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가 살짝 넘어 일어나 내가 한 일은 밀린 설거지였다. 스티로폼 조각이 많은 걸로 봐서는, 난 그동안 수많은 배달 음식을 시켜먹었던 것 같다.(얼마나 많이 밀렸으면, '시켜먹었던 것 같다'라는 표현이 절로 나올까) 원룸에 살고 있기 때문에, 배출구는 작고,적다. 그래서 다양한 음식 찌꺼끼 냄새가 내 게으름으로 인해 섞여 있을 때면 코끝이 찡하다. 보쌈 김치 냄새, 라면 국물 냄새, 언제든지 시키면 다 먹지 못하는 쟁반국수 찌꺼끼 냄새 등. 이 냄새들을 회피하고 윗층에 올라가 책만 팔 수 있지만, 그러기엔 나는 내 집에 애정을 갖고 있다.  

전에 살던 사람이 이 집에 가졌던 청결한 소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이어받고 싶었고, 지키고 싶었다. 전직 무용수 출신의 한 여성이 선물로 주고 간 커튼 장식이 너덜너덜해져가지만, 그녀가 잘 지켜온 하얀 벽지에 얼룩이 져 가지만, 그래도 나름 최선을 다해 이 곳을 사랑하자라는 마음으로, 꽤 '근면지수'가 상위권을 유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 문제는 가끔씩 발동하는 오지랖이다. 인터넷 용어로 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오지라퍼(오지랖어)'일 수 있다. 알록달록한 선 캡을 쓰고, 골프 웨어를 입고,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살짝올린 채, 여유있게 "사장님.."하고 전화를 받는 부자아줌마들이 동네를 순회하며 한다는 그 '오지랖어'놀이는 솔직히 내 일과 중 하나다. 

 

김찬호의 <도시는 미디어다>를 읽고, 문득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거리며 살펴본 적이 있었다. 저자의 말대로, 그 누구도 자신의 삶 이외엔 신경쓰지 않는 오피스텔. 영화 <2046>처럼, 누군가가 있다는 건 단지 그 사람이 묵고 있는 방의 호수에 대한 눈도장. 내겐 그런 눈도장보다는 좀 더 나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주말이 되면 케케묵은 총각냄새가 내가 살고 있는 9층을 채운다. 처음엔 "아휴, 청소  좀 하고 살아라"라는 말로 비난도 자주 했지만, 요즘은 "그래, 적어도 자기 집에 대한 양심은 있네"라며, 문을 살짝 열어놓은 곳을 스쳐간다.  

배출구가 별로 없는 이 곳에 용감하게 청국장을 끓여먹은 곳을 인지할 때면, 이 곳이 꼭 젊은이들의 공간만은 아니라는 걸 생각하게 된다. 반 정도 열려 있는 문에서, 런닝과 헐렁한 사각 팬티만을 입은 채, 부엌에서 청국장을 끓이는 한 어르신의 모습을 넌지시 본 적이 있다. 내가 여기 산다는 것을 택배기사의 "계세요. 택배 왔어요"라는 말 정도로 확인하는 이 곳에서, 어르신의 공개된 모습은 내겐 신기한 장면이다. 

가끔 장을 보고 락 도어의 암호를 빨리 눌러 집에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 내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박적으로 들때면, 꼭 바로 옆 호의 사람들이 청소를 하고, 내 모습을 보거나, 같은 층의 총각들이 담배를 피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때도, 유지하게 되는 경계. 자신의 향긋한 샴푸 향기로 청소하시는 아줌마가 칠해 놓은 락스 냄새를 지워버리는 여자들은 자신이 갈 층수를 내가 내릴 때까지 누르지 않는다. 너무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과 그래,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라는 생각의 교차.  

다시 돌아온 새벽 세 시의 이 곳. 경비아저씨가 내 쓰레기를 보는 게 싫어서 난 유난히 새벽에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시작되는 곰팡이꽃 따라하기. 쓰레기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추측해보는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을 나도 모르게 흉내내고 있다. 근데 나는 소설처럼 그렇게 매혹적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지 못한다. 보다 도덕적이라고 할까.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으레 부여되는 선입견에 맞지 않는 애늙은이의 도덕이 가끔 내 입을 휘감는다. "나는 그래도 1층까지 내려가 쓰레기를 직접 버린다구. 이 양반들아. 양심 좀 있으면, 자기 집 쓰레기는 자기가 좀 내려가서 비우지." 친구가 집에 놀러와도 그 놀이를 멈출 수 없다. 그리고 친구 참참은 내게 '동네 이장님'이란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한 호실은 죽어라 피자상자만 쌓아 놓는다. 한 호실은 죽어라 자신이 안 쓰는 램프와 악세사리를 문 앞에 갖다 놓는다. 한 호실은 너저분하게 국물도 씽크대에 안 비우고 준 짬뽕 그릇을 문 앞에 놓는다. 한 호실은 더 얄밉게 종량제 쓰레기 봉투에 자신의 일일 배출량을 전시해 놓는다.  

나도 모르게 뒷짐을 지게 되고, 혀에서 쯧쯧 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경비아저씨는 자겠지? 아, 귀찮아서 음식쓰레기 검은 봉지에 감춰서 종량제 봉투에 담았는데 - 9층, 설마 뒤져 보진 않겠지? 내 토익 성적은 이번엔 잘 나왔을까?  -8층 참참이랑 꼭 롯데 경기보러 부산 가야하는데. -7층 또 친구 녀석들 결혼한다고 전화 왔네? 신기하다. -6층 졸업논문 잘 쓰고 있는거지? -5층 여름이다, 뱃살 빼야하는데. - 4층  아, 1층까지 내려가는데, 제발 중간에 사람 타면 안돼. 쓰레기냄새로 흉보이긴 싫단 말이야 - 3층 어, 멈춘다. 쓰벌. 이 새벽에 나 같은 사람이? 2층 조금만 견디자. 다행히 한 층이야. -2층. 띵. 1층입니다..-1층.  

밤샘하면 나는 남자 냄새 빼느라 고생하는 게 분명한 편의점 알바. 아직도 얼큰하게 술 한잔 기울이고 있는 어느 두 남녀의 모습이 보이는 술집.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새벽 냄새.  아씨. 쓰레기 봉투 찢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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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5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5-05 23:04   좋아요 0 | URL
힘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