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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남형도 지음 / 김영사 / 2020년 6월
평점 :
보통 사람들이 신문사가 아닌 기자의 이름을 각인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야구 기자 말고는 기자의 이름을 눈 여겨 본 적이 없는 내가 어느 날 홀연히 팬이 된 기자가 있다. 바로 ‘남기자의 체헐리즘’을
연재하는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와 무슨 기자가 이런 걸 해? 처음에는
굉장히 신기한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꽤 오랜 기간 습관처럼 남기자님의 체헐리즘을 읽으며 내가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이 사회의 민낯을 직접 발로 뛰며 고발하는 내용에 쾌감을 느끼기도 했고 때론 부끄러워 지기도 했다. 2018년부터 연재한 기사를 엮어 출간한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은 그가 직접 체험한 생생한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았다. 20편의 기사를 수록한 이 책은
보통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혹은 알면서도 그 수고로움을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을 굉장히 리얼하게 그려 더 이상 ‘몰랐다’는 핑계가 댈 수 없게 만든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당연하게 학습되어 왜 입는지 의문조차 가지지 않는 여성들의 브래지어, 남자인 남기자가 직접 입어보고 쓴 기사를 읽으며 사람들이 그에게 보냈을 시선을 생각하니 내가 다 민망했다. 그런데 왜 나는 부끄럽다고 여기는 걸까? 왜 브래지어를 입은 남자는
당연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여기서부터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꼭 당연한 것인지 고민해봤다.
체험한 지 사흘 만에, 브라를 결국 벗었다. 육체적인 불편함보다 더 힘든 건, 버거운 시선이었다. 누가 뭐라 안 했어도 그것만으로 무언의 족쇄였다. 그래서 여성들도 쉬이 벗을 수 없었겠구나, 절실 히 깨닫게 됐다. (p20)
여자인 나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다른 여자들의 고민을 오히려 남기자님은 더 구구절절 공감해주었다. 힘들다고 말하는 것조차 유난이라며 따가운 시선을 이슈에 어쩌면
그 첫 단추를 끼우는 건, 우리 몫인지도 모르겠다(p21)며
격려한다.
시각장애인의 삶이
운에 따라 편하고 불편할 순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들도 각자 삶을 오롯이 누릴 권리가 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맛있는 걸 먹고 원하는 걸 누릴 수 있어야 한다.
(p182)
그의 체험에는 한계가 없다. 육아 체험, 80세 노인 체험, 초등학생 체험,
소방관, 집배원, 청소부 등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될 것이고, 또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이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장에 직접 출동한다. 이 중 내 기억에 가장 남는 건 시각장애인 체험이다. 어렸을 때
수련회에 가면 꼭 눈을 감고 친구에게 의지해 장애물 넘기 같은 활동을 하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함이 얼마나 답답한
지, 친구도 믿을 수 없는 나의 얕은 우정을 탓하곤 했었다.
예쁜 벚꽃이 피는 봄 날에, 시각 장애인들에게
축제는 사치일 것이다. 그들의 외출이 순탄 하려면 순전히 남의 호의에 의지해야 한다. 시각장애인 수가 25만
2,132명이나 되는데, 주위에서 왜 찾아보기 힘든지. 바깥에 나오지 않는 게 아니라,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는 거였다(p180)는 글을 읽으며 우리 사회가 약자에게 얼마나 무감각한지 깨달았다. 나도 지금껏
왜 우리 주위에 장애인이 쉽게 보이지 않을까 단 한번도 의문을 가진 적이 없다. 이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무심했을 뿐이다.
그러다 어쩐지 우스워졌다. 일탈마저도
‘정답’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는 게. 정답 같은 삶을 살아왔고, 그게 싫어 회사를 하루 땡땡이쳐음에도
말이다. (p307)
나도 모르게 사회가 규정해 놓은 그 틀안에서만 행동하려 한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하고, 거절당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나태의 죄악으로 여기고 바쁘다는 핑계로 정작 중요한 걸 챙기지 못한다. 사실 다 한번씩은 읽어봤던 기사인데 이렇게 책으로 읽으니 새롭게 다가온다. 사실
체헐리즘을 읽고 난 전후로 뭐 대단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나는 무심하게 살 것이고,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다는 건 기사를 통해 읽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이전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하는거야말로 언론의 참된 역할이 아닐까.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격언을
몸소 실천하는 기사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책,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솔직히 남기자님은 기사는 댓글 읽는 재미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