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이, 그건 다 그 사람 걱정하니까 그런 말 하는 것이에요" 

2. "아니, 그런 말도 못합니까? 자기만 성군인가?" 

1번과 2번으로 채워질 반응을 미리 예상해 본다. 어제 [pd 수첩]을 보고 난 후 나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 표출'의 게임을 즐기는 것 같았다. 말을 좀 붙여 만들자면, '공포-게임'이라고 할까. '공익고발자'('내부고발자'보다는 이 말이 좋은 것 같다)를 자처한 한 영관장교의 용기있는 소신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사람의 용기로 인해 발생할 어떤 긍정성보다는, 그가 처할 부정적 미래에 대한 진단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다. 아, 물론 "대단하다"는 표현 또한 많았다. 그러나, 그 수 만큼이나 사람들은 그 소령을 둘러싼 어두운 미래를 뱉어내기 좋아했다. "어이구, 이 분 끝이네요", "옷 벗으시겠네요" 이건 좀 심정을 밝히는 차원이지만, 난 괜히 이런 사람들이 밉다. '얄밉다'라는 표현이 맞겠지.  

그런 부정적 언어의 표출을 보면서,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계속 말을 하는 것은..결국 자신의 죽음을 부인하고 싶어서다"라는 그 말. 김영수 소령은 '두려움'이란 말을 꺼냈다. 우리는 그 말, 그 말에 담긴 어떤 감정을 통해 '인간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음과 동시에, 그 '두려움'을 맞이함으로써 '나의 안전망'을 무의식적으로 확보하려는 그 어떤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그 두려움을 내 입에서 나오는 '타자가 처할 두려움'을 발설하면서, 구경하는 쾌락의 순환고리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지.  

우리가 '남의 집 불구경하기'라는 표현을 쓸 때 상상하는 것은, 활활 타올라 잿더미로 변한 집들을 보면서, 옆에서 자신과 함께 보는 이들과 '불타오르는 광경'을 공유하는 것이다. 내가 너무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보는지 몰라도. 그 불구경 속에서 인간의 '공공적' /'이타적' 정신을 찾기보다는, "우리 집은 안 탔으니, 되었다"는 이상한 틈들이 더 가까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그런 '공포'의 기제들이 만연된 일상. 이것은 왠지 이번 정부들어서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특수한'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더한 공포들이 이전에도 작동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 공포들은 참 우리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부정적 자극을 그냥 참고 외면해버리게 하는 자기 검열의 형태라 모호한 두려움이 앞선다.  

결국 우리는 그 소령의 용기에서, 용기 자체에 대한 진정한 인정보다는, "또 무슨 (흥미로운) 일, 그 알 수 없는 실체의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지"라는 심정을 은밀하게 표출하는지 모른다. 그 소령의 용기는 그리하여, 또 '소비'되는 것이다. 타자가 느끼는 공포를 타자를 둘러쌀 공포로 반응하면서. "맞아, 당신 느끼는 두려움 그대로 될 거야"라는 이 수준을 "오 후덜덜합니다"라는 (약간 착한 듯한) 감정의 표출로 조심스레 교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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