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새움 세계문학
버지니아 울프 지음, 여지희 옮김 / 새움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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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하지만 우린 당신한테 여성과 픽션에 관해 말해 달라 요청했습니다. 이게 자기만의 방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p7)

 

19291024, 버지니아 울프는 논픽션자기만의 방을 출간했다. 2020년에 이르러 이 책을 읽은 나는 이 책을 케케묵은 옛날 책 취급할 수 없음을 느낀다.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불리는 이 책을 짧게 요약하자면 글을 쓰기 위해서 여자는 자기만의 방과 안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전문 작가가 아닌 이상 공부하는 학생도 아닌 평범한 여성이 온전한 자기만의 방을 가지는 것이 흔할까? 당장 나부터도 학생인 나는 나만의 공부방이 있지만 엄마만의 방은 없다. 자기만의 방을 시작하는 첫 문장은 강렬하다. 여성과 픽션에 대한 이야기를 요청받자 버지니아 울프는 성공한 여성 작가들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보단 자기만의 방에 대해 설파한다. 100년 전을 생각하면 현대 여성의 인권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이 책이 쓰였을 무렵, 여성의 재산권을 보장 받은 지 고작 48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숙녀들은 도서관 출입조차 대학 연구진과 동행하거나 소개장이 있을 때만 입장할 수 있는(p15) 부당함을 당해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의식의 흐름대로 쓰인 이 글은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논픽션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 그렇지만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했을 것이다. 또한 그녀는 분노한다. 여성이 아니라는 것만 빼면 아무 자질도 갖추지 않은 남자들이(p46) 여성에 대해 논하는 것에 대해.

 

여자들이 살았던 환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저는 스스로한테 물어보았습니다. 픽션은 상상력으로 하는 작업이지, 땅의 조약돌처럼 툭 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p68)

 

20세기를 살아가는 버지니아 울프가 엘리자베스시대의 여자들에게, 그보다 더 과거의 여자들에게 그들이 살아온 환경에 대해 묻는다. 심지어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 여성에게 발휘되었다면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었을지도 궁금해 한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즘보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의에 관심이 많은데 약자의 인권이 향상되면 자연스럽게 소외되었던 여성의 인권도 따라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글이 쓰인 시기에도 마찬가지다. 셰익스피어 같은 천재성은 막노동을 하고 교육을 못받고 굽실거리는 사람들한테선 나오지 않는다(p78) 자조하는 서술에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또 하나의 특권임을 암시한다. 다만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있어 천재적인 남자들이 너무도 견디기 힘들어했던 세상의 무관심은 여자의 경우, 무관심이 아닌 적대감이었(p85)다고 안타까워한다. 무엇보다 지난 100년간 위대한 시인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의 대다수는 부유한 고학력자였다는 점을 꼬집으며 위대한 여성 작가가 나오는 건 그만큼 희박하다는 현실을 인정한다.

 

 

 

 

지적인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있습니다. 시는 지적인 자유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단지 200년간이 아니라 인류의 시작부터 늘 가난했습니다. 여자들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못한 지적 자유를 누렸습니다. 여자들은, 따라서, 시를 쓸 아주 작은 기회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이게 제가 그토록이나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강조해 온 이유입니다. (p171)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고, 또 지독히도 반복된다. 앞서 말했듯 버지니아 울프는 결국 경제적 독립이 글을 쓰는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를 여성 작가가 갖추는 것이 여의치 않은 현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아무리 사소하거나 방대한 것이라도 망설이지 말고, 온갖 종류의 책을 쓰라고 당부합니다(p172). 펜과 종이만 있다면 글을 쓰는 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녀는 글 쓰는 걸 다른 성의 영역으로만 한정 짓지 않고 자체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글을 써보려는 시도를 높이 평가한다. 결국 글 쓰는 걸 하기 위해선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치열한 교육열로는 전세계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국가의 일원으로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시대처럼 성별로 인한 교육 차별을 체감하진 않는다. 그런데 나는 그 이후의 삶에 주목하고 싶다. 더 이상 학생이 아닐 때 과연 자기만의 책상을 가지는 현대 여성은 얼마나 있을까.

 

페미니즘의 고전답게 오랜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왔는데 이번에 새움에서 나온 자기만의 방은 영롱한 은박이 새겨진 양장으로 책이 너무 예쁘다. 무엇보다 책 말미에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 소개와 연보가 수록되어 왜 그녀는 이런 작품을 썼는지 한층 더 이해를 도울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 명성은 자자하지만 그녀의 작품은 처음 접해 봤는데 읽으면서는 괴로웠지만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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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먼나라 이웃나라 21~22 : 러시아 1~2 세트 - 전2권 - 시즌 2 지역.주제편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글.그림, 그림떼 그림진행 / 김영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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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학자들은 러시아의 가장 큰 특징으로 애국심, 차리즘, 정교를 든다. ‘애국심은 어머니 대지, 즉 자연에 대한 사랑과 순종, ‘차리즘은 절대 권력에 대한 순종, ‘정교는 신에 대한 복종을 뜻하는데, 오늘의 러시아에 푸틴이 등장한 배경을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p7)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갈 때 러시아만 지나면 목적지에 다 왔다고 생각했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지닌 광활한 대국, 한반도의 77배 크기로 얼마나 넓은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전체 국토의 1/8만 농작이 가능할 정도로 비옥한 땅은 거의 없이 추위에 시달린다. 하지만 방대한 천연자원이 매장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국가로 근현대사에 이르러 한반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어렸을 때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를 상상하게 했던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 21-22편의 주인공은 러시아. 유럽과 아시아 두 대륙에 걸쳐 자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유라시아 제국에 속하는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태동지로 대한민국과는 무려 85년이나 국교를 맺지 않은 나라다. 그대로 가깝지만 먼나라였던 러시아는 1990년에 이르러 국교가 수립되고 우리에겐 익숙하지 않았던 그 본모습을 드러냈다.

 

귀여운 만화로 구성된 먼나라 이웃나라는 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배경 지식이 많지 않아도 누구나 쉽고 재밌게 러시아가 어떤 나라인지 알아보기 좋은 입문서다. 나 역시 러시아하면 구한말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난 간 아관파천과 러일전쟁의 패배,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은 떠올렸지만 러시아가 어떤 나라인지 이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지정학적으로 많은 민족들의 이동의 중심지일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가 소련으로 거듭나기까지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아주 오래 전 역사부터 거슬러 올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피로써 민주주의를 쟁취한 우리에게는 독재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지 21세기에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한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길고도 긴 역사를 살펴보면 러시아의 특수성, 특히 강력한 리더가 없을 때 인구 대비 넓은 땅을 통치하기 어려운 고충을 알게 되니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러시아를 보게됐다.

 

모스크바 공국이 러시아 제국으로 거듭나기까지, ‘정통성을 얻기 위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혼인 관계.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에 손꼽히는 대전과 이를 그린 대문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 나폴레옹을 막아낸 조국 전쟁과 히틀러를 저지시킨 대조국 전쟁의 승리자로 세계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나라 (이렇게 쓰면 좀 그렇지만 어떻게이겼는지는 이 책을 보고 알아서 상상했던 것과는 좀 많이 달랐다). 톨스토이와 푸시킨을 사랑하는 그들의 민족성이 어디서 기인되었는지, 왜 러시아의 농노가 생겼는지. 너무도 추상적으로 알고 있던 개념들을 하나하나 정리해주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기란 어렵지만 러시아는 언제나 러시아만의 방식을 추구했고, 한때는 세계의 패권을 쥐기도 했으며 몰락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고작 두 권의 책으로 러시아가 어떤 나라인지 다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러시아에 대한 배경지식이 미미한 상태에서도 충분히 전체적인 흐름은 알아볼 수 있게 구성되어있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애국심과 차리즘, 정교가 어떻게 태생되었는지, 러시아 민족에게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그 역사를 알고 싶다면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을 것이다. 빡빡한 글씨로 본다면 어질어질 하지만 만화로 휘리릭 넘기면서 보면 내 몸은 벌써 러시아 한복판에 있다. 언젠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에서 유럽에 꼭 가보고 싶다! 이 책을 읽으니 러시아에 가보고 싶은 열망이 더 거세진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위해 한국에서 많이 가는 블라디보스톡을 얻기 위해 러시아가 어떤 깡패짓(?)을 했는지 보는 것도 쏠쏠하다. 역시 역사는 아는 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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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 동서양을 호령한 예술의 칭기즈칸 클래식 클라우드 18
남정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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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상치 않은 천재의 일대기. 



현대 예술은 아무리 가까워지려 해도 참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런 걸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잘 납득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내게 있어 백남준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고작 모니터를 쌓아 둔 게 예술이라고? 항상 의문이 가득했다. 여전히 예술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넓진 않지만 클래식 클라우드의 백남준을 읽으며 그가 이 비디오 아트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예술의 이상향을 알 수 있었다. 



그를 그저 괴짜라고 터부시하기에는 나름 확고한 예술 취향이 있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기꺼이 가고자 했고 남들이 시도하지 않은 새로움을 추구했다. 피아노를 때려 부수고 소 머리를 걸어두는 그의 괴팍함만을 기억하기보단 이런 작품들을 통해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를 생각해보니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백남준이 다가왔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나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내 취향이 될 수 없는 쇤베르크를 그 옛날 깊은 감명을 받았다니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부유한 집안 덕분에 남들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유학을 떠나 지금은 현대 예술의 전설로 이름 올린 예술가들과 조우했으니. 재능과 재력이 뒷받침된 노력파 천재는 본인의 바람처럼 새로운 예술 장르를 탄생시켰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 본다면 비디오 아트는 너무 흔한지라 이게 그렇게 대단한가 의아하기도 하지만 백남준 이전에는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게 놀랍고 무엇보다 비디오 아트를 정착시키기 전에 다방면으로 시도한 그의 예술적 모험이 인상 깊었다. 



유명하다고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왜 유명한지 납득할 수 없었던 예술가의 발자취를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따라가보니 지금까지 백남준 아트센터를 방문하지 않은 내가 어리석게 느껴진다. 동양에서 온 청년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전 세계 예술가들과 겨뤄 인정받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해냈고 우리는 그가 남긴 유산을 만나볼 수 있다. 작가 본인은 영원함을 부질없게 여겼지만 늦게나마 그의 이야기를 접한 나같은 사람들이 책을 통해 그의 과거를 만나고자 하는 걸 보면 예술의 무한함은 정말 끝이 없나보다. 무엇보다 백남준 작가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맛깔나게 서술한 남정호 작가의 필력이 내게 백남준을 더욱 더 알고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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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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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저브레드생강빵이 비록 같은 종류의 음식을 가리킨다 해도 두 단어의 용법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월귤과 블루베리는 같은 과일을 뜻하지만 단어의 어감은 판이하게 다르게 느껴진다. (p8)

 

대단하진 않지만 종종 번역을 하는 입장에서 비슷한 듯 다른 두 단어의 어감을 정확히 전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공감한다. 소설가이자 영미문학 번역가인 김지현 작가의 산문집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어린 시절 세계 명작 속 등장하는 음식을 상상하던 소녀가 훌쩍 커 문학 속에만 존재하는 문학적 음식들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한국어로 옮겨져 우리에게 도착했을 때의 에 대해 이야기(p9)한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옛날, 독자들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먹는 이국적인 음식을 어떻게 상상했을까. 생전 본적도 먹은 적도 없는 음식을 그럴싸하게 번역해야하는 번역가의 고충도 컸겠지만 이국적인 어감 덕에 지금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음식조차도 생경하게 받아들였을 독자의 즐거움도 컸으리라. 개인적으로 책의 세부내용을 흘겨 읽는 스타일이다 보니 고전 속 이렇게 다양한 음식들이 등장했는지 알지 못했다. 무심코 지나쳤던 문학 작품 속 음식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독자들에게 소개하니 이야말로 맛있는 책 아니겠는가.

 

 

문학은 지극히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있던 사물들이 본연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오고, 평생 한 가지 용도로 써온 물건에서 갑자기 전혀 몰랐던 용도를 발견한다. (p100)

 

이 책에 등장하는 문학 작품들은 대게 제목 정도는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명작들이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알지만 음식과 문학이 만나 이토록 창조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니 놀라웠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등장한 옥수수 팬케이크가 흑인 계층의 애환을 상징하는 소울 푸드였다니. 현대에 와서 소울 푸드의 뜻은 변질됐지만 톰 아저씨의 부인 클로이 아줌마에게 훌륭한 요리 실력이 가진 의미는 특별했다. 백인들이 아무리 노예의 몸을 사고 팔아도 그들의 소울까지 소유할 수는 없었듯이. 그들이 노예의 능력과 민족성을 아무리 평가절하해도 흑인들이 일군 문화의 고유한 가치가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다(p55)는 저자의 해석은 음식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얼마나 강렬하게 표현하는지 직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비비언 리의 스칼렛 오하라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이 미인이 아니라는 작가의 첫 문장은 머릿속에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거다. 미국 남부 대농장의 귀한 딸로 언제 어디서나 품위를 강조하는 가풍은 어린 소녀에게 엄청난 억압이었을 것이다. 온갖 산해진미가 가득한 파티에서 남자들에게 내숭을 떨기위해 음식을 새 모이만큼 먹어야한다는 사회적 분위기는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힌다. 먹성이 좋으면 남편을 구할 수 없다는 유모의 엄포에 결국 백기를 든 스칼렛은 결국 파티에 가기 전 그레이비에 든 햄을 먹는다. 그레이비에 든 햄, 내게는 꽤 익숙한 음식이다. 사실 서양에서는 매우 평범한 음식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레이비와 그때 스칼렛이 먹은 그레이비는 같은 음식이 아니었을 거라는 저자의 해설이다. 먹음직스러운 갈색 소스가 그 시절에는 고기를 구울 때 나온 부산물조차도 그냥 먹기 아까워 재활용 한 것이라니(p113).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영화를 본지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전쟁 이후 굶주림과 싸우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아픔에 싸워야 하는(p110) 스칼렛에게 그때 그 그레이비는 어떤 맛으로 기억될지 문득 궁금해진다.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를 읽으며 한 권의 책을 읽는 건 그 책의 배경이 되는 한 나라의 문화를 간접 체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매우 희귀한 셜록 홈즈에 등장하는 멧도우 요리, 먹고 즐기는 것을 모토로 삼은 안나 카레니나의 오블론스키의 미식가적 면모를 뽐내는 플렌스부르크 굴, 알프스로 돌아가고 싶은 하이디의 의지를 담은 흰 빵, 극빈층이나 먹었던 바닷가재가 고급 요리가 된 배경까지. 모르고보면 무심코 지나치겠지만 알고 보면 특별하게 와 닿을 문학 속 음식들이 한자리에 모아 읽으니 군침이 돈다.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특별한 날에 큼지막한 케이크를 즐기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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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 - 파리, 그 극적인 거리에서 마주한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크리스티앙 파쥬 지음, 지연리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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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빈민을 보호하지 않는다. 빈자의 발목을 잡고 벼랑 끝으로 내몰아 매장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정의다. 이따금 빈자의 편을 드는 것은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뿐이다. (p88)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누가 있겠냐만 안락한 집에서 내쫓겨 거리의 방랑자가 된 이들만큼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진 이들도 드물 거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 파리, 그 화려한 도시를 이루는 또 다른 구성원은 노숙인이다. 사실 노숙인의 이미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감출 수 없는 특유의 매캐한 냄새,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며 술주정이나 하는 거리의 무법자, 내일이 없는 삶. 보통 사람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인상을 찌푸린다. 그 누구보다도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게 노숙인의 실상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냉혹한 잣대로 평가받는 노숙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낼까, 3년 반 동안 파리의 노숙인으로 거리를 누빈 크리스티앙 파쥬의 진솔한 고백이 담긴오늘도 살아내겠습니다는 그간 내 한 몸 건사하는 것조차 힘겹다는 이유로 외면해온 빈자의 처절한 외침을 생생하게 그렸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노숙인이지 않았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더니, 한 가정의 건실한 가장으로 직업도 있고 건강보험료를 내고 살았던 평범했던 그가 몰락하는 건 한 순간이었다. 아내와 아이가 떠나고 일자리와 집을 잃었다. 어제는 친구였던 이웃이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돌변하고 바쁘게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은 그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미래의 아이들에게 당당하지 못하단 마음에 등교시간은 숨어있어야 하는 그들에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옥 같은 이 상황에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을 보호하는 정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노숙인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포기는 우리가 사는 나라가 그만큼 노후했음을 의미한다. 시대가 바뀌며 우리는 보다 부유해졌지만, 늘어난 부만큼 결속력은 줄어들었다. 예견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색하고 배타적인, 노망난 늙은이들의 나라가 되었다. (p158)

 

노숙인이 거리에 넘친다는 건 그만큼 이 사회에 어딘가 모순이 일어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분명 이전보다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여전히 누군가는 거리에서 외롭게 죽어 가는가? 크리스티앙 파쥬는 DAL(주거권 연합)의 투사로 활동하며 노숙인의 주거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길바닥 인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도와줄 사람을 만나거나 집을 구하는 것. 구직 센터를 통해 일자리를 얻으려 해도 부지런히 오가며 서류를 작성할 책상이 있어야 한다(p98)는 그의 진술로 미루어보아 노숙인의 자립에 가장 중요한 것이 결국 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 확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그는 거리 생활을 청산했지만 더 많은 파쥬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지 않을까. 노숙인을 그저 내 눈 앞에서 치워버리는 영국의 시스템이 능사는 아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거리의 빈자는 누구에게도 예고 없이 닥칠 수 있는 일이다. 비교적 자기절제가 잘 되고 꿈이 있었던 파쥬와 달리 삶의 의욕조차 없어진 이들은 그저 사회의 골칫덩이로만 방치해야 하는가? 이 책을 읽고 나니 여러모로 안타깝고 답답하다. 그렇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라 더 마음이 먹먹하다. 책을 통해 모두가 한번쯤은 노숙인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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