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다른 악마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책을 읽었던가? 아주 오래 전, 독서모임에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었던 것 같은데 아마 그 때 난 책을 다 읽지 못했던 것 같다. 볼라뇨와 세풀베다 같은 칠레 작가들의 책은 흥미롭게 읽었는데, 당최 붐문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마르케스의 책들은 나랑 좀 맞지 않는다는 느낌에 의도적으로 멀리 했던 것 같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마르케스가 살아 계셨는데 지금은 영면하셨다.

 

최근 새롭게 마르케스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뒤늦게 하나씩 컬렉션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 첫 번째 책이 바로 1994년에 발표된 <사랑과 다른 악마들>이었다. 지난주에 사서 읽기 시작했고, 금방 다 읽을 줄 알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서두에 마르케스 자신이 신문 기자로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의 산타클라라 수녀원 묘지의 유해를 발굴하던 중, 머리카락이 2미터도 넘게 자란 소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작가는 자신의 할머님이 카리브 해 일대에서 많은 기적을 행해 숭배를 받았다는 카살두에로 후작 딸의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추론한다. 물론 시작부터 그럴싸한 소설의 전개를 위한 설정이다.

 

스페인 제국이 효율적인 원격 식민통치를 통해 라틴아메리카를 네 개의 부왕령으로 분할했다. 그 가운데, 세 번째로 세워진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에 포함된 항구도시 카르타헤나는 신대륙에서 채굴된 은이 구대륙의 문물과 교환되는 중요한 장소였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구대륙에서 들여온 천연두 같은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인디오들이 몰살당하면서 신대륙 개발을 위한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 결과 노예무역은 수지가 맞는 신수종 사업이었다. 소설의 초반에도 고혹적인 아비시니아 여인을 몸무게 만큼의 금으로 사들이는 장면이 충격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던가.

 

어쨌든 소설의 발단은 카살두에로의 외동딸 시에르바 마리아가 미친개에게 살짝 물리는 장면이었다. 아버지 한량 카살두에로 후작과 당밀과 카카오에 취한 어머니 베르나르다의 무관심 가운데, 시에르바 마리아는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 품속에서 자라면서 크리오요 귀족의 품성 대신 자연스럽게 그들의 주술적 관습과 언어에 젖어 들었다. 타고난 거짓말하는 능력까지 익히면서, 광견병에 걸린 악마 소녀가 되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로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1811년까지 카르타헤나에 존재했다는 종교 재판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뒤늦게 자신의 딸 시에르바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된 카살두에로 후작은 백방으로 수를 써 보지만, 딸의 증세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유대계 포르투갈 출신 의사 아브레눈시우는 후작 영애의 증세를 대수롭게 보지 않고, 행복이라는 처방전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긴다. 아브레눈시우의 경험을 믿는 대신, 돌팔이 의사들의 처방을 따랐다가 시에르바 마리아의 증세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당시만 하더라도 의학이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거의 주술의 수준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다.

 

자, 여기에서 시에르바 마리아 사건에 개입해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인물이 당시 세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가톨릭을 대표하는 주교 비르투데스다. 카르타헤나 종교 당국의 최고 권위자로 카살두에로 후작의 위임을 받아 미치광이 소녀를 산타클라라 수녀원에 유폐시키는 결정을 내리는 동시에, 살라망카에서부터 자신이 데려온 애제자이자 신뢰하는 신부 카예타노 델라우라에게 엑소시즘을 거행할 것을 명령한다.

 

한편 봉쇄수녀원에 갇힌 시에르바 마리아는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안좋은 모든 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숱한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수녀원은 역설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시설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증세를 광증으로 더 악화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아니 멀쩡한 사람도 그런 곳에 갇혀 있다가는 미치지 않을까 싶을까 정도다. 퇴마사 경험도 일천한 델라우라 신부는 스승의 명령에 따라 엑소시즘에 나섰다가 12세 소녀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엄청난 나이 차이는 물론이고 나중에 왜 그렇게 사랑하는 소녀를 데리고 신부는 모든 것을 버리고 탈출하지 않았을까.

 

주교와 신부의 지휘 아래 신대륙에서 진행되는 퇴마의식은 원주민 인디오나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온 요루바족들의 주술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인간의 의심과 불안이 만들어낸 환영을 쫓아내기 위해 벌이는 푸닥거리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원주민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서구식 관습을 전파하기 위해 사제와 수녀들이 겉으로 보여주는 희생과 봉사정신은 더욱 더 위선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원주민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 그리고 수탈의 역사를 반성하고 회개해야 했던 게 아닐까.

 

스페인 제국주의자들이 종교와 군대 그리고 상인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 카르텔로 라틴아메리카 정복에 나섰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종교로 인디오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자 했으며, 군대로 대변되는 무력행사로 그들로부터 강제 노동을 강요했다. 마지막으로 자본축적을 위한 중상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상인들이 나서서 신대륙의 자원을 착취하고 수탈했다. 그 중에서 마르케스의 소설 <사랑과 다른 악마들>은 첫 번째 요소인 종교를 냉정한 시선으로 비판한다. 아무리 고도로 훈련받고 신앙으로 무장한 델라우라 신부도 결국 인간적 정념에 무너지지 않았던가. 아니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점을 마르케스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물론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신부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 신부 같이 이미 스페인 정복 초기부터 원주민들의 인권과 자연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주창한 이들도 있었다. 반대편에서 인디오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규정하면서 스페인의 군사적 정복의 정당성을 주장한 세풀베다 같은 이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지난 겨울에 산 <바야돌리드 논쟁>을 읽어야지 싶다. 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쇄독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구나.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8-11-16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틴아메리카가 묘하게 매력적인데가 있나봅니다 ㅎ

레삭매냐 2018-11-16 14:0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라틴 문학을 애정합니다.

루이스 세풀베다와 로베르토 볼라뇨를
특히 좋아한답니다.

뭐랄까 주술적 리얼리즘도 좋고 작가들
이 추구하는 가치전복적인 도전이 매력
적이라고나 할까요.

이번에는 마르케스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뒷북소녀 2018-11-16 18:15   좋아요 1 | URL
저도 대댓글 쓰고 싶었는데 안돼서요. 마르케스 만화라면 어떤 책인가요?

카알벨루치 2018-11-16 18:27   좋아요 0 | URL
마르케스 인생을 만화로 만든건데 백년의 고독이 어떻게 만들어졌나 알수있는 귀한 자료집이라고 볼 수 있어요 ...

2018-11-16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1-16 14:04   좋아요 0 | URL
아, 예전에 제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면
정말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 그 시절에는 책 읽을 생각은 안하고
만날 놀 궁리만 했는지 ㅋㅋ

뒷북소녀 2018-11-16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라틴문학... 전문가처럼 보이는걸요.
그리고 희한하게 라틴문학은... 연쇄독서를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18-11-16 14:05   좋아요 1 | URL
전문가라니오...

고저 얼치기 독서꾼인 것을요 ~

라틴문학 연쇄독서에는 절대공감입니다.

카알벨루치 2018-11-16 14:13   좋아요 2 | URL
마르케스 만화 읽었는데 가슴이 뭉클....

대장물방울 2018-11-16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읽고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백년동안, 콜레라시대 읽었는데 크크 읽기 쉽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뭔가 매력이 있더라구요. 거꾸로 되긴 했는데 이것도 찜해둬야겠네요 ㅋㅋ

레삭매냐 2018-11-16 16:10   좋아요 0 | URL
마르케스는 일단 단편부터 읽고 나서
그 다음에 장편에 다시 도전해 보려고...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제목 때
문에 그동안 구매를 미루고 있었는데,
오늘 당장 가서 사야겠네 그래 :>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는 중고 주문
했는데 신간하고 같이 오느라 다음 주
에 발송예정이라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
기 시작했네 그래.

어그러져 버린 나의 독서 새끼줄이여 ~

목나무 2018-11-16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었군요. 마르케스의 소설 중에~~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10년 전에 읽었는데... 읽으면서도 짧은 소설이 참 무거운 걸 이야기하고 있구나 감탄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네요. ^^
간만에 저도 다시 마르케스의 소설 읽어봐야겠어요. 이번에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마르케스 소설 축하 기념으로다..ㅋㅋ

레삭매냐 2018-11-16 18:00   좋아요 0 | URL
전 오늘 도서관에서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빌려서 읽기 시작했답니다...

역시나 특이한 스타일이네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저도
주문장 날렸는데, 마르케스가 가장 잘
쓴 단편이라고 하는군요. 기대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