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의 도쿄
호즈미 가즈오 지음, 이용화 옮김 / 논형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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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明治]의 시작은 1868년이다. 1868년은 일본 역사에 큰 의미가 있는 해인데,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중세에서 근대로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에도[江戶]가 신정부의 수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에도가 당시 일본의 중심이 되는 대도시였고, 보신[戊辰] 전쟁 당시 도쿠가와 막부측의 가쓰 가이슈[勝 海舟, 1823~1899]와 메이지 신정부군측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 隆盛, 1828~1877]의 협상으로 ‘에도’라는 도시가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고 온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탄생한 메이지 정부의 도쿄는 어떤 모습일까?

먼저 ‘1장 문명개화’에서 소개된 메이지 시대의 특징을 보면,

 

에도 이래의 전통과 서구의 근대문명이 뒤섞여진 이상한 이국정취야말로 메이지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전통과 근대화라는 이중구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과 사고방식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pp. 18~19]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메이지 정부가 목표로 한 것은 ‘근대도시’로서의 도쿄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의 수도’ 즉 국가의 수도로서의 딱딱한 관리사회를 의미하고 있었다. 요컨대 걸핏하면 쾌적성보다도 국가의 체면과 통치가 우선되어 정치성과 경제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도쿄의 일반시민들은 에도 이후의 시민문화를 이어받아 자유로운 생활공간을 추구했다. 메이지의 도쿄는 ‘천황’의 의향과 ‘시민’의 목소리라는 두 개의 요소가 대립과 공존하면서 성립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p. 19]

 

라고 한다.

 

이러한 메이지의 도쿄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도쿄 최초의 본격적인 호텔이라고 불리는 ‘쓰키지[築地] 호텔관’이다.

 

쓰키지[築地] 호텔관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28~29

 

이곳의 설계는 미국인 리차드 브리젠스(Richard P. Bridgens)가 했지만, 건축은 훗날 시미즈[淸水] 건설의 창업자의 양자인 2代 시미즈 기스케[淸水 喜助, 1815~1881]가 맡았다. 그래서인지 완성된 쓰키지 호텔관은 시미즈 기스케의 독창적인 디자인이 가미되었다. 쓰키지 호텔관의 외관은 흙과 회로 두껍게 바른 것 같은 해삼벽[海鼠壁]1)이고, 지붕 중앙에는 절의 종루를 닮은 탑이 솟아 있다. 탑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나선형 계단이 있어 일본식도 서양식도 아닌 너무나도 기묘한 건축물이 되었다. 게다가 외국인이 바다에서 직접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는 바람에 원래 후문으로 설계된 나가야문[長屋門]2)이 정문으로 바뀌는 등의 설계상의 변동도 발생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아쉽게도 1872년 긴자[銀座]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호텔들은 메이지 정부가 내세운 ‘서구화 정책’ 혹은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명개화(文明開化)의 또 다른 상징으로는 긴자[銀座]의 벽돌거리가 있다. 1872년 발생한 긴자 대화재를 기점으로 메이지 정부는 도쿄 전체를 불에 타지 않는 서구식 건물로 바꾸겠다는 방침 아래 화재로 인한 폐허 위에 서구식 거리(street)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토마스 워터스(Thomas J. Waters, 1842~1898)에게 설계를 맡겼다. 이렇게 조성된 ‘벽돌거리’ 혹은 ‘렌가가이[煉瓦街]’는 일본 최초로 대로를 중심으로 차도와 인도를 분리했으며 가로수를 심고 가스등을 세웠다. 대로변의 상점 건물을 붉은 벽돌로 지었으며, 부채꼴의 벽돌로 만든 원주로 지탱되는 아케이드를 상가 입구에 붙였다. 이렇게 건설된 벽돌거리의 모습은 19세기 영국과 그 식민지에서 볼 수 있었던 아케이드로 둘러싸인 모습 그대로3) 였다고 한다. 하지만 습기가 많은 일본 환경과 거주자를 고려하지 않고 조성했기 때문인지, 완공 후 약 5~6년간 가옥들이 거의 빈 채로 있었고, 입주 후에도 목조 부엌과 변소 등을 건물 외부에 대나무로 만든 전통 빗물 보호대를 설치하는 등 일본적 요소를 추가한 대대적인 개축 등을 실행했다4)고 한다.

 

벽돌거리의 계획은 수도의 체제를 정비하려는 정부의 생각만으로 진행된, 이를테면 주민 부재의 지역 개발이었다. 타고 남은 가옥의 강제철거를 시작으로 벽돌구조의 비싼 건축비로 인한 집세와 불하료5)문제, 일본의 기후습도에 어울리지 않는 설계상의 약점, 게다가 거주자의 생활양식과 맞지 않는 점도 특이할 만하다. [p. 37]

 

긴자[銀座] 벽돌거리의 변화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34~35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242~243

 

이처럼 일방적으로 서구화를 하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도 발생했다.

 

메이지 5년(1872) 연말은 실로 황당하고도 묘한 일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정령에 의해 지금까지의 태음력 대신에 태양력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12월은 겨우 이틀 만에 끝나고, 다음날인 3일은 다시 메이지 6년(1873) 1월 1일이 되었다. 이 때문에 관공서에서 지불하는 월급이 1개월분 덜 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런 설 준비로 시민들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pp. 95~96]

 

메이지의 패션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48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50

 

일본 여성의 머리모양과 속발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53

 

당대의 아이돌이었다는 ‘뮤수메 기다유[娘 義太夫]’와 메이지 시대의 오빠 부대인 ‘도스루 팬클럽[ド-スル連]’의 얘기는 신기했다. 다만, 이 책에서 언급된 뮤수메 기다유[娘 義太夫]가 사람 이름인지 아니면 ‘걸그룹’처럼 장르 혹은 분야의 명칭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판소리처럼, 일본에는 독특한 창법으로 말하고 노래하는 다유[太夫]와 다유의 표현을 리드하고 반주하는 샤미센[三味線]으로 구성된 기다유부시[義太夫節]라는 장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는 문명개화, 새 나라 만들기, 도시의 시설, 언론의 시대, 도시 만들기, 시민의 생활, 도시의 즐거움, 메이지의 쇠퇴기라는 8개의 주제로 메이지 시대의 건축물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양으로부터 들여 온 새로운 문화, 풍습, 사회 현상 등을 깔끔한 일러스트와 함께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가 건축학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호즈미 가즈오[穗積 和夫, 1930~ ]이기 때문이 아닐까? 전체적으로 역사에 기반을 두면서도 건축물, 도로와 철도, 도시 계획 등에 초점을 맞춰 오늘날의 도쿄가 어떤 기틀에서 형성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백과사전적인 측면이 있다 보니 메이지 시대의 역사를 살피고자 하는 이에게는 다소 난잡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또 흑백 일러스트이기에 건축물들이 비슷비슷해 보인다는 점도 아쉽다.

 

1) 흙벽돌로 된 외벽에 네모진 평평한 기와를 붙이고 그 이은 틈을 석회로 불룩하게 만든 벽

2) 다이묘[大名]이 자신의 저택 주변에 가신들을 위해 나가야[長屋]을 지어 살게 하고 그 일부에 문을 연 것에서 비롯된, 일본 무가 저택의 전통식 문(門)의 형식.

3) 김효진, “일본의 초기 근대 건축의 양상과 변모”, <일본비평> 15호, (2016), pp. 264~265

4) 김효진, 앞의 글, pp. 266~268

5) 불하(拂下)는 국유나 공유재산 또는 귀속재산을 개인에게 팔아 넘기는 일. 다만, ‘불하’라는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이기에 ‘매각’ 또는 ‘팔다’로 순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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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 조선 선비 중국을 표류하다 - 기행문 겨레고전문학선집 14
최부 지음, 김찬순 옮김 / 보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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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성종 18년(1487) 최부(崔溥, 1454~1504)가 제주 세 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1)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파견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성종 19년(1488), 최부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이야기는 급진전된다. 이 소식에 최부는 수행원 42명과 함께 배를 타고 서둘러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날과 달리 그 당시에는 제주도를 오가는 것이 목숨을 걸 각오까지 해야 할 정도로 험난한 일이었다. 문제는 날씨를 가늠하기 어려워 출항여부를 놓고 다투다가 진무(鎭撫) 안의(安義)가 동풍(東風)이 좋으니 떠나자고 권하자, 부친상을 빨리 치르고자 하는 최부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조금만 상황이 안 좋아지면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 밖에. 그래서일까? 최부의 나주행은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바람이 약해지면서 비가 쏟아졌다. 추자도의 배 대는 자리가 가까워졌을 때 썰물은 몹시 급하고 하늘은 매우 캄캄하였다. 군인들을 지휘하여 노를 젓게 하였으나,

이런 날에 배를 떠나게 한 것이 누구 잘못인데…….”

하고 모두 중얼거리며 반발심을 품고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이 제멋대로 노질하여 뒤로 밀려나 초란도(草蘭島)에 이르러 서편 언덕 아래에 닻을 내리고 배를 대었다. [p. 20]

 

이 무렵 닻이 부서져서, 이를 확인하고 급히 노를 저었으나 북풍에 휩쓸려 바다 가운데로 불려 나갔다. 본격적인 표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간신히 닿은 절강(浙江) 영파부(寧波府) 하산(下山)에서 해적을 만나 약탈을 당하고, 다시 큰 바다에 버려져 표류하다가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에 닿았다. 하지만 최부 일행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상륙 후 그 곳을 담당하는 사자채(獅子寨)의 관원이 그들을 왜구(倭寇)로 몰아 머리를 바치고 공훈을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부 일행이 배를 버리고 마을로 진입하는 바람에 그 흉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왜구라는 의혹은 풀지 못해, 임해(臨海) 도저소(桃渚所), 소흥부(紹興府), 항주부(杭州府)에서 각각 조사를 받았다. 가까스로 왜구가 아닌 표류한 조선의 관리임이 확인된 후에야 대운하를 따라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에서 명(明)나라 홍치제(弘治帝)를 알현한다.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답게 최부는 황제에 알현하는 과정에서 상복을 벗고 관복을 입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나는 차마 길복을 입을 수가 없었다. 이상은 직접 내 굴건을 벗기고 사모를 씌우더니

나라에 일이 있게 되면 기복(起服)2)하는 제도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지금 이 문에서 길복을 입고 들어가서 사은의 예를 마치고는 다시 문밖으로 나와서 도로 상복을 입을 테니 그저 잠시 동안일 뿐입니다. 하나만을 고집해서 예절을 잃어서는 안 되지요.” [pp. 212~213]

 

결국 잠시나마 상복을 벗고 알현을 했다. 그 후 귀국 길에 올라 요동과 압록강을 거쳐 귀국했다. 귀국했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하루속히 부친상을 치르고자 했던 최부에게 성종은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우선 기록으로 남기라 명한다. 이에 최부는 단 8일만에 중국에서 겪었던 거의 모든 일들을 꼼꼼히 기록해 바친다. 그것이 바로 이 책 <표해록>이다. 이 책은 일기를 적듯 하루 하루 최부가 겪은 내용을 엮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시간과 장소를 들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위한 중국 관원과의 문답과정에서 조선의 제도, 조선과 명의 문화적 차이 등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 대운하를 따라 이동하면서 본 중국 각지의 기후, 도로, 방죽과 갑문 등 물길 이용 제도, 살림살이와 옷 차림새, 인정과 풍속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중국의 강남과 강북의 문화적 차이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면,

 

강도질을 하는 자들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물론 사람 죽이기를 거리낌 없이 한다. 그러나 여기 강남 사람은 비록 사사로운 이익에 사로잡혀 강도질은 할지언정 그렇게 마구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하산의 도적들도 우리를 죽이지는 않았고 먹을 것도 주었으며 선암리 사람들은 자기들이 빼앗은 것을 숨기지 않고 말안장을 도로 내놓지 않았는가. [p. 95]

 

부영은 “중국의 인심을 논한다면 북방 사람은 모질고 남방 사람은 유순합니다. 영파의 도적은 강남 사람이므로 아무리 도적이 되었다 해도 물건만 빼앗을 뿐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들도 목숨을 보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북방 사람은 약탈하고는 반드시 사람을 죽여 구렁텅이에 던지기도 하고 강이나 바다에 띄우기도 하니 오늘 강에 떠 있는 시체를 보고도 알 말하지 않은가요?” 하였다. [pp. 178~179]

 

처럼.

 

또한 생사가 걸려있기에 섣불리 조선으로의 이주를 시도하지 못하는 해외유민의 모습도 묘사된다.

 

계면(戒勉)이라는 중은 우리 나라 말을 잘하였다. 그가 나더러,

저는 중인데 본래 조선 사람입니다. 역시 중이었던 저희 할아버지가 여기로 들어왔으며 지금 이미 삼대째입니다.

이 지방은 옛날 고구려 땅이었으나 지금은 중국 땅이 된 지 천 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고구려의 풍속이 아직도 남아 있어 고려사를 세워 제사를 정성껏 지내며 전통을 잊지 않습니다. 새가 날면 고향으로 가고 토끼가 죽으면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지요! 언제나 본국이 그리워 돌아가 살고 싶지만, 본국에서 나를 도리어 중국 사람이라 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낸다면 분명히 다른 나라로 탈출한 죄를 받아 몸과 머리가 따로 구르게 되겠으니 마음은 가고 싶어도 발이 주저합니다.”  [p. 251]

 

이렇게 일기체로 구체적인 내용을 적었기에 <표해록>은 명나라 초기의 중국 실정을 확인하는데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래서일까? 일본에서는 1769년 유학자 세이타 겐소[淸田??, 1719~1785]에 의해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란 이름으로, 미국에서도 1965년 컬럼비아 대학의 존 메스킬(John Meskill, 1925~ )이 <최부의 일기 표해록(Diary: a record of drifting across the sea by Pu Ch’oe)>라는 이름으로 각각 번역본이 나왔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선 이 책을,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견문록>과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함께 3대 중국 여행기로 꼽는다고 하니 우리 스스로 우리의 것에 무관심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처럼 우리가 우리 옛 문헌에 수록된 우리 역사를, 옛 유물에 서린 우리 역사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최부는 상복 일화에서 드러나듯이 꼬장꼬장한 면도 있지만, 관찰력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소흥부에서 수차(水車)를 돌리던 것을 보고 부영(傅榮)에게 수차 제작법을 알려달라고 했고, 결국 그에게 배운 수차의 형태와 운용법을 가지고, 조선에 돌아와 수차를 제작, 호서지방의 가뭄 해소에 기여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행동함에 거침이 없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던 15세기 조선선비의 진취적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그가 지나온 길을 지도로 확인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출판사에서 조금만 배려를 해주어 지도를 첨부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1) 경차관(敬差官)은 왕명을 받아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 행정을 감찰하는 관직이고, 추쇄(推刷)는 제 고장에서 도망하여 숨어든 자를 송환하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추쇄경차관은 제주도로 도망간 노비나 범법자들을 송환하기 위해 파견된 감찰관인 셈이다.

2) 상중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법이지만 나라에 일이 있을 때, 불러 상복을 벗고 출사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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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건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막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막는 게 더 좋다는 것, 무른 흙도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단단해진다는 것. [p.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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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그리고, 타이베이 - 이메이의 어반스케치와 펜드로잉으로 기억하는 대만 여행
이명희(이메이) 지음 / 밥북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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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그리고, 타이베이]는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많은 이들이 해외로 나갔고, 그 만큼 많은 여행 에세이가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같은 지역에 대한 에세이를 읽으면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게 되었다. 타이베이[臺北]이라고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 책, <걷고 그리고 타이베이>는 기존의 타이베이 여행 에세이와 다소 다른 점이 있다. 첫째, 여행지의 풍경과 현지의 음식을 사진 대신 드로잉으로 만난다는 점이다. 분명 같은 공간, 같은 음식인데도 펜으로 그려진 드로잉으로 만나면 느낌이 달라진다.

둘째, 책 제목에 굳이 ‘걷고’를 붙일 만큼 저자가 많이 걸었다는 것이다. ‘타이완[臺灣]’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타이베이는 최소한 수도 역할을 하는 도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을 걸어서 여행한다니……. 마치 서울 걷기 여행 같은 느낌이 들어 신기했다. 물론 여기에는 저자가 어반 스케치(Urban sketch)를 위해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고 피사체를 그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왠지 걸어서 여행한다는 것은 낭만적인 감상에 젖게 한다. 이제는 찾기 힘들어진, 구불구불 복잡하게 엮인 골목길에 대한 향수(鄕愁)처럼.

 

 

먹고

 

그러면 구체적으로 작가의 눈에 비친 타이베이는 어떤 모습일까?

중국인은 다리가 4개인 것은 의자 빼고 다 먹고,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기 빼고 다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에 대해 얘기하면서 식도락(食道樂)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 타이베이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식사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적지 않게 나온다. 예를 들면,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100년 된 역사의 상어 국수 가게를 지나치고 나중에 후회한 얘기를 들 수 있다.

 

타이베이의 골목길, 뜬금없는 장소에 유명한 맛집이 숨어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보물찾기라도 한 것처럼 신기했다. 그 식당에만 사람들이 북적북적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꼭 이럴 때 감이 떨어진다. 아쉬웠다. 한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상어고기를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인데 말이다. [p. 57]

 

저자가 인터넷 검색을 좀 더 하고 갔다면 달랐을까? 왠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구절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어고기 국수[?魚麵]가 아니라 우육면(牛肉麵)이지만, 저자는 미슐랭가이드1)에 소개된 식당을 방문하게 되었다. ‘건굉(建宏) 우육면’과 ‘융캉[永康] 우육면2)’이 바로 그 식당이다. 아마도 우육면이 타이베이의 대표적인 요리 가운데 하나라서 그런지 미슐랭가이드에 올라간 식당도 많이 존재하는 것 같다.3) 이렇게 미슐랭가이드에 선정된 식당이라면 맛이 궁금해지는데, 저자의 입맛에는 ‘건굉 우육면’쪽이 맛과 가성비 면에서 더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세계에서 꼭 가보고 싶은 레스토랑 100선에 꼽히기도 한 딘타이펑[鼎泰豊]은 육즙 가득한 샤오롱바오[小龍包]로 유명한데, 저자는 갈 때마다 대기시간이 최소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어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 긴 대기 줄에 질려 돌아다니다가 지쳐서 도달한 곳이 ‘항주소룡포’로 이곳도 유명한 맛집이라서 꽤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여기서 맛본 것이 샤오롱바오와 고소하고 부드러운 새우 살이 감칠맛 나는 새우 사오마이[燒賣]인데, 저자에게는 샤오롱바오보다 새우 사오마이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고 한다.

 

원래 여행은 계획대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아니 여행은 계획에서 일탈해야 즐거운 여행이 된다. 왜냐하면 여행 계획과 여행의 목적에 신경을 쓰다 보면, 뭔가 꼭 경험해야 할 것 같고, 놓치지 않고 즐겨야 할 것 같은 불안함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여행이 가져오는 여유로움은 사라진다. 그래서 일러스트레이터(illustrator) 영민이 <당신의 치앙마이는 어떤가요>에서 “가끔은 목적지에 가기 위한 여정이 목적지 그 자체보다 의미를 가지기도 하니까.4)라고 한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래서 저자도

 

언제인가부터 여행을 가게 되면 꼭 가고 싶은 장소 리스트를 만드는 일이 줄어들었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은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어떻게든 가게 되는 법. 물론 일정이 꼬이거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겨서 못 가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지만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곳에 못 가서 아쉬운 마음이 생길수록 그곳에 다시 가야 할 핑곗거리가 하나 더 생기는 것 같았다. [p. 260]

 

라고 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자그마한 일탈과 우연들이 공장에서 찍어낸 것 같은 여행을 더 값지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향신료 같은 역할을 해준다. 그래서 여행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예측불허의 안개 같은 것이 된다.

 

 

걷고

 

내가 경험한 서울, 베이징, 타이베이의 주요 교통수단은 모두 달랐다. 물론 베이징이나 타이베이에 자동차가 적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가 방문했던 베이징, 타이베이와 지금의 베이징, 타이베이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인상적인 것은 도로 위를 달리는 서울의 자동차, 베이징의 자전거와 타이베이의 오토바이였다.

 

대만은 오토바이가 자동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니 오토바이가 많을 수 밖에 없다. 대만도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좁은 국토에 많은 인구가 수도인 타이베이에 밀집되어 있다. 그 탓에 교통체증이 심각해서 오토바이를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도로와 거리에 오토바이가 많은 점은 이웃 동남아 국가인 베트남과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베트남과도 다르다. 베트남의 도로와 거리는 수많은 오토바이의 행렬로 무질서하고 복잡하다 못해 때론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면에 타이베이의 오토바이 부대는 그에 비해 정리가 잘 되어 있고 덜 혼잡해 보였다. [pp. 160~161]

 

누군가 나에게 여행을 제대로 즐기려면, 방문한 곳의 재래시장을 둘러보라고 권한 적이 있다. 아마도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이 생활하는 공간이자 도시의 민낯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기에 그런 얘기를 한 것이리라. 물론 그 재래시장이 대놓고 ‘여기는 관광객을 위한 공간’이라고 내세우면 다른 얘기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부키[歌舞伎] 공연을 위해 분장한 무용수를 보고 민낯을 짐작하라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도시에서 어두워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 여행사나 가이드가 권고하는데, 야(夜)시장으로 유명한 타이베이의 경우에는 예외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타이베이의 야시장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관광객이 현지의 공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완벽한 하드웨어를 갖춘 ‘스린[士林] 야시장’, 인기 먹거리 20여 가지를 한 테이블에 차려내는 천세연(千歲宴) 행사로 유명한 ‘닝샤[寧夏] 야시장’, 타이베이 최초의 관광 야시장인 용산사 부근의 ‘화시가(華西街)’가 유명하다.

 

즐기다

 

여행 중에만이라도 마음이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이고 싶다는 말은 명소를 배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저자도 여러 명소를 방문했다. 이 책에 그려진 장소 가운데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이나 용산사(龍山寺) 같은 곳은 나도 가본 곳이기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특히 용산사 정문의 지붕장식을 그린 것은 낡은 인화사진으로만 남아있던, 공간을 꽉 채우는 향냄새로 가득한 용산사를 다시 떠오르게 했다.

 

용산사 정문의 지붕장식

 

출처: <걷고, 그리고 타이베이>, p. 207

 

중정기념당 전경

 

출처: <걷고, 그리고 타이베이>, p. 248

 

쓰쓰난춘[四四南村]은 1949년 이후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의 군인과 그들의 가족 등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오래된 마을이다. 그렇기에 도시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철거 대상이 되었다. 다행히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하려는 도시재생 움직임 덕분에 완전히 철거되지 않고, 복합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기념품과 굿즈를 파는 ‘굿초[Good cho’s; 好丘]’라는 편집숍은 이런 노력의 결과물 가운데 하나다. 덕분에 이곳을 방문하면, 타이베이의 과거와 현재, 옛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쓰쓰난춘 내부에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의 생활 소품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자그마한 공간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것이 아닐까?

 

내가 예전에 타이베이를 방문했을 때는 패키지로 가서 그런지 굳이 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이 책 <걷고 그리고, 타이베이>를 읽다 보니, 왠지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아마도 사진과는 다른 감성의 드로잉 때문에 소개된 장소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생겼나 보다.

 

 

옥의 티

 

중국어 표기 방식을 하나로 통일했으면 좋겠다. 건굉(建宏) 우육면’과 ‘융캉[永康] 우육면’처럼 하나는 한자음으로, 다른 하나는 중국어 원음으로 표기되어 있으면 왠지 어색하고 거슬린다.

 

1) ‘미슐랭가이드’로 표시되어 있지만, 정확하게는 가성비가 좋은 식당을 선정한 미슐랭가이드 빕구르망(Michelin Guide Bib Gourmand Table)이다.

2) 이 책에는 ‘융캉 우육면’이 이연복 셰프가 방문한, 현지에서 유명한 맛집으로만 소개되어 있는데, ‘건굉(建宏)우육면’과 함께 미슐랭가이드 타이베이 빕구르망(Michelin Guide Taipei Bib Gourmand Table)에 이름이 올라간 식당이기도 하다.

3) 미슐랭가이드 타이베이 빕구르망 2018을 보면, 36곳의 레스토랑 가운데 淸眞中國牛肉麵食館, 建宏牛肉麵, 老山東牛肉家常麵店廖家牛肉麵, 林東牛肉麵, 劉山東牛肉麵, 牛店精燉牛肉麵, 永康牛肉麵 8곳의 우육면 가게가 포함되어 있다.

4) 영민, <당신의 치앙마이는 어떤가요>, (북노마드, 2022), pp.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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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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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역설적으로 들리는 두 개의 단어가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듯한 제목이다. 마치 차가운 불꽃처럼.

그래서일까? 이 소설은 이지연의 현재와 1930년대 이정선의 과거가 교차하듯이 얽히면서 전개된다. 현재는 서른 두 살의 이지연이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회령에서 새로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과거는 백정의 딸로 태어난 그녀의 증조할머니 이정선이 나고 자란 황해도 삼천을 떠나 회령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1930년대다. 재미있는 것은 과거가 누군가의 입을 빌어 얘기되는 것이 아니라 화자에 해당하는 이지연에 의해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료들이 역사가에 의해 재구성되어 역사로 남겨지는 것처럼.

 

지연의 증조모 이정선은 정신대에 끌려갈 뻔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처라고 거짓말을 한 남자 박희수와 결혼하여 개성으로 떠난다. 병든 어머니를 두고 자기 혼자 살길을 찾아 떠났다는 원죄(原罪)에, 백정의 자식이라는 핸디캡까지 있었지만, 남편이 자신을 사랑했다면 그 삶은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저 만민이 평등하다는 기독교 교리를 실천했다는 허영심으로 그녀와 결혼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 의 조상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의 범주에는 백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니 박희수의 부모가 그 결혼을 반대할 수 밖에. 이로 인해 박희수는 부모의 뜻을 저버리고 백정의 딸과 결혼했다는 죄책감까지 있었으니 그들의 결혼이 힘겨울 수 밖에. 단지 ‘삼천’이라고도 불린 지연의 증조모가 모든 것을 참고 견딞으로써 그들의 결혼이 이어졌을 뿐이었다.

 

지연의 할머니 박영옥의 삶도 힘겨웠다. 증조부가 1.4 후퇴 때 단신으로 회령으로 내려온 길남선을 마음에 들어 했기에 그와 결혼했다. 길남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남들 보기에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서 그와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북에 부인과 아들이 있는 상태에서 결혼한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할머니를 속였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 하나 없이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변명할 뿐이었다.

사실 할머니나 증조모도 그녀의 결혼이 파국을 맞이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단지 그 예감이 생각보다 빨리 현실화되었을 뿐.

 

남선인 너이 아바이랑 비슷한 사람이야. 나두 영옥이 너이 어마이가 아니었으면 남선이레 공손하구 괜찮은 사내라구 생각했을지도 모르갔어. 기런데…… 아니야. 너를 귀하게 대할 사람이 아니다

기걸 어마이가 어떻게 알아

같이 밥 먹을 때 보라. 생선이든 고기든 가장 큰 살코기를 제일 먼저 집어가는 기를. 영옥이 너가 귀하면 기렇게 하갔어? 말은 재미나게 하디. 기건 나두 알갔어. 기런데 영옥이 네 말 들어주는 모습을 내레 본 적이 없다.

남자들은 다 기렇디 않아.

영옥아, 내는 다른 거는 몰라두 너레 너를 속이디 않았으면 한다. [pp. 216~217]

 

지연의 어머니 길미선도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로망으로 자신의 엄마가 꺼려하는 결혼을 선택한다. 지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정상적인 가족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저 참고 견디기만 했다. 그나마 지연의 조모가 중혼(重婚)을 한 남편에게 매달리지 않고, 지연이 바람을 피운 남편과 이혼을 하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묘하게도 그녀들에게는 모두 힘든 순간 버팀목이 되어 준 벗이 있었다. 지연의 증조모 이정선에게는 새비 아주머니가, 지연의 조모 박영옥은 새비 아주머니의 딸 김희자가, 지연의 어머니인 길미선은 멕시코에 사는 명희 언니가, 지연에게는 지우가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보여주고 속에 담아둔 말을 들어줄 수가 있는 상대방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람이 존재하는 것, 혹은 버틸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기억하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바쁜 삶을 살아가면서 굳이 다른 이를 기억하기 위해 마음과 시간을 쓴다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기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러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그것이 우리의 최종 결말이다. [p.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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