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다들 알다시피 이 시대에 '선언'은 사라졌다. '엥?'이라고 하겠지만, 내말인즉슨, '선언다운 선언'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앞서 나가려는 선언은 없다. 항상 '사후적인', 어떤 것에 대한 뒤늦은 예비책, 방어책들만이 가득하다. 아직 서른 살이 되지도 않은 두 젊은 청년이 이 세상의 모순을 직시하고, 이 선언문을 썼을 때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 가득하다. 그러고 싶은 이유는, 이 책이 우리의 '지적 골동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은 여러 출판사의 버전으로 나왔지만, 강유원이 번역한 이 책은 맑스와 엥겔스에 대한 어떤 아련함이 남아 있으면서도, 이 아련함이 위대한 선언문을 박제물로서 여기지 않도록 하려는 잔상이 남아있는 것 같아 권하고 싶다. 이 책이 나온 시기는 공산당선언 160주년 즈음이었는데, 역자인 강유원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60년 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를 유럽에 떠돌고 있는 유령이라 말했다. 2008년 오늘, 공산주의는 전 세계 어디에도 자리잡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유령이다. 160년 전에는 공산주의를 토벌하기 위한 신성한 몰이사냥이 조직되었으나 2008년에는 무관심이라는 사태가 공산주의에게 벌어지고 있다. 공산주의는 세계의 많은 세력들에 의해 유의미한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공산주의의 '견해', '목적', 그리고 '경향'을 다시금  '공공연하게 표명'할 의의가 있는지를 분명히 해두어야 할 때이다. 121쪽. 

1848년 이후에 엥겔스가 계속해서 덧붙인 서문을 읽을 때는 이제는 곁에 없는 동료 맑스를 그리워하는 엥겔스의 감동스러운 문장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선언>의 공과를 지적하며, 그러한 공과에 대한 직접적이며 강제적인 개입이 아닌, 역사가 위치한 그 자리에서, 그 자리를 경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역사에 대한 의지와 실천을 묻는 엥겔스의 겸허한 문장도 인상적이다. 

나는 요즘 자크 르 고프의 <돈과 구원>, 앨버트 허쉬먼의 <열정과 이해관계>와 함께 본 책을 읽으면서, '국가 - 이데올로기 - 자본 - 개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자본주의가 '교환관계'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는 맑스의 놀라운 통찰력, 그리고 그 교환 관계 속에 숨어 있는 인간과 인간의 불평등한 주고받음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탈피할 수 없는 속성이다.  중세 시대 국가와 종교가 하나가 되어,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고, 특히 인간의 열정과 흥미를 감시하던 시기가 있었다. 돈을 매만지는 것이 나쁜 것으로 여겨지던 세상에, 점점 더 딜레마에 빠져가는 세계는, 자본주의를 향한 길을 통과하게 될 준비를 한다. 상업의 발흥과 함께 서로 간의 물질이 오고가고, 사람들의 물질성은 '이해관계'라는 단어와 결부된다. 즉, 이러한 이해관계를 통해 당시의 지식인들은 일정한 좋은 '정치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아니다의 갑론을박을 벌인다.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는 여기서 무한한 인간의 합리적 이기심, 인간이 자신을 향한 이해관계를 펼치는 행위가 오히려 공공적 가치를 드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이러한 합리적 이기심이 마냥 좋은 미래만을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도 신뢰할 수 없었던 측면이 있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관계가 맑스의 표현에 의하면, 생산관계, 생산양식, 생산력의 3항에 묶이면서, 이제 이 두 계급의 갈등이 시작된다. 국가사회학에서 맑스는 국가라는 것이 끊임없는 계급의 투쟁이라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맑스는 저 선사시대부터 산업이 발전하고 있는 당시까지를 존재의 역사, 물질의 역사로 바라보면서, 그 시간을 관통하는 물질성이 가져다 준 풍경의 비극을 우리가 막지 않아야겠냐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통해 맑스는 노동자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새로운 판을 짤 것을 촉구한다.  

나는 아직 많은 나이를 먹지는 않았지만, 이 책을 자신의 지적 골동품처럼 자랑하거나, 혹은 자신을 '좌파'라고 당당히 소개하면서 이 책을 자신의 액세서리처럼 말하는 사람을 자주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지적 골동품'도, 자신을 좌파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좌파 액세서리'도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가 써내려간 이 선언문의 당당함 만큼이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 갖추고 있는 어떤 겸허함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앞에 나와 있는 초기 선언문 하나만을 읽고 다 읽었다는 티를 내지 않기를 바란다. <선언>이 나온 후, 이후 여러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선언>의 서문을 다 읽은 후, 우리는 그 <선언>을 둘러싼 당대의 반응들을 차분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어느 위대했던 젊은 두 청년의 야심이 묻어나는 삶의 고백이다. 그리고 이 고백의 중심에는 '사람'을 챙기려는 의지가 있다. 지금 당신, 사람을 챙기려는 의지가 있는가. <선언>은 여전히 책을 만지는 당신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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