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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다리 1
줄리 오린저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1000쪽이 넘는 소설이다. 워낙 호평을 받은 책이라 감히 도전했다. 1주일이 꼬박 걸렸다. 어려운 책이 아닌데도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충실히 읽을 시간이 부족한 것도 하나의 이유다.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알기에 무작정 달려갈 수 없었다. 그 유명한 홀로코스트가 머릿속에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 속 두 주인공 언드러시와 클러러는 조금 경우가 다르다. 낯선 유럽 역사 속에서 조금 다른 유럽을 본 것이다. 그들의 비극이 다른 곳의 비극보다 아주 조금 적다고 해도 말이다.

 

현대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말할 때 팔레스타인을 그냥 지나갈 수 없다. 20세기 초반 그들이 겪은 엄청난 비극이 다시 재현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로 개인은 선량하고 착하지만 이들을 모은 집단이 나쁘다는 말처럼, 아니 쉽게 한국의 예비군들은 군복만 입혀놓으면 개가 된다는 말처럼 나치의 광풍은 거대하고 참혹하다. 이 소설 속에서 헝가리 군대의 모습 중 일부가 그렇다. 현대 중동은 수많은 비극을 품고 있다. 홀로코스트 산업이란 단어가 만들어질 정도의 홍보 때문인지 팔레스타인의 수난을 다룬 문학이나 영화가 등장하고 있다. 적들에게 배운 것일까? 단순히 소설에만 집중하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 또 나왔다.

 

헝가리 출신 유대인 언드러시는 잡지 표지를 잘 그린 것 때문에 파리 건축학교 장학생이 된다. 이 장학금은 헝가리 유대단체가 지원하는 것이다. 아직 유럽에 전쟁의 기운이 발현하기 전이기에 그에게 이 기회는 도저히 놓칠 수 없는 행운이다. 환전을 위해 간 은행에서 부딪힌 하스 부인이 그가 파리에 간다는 것을 알고 조그만 부탁을 한다. 아들 요제프에게 뭔가를 전해달라는 것이다. 며칠 동안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먼 거리를 생각하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여기에 한 노부인이 파리에서 편지를 부쳐달라고 요청한다. 이 조그만 인연이 나중에는 아주 중요한 인연임이 밝혀진다.

 

낯선 파리. 아름다운 파리다. 하지만 불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방도 구하지 못한 그에게 너무나도 낯설다. 어렵게 방을 구하고 학교에 간다. 그가 바라는 건축가의 길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유대인 친구들을 만난다. 자신들의 모임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 이 장면들을 보면서 살짝 반감이 생겼다. 유대인들이 너무 폐쇄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하지만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들이 미국에서 자신들만의 사회를 만들어 생활하는 것을 떠올리니 너무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것을 비판하고 욕한다면 코리아타운이나 차이나타운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친구와 선생과 학교가 갖추어졌다고 삶이 행복하지는 않다.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돈이다. 그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한 헝가리 유대인단체가 정부의 헝가리 유대인 해외 송금 금지로 장학금을 보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좋은 선생과 친구는 다른 방법을 찾아준다. 거기에 언드러시의 노력이 보태져야 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언드러시는 기차에서 만난 유대인 노버크의 도움으로 나머지 돈을 벌게 된다. 이 직장은 그에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한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클러러다. 그녀는 가슴 아프고 참혹한 과거를 지닌 채 딸 엘리자베스와 살고 있다. 그녀를 본 순간 사랑에 빠진다. 이 둘의 강한 사랑이 시작한다.

 

두 권으로 나누어진 이 소설에서 1권은 언더러시의 파리 생활을, 2권은 헝가리로 돌아간 후 겪게 되는 2차 대전 당시 헝가리 유대인의 삶과 비극을 보여준다. 1권에서 사랑을 시작하는 한 청춘의 고뇌와 열정이 다루어진다면 2권은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유대인의 비극이 이어진다. 다행이라면 헝가리 유대인이 상대적으로 덜 고생했다는 정도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작가가 비극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사랑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나의 감성이 메말랐거나 좀더 강한 자극받기를 바란 것인지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그들이 선택한 길이다. 역사의 비극을 아는 상태에서 분명하게 비극이 보이는데 그들은 사랑 때문에 가족 때문에 그곳에 머문다. 그들에게 닥쳐올 비극을 생각하면 정말 답답하다. 물론 달아난다고 그 시도가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나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참혹함과 나치의 잔혹함을 아는 나에게 이것은 강한 불안감을 전해준다. 혹시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하고. 이 긴장감과 불안감이 재미있게 읽힐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다. 헝가리 유대인이란 특성 때문에 더 그렇다.

 

비극을 알지만 다른 결말이 나오길 기대하면서 읽었다. 그 기대는 어느 정도 충족되었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준 비극을 모두 벗어날 수는 없다. 비록 헝가리 유대인이 폴란드나 독일 유대인에 비해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았다고 해도 말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게 되면서 벌어지는 몇 가지 사건 중 하나는 완전히 예상을 벗어난다. 엄청나게 참혹한 비극이 있는 와중에도 인간을 지키려고 노력한 헝가리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는 늘 시대의 앞잡이나 동조자가 있다. 이 때문에 생기는 비극은 또 다른 아픔이자 기억이다.

 

정말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언드러시와 친구 멘델이 노무부대 안에서 신문을 만든 것이다. 이런 여유가 어쩌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하고 말이다. 이것도 역시 결과를 아는 사람만이 느끼는 불편함이다. 이런 홀로코스트 관련 문학은 늘 이런 불편함과 불안감을 가지고 읽을 수밖에 없다. 역사를 바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려준다. 가볍게 시작할 수 없는 분량에 내용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고증을 통한 묘사와 서술은 이 작품을 더욱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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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릿광대의 나비
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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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인 <어릿광대의 나비>와 <마쓰노에의 기록> 두 편이 실린 단편집이다. 달랑 두 편인데 단편집이라고 말하니 조금 어색하다. 분량도 많지 않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다. 적은 분량 때문에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 되었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직 완전히 소화하지도 읽지도 못했다. 그것은 이 소설이 지닌 매력이자 어려움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소설에 상을 준 심사위원들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런 소설 정말 오랜만이다.

 

<어릿광대의 나비>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쉽지 않다. 화자가 바뀌는 것이야 쉽게 파악되지만 이 변화가 이야기 속에 녹아갈 때 만들어지는 시간과 설명은 쉽지 않다. 희대의 다언어 작가 도모유키 도모유키를 둘러싼 상황들이 녹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쓴 소설에서 시작하여 이 소설을 번역한 사람이 등장하고 다시 도모유키가 등장하는 설정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단순히 사람의 변화만이 아니라 상황과 시간의 전복 등이 이어지면서 복잡해진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이 있다. 그것은 도모유키 도모유키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방식이다. 혹시 나도 이런 식으로 한다면 빨리 다른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마쓰노에의 기록>은 원작을 번역한 작품을 다시 번역하고, 이 번역을 다시 번역하는 것을 다룬다. 이런 번역 과정 속에 원래 의미는 사라지고 새로운 작품이 탄생한다. 어쩌면 번역이라기보다 상상력에 의한 창작이 더 맞을 것 같다. 다른 언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묻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두 번역자가 만난 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사람속이 얻은 최초의 언어는 노래였다.”(188쪽)란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아직은 과학적으로 완전히 해석되지 못한 뇌의 신비도 다루어지는데 역시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가끔 이와 비슷한 소설을 읽는다. 읽을 때면 늘 고민에 빠진다. 쉽지 않다. 익숙한 문장과 구성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많지 않은 분량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바로 이런 낯설음 때문이다. 추적자와 추적자를 관찰하는 대상의 이야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런 구성으로 이어지고 이 구성 밖에서 만들어지는 설정과 환경이 어렵게 만든다. 이것은 다시 번역자와 원작자의 상호 번역이 이해가 아닌 자신의 인식에만 머문 것에 눈길이 가게 한다. 모든 번역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면 지나친 과장이 되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 낯선 문장과 전개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소개가 보여준 해설의 깊이나 넓이에 대해 그 반만이라도 이해했다면 이 소설에 대한 나의 호감은 더 높아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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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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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네 마음을 끈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촬물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 문학동네문학상 수상작을 읽을 때도 이 상에 대한 나의 호감을 말했다. 그럼 다른 하나 특촬물인데 사실 이 소설에서 기대한 것은 예전 안정효의 <헐리우드키드의 생애>와 같은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 빠진 소년과 그가 본 수많은 영화에 대한 감상과 행동 등을 기대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방향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기대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물론 특촬물에 대한 애정 있는 시선은 그대로 담겨 있다.

 

첫 대사는 “우리, 결혼해”다. 특촬물과 결혼이라. 이상한 결합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대사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해준다. 암에 걸린 채연이 보험회사에 보험료를 신청하러 온다. 이때 영호와 만난다. 냉면집에서 인연이 이어지고 이 연상연하 커플은 결국 결혼한다. 물론 이 결혼은 직장에는 비밀이다. 고객과의 관계가 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다. 이 결혼까지 진행되는 과정이 간결하다. 솔직히 과연 이런 결합이 있을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거기에 그녀는 열세 살 된 아들까지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아들 샘과 영호와 만나면서부터다.

 

제목에서 말하는 체인지킹은 특촬물 드라마 제목이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나오지 않는다. 영호가 이 드라마와 만나게 되는 것은 샘과 거리를 거닐다가 샘이 몰두하는 장면을 보면서부터다. 집에 있는 디지털TV에도 이 드라마를 본 흔적이 있다. 이 사실들이 나올 때만 해도 이제 본격적인 특촬물 세계로 들어가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샘이 영호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드라마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낳았다. 그런데 아니다. 또 맞다. 아닌 것은 본격적인 특촬물 세계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고, 맞는 것은 이 드라마와 샘의 말없음이 관계있다는 것이다.

 

소설 속 관계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채연의 아들 샘과의 관계, 다음은 샘이 열심히 보는 체인지킹 때문에 엮이게 되는 마니아 민과의 관계, 마지막은 보험심사원 안과 그가 의심을 가지는 보험수령자 윤필과의 관계다. 이 셋은 별개의 것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샘은 민과, 영호는 안과, 윤필의 과거는 체인지킹의 소문과. 이런 관계 외에 이들은 아버지 없는 세대를 대표한다. 샘의 아버지는 마약 중독자고, 영호와는 그 어떤 대화도 없다. 영호 아버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다. 윤필의 아버지는 아들들 손가락 잘라 보험료를 탄 이력이 있다. 여기에 샘의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영호와 자살한 아들과 소년원을 다녀온 딸을 둔 안의 관계는 그냥 무심코 지나갈 수 있는 설정이 아니다.

 

제목 <체인지킹의 후예>는 민이 영호에게 한 대화 후에 나온다. “아버지도 없고, 중심이 되는 이야기도 없고, 믿고 따를 진실도 없어. 신도, 철학도 아무것도 없어. 가진 건 그저 반복 학습된 찌꺼기야. 우리는 어디선가 있었던 이야기들의 흉내일 뿐이야. 위대한 과거의 지루한 모방이야. 비참한 소재의 처참한 패러디야.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어.”(252쪽)란 대화다. 이 속에 담긴 무력함과 패배적이고 허무적인 감상은 바로 반발을 불러온다. 감상에 매몰된 사람이 흔히 내뱉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반복 학습된 찌꺼기이기 때문이다.

 

특촬물에서 기대한 가볍고 경쾌하면서 조잡할 것 같은 내용은 사실 없다. 처음부터 짜놓은 설정과 관계 속에서 아무 의미 없는 듯 던져놓은 것들이 하나씩 의미를 찾을 때 고개를 끄덕인다. 숨겨져 있던 사연들이 하나씩 밖으로 드러날 때 그 상처는 아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상처를 남에게 내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윤필과 안의 대립과 갈등 속에 벌어진 사고는 현실적이라기보다 너무 많은 비약을 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영호와 샘이 첫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같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왜일까? 긴장의 끈이 풀렸기 때문일까?

 

체인지킹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불가에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고 한 법문이 떠오른다. 왜 이런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인지킹의 기본 줄거리는 고독하고 잔인하면서도 철학적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많이 나간 것인지 모르겠다. 민의 분석이 샘의 그것과 너무 다른 것과 같이. 또 민의 ‘우리는 체인지킹의 후예다’라는 외침의 답으로 영호가 내놓은 말은 유치한 말장난 같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사연은 결코 유치하지 않다. 이 소설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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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요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여영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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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뒷장을 가득 채운 엄청난 수상경력은 사실 그냥 지나가기 어렵다. 한때 순위와 목록에 열광했던 과거를 되새기면 더욱 그렇다. 이런 수상경력이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것 때문에 더 많이 읽히지 않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것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소년과 그 가족의 삶이 너무나도 기독교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덕분에 왜 그렇게 미국 기독교 보수들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되고 있다.

 

화려한 수상 경력도 아마 이런 종교적 성장 과정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미국 영화나 다른 기독교 영화에서 쉽게 다루지 않은 부분을 심층적으로 파고든 점도 있다. 아마 그 문화권에서는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부분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나 감정이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크레이그가 경험한 왕따와 신에 대한 사랑과 연애는 읽는 내내 잔잔히 가슴으로 파고든다. 어떤 부분은 너무 사실적이라 작가와 부모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소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주인공 크레이그는 작은 키에 순한 성격이고 다른 학생에게 놀림을 받는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그에게 학교와 집 모두 탈출구가 없는 공간이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 역할을 한 것은 동생과 함께 잔 침대와 그림이다. 유년기에 들은 목사의 천국에 대한 설교는 성경에 더 집착하게 만든다. 매일 밤 성경을 읽어야 잠들 수 있을 정도다. 그의 일상은 너무 단순하다. 이런 일상에 변화가 온 것은 겨울 성경학교에서 레이나를 만나고부터다. 편지가 오고가고 둘의 감정은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리고 방학 동안 크레이그가 레이나 집으로 놀러간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레이나와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조심스럽고 간절하다. 크레이그 상황보다 좋지 않은 레이나 집 사정 때문에 더 그렇다. 부모의 이혼이란 큰 문제 앞에 이 둘의 사랑은 깊어진다. 위태롭다. 두 집안 모두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다. 십대 둘이 붙어 다니는 것을 용서하지만 육체적 쾌락에 대해서는 엄격하다. 크레이그 경우 매일 밤 성경읽기를 통해 다져진 인내력에 그 사랑의 순수함마저 왜곡될 정도다. 개인적으로 아주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다. 레이나의 아버지가 이 둘이 벗고 자는 모습을 보는 장면이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의 흐름과 레이나의 얼굴 표정은 진한 여운을 준다. 이것은 그가 이혼할 예정인 아내가 집에 들어올 때 차 안에서 보던 장면과 이어진다.

 

흔히 우리가 보던 그래픽노블이 아니다. 그림체가 화려하지도 억지로 꾸미려는 장면도 없다. 간결한 선을 통해 드러나는 감정과 장면들은 짧은 대사와 더불어 흡입력을 놓인다. 인용된 성경의 문장은 크레이그의 감정을 대변하고, 어릴 때 동생과 경험한 일들은 가족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지 보여준다. 자신이 믿는 바를 강요하는 사람들 틈에서 자란 크레이그가 다른 삶을 경험하면서 얻게 되는 것은 다양하고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레이나와 사랑에 빠진 그가 레이나의 또 다른 관계를 힘들어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감정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담요란 제목은 레이나가 그에게 준 선물이자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가 왜 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그가 그렇게 견고하게 쌓아놓았던 신의 성전이 한방에 무너졌는지 알려줄 때 이 담요는 그가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떠올려주고 위안을 준다. “꿈에서 깨기 위해서는 우선 기억을 해야 한다. 우리는 기억을 돕기 위해 의식을 행한다.”(574쪽) 이 문장은 지금까지 부정적이었던 의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적 삶이란 거대한 틀 속에서도 사랑은 살아 움직이고 열정은 불탄다. 지금 순간 백지처럼 텅 빈 듯한데 시간이 지나면 그 공간을 여운이 채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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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 나인 드림
데이비드 미첼 지음, 최용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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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개봉한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원작가 작품이다. 먼저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읽을까 하고 고민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볼 예정이라 책에는 손이 가질 않았다. 어디에 두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러다 우연히 나에게 온 이 소설은 며칠의 시간을 빼앗아 갔다. 분량이 적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고, 다른 하나는 평일에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여기에 처음 얼마간은 이 소설의 형식과 문장 등에 적응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 적응이 다 되기도 전에 끝에 도달했지만. 평소보다 조금 힘들게 읽었지만 작가의 매력을 알게 만드는 데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읽으면서 숫자 9때문인지 모르지만 김만중의 <구운몽>이 떠올랐다. 내용 상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꿈과 숫자 9밖에 없다. 아련한 기억 속에 자리한 소설이 떠오른 것은 첫 장면과 각 장마다 일어나는 사건과 환상 때문이다. 이 도입부 때문에 한동안 이야기 속에 빨려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았다. 가독성이나 재미와 상관없이 말이다. 하지만 점점 진도가 나감에 따라 이야기 구성에 눈길이 갔고 주인공의 기묘한 경험에 빨려 들었다. 순간적으로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예고편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아홉 장이라고 했지만 마지막 장은 백지다. 이 백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소설 전체에 대한 호불호와 해석이 갈라질 것이다. 내 경우는 어떻게 그 백지를 채워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8장의 마지막 문장과 상황이 이것을 더 부채질했다. 하지만 그 앞장에서 보여준 열아홉을 지나 스무 살이 된 미야케 에이지의 결코 간단하지 않은 대모험을 보면 그냥 무시하기는 힘들다. 자신의 아버지를 찾기 위한 시도가 어떻게 이런 혼란 속으로 유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더불어 말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이 장면도 혹시 미야케의 환상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솔직히 적지 않은 장면들이 그랬다.

 

소설은 미야케 에이지가 자신의 유전적 아버지를 찾는 과정을 다룬다. 그는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어머니조차 그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말해주지 않는다.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변호사 이름이 전부다. 이 이름을 통해 아버지에게 다가가려고 하는데 장벽이 적지 않다. 변호사와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첫 장 첫 장면이 이 만남을 위해 액션 영화에서 빌려온 액션 등으로 가득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가 바란 것은 단순히 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인데도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들이 우선 눈에 들어와서 상황을 왜곡한다. 이 때문에 미야케의 도쿄 생활은 파란만장해진다.

 

이 파란만장한 삶이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을 몇 번이나 넘기게 만든다. 특히 이런 순간들은 한 편의 액션 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은 준다. 밤의 지배자 야쿠자들과 엮이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결코 평범한 시골 청년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도시 청년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그를 둘러싼 몇 명이 만들어내는 일상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을 순화시켜준다. 미야케가 생각하기에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목덜미를 가진 웨이트리스 이마조 아이는 이런 변화의 한 가운데 있고, 미야케의 로맨스를 완성시키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 둘의 순수한 감정 덕분에 강렬한 이미지들로 가득한 이 소설에서 조금은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아버지 찾기에서 시작한 소설은 언제나 자신 찾기로 끝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안주라는 쌍둥이 누나가 있는데 그녀는 어릴 때 죽었다. 이 죽음을 극복해야 하는 것도 하나의 과정이다. 이런 과정들을 비현실적인 폭력과 환상과 엮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다양한 장르를 사용한다. SF, 액션, 스릴러, 역사, 로맨스, 판타지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가끔 다양한 장르의 사용이 흐름을 방해하고 가독성을 떨어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소설은 각 장의 구분을 통해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물론 잠시만 흐름을 놓치면 꿈과 현실이 잘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어쩌면 마지막 장이 백지인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읽으면서 어떻게 영국인이 이렇게 일본에 대해 잘 쓸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알고 보니 아내가 일본 사람이다. 단순히 아내 탓이라고 하기에는 그 깊이가 대단하다. 역자가 후기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을 많이 말했는데 사실 한두 가지를 제외하면 잘 모르겠다. 너무 오래전에 읽은 책들이라 기억이 연결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이라면 이 장면을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부분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좋은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가 만난다면 원작과 또 다른 재미를 줄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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