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는 모름지기 강력한 동기가 필요한 법이다. 나의 이번 <랩 걸> 도전의 강력한 동기는 알라딘 라로님의 독촉(!)이 주효했다. 다행히 <랩 걸>은 이미 작년 가을에 사서 잘 묵혀 두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책상에서 바로 멀지 않은 곳에 한 눈에 찾을 수 있는 곳에 떡하니 꽂혀 있어 독서를 시작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책을 읽기 전에 음란마귀가 씌운 탓인지 <랩 걸>이 랩댄스를 하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일까하는 엉뚱한 공상에 잠시 빠지기도 했다. 물론 그건 아니었다.

 



자 그럼 우리의 주인공 ‘랩 걸’ 호프 자런에 대해 한 번 알아 볼까. <랩 걸>의 저자 호프 자런은 1969년 더럽게 춥기로 유명한(겨울 학기에 눈이 와서 교통이 두절되면 이틀씩이나 쉬기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교에서는 터널로 강의실 이동을 한다는 말도 있다) 미네소타 오스틴 출신이다. 아, 참고로 미네소타는 미국에서 가장 표준적인 영어를 사용하는 곳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자그마치 42년 동안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물리학과 지구과학을 가르쳐온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덕분에 아버지의 실험실은 저자의 좋은 놀이공간이 되었다. 어쩌면 고식물학자로서 호프 자런의 커리어는 이미 그 실험실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했다가, 곧 지질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17세에 부모에게서 독립한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학과 커리큘럼과 일자리 시간조정에 목을 매다시피 하며 살았다. 호프 자런의 젊은날의 생존기는 훗날 종신교수가 되고 어느 정도 커리어를 쌓기 전까지, 식물에게는 물보다도 더 귀한 연구 자금 확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묘하게 겹쳐지기도 했다.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죽음의 실체에 대해 누구보다 더 빨리 깨닫게 되는 체험을 하기도 했다. 미네소타에서 출발한 호프 자런의 여정은 캘리포니아(토양과학 박사학위)의 버클리, 애틀란타에 있는 조지아텍 그리고 볼티모어에 소재한 존스홉킨스를 위시한 그야말로 미국에서 난다하는 공대들을 섭렵하기에 이른다.

 



버클리에서 땅을 파다가 만난 평생 지기이자 자신이 가족으로 생각하는 빌과 함께 자신만의 실험실을 꾸리고, 보수적인 과학계에 만연한 성차별과 치열하게 투쟁하면서 호프 자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 때 즐겨 보던 미드 <빅뱅이론>이 떠올랐다. 조금 희화화된 설정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고식물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최근 우리의 관심이 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라는 기후변화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한편 미연방정부의 과학 분야에 대한 투자는 형편없기 때문에, 특히나 군수물자나 전장에서 쓸모 있는 획기적인 발명을 하지 않는 이상 순수과학에 대한 연구 자금 확보는 자런에게 주어진 지상과제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과학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인 연구 자금의 확보가 최우선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연구에 필요한 기자재들은 스스로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자런 교수의 학문적 멘터 에드 학과장 같은 이들의 후원/기부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박사 학위가 없는 연구 파트너 빌의 월급 확보를 위해 자런 교수가 오랜 기간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는 점은 특히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어느 것도 쓸모없는 연구는 없다. 사유와 실험을 통해 세운 가설을 실존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그네들의 모습에서 <빅뱅이론>에 등장하는 괴짜 과학자들의 모습이 완전 왜곡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가하기 위해 대학에서 빌린 밴을 이용해서 로드 트립에 나서는 장면은 또 어떤가. 미국 최고의 MIT에서는 학부 시절 무엇보다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하는데, 호프 자런 역시 그런 교육의 세례를 충실하게 수행한 덕분인지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위대한 식물의 삶에 이야기를 전달하면서도 동시에 유머를 잃지 않는 글쓰기의 전범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자동차 여행이라는 미국 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문학적 전통을 그대로 수행한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거리를 줄이겠다고 나섰다가 현지 친구의 조언을 듣지 않아 밴이 전복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전에 등장한 ‘원숭이 정글’ 방문기는 이 사건에 비하면 그야말로 워밍업 정도였다.

 

박사학위 논문 과제였던 팽나무 씨앗 연구 도중에 발견한 오팔의 비밀에 대한 발견한 장면에 대한 묘사는 오래 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호프 자런은 무한대로 확대되어 가는 우주에서 창조주의 어떤 오묘한 진리를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존재론적 희열의 정수를 맛보았다. 그 때의 힘으로 업계의 성차별과 싸우며 영양실조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끊임없는 자기확신을 재창조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 때와 비슷한 체험은 훗날 남편 클린트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해서 아이를 출산할 때의 경험과 비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여성 과학자의 신산한 삶에 대한 저자의 냉소적인 유머 섞인 조화로운 글쓰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저자의 삶과 과학적 성취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았나? 최근 읽은 이언 매큐언의 <솔라>에도 등장하는 인공광합성의 주인공 마이클 비어드가 문득 떠올랐다. 우리에게는 식량, 의약품 그리고 목재라는 기대치를 주고 있는 식물이 뿌리가 빨아들인 물과 공기 중에 떠다니는 이산화탄소 그리고 이파리가 흡수한 햇빛으로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에너지원을 만들어내는 광합성에 대한 설명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우리 호모 사피언스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에너지인 포도당/설탕물을 제공하는 게 바로 식물이라는 상식을 이제야 깨닫게 된 기분이었다. 광합성을 통해 만들어진 유기화학물이야말로 산화와 환원이라는 자연계의 법칙을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외에도 가지를 강물에 떠내려 보내 자신과 똑같은 DNA를 가진 후손을 만들어낸다는 버드나무 이야기,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대기를 통해 강력한 천적 텐트나방 애벌레의 등장을 예고하는 메시지를 대기 중에 휘발성 유기 화합물에 실어 보낸 알래스카 시트카 버드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적에는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하나의 동일한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동물을 능가하는 식물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필요 없어진 개체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냉정하게 영양분 공급을 차단해서 고사시키는 방식에 대한 소개도 역시 인상적이었다. 조금 원시적인 방식의 외떡잎 풀인 밀과 쌀 그리고 옥수수에 전 세계 70억 인구가 식량자원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도 눈여겨볼 만한 사실이었다.

 

호프 자런의 식물 연구와 그에 투영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자면 그야말로 무궁무진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무정한 과학자의 면모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동료 빌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사랑하는 이를 잃고 끝모를 상실감에 빠진 빌을 설득해서 아일랜드로 필드 트립을 떠나 이끼를 채집하자고 꼬시기도 하지 않았던가. 호프 자런과 빌 같은 일벌레들에게는 고통 탈출도 일로 하는구나 싶기도 했다.

 

끝으로 호프 자런은 <랩 걸>을 읽은 독자들에게 제안을 하나 던진다. 우리 인류가 이런 식으로 자연을 마구 개발하다가는 600년 정도 지나 나무들이 사라져 버리고 그루터기만 남을 것이라는 경고다. 그러니 오늘부터라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자는 것이다. 미국 같으면 비용 문제가 안될 거라고 하지만, 우리하고는 아마 상황이 다르겠지. 빨리 자라고 무언가 효용을 기대할 수 있는 과실수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관리가 쉽지 않고 금세 죽을 수도 있다며 대신 떡갈나무나 참나무를 작가는 추천한다. 지구별의 에코시스템에 공헌하면서도, 생로병사라는 필멸의 존재인 인간에게 자연의 신비를 맛보게 해줄 수 있는 나무심기야말로 가장 간단한 자연사랑의 방법이 아닐까. 어제 교회에서 꼬맹이가 환경지킴이라는 뱃지를 하나 달고 왔던데, 때마침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이라는 자연친화적인 주제들로 이루어진 <랩 걸>을 읽게 돼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호프 자런 교수의 다른 글들도 읽어 보고 싶어졌다. 더욱 열심히 글쓰기와 자신의 고유 영역인 식물연구에 정진해 주시길.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나무 2018-08-13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창 올림픽을 위해 오래된 숲을 망가뜨리는 걸 서슴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과연 얼마나 나무 나아가 자연을 위할지는..ㅡㅡ;;

저는 갈아입은 표지판으로 이 책을 가지고 있는데 저도 곧 읽을 것같은 예감이 팍팍 듭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8-08-13 13:47   좋아요 0 | URL
언젠가 들었었는데,
미국 웰즐리라는 동네에서는 자기네 집
앞마당에 있는 나무를 한 그루 베려고 해도
시청에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라고 하더
라구요.

올림픽한답시고 수백년된 숲을 통째로
베어 버리는 우리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
같습니다.

작년에 사둔 책이었는데 이제사 읽게 됐네요.

뒷북소녀 2018-08-13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표지가 더 좋아서 리커버 됐을 때 일부러 안 샀어요.

라로 2018-08-13 13:27   좋아요 2 | URL
저도 이 표지가 더 좋아요. 고급스럽고. 미국판이나 새로 나온 건 성의가 없는 듯 보여요. 이것과 비교하면. 홉 자런에게 저정도 성의는 보여줘야 하는데 말이죠~~^^;;

레삭매냐 2018-08-13 13:48   좋아요 1 | URL
참나무겨울살이, 그림 너무 멋졌어요.

속 표지는 ‘그린‘으로 호프 자런 교수의
그린 그린한 이야기를 뒷받침한다고나
할까요.

라로 2018-08-13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광입니다. 레삭매냐 님의 페이퍼에 제가 등장하다니!!^^;;
님의 글을 읽다가 줄거리가 나오는 것 같아서 읽다 말았어요. 다 읽고 읽으려고요. 제목이 한 그루의 나무를 심자고 하셨는데 내일 당장 알아볼까봐요. 저도 분발해서 열심히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레삭매냐 2018-08-13 13:50   좋아요 0 | URL
라로님 덕분에 그동안 여기저기서 좋다는
이야기를 듣다가 지난 주말에 부지런히
읽어서 오늘 아침 출근 전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답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나무심기 너무 멋진 것 같아요 !~

라로 2018-08-14 13:51   좋아요 1 | URL
책을 다 읽고 님의 글을 마저 읽었어요! 레삭매냐 님 덕분에
하루라도 빨리 읽게 되었어요!!
나무는 참나무를 심기로 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