어떻게 자유롭게 만들었는가 였볼 수 있었다. 

스트라이프는 하나의 이미지가 담고있는 상징, 의미가 시대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가를 확연히 알 수 있는 소재였다. 더불어 기호와 상징을 얼마나 이해하는냐에 따라 그 시대의 문화, 예술, 문학 작품을 더 깊고 풍부하게 읽어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한번더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색, 무늬, 형태들에는 또 어떤 역사와 의미가 담겨 있을까 궁금해진다. 기호와 상징의 세계는 역시 알면 알수록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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