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들어오면서 느낀 1년 반동안의 고민들.. 이제 털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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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이후, 학문 시장에서 가장 기이한 '장르'를 꼽으라면 '문화연구'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왜 나는 이 장르를 사랑하면서도, '기이하게' 사랑하는가. 이제 그 속내를 밝히고 싶다. 나는 문화연구를 공부하러 오겠다는 똘망똘망한 후배님들을 보면 문화연구가 참 기이하다. 왜냐고? 문화연구는 최근 '지성의 시장'에서 사실 안 팔리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또 어떤 곳을 가 보면, 문화연구는 매우 활황 상태다. 문화연구에 통 뼈가 굵은 사람조차도, "야, 요즘 문화연구 누가 하냐?"라는 냉소적인 말을 한 지가 오래인데, 내 주변에는 "선배님, 문화연구를 좀 공부 하고 싶어서요. 대학원에 가려고 해요"라는 말을 꽤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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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는 어찌 보면 가장 불쌍한 지적 장르이기도 하다. 본인이 속한 기존의 '원-장르'에서 별 매력을 못 느낀 이들을 받아주는 섬, 그것이 바로 문화연구라 할 수 있을진대, 이 용병들은 그래서 더욱 열심히 '장르 파괴'와 '장르 해체'를 일삼으며, 횡단을 즐겨한다. '문화학'이라는 장르가 생겨나고 조금씩 그 꼴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아무래도 한국에서 문화연구라는 섬에 들어가려 하는 이들은 사회학도나 언론학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것 같다. 또 최근에는 역사학의 호황을 등에 업고 국문학도들이 이 섬을 자주 찾는 것 같고, 서동진 같이 외롭게 '디자인 문화연구'라는 서브 장르를 개척해나가는 사람도 있다. 특히 언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커리큘럼 안에서 '대중문화의 이해'같은 것을 포섭시켰다는 이유로, 이 미디어가 담아내는 어마어마한 문화적 산물들을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미디어 세계가 담고 있다는 이유로 인하여, 소위 커뮤니케이션학이라는 이름 아래, 미디어와 문화연구를 합한, '미디어 ․ 문화연구'라는 장르가 만들어졌고, 한국에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화연구'앞에 붙은 '미디어'라는 접두어 때문에 미디어 ․ 문화연구자들은 많은 곤혹스러움을 겪고 있다. 소위 전통적인 '미디어'의 범주 안에서 문화연구적 정신을 실현할 것인가. 내가 알고 배운 문화연구라는 것을 써 먹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문화연구는 잠시 주춤거리는 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문화연구'라는 학제가 생기면서, 문화연구 스스로가 갖는 그 자율성이 학문의 제도라는 영역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면서 나타나는 딜레마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기형 같은 연구자는 이제 '미디어'라는 수사에 너무 한계를 짓지 말자고 자신의 논문에서 주장한다. 그는 미디어의 존재 범주를 확장시키자고 주장하며, 미디어는 단순히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같은 전통적인 매스 미디어로서 사유할 것이 아니라, 도시 문제의 연구를 통한 '범미디어주의'를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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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이기형 등의 연구자가 미디어 / 문화연구라는 특정 장르를 더욱 확장된 의제로 끌고 싶어나가는 것은 문화연구의 문제라기보다는 미디어연구의 입장에서 일단 봐야 한다. 소위 미디어연구라는 것을 하면서 언론학 자체가 예전부터 갖고 있는 위기가 나는 계속 가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학, 즉 우리가 신문방송학이라고 부르는 이 장르는 가라타니 고진이 문학을 걱정하여, 내뱉었던 그 선언의 상황 만큼이나 어렵다. 미디어연구자들은 신문이 어렵다! 방송이 난국이다! 이런 진부한 시대 선언에 더 이상 얽매이지 말고, 오히려 미디어 연구 자체가 어려우며, 난국임을 봐야 할 것이다. 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문화연구로 떠날 채비를 하려는가. 그것은 단순히 대중문화의 시대라는 핑계를 대기엔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이 문제에는 권력이 있다. 더 나아가 지식과 권력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미디어연구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문화연구의 문제의식과 이에 비롯된 연구 주제들에 반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상태를 애매하게 걸치고 있는 순응적인 젊은 연구자들의 의미 없는 '논문 찍어내기'도 일조한다. 미디어 연구에 사회가 죽었다. 미디어 연구에 권력 비판이 부재하다. - 더 노골적으로 말해 계급 문제는 아예 찾아보기 힘들다- 미디어연구에 남은 것은 '기술'과 '기능'뿐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 미디어연구의 위기가 성찰되지 않은 채, 흐지부지되면서 문화연구도 그 영향을 받고 있다. 문화연구자 자신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미디어연구의 전통적인 주제들, 혹 관례적 주제들 '대통령 연설문 조사' ,'대통령 후보 토론회 후보자들 수사 분석'와 같은 것들이 마치 문화연구자들의 연구적 태도로 '전이'된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문화연구자들은 돌고 돈다. 그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차원에서 있는 그대로만을 억지로 끌고 가보자고 한다. 끝까지 절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문화연구의 위기를 타진하는 비평들을 보면, 이것은 '위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연구라는 장 안에서 왜 자신의 연구를 인정해주지 않느냐는 '인정투쟁에 대한 하소연'에 가깝다. 그래서 문화연구를 사랑한다는 자들이 보여주는 문화연구에 대한 '성찰 게임'은 이미 관례화된 지 오래다. 다들 알다시피 문화연구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위기론을 맞은 기이한 장르이다. 이 장르는 위기를 맞으면서도, 그 위기와는 판이하게 다른 호황 상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전술했다시피 이 장르는 참으로 기이하다.


이 기이함 속에서 이기형 등이 강조하는 '미디어'-'문화연구'의 관계. 그 딜레마에서 우리가 뜨겁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리고 논쟁이 필요한 부분은 사실 '문화연구가 왜 이 모양이야!"라는 구태의연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미디어연구라는 전통적인 장르에 기생하는 듯한 문화연구의 현실을 문제 제기해야 한다.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문화연구는 미디어연구에 잠식당할 공산이 크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대통령 수사 연구와 같은 형태의 관례적 문화연구식 소재가 남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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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가 억지로 숨을 쉬고 있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파도의 정신'이다. 우리는 섬이 아니라, 파도이기 때문에 어디든지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이다. 섬은 고립되어 있지만, 파도는 움직인다. 그러나 이 다이내믹은 정작 문화연구의 위기를 부추기고 있다. 문화연구자들은 자신들의 변덕을 문화연구가 지닌 급진적 맥락성이라는 좋은 용어로 갖다 붙이지만, 이 변덕으로 인하여 문화연구는 사실상 주인 없는 파티장이 되어버렸다. 연구자들이 스스로의 고민을 사회 문제의 '급변성'에 너무 예민하게 맞추다 보니, 사유의 깊이는 없고, 비평의 시선은 진부하고 또 진부하다. 문화연구자들의 변덕은 또 '쏠림' 현상과 연관성이 있다. 요즘 문화연구자들의 '쏠림'이라고 하면, 일부에서 보이는 '역사적 문화연구'다. 아마, 국문학에서 엄청나게 나오고 있는 한국 근대사의 성과에 관하여, 국문학을 한다는 친구들이 그 시대의 문화를 다루고 있으니, 정작 문화에 헤매고 있는 문화연구자들의 무의식엔 "어이쿠, 이것 큰일났구나"라는 게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 그들이 역사에 관심 있어 '역사적 문화연구'를 하려는 건 아닌 듯 보인다. 그들에겐 오히려 "내가 문화연구를 하고 있다"는 생명 연장에 더 큰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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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의 위기에는 가장 중요한 세대 교체의 실패가 두드러진다. 양은경의 성과라고 할 수 있는 '한국 문화연구의 형성'은 문화연구를 지식 장 안에서 세대적 대립으로 보는 데, 나는 이 구도에 공감이 간다. 소위 90년대의 아이콘이었던 사람들이 지식에 똥을 싸고, 욕을 하고 실컷 놀던 시대가 있었다. 덕분에 리뷰나 상상 같은 문화계간지들이 돌출하고, 홍대를 비롯해 롯데월드까지 모든 게 문화였고, 모든 게 연구일 수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똘끼'가 주는 임팩트가 사실 세대적으로 또 한 번의 대립을 걸치면서 나타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나를 포함하여, 젊은 문화연구자들이 이런 세대와의 대립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문화연구를 한다는 이들은 90년대를 좌지우지하던 그들의 이야기에 쌍욕을 하지 못하고, 그들에 순응하고 그들에 환호하기 바쁘며, 그들의 추억담에 웃기 바쁘다. '2009년'에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의 논문에 90년대가 문화의 시대였다라고 하는 그 대표적 수사가 인용되기에 바쁘지, 그것에 남다른 의미를 붙여보려는 시도가 없다는 점은 우리들이 얼마나 문화연구적 클리셰에 젖어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문화연구'라는 장르 내에서 어설픈 연민으로 뭉친 사회 문제에 대한 연대가 아닌, 그 연대를 더욱 키울 수 있는 분열과 논쟁이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논쟁을 하려는 이들이 없다. 왜냐하면 문화연구자들도 한국의 지식 시장에서 문화연구가 배고픈 장르임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오히려 문화연구를 취미처럼 대하기에. 갈수록 커져가는 문화연구자들의 옹알이는 사실 문화연구가 한국에서 별 재미를 못 보고 있다는 자조를 스스로 너무 떠벌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면서 문화연구 학회에 가보면 다들 문화연구 좀 사랑해달라고 난리다. 이 정도 되면 '한국문화연구의 종언'이라는 말을 꺼낼 때도 되었다고 본다. 생각보다 개판이며, 실제로 보면 더욱 개판이다.  

(어찌보면 최근 '무례한 복음'으로 90년대식 문화연구에 애정을 드러내시는 그 분께는 참 미안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 복음을 마치 새로운 것처럼 강조할 때마다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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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8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고민을 갖고 계셨군요. 그리고 저한테는 어떤 말도 하시진 않으셨군요...ㅎㅎ 나중에 함께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이 생길 수 있을지도..(그리고 그러고 싶은 맘) 입학하면 학교에 계시나요? 종종 같이 얘기하면 좋겠어요.

얼그레이효과 2009-12-28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안하지만, 논문학기라 학교에 안 간지 오래랍니다.ㅎㅎ 저때문에 대학원 입학의 희망을 너무 빨리 소모하진 마시고,,충분히 겪어보고 나서..언젠가 서로 편하게 이야기 할 때가 오겠지요.^^ 문화학과 분들은 영롱씨에게 희망을 줄 분들이 많으리라 개인적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