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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만 중요한 남극동물의 사생활 - 킹조지섬 편 ㅣ 남극생물학자의 연구노트 1
김정훈 지음 / 지오북 / 2019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면서 극지의 땅을 밟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평범한 사람이 거주하기에 온화한 기후가 아니기 때문에 극지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은 아니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남극동물의 사생활> 은 베일의 싸여졌던 남극동물들의 일상을 한 꺼풀 벗겨낸다.
남극은 아직 인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소수의 인간만이 남극에 발을 디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은 선에서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 허락된다. 이 책의 저자인 김정훈 박사님은 그 이름도 생소한 스쿠아(Skua, 도둑갈매기)를 조사하러 남극대륙과 연을 맺은 이후 무려 14년이나 그곳에 초청되어 생명과학 발전에 이바지하고 계신다.
책의 주요 무대인 킹조지섬의 바톤반도는 몇해 전, 남극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을 촬영한 곳이라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하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자면 새끼펭귄이 포식자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제작진의 카메라 앞으로 몸을 숨긴 것이다. 살기위한 새끼 펭귄과 먹기 위한 자이언트 패트럴.

두 동물 모두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은연중에 익숙하고 귀여운 새끼펭귄의 생존을 바랐다. 포식자들이 사라진다면 펭귄은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펭귄도 누군가에게는 포식자일 텐데 말이다. 저자는 생태학자로서의 책임을 가지고 일반인들에게 남극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정보를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제목 그대로 사소할 수도 있지만 매우 중요한 남극 동물들의 생존방식(p7)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킹조지섬에는 어떤 동물들이 살고 있을까? 보통 남극하면 떠올리는 펭귄, 고래와 같은 동물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다. 초반에 언급했듯 저자의 친한 친구 스쿠아(도둑갈매기)는 사납기로 유명하다. 알과 새끼를 지키기 위한 스쿠아와 그런 그들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둥지에 다가가야 하는 저자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일 테다.
처음에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헬멧을 썼지만 저자를 내쫓기 위해 온몸으로 헬멧에 부딪히는 도둑갈매기의 충격을 염려하여 고민 끝에 조언을 얻어 ‘가짜 인형머리’를 쓰고 다녔다는 귀여운 에피소드 이면에는 자신들로 인하여 생태계가 교란되지 않게 하기 위한 연구원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인형머리를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담담한 고백은 극지에 적응한 인간이 이렇지 않을까 재미난 상상을 하게한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인형머리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머리 위에 올라타서 모자를 벗기려고 하는 녀석도 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내 일을 할 뿐이다. 하도 많이 맞다 보니 이젠 아픈지도 모르고 조사하러 다닌다(p78).

장기 생태연구를 위해서는 새의 다리에 개체인식 가락지를 부착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새를 잡아야한다. 처음에는 갈고리를 고안했다는 박사님은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져서 날아가는 녀석들을 손으로 잡아채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p147). 기억하는가? 도둑갈매기들에게 하염없이 공격당했던 비련한 과학자를? 이젠 상황이 역전이 되어 도둑갈매기들이 저자를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한다(p147).

이처럼 남극에서 연구를 하면서 경험한 생생한 연구담과 더불어 낯선 이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남극동물들의 기상천외한 생존방식, 외형으로 남방큰재갈매기를 구분할 수 있는 팁까지.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마치 내가 남극에 있는 듯 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쉽게 가볼 수도 만나볼 수도 없는 남극의 원주민들의 일상생활이 궁금하다면 꼭 한번 읽어보길 추천한다.
책 겉면에 남극생물학자의 연구노트 01이라 쓰여 있어 시리즈물인가 찾아봤더니 2019년부터 5년 동안 극지연구소의 도움으로 전 9권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유익한 책들이 많이 출간된다는 소식은 정말 반갑고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