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 한국의 미를 세계 속에 꽃피운 최순우의 삶과 우리 국보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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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 최순우는 누구인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좋아하던 문학소년 최순우(崔淳雨, 1916~1984)의 인생에서 전환점은 우현(又玄고유섭(高裕燮, 1905~1944)과의 만남이었다개성부립박물관(開城府立博物館)에서 관장과 관람객으로 시작된 인연은 최순우가 고유섭의 제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그는 고유섭의 다른 제자인 메이지대학 정경학부 출신인 수묵(樹默진홍섭(秦弘燮, 1918~2010)이나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 출신인 초우(蕉雨황수영(黃壽永, 1918~2011)과 달리 송도고등보통학교 출신이었다때문에 진홍섭과 황수영과 함께 개성 3()’로 불리면서도 그는 승진이나 급여에 불이익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그가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의 서기로 있을 때, 2년 연하의 후배인 진흥섭이 개성분관의 관장으로 선임된 것이나 그가 1954년 보급과장(1961년 미술과장으로 명칭이 변경)으로 진급한 후 20여 년 간 만년과장이었던 것도 아마 그 탓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곡(兮谷최순우는 묵묵히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찾고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친 박물관인이 (되었다왜냐하면,) 그는 선조의 문화와 이 땅의 유산이 총체적으로 모여 있는 박물관이 왜 중요하고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그랬기에 일생을 바쳐 국립중앙박물관을 지켰고 발전시켰다.” [pp. 4~5]

이런 최순우의 삶은 제대로 된 나라라면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이라면 분명히 기억해야 할 만큼 의미 있다하지만많은 이들이 최순우에 대해 알지 못한다그나마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빛을 보지 않았다면그의 이름은 한 장의 깨진 청자 기와조각처럼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외로웠다지금은 우리 문화유산이 아름답고 자랑스럽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일제강점의 후유증인 식민사관과 해방 이후를 휩쓴 서구우월주의에 힘겹게 맞서야 했다오래되고 낡은 것에 볼 게 무엇이 있느냐는 냉소와 비웃음이 난무했다.

그런 시대에 그는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에 설레고 떨리고 사무치고새것이 아닌 옛것에 홀리고 미치고 취했다수탈과 전쟁을 빼앗기고 무너지고 파괴된 폐허의 시대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굴하고 지키고 보존” [p. 5]했을 뿐 아니라우리 문화재가 정당한 대접을 받도록 요구하고 이를 관철했다.

 

 

최순우를 기억하는 키워드

 

첫째한국미의 보존

최순우는 한국전쟁 중에 서울 국립박물관을 점령한 북한군의 문화재 반출 지시를 목숨을 걸고 지연시켜 소장 문화재를 부산으로 안전하게 피난시켰다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개관할 때마다 그의 공이 컸다. 198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을 구(중앙청 청사 건물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자 그 주역으로서 일하다가 제반 계획과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개관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또한 그는 1946년 고려의 정궁(正宮)의 터인 만월대(滿月臺)에 미군 막사를 세우는 공사를 막은 후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개발논리에 의해 흩어지고 버려지고 있는 문화재 발굴과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강진의 청자기와 가마터인천 경서동 녹청자 가마터광주 무등산 금곡요 등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진 채 쓰러져갔던 국보급 문화재와 유적의 발굴 답사출토유물 정리연구와 전시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그의 정성이 묻어있었다.

 

나아가 당시 국립박물관에 예산이 없어 구입하지 못한 주요 유물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해같은 개성 출신 사업가인 호림(湖林윤장섭(尹章燮, 1922~2016)에게 문화재 수집의 단초를 제공하고훗날 호림미술관을 설립할 때도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둘째한국 문화유산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다.

최순우는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그저 가난한 신생국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고유 문화를 가진 국가임을 세계에 알렸다.

1957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도자기목기회화 등을 해외에 전시하면서 그때마다 호송관과 전시담당 학예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1973년에  ‘한국미술2000년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시작했으나 서울 암사동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가 기원전 3000년 토기임이 밝혀진 이후에는 한국미술의 역사를 수정, ‘한국 미술 5000년전으로 변경해서 전시를 했다이러한 전시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의 서화도자기조각건축물의 독창적이고 찬란한 아름다움을 떨쳤다나아가 한국 미술의 이해와 보존·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7년 말부터 진행된 한국 국보 전시회관람객 중에는 우리나라 유학생도 많았다사실 유학생 사회에서는 전시회가 열리기 전 “누구 창피를 보이려고 시시한 것들을 가지고 왔느냐”는 뒷공론도 있었지만전시회가 개막되고 <뉴욕타임스등 여러 신문에서 한국 미술의 특색 있는 아름다움을 대서특필하자정말로 그렇게 좋은지 보겠다며 하나 둘 찾아왔다최순우는 훗날 유학생들의 그런 모습에 대해 “말하자면 학생들은 미처 몰랐던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을 외국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고따라서 저절로 우러나는 민족적인 긍지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p.206]

 

유럽 국가들의 요청으로 한국미술 5천년전을 진행할 때는 한국 국보에 대한 보험액을 국제수준에 비해 절반 정도로 산정하자 그는 보험액을 올리지 않으면 전시를 못하겠다면서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 정당한 대접을 요구했다그 결과이후 우리나라 국보는 해외전시 때 세계 최고수준의 대접을 받게 되었으니 그의 힘으로 국격(國格)을 올려놓은 셈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한국미술 5천년전’ 전시는 한류(韓流)’의 원조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셋째한국미의 아름다움을 글로 알리다.

아마도 많은 이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고 혜곡(兮谷최순우(崔淳雨, 1916~1984)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최순우가 남긴 글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문화재에 대한 척박한 인식 속에서 그는 1947 9월 [서울신문]에 발표한 ‘개성 출토 청자파편’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멋과 가치를 문화재 해설 280미술 관련 에세이 205논문 41사료해제 86편 등 모두 600여 편의 글로 남겼다.

또한 1950년부터 서울대고려대홍익대이대 등 여러 학교에 출강하여 미술사를 강의하면서 후학을 많이 길러내었다같은 박물관에 근무했던 진경시대 문화 연구의 대가이자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가헌(嘉軒최완수(崔完秀, 1942~ ), 불교미술의 권위자 강우방(姜友邦, 1941~ ), 6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소불(笑佛정양모(鄭良謨, 1934~ ) 등도 그가 길러낸 후학이라 말할 수 있다.

 

오직 박물관과 문화유산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삶이지만,

1963년 조선 백자와 반닫이 등 조선시대 목가구 수출을 저지했다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고, 1966년 석가탑 보수복원공사 때는 내부가 썩은 전보대로 인해 2층 옥개석의 모서리 한쪽이 조금 훼손되자 복원책임자라는 이유로 문화재 보호법 제60조 및 제70(파손과 관리소홀)를 위반했다고 형사 입건되어야 했다심지어 공무원 병가 허용기간이 두 달이라는 이유로 직장암으로 죽어가는 그에게 문화공보부에서는 사람을 보내 사표 제출을 독촉한 일화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 밖에 없었다.

 

최순우 같은 분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풍납동 토성 보존과 관련된 현실 등을 바라보면 왠지 답답하다심지어 최순우가 한국 전쟁 당시인 1952 1 <민주신보>에 문화재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아래의 글이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 듯해서 씁쓸했다.

우리 스스로의 무지와 무위무책(無爲無策)으로 무참한 파괴가 쉴 새 없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슬퍼하는 바이다.

중 략 ~

건축 이외의 문화재만 하더라도다행히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주요 문화재는 안전히 소개(疏開)되어 있다고 하나이 방대한 미술품의 보존관리를 담당한 기관에 최소한도의 소요예산과 인원도 배정되어 있지 못하여소개 문화재는 그 중요성에 반하여 현재 너무나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

무지와 무위무책의 악몽에서 어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무엇이 더 급한지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가릴 줄 모르는 한모든 연유를 전쟁에만 돌리는 한우리 문화재 보존의 앞날은 암담하다.” [p.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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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웨이 - 전 세계를 사로잡은 콘텐츠 기업의 모든 것
빌 캐포더글리.린 잭슨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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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사업 모델

 

저자들은 디즈니는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경영방침의 일관성과 전반적인 전략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객 서비스제품의 창의성직원 교육상대적으로 낮은 이직률눈부신 수익률 등 여러 측면에서 고려했을 때 완벽한 사업 모델로 손색이 없었다.” [p. 18]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디즈니를 완벽하게 만든 것일까?

우선디즈니의 창립자이자 완벽주의자였던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 이하 월트’)의 원칙을 들 수 있다. “꿈꾸고 믿고 도전하고 실행하라수십 년 동안 디즈니가 성공을 거둔 곳에는 어김없이 이 네 가지 원칙에서 발전한 것이다그리고 월트의 삶과 일을 지탱했던 버팀목이었던 이 원칙들은 당연히 회사 경영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가치관이 되었다그래서 이 네 가지 핵심 원칙은 월트 디즈니사가 직원들을 훈련시켜 제 몫을 하게 만들고창의력과 혁신을 관리하고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 [p. 16]

 

그렇다면 디즈니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월트의 4가지 원칙을 실천하고 있을까?

1.     조직의 모든 구성원에게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꿈을 구현할 수 있는 창의성을 자극하라.

2.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고수하라.

3.     고객을 귀한 손님으로 대하라.

4.     직원을 격려하며 권한을 부여하고 포상하라.

5.     핵심 공급업체 및 협력사들과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라.

6.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예측된 위험을 과감히 감수하라.

7.     폭넓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조직 문화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라.

8.     장기 비전에 맞춰 단기 실행 전략을 구상하라.

9.     문제를 해결하고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의사소통을 개선하기 위해 스토리보드 기법을 활용하라.

10.  세부 사항에 깊이 주목하라.

11.  직원과 고객과 제품과 자신을 사랑하라! [pp. 28~29]

 

 

디즈니는 정말 완벽한 기업일까?

 

<디즈니 웨이>에 소개된 것만 보면디즈니는 완벽한 기업이다.

먼저 그들은 사람을 존중한다.

월트 디즈니는 새로운 쇼를 개발하는데 캐스트 멤버를 참여시키면 그들이 맡게 될 프로젝트와 회사조직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디즈니사의 극도로 낮은 이직률도 보건대 늘 그렇듯 이번에도 월트의 본능이 적중했다고 할 수 있다대부분 테마파크의 평균 이직률을 150퍼센트인데 반해 디즈니 테마파크 일반 직원들의 이직률은 30퍼센트도 안 된다본사 관리직의 경우에는 6퍼센트 미만으로 훨씬 낮다. ” [p. 42]

그리고월터는 저는 어느 분야에서고 권위자가 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제가 만나는 보통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따르고우리 회사의 끈끈한 팀워크에 긍지를 느낍니다.” [p. 117] 혹은 나는 훌륭한 미술가는커녕 결코 훌륭한 애니메이터도 아니다나보다 실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늘 나를 위해 일해주곤 했다” [p. 314]처럼 캐스트 맴버[직원]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게다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잘 하라너무도 잘 해내어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라사람들이 다시 찾아와 여전히 잘 하는 당신을 본다면 다른 사람들을 데려와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할 것” [p. 317]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고객들에 대한 사랑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로스 펄린(Ross Perlin) <청춘 착취자들>을 보면 얘기가 다르다우선 디즈니랜드에서 일하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인턴이라고 한다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나칠 수 있지만그 인턴에 대한 착취를 통해 디즈니라는 회사가 운영된다면 얘기가 다르다.

<청춘 착취자>에 따르면, “디즈니의 인턴십 프로그램은 방학 기간을 이용한 전통적 인턴십이라기보다 실제 회사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프로그램이다따라서 인턴들은 학교를 휴학하든지아니면 일하면서 학교에서 요구하는 필수 학점을 따야 한다디즈니의 인턴은 엄격한 규율에 따라 회사에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휴가나 병가는 달콤한 꿈이고 애로사항에 관한 소원 수리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성희롱이나 부당 대우에 관한 적절한 보상 대책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근무는 대개 12시간 교대제이지만실제로는 오전 6시에 시작하고 자정을 넘겨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pp. 23~24]

이는 고객에 대한 사랑이 값싼 인턴을 갈아 넣어 만든 결과라는 얘기도 된다.

 

뿐만 아니다. “미국 시민단체들의 감시망에 걸려든 대표적인 사례는 게스월트디즈니나이키빅토리아 시크릿 등 대기업 의류제품 생산 공장들이다월트디즈니의 경우 아이티 공장에서 ‘101마리의 강아지’ 옷을 생산하고 있는데, 19달러99센트짜리 옷 한 벌을 불과 6센트의 생산 원가로 만들어낸다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시간당 57센트 48시간 일해야 고작 손에 쥐는 것은 27달러27센트이다. 3인 가족의 최소 생활비 3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혹한 노동력 착취다.”1)

 

<디즈니 웨이>에 의하면 디즈니사의 종업원들은 경영진의 오만함을 싫어하며 자신들도 기획과 중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실질적인 쌍방향 소통을 간절히 원한다.

(디즈니의) ‘꿈 휴양소는 기업들이 필요한 변화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최선의 수단임이 입증되었다직원들을 전략에 참여시키고 회사가 추구하는 비전과 경영 방침에 대한 직원들의 이해를 촉진시킬 뿐 아니라프로그램 참여자들은 꿈 휴양소의 독특한 환경 덕분에 현안 문제의 혁신적 해결책을 찾아낼 새로운 아이디어의 세계로 빠져든다” [pp. 42~43]라고 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디즈니의 착취를 고려할 때도대체 그 어디에 <디즈니 웨이>에 적힌 것처럼 꿈 휴양소를 통해 창의적이고 헌신적인 종업원들이 나올 여지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아니 픽사의 에드 캣멀(Edwin Catmull, 1945~ )과 존 레서터(John Lasseter, 1957~ )가 디즈니 출신의 애니메이터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디즈니가 창의적인 사고를 억압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뿐만 아니다. 2017 <스타워즈라스트 제다이>의 개봉을 앞두고 시장지배적 위치를 이용극장주에게 영화 흥행수입의 65%를 배분해줄 것과 최대 규모의 상영관에서 최소 4주간 스크린에 올릴 것을 요구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극장주에게 돌아가는 몫에서 5%를 추가로 삭감2)하겠다고 한 적도 있다일반적인 영화사의 수입배분율이 55%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대 70%까지 가져가겠다는 디즈니의 요구는 갑질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세계 최고의 콘텐츠 공룡으로

 

이 책 <디즈니 웨이>에서는 디즈니가 비슷한 경영 이념에 따라 계속 운영된 듯한 느낌을 준다하지만 월트와 그의 형 로이 디즈니(Roy Disney, 1893~1971) 시대와 마이클 아이스너(Michael Eisner, 1942~ , 이하 아이스너’) 시대는 다르고또 아이스너 시대와 그 후임자인 밥 아이거(Robert Iger, 1951~ , 이하 아이거’) 시대도 다르다.

 

디즈니 형제의 사후(死後), “디즈니는 창의성이 고갈된 상태였고 작품도 35년에 한 편 정도만 만들 정도로 효율성이 떨어져 있었다그나마 특별한 히트 작품도 내지 못해 과거의 성공에 기대어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였다(그 결과 디즈니는 전문 기업사냥꾼의 매수 대상으로 전락했다. 1984년 디즈니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 디즈니의 새로운 수장이 된 아이스너는 극장용 만화영화에만 치중했던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그는 가정용 시장즉 홈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성장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다회사 중역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까지 극장에서 상영했던 만화영화들을 비디오에 담아 팔기 시작했다.

아이스너의 전략은 적중했다불과 몇 년 만에 디즈니의 수익 대부분이 가정용으로 판매되는 비디오와 DVD에서 나왔다아이스너는 사업 다각화를 위해 1995년 또 한 번의 중대한 결정을 했다미국 3대 방송사 중 하나인 ABC 190억 달러에 인수한 것이다이 인수 과정에서 미국의 대표 스포츠 채널인 ESPN을 계열사로 확보했고 디즈니는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한때 성공한 CEO였던아이스너는 점점 회사의 모든 일을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CEO로 변해갔다심지어 사람들은 그를 “아이스너 제왕(Emperor Eisner)”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특히 아이스너는 2000년대 들어 수많은 중역들을 몰아냈다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제거해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3)” 드림웍스를 차린 제프리 카젠버그(Jeffery Katzenberg, 1950~ )도 그 중 하나였다. []

 

제왕(帝王)’ 아이스너에 이어 CEO가 된 것은 지금의 디즈니 제국을 만든 아이거 였다그의 CEO 취임 이후 연간 개봉작의 수는 줄이되 소수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투자를 집중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으며픽사(2006), 마블(2009), 루카스필름(2012), 21세기 폭스의 엔터테인먼트 부문(2019)을 인수 합병하는 등 아이스너의 전략을 계승하면서도 인수회사에게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월트의 이념도 이어받았다. []

물론 엄격하게 따지자면직접 꿈꾸고 믿고 도전하고 실행했던 월트와는 차이가 있지만 창의적이고 헌신적인 직원들이 디즈니의 가장 큰 자산임을 잊지 않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이 책은 학창시절의 참고서처럼각 단원 마지막 부분에 요약 정리 성격의 생각 나누기’, 핵심 가치를 확인하는 요점 질문’,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제시되는 행동 방침이 실려있다시간이 없거나 14개의 단원에서 하는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는 이는 이를 먼저 읽어봐도 괜찮을 것이다.



1) 강제노역-착취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 <주간동아> 226(2006.03.08)

2) 디즈니, 영화관에 갑질’… 스타워즈 신작 흥행수입 65% 요구”, <연합뉴스> 2017.11.02

3) 정동일, “위대한 리더십의 완성; 박수칠 때 떠나라’”, <DBR(동아비즈니스리뷰) 132>, (201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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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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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

 

<파리는 날마다 축제>을 읽으면서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에서 주연인 길 역을 맡은 오웬 윌슨(Owen Wilson)이 된 기분이었다왜냐하면 이 책은 Lost Generation을 대표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이하 헤밍웨이’)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배경과 비슷한 시기[1921~1926]의 파리에 거주하면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회고록이기 때문이다.

,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헤밍웨이의 이동경로에 따라 파리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기에 저자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느낌도 든다.

 

 

가난마저도 추억이 되는 도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헤밍웨이는 갓 결혼한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과 함께 파리로 향했다비록 그가 <토론토 데일리 스타>의 해외 통신원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는 있었지만가난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작가 지망생 혹은 무명의 작가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이 무렵의 헤밍웨이가 살던, “카르디날 르무안 거리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우리 아파트는 온수도 안 나오고 제대로 된 화장실 시설도 없이 간단한 변기통만 있었지만그래도 미시간의 오막살이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p. 35]

 

불편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베를린의 <데어 크베어슈니트>에서 보내온 원고료 600프랑을 받고 생 제르맹 거리의 리프(Lipp)에서 가졌던 한 끼 식사를 수십 년이 지나도록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왠지 짠했다.

이제 어디 가서 식사나 할까나는 리프 Lipp에 가서 한잔하면서 식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략 ~

맥주는 시원하고 맛있었다올리브유를 뿌린 감자 샐러드는 적당히 짭짤하고쫀득쫀득했으며 올리브유의 향미도 감미로웠다나는 통후추를 가루 내어 감자에 뿌린 다음빵을 올리브유에 적셨다첫 잔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나서그 다음부터는 천천히 마시면서 식사했다감자 샐러드를 다 먹고 나자한 접시 더 주문하면서 세르벨라를 추가했다세르벨라는 굵은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세로로 자르고 그 위에 겨자 소스를 끼얹은 요리다.

올리브유와 소스를 빵으로 깨끗하게 닦아 먹은 다음나는 맥주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천천히 다 마시고는 반 리터짜리 맥주를 더 주문하고 웨이터가 맥주통에서 맥주를 뽑아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이번 것은 1리터짜리보다 더 시원했다나는 단숨에 잔을 반쯤 비웠다.” [pp. 83~84]

SNS에 사진을 올리고 기록하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몇 십 년 전이 아니라 1년 전 식사도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도대체 얼마나 평상시에 제대로 먹지 못했기에 저 한 번의 식사가 그렇게 인상적이었을까?

문득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에 실린 실직한 남편이 직장 다니는 아내를 위해 따뜻한 밥 한 그릇에 간장 한 종지를 마련해서 왕후(王侯)의 밥걸인(乞人)의 찬이라는 메모를 남긴 한 가난한 신혼부부 이야기가 떠오른다.

 

파리에서의 삶은 힘겨웠지만헤밍웨이는 굴복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스스로 자부했으며부자들을 경멸하고 불신했다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속옷 대신 스웨터를 입는 것이 내게는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그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자들뿐이라고 생각했다우리는 값싼 음식으로 잘 먹고값싼 술로 잘 마셨으며둘이서 따뜻하게 잘 잤고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pp. 50~51]고 얘기한다.

 

나아가 그는 파리는 내게 언제나 영원한 도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어떤 모습으로 변하든나는 평생 파리를 사랑했습니다파리의 겨울이 혹독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가난마저도 추억이 될 만큼 낭만적인 도시 분위기 덕분이 아닐까요아직도 파리에 다녀오지 않은 분이 있다면 이렇게 조언하고 싶군요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p. 361]라고 말했다.

 

 

나는 글을 쓰려고 태어났고지금까지 글을 써왔으며앞으로도 글을 쓸 것이다.

 

이 시절 헤밍웨이의 동료였던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itzgerald, 1896~1940, 이하 피츠제럴드’) 헤밍웨이에게 팔리는 글을 쓸 것을 권유했다헤밍웨이에 따르면, “[피츠제럴드]는 내게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가 원하는 단편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잘 알고 있다면 그런 잡지사에 팔기에 알맞은 단편 원고 쓰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일단노력을 기울여 좋은 단편을 써놓은 다음잡지사가 원고를 청탁하면 그 잡지사가 원하는 대로 잡지의 판매부수를 올릴 만한 작품으로 다시 수정해서 원고를 넘긴다고 했다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것은 몸 파는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했다그는 그렇긴 해도좋은 작품을 쓸 돈을 마련하려면 잡지사에서 돈을 벌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고 했다나는 그에게 작가라면 자기 능력이 닿는 데까지 가장 좋은 글을 써야 하면그렇지 않는다면 자기 재능을 파괴하게 되리라고 말했다그는 자기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팔릴 작품을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 자기 재능에 해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진짜 작품을 먼저 써놓았기에 설령 그것을 파괴하고 변형한다 해도 자기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pp. 170~171]

 

하지만 가난해도 훌륭한 글과 문장에 대한 헤밍웨이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피츠제럴드와 달리 나는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절대로 생계의 수단으로 소설을 써서는 안 될 것이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고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을 때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따라서 나는 더 많은 압박이 쌓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기다리는 동안은 우선 내가 잘 아는 주제에 대해 긴 글을 써봐야 할 것” [pp. 87]이라고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슬럼프가 와서 새로 시작한 글이 전혀 진척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그럴 때면 벽난로 앞에 앉아 귤 껍질을 손가락으로 눌러 짜서 그 즙을 벌건 불덩이에 떨어뜨리며 타닥타닥 튀는 파란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그렇지 않으면 창가에서 파리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걱정하지 마넌 전에도 늘 잘 썼으니이번에도 잘 쓸 수 있을 거야네가 할 일은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 한 줄을 써봐.’ 그렇게 한 줄의 진실한 문장을 찾으면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계속 글을 써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p. 18]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린 췌장암에 걸려 복수(腹水)를 빼내고 있던 에반 쉬프맨(Evan Shipman, 1901~1957)과의 대화는 헤밍웨이의 꾸준히 노력하는 글쓰기를 한 마디로 압축시켜 보여준다.

“ “헴글 쓰는 것잊지 않을 거지?

“물론이지.” 내가 대답했다“내가 글 쓰는 걸 잊을 리가 있나.

나는 전화를 걸려고 밖으로 나갔다물론이지하고 생각했다글 쓰는 걸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나는 글을 쓰려고 세상에 태어났고여태까지 글을 써왔으며앞으로도 다시 글을 쓸 거야.” [p.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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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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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밑으로부터의 역사가 어려운 이유

 

과거에는 기득권층이 문자로 전승해온 텍스트를 그대로 기록하고 해석하는 소위 술이부작(述而不作)1)의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했다때문에 역사의 대부분을 왕이나 귀족 같은 지배층의 이야기가 차지했다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운 역사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여기에는 왕과 귀족 중심의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닌 민중 중심의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주장하고 싶어도 그 바탕이 될 텍스트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점도 한 몫 한다.

<고양이 대학살>을 번역한 조한욱 교수가 옮긴이 서문에서 무명 인사들이 남겼거나 그들에 대해 서술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서술을 체념적으로 포기한 채 그들을 그늘 속에 남겨두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p. 8]고 말한 것도 같은 이야기인 셈이다.

 

 

<고양이 대학살>

 

여기서 이 책 <고양이 대학살>의 가치가 드러난다이 책의 저자인 로버튼 단턴이 <신데렐라>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사람들이 흔히 보아왔지만 지나쳤던 농민들의 이야기에 역사적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복원” [p. 8]시켰기 때문이다이 책의 1장 농부들은 이야기한다마더 구스 이야기의 의미는 바로 이런 점에 충실하다이 시대 민담에 대한 해석을 통해 18세기 프랑스 농민들의 물질적 여건과 생활그리고 정신세계에 대해서 일종의 복원’ 혹은 재구성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2장 노동자들은 폭동한다-세브랭 가()의 고양이 학살은 극히 드문 피지배층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1730년대 파리 생-셰브랑 가의 인쇄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던 니콜라 콩타는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기록했다우리에게는 단순한 동물 학대로 보이는 고양이 학살이 노동자들에게 재미있었던 이유는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즉 그것은 그들이 '부르주아'에게 반격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였던 것이다고양이 울음소리로 괴롭힘으로써 그들은 '부르주아'로 하여금 고양이를 학살하도록 위임하게 부추겼고다음으로는 학살을 이용하여 그를 상징적으로 재판에 회부하여 불공정한 경영을 이유로 단죄하였던 것이다그들은 또한 그것을 마녀 사냥으로 이용하였다그것은 여주인이 가장 아끼던 고양이를 죽일그리고 그녀 자신이 마녀였다는 것을 암시할 구실을 제공하였다마지막으로 그들은 고양이 학살을 샤리바리[Charivari]2)로 변형시켰다그것은 여주인에게 성적인 모욕을 줌과 동시에 남편을 오쟁이진 사람으로 조롱할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pp. 146~147]

조선 시대의 탈춤처럼 부르주아가 애지중지하는 고양이를 학대 혹은 학살하는 과정과 이를 재연하는 행위를 통해 지배층[부르주아/양반]과 피지배층[인쇄공/농민]의 갈등을 모욕과 풍자라는 수단을 통해 해소한 것이다따라서 지배층은 고양이 학살과 그 재연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이러한 갈등 해소 수단을 제제하다가 체제 전복으로 이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3장 한 부르주아는 그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텍스트로서의 도시는 <1768년에 만든 몽펠리에 시의 상태와 설명(이하 설명서’)>이라는 익명의 시민에 의한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설명서를 저술한 익명의 시민은 한 측으로는 귀족과다른 한 측으로는 평민들과 자신을 구분시켰다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기 주장에 공개적으로 집착하여 매 페이지마다 확인되고 있는 그의 공감대는 도시 사회의 중간 범위 어디엔가 그를 위치시킨다즉 그는 (‘구세대의 부르주아에 속하는의사법률가행정가금리 생활자 등 대부분의 지방 도시에서 인텔리겐치아를 형성하였던 자들에 동조하였던 것이다.” [p. 164]

뼛속까지 부르주아였다고 자처하는 익명의 시민은 대표자를 뽑거나 국가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자율적인 개인들로 구성된 정치적 집합체를 상정할 수 없었다그는 집체적 집단이라는 틀 속에서 생각하였다따라서 그 지역에서 베르사유에 대표단을 파견하였을 때그 대표단은 신분별로 왕에게 말해야 했다는 것은 그에게 완전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하나의 신분으로서 귀족의 용도를 느끼지 못했지만 그는 사회의 자연적인 조직으로서 신분의 위계 질서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부르주아 계층이 상당수 작위를 받았던 것은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였다진정으로 그를 경악시켰던 것은 평민의 부르주아화였다왜냐하면 2신분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3신분과의 접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 [pp. 187~188]

이를 위협이라고 느낀 부르주아 가운데 하나인 익명의 시민은 신분간의 경계선을 강화시킬 것을 제안했다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폭동에 몰입하는 난폭한 무리인 대학생들은 매 학부마다 특수한 교복을 입어 정상적인 시민들과 섞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공원과 산책로는 특정의 시간에 특정의 집단에게 예약되어야 한다 특정 직종의 장인들은 특정의 지역에 살도록 요구되어야 한다그리고 무엇보다도 하인들은 그들의 의복 위에 특징적인 기장을 달도록 강요되어야 한다” [p. 195]와 같은 일이다.

이런 식으로 같은 부르주아 입장에서 바라 본 부르주아를 소개하는데의외로 진보적이라고 간주되는 18세기 부르주아가 복고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4장 한 경찰 수사관은 그의 명부를 분류한다문필 공화국의 해부은 서적 거래 수사관인 조세프 테므리가 1748년부터 1753년까지 파리의 문필가 501명에 대한 보고서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18세기 중엽에 문필 인구는 제어하기 힘들었을지는 몰라도 혁명적은 아니었다그 대부분은 <메르퀴르>의 서평이나 프랑스 국립 극단의 단원 자리나 학술원의 회원 자리를 얻으려고 애썼다.” [p. 2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필가에 대한 절대왕정의 입장은 무신론이 왕의 권위를 침해한다고 믿었다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자유 사상가들은 중상가들이나 마찬가지의 위협을 이루고 있었다” [p. 262]고 하는 조세프 데므리의 인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5장 철학자들은 지식의 나무를 다듬는다: <백과전서>의 인식론적 전략에서는 겉으로 보이는 <백과전서>라는 텍스트가 아닌 그 안에 담긴 의도를 얘기하고 있다.

계몽 사상 최대의 텍스트인 <백과전서>는 모든 것에 대한 잡동사니 같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기에 이것이 왜 18세기에 그렇게 큰 반향(反響)을 일으켰는지 의아해하기 쉽다하지만 분류 정리를 한다는 것은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다.”[p. 272]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드니 디드로(Denis Diderot, 1713~1784)와 장바티스트 르롱 달랑베르(Jean-Baptiste le Rond d’Alembert, 1717~1783)는 인간 지식의 체계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방식을 통해 구체제와의 단절을 설계했기 때문이다.

 

6장 독자들은 루소에 반응한다낭만적 감수성 만들기에서는 라로셸의 부유한 상인인 장 랑송이 서적 도매상에 보낸 주문목록과 잡담을 통해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소설 <(엘로이즈>에 대한 반응을 보여줍니다여기에 장 랑송 이외의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추가해서 이들이 어떤 공통감정을 가졌는지 보여주는데소설 속 인물이 실존하는 것처럼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18세기 독자들의 몰입에 당혹스러우면서도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현대의 드라마 시청자의 모습이 겹쳐져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고양이 대학살>은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일부를 논한 6편의 논문을 엮은 책이다그래서 읽다 보면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다게다가 이 책이 두괄식 혹은 미괄식으로 결론을 내지 않아 다 읽고도 다 읽은 것 같지 않은 찜찜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구(口傳)되어 온 민담(民譚), 경찰의 보고서루소의 소설 등을 통해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갔는지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좀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일반 민중들의 삶과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는지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계급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다나아가 지식인이 등장하기 시작할 무렵 공권력은 그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고계몽주의가 어떻게 기존의 것들과 선을 긋기 시작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역사가들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사회를 분석하는 것은누구도 쉽게 다루지 않았던 것들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신선한 자극이 된다비록 자료의 애매한 부분 때문에 저자의 모든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지만역사는 암기과목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머리가 생각하고 이해하기 위해 달려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1) 술이부작(述而不作): 옛 글을 인용하여 기록했을 뿐 스스로 창작한 것은 아니다.

2) 샤리바리(), 정치경제종교 등과 관련하여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가 생겼을 때 이것을 소란과 조롱폭력 등으로 처벌하는 유럽의 민중적 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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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북학의 - 조선의 개혁.개방을 외친 북학 사상의 정수
박제가 지음, 안대회 엮고옮김 / 돌베개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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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북학의>

 

북학의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아마 대부분 학창시절에 배운 대로 조선시대 실학자인 초정(楚亭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쓴()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내용의 책이라는 것이 떠오를 것이다좀더 구체적으로 청과 해상 통상을 확대할 것수레나 선박의 사용을 늘릴 것절약보다는 소비를 권장하여 생산을 자극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1)했다는 사실까지 기억할 수도 있다또 고루(固陋)한 성리학자들의 소중화(小中華의식을 극복하고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저술이라는 의견을 덧붙일 이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그런데 우리가 <북학의(北學議)>에 대해 이것만 알면 될까아니 우리가 <북학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앞에서 언급한 것 외에 무엇이 더 있을까?

 

먼저 <북학의>에 대해 살펴보면이 책은 한 번에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박제가는 1778년 절친인 청장관(靑莊館이덕무(李德懋, 1741~1793)와 함께 진주사(陳奏使)2)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갔다 와서 <북학의>를 저술했다일반적인 책이라면 여기서 끝인데박제가는 이후 수년간 내용을 보완하여 이를 <북학의 내편>과 <북학의 외편>으로 만들었다그러다 1798정조(正祖재위 1776~1800)가 백성들을 위한 농서(農書)를 구하자 기존 <북학의>의 1/3 정도 내용을 간추리고 농업 관련 내용을 추가한 <진소본(進疏本북학의>를 만들어 바쳤다때문에 북학의는 내편’ 및 외편과 진소본이 존재하고서로 중복된 내용도 있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고현대의 독자들이 어렵게 여기는 고증적이고 복잡한 부분을 제외시켜이를 주제에 따라 4장으로 다시 분류하여 재구성했다.

 

 

박제가가 본 당대 조선의 문제

 

먼저 1장 왜 북학인가에 실린 1778년 본의 서문에서 현재 백성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국가의 재정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지고 있다” [p. 20]고 말해위기에 빠진 당대 조선의 현실을 진단한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가 내걸었던 문제는 경제야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와 같은 얘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경제에 어떤 문제가 생겨서 국가와 백성이 가난해진 것일까박제가는 네 가지 기만(四欺)과 세 가지 폐단(三弊)때문이라고 구체적으로 꼬집는다.

 

네 가지 기만(四欺)은 다음과 같다.

인재가 아주 드문데도 인재를 양성할 방도를 강구하지 않고재용(財用)이 날이 갈수록 고갈되는데도 소통시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며, “세상이 말세로 가니 백성이 가난하다라는 핑계를 대니 이것은 국가가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하급 관료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국경 밖으로 사신을 갈 때에는 모든 것을 역관들에게 위임합니다좌우에서 자기를 옹위하게 하면서 체모를 허술하게 할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사대부가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과거 시험의 숲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병려문(騈驪文)3)의 길에서 기운을 다 소진하고 나서는 천하의 책을 몽땅 묶어 두어 볼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니 이것은 공령문(功令文)4)짓는 자들이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자가 있고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자가 있습니다할아버지나 아버지 항렬의 어른에게 절을 하기는커녕 손자뻘 조카뻘 되는 어린 자가 어른을 꾸짖는 일도 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쭐대며 천하를 야만족이라 무시하며 자기야말로 예의를 지켜 중화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이것은 우리 풍속이 자기를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 [pp. 28~29]

 

세 가지 폐단(三弊)은 다음과 같다.

사대부는 국가가 만든 것입니다그러나 국법이 사대부에게는 적용되지 않으니 이것이 자기를 피폐케 하는 것이 아닙니까?

과거(科擧)란 인재를 취하는 도구입니다그런데 인재의 선택이 과거로 인해 망가지니 이것이 자기를 피폐케 하는 것이 아닙니까?

서원을 설립하여 선현(先賢)의 제사를 받는 것은 선비를 숭상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왔습니다그런데 부역에서 도망하는 장정과 금주(禁酒)를 빚는 자들이 숨어 지내는 소굴이 되고 있으니 이것이 자기를 피폐케 하는 것이 아닙니까?” [p. 29]

 

 

조선이 살 길통상

 

앞에서 열거한 조선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박제가는 1766년에 쓴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에서 현재 국가의 가장 큰 폐단은 한마디로 가난입니다그렇다면 이 가난을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중국과 통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p. 23]라고 주장하여 구체적인 위기극복 대안을 제시한다.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통상을 통해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고[學中國], 낙후한 경제의 부흥을 추진하여 개인은 풍요로운 생활을 구가하고 국가는 부국강병을 실현”[p. 6]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문물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하지만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생각하는 선진 문물과 박제가가 생각하는 선진 문물은 달랐다극단적으로 말하자면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명()나라 이전의 정신문화를박제가는 청()나라의 물질문화를 각각 선진 문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할 수 있다다시 말하면 박제가가 배우자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은 유학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학문이 아니라 서민의 행복하고 윤택한 삶즉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수단이다여기서 이용(利用)’은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영위하는 것을 가리키고, ‘후생(厚生)’은 삶을 풍요롭게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비하하며 무시하고조선이야말로 유일한 문명국인 소중화(小中華)” [p. 49]라고 우쭐거리는 사대부들은 정신적 승리에 만족하는 어리석은 이요반드시 도태시켜야 할 나라의 좀벌레일 수 밖에 없다.

 

조선의 살 길이 중국과의 통상이니 이를 위해서는 수레와 배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고도로나 교량과 같은 사회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그래서 그런지 이 책 3장 북학의 실천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이 수레먼저 사람이 타는 태평차(太平車), 짐을 싣는 대차(大車), 외바퀴 수레인 독륜차(獨輪車), 수레에 돛을 단 풍범차(風帆車등 청나라에서 사용하는 수레의 종류를 나열하고수레 운영의 장점을 얘기한다그리고 나서 중국 촉(지방의 잔도(棧道)와 같이 극도로 험준한 지형도 아니면서 산천이 험준하다는 핑계로 수레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비판한다나아가 산천이 험난해서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면, “그저 통행하기 좋은 지역만이라도 수레를 통행시켜 도()마다 그 도에 적합한 수레를고을마다 그 고을에 적합한 수레를 쓰는 게 어떤가만약 고개 때문에 사용을 꺼린다면고개를 넘을 때만 사용하는 수레가 얼마든지 있다” [p. 149]고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배도로다리 등의 주제에 대해 조선과 청의 상황을 대비하는 형태로 조선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당대인이 본 <북학의>

 

이 책의 4장 ‘<북학의>의 평가는 보만재(保晩齋서명응(徐命膺, 1716~1787)과 연암(燕巖박지원(朴趾源, 1737~1805) <북학의서문으로 되어 있다소제목에 비하면 내용이 아쉬운데이 두 사람이 모두 북학파에 속하고 <북학의>의 서문을 써 줄 정도로 박제가와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이 책에서의 <북학의평가는 북학파에 의한 평가란 말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박지원이 쓴 서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책[북학의]을 남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남들은 당연히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믿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남들은 우리에게 화를 내리라화를 내는 성격은 편벽된 기운에 원인이 있고우리 말을 믿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의 산천을 여진족 땅이라고 죄악시하는 데 있다.” [pp. 257~258]

결국 조선시대 지식인 계층인 사대부가 소중화 의식을 버리지 않는 한, <북학의>는 믿을 수 없는 허황된 글이 된다는 것이다따라서 박제가가 꿈꾸었던 조선의 개혁은 그저 일부 지식인의 몽상(夢想)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북학의>를 통해 내비쳤던 박제가의 문제의식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1) <고등학교 한국사>, (천재교육, 2018), p. 156

2) 진주사(陳奏使): 중국에 외교적으로 알려야 할 일이 발생했을 경우 임시로 파견하는 사신. 중국으로부터의 책문(責問) 또는 중국측의 오해에 대한 해명, 조선 내의 반역사건에 대한 전말보고 등을 위해 파견했다.

3) 병려문(騈驪文): 표준어는 변려문이다. 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수사적(修辭的)으로 미감(美感)을 주는 문체이다. 사륙변려문(四六騈驪文)이라고도 한다.

4) 공령문(功令文): 과거 시험에 쓰는 시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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