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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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읽는 모리미 토미히코의 소설이다. 이번 작품은 기존에 읽었던 작품과 느낌이 많이 차이난다. 새벽에 대부분 읽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의 이야기가 끝날 즈음이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전작들에서 느낀 기묘하고 기발한 발상들이 이번 작품에서는 기이하고 섬뜩한 느낌으로 변했다. 유쾌하고 오밀조밀하면서 기발한 재미를 준 이야기들이 어둠 속에 잠긴 듯하다고 해야 하나. 제목의 의미가 야행열차나 백귀야행의 야행일 수 있다고 할 때 이 둘이 각각 독립된 것이 아니라 혼재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과 환상은 언제나 그 대상에게는 어렵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현실이 어디까지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10년 전 영어회화 학원 동료들과 밤의 불 축제인 진화제에서 만나 각자 하나의 기묘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이야기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작가의 동판화 작품들이다. 마흔여덟 개의 연작으로 구성된 야행 시리즈다. 그 작가의 이름은 기시다 미치오다. 그는 원래 의도했던 작품을 모두 만들지 못하고 죽었다. 이 작품들은 지역명이 붙어 있는데 다섯 이야기는 바로 이 지역을 여행하면서 각자가 경혐한 비현실적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다.

 

다섯 이야기 중에서 오하시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지막 구라마가 유일하다. 각각의 이야기 화자는 10년만에 모인 학원 동료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기이한 일을 이야기하는데 항상 등장하는 것이 기시다 미치오의 야행 동판화다. 야행과 대비되는 서행이란 작품의 존재를 알린 것도 이 이야기 속이다. 아직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작품이다. 마지막 이야기에서 이 작품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데 이 때문에 전체적인 설정이 더 어려워졌다. 단순히 밤과 낮, 어둠과 밝음의 대비가 아니다. 삶과 죽음으로 나누기에도 무리가 있다. 마경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서로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조금은 부족하다.

 

오노미치, 오쿠히다, 쓰가루, 덴류쿄, 구라마 등은 모두 지명이다. 이 지역을 여행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이야기한다. 이 지역은 기시다 미치오의 연작에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당연히 야행 시리즈에 나오는 건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가 늘 등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비현실적인 환상으로 이어진다. 어떤 부분에서는 공포가, 어느 곳에서는 묘한 긴장감이 잔뜩 드리우고 있다. 아내와 똑같이 생겼지만 아니라고 하는 여자, 죽음을 예언하는 할머니, 공터 한 가운데에서 불타는 집과 수상한 여자, 기차 여행 중에 만난 기묘한 분위기를 가진 여고생 등이 그렇다. 동판화 속 여인 이미지지만 얼굴이 정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상상력으로 이 존재를 추정해야 한다. 10년 전 사라진 하세가와가 아닌가 하고.

 

유리 가가린이 빛나는 지구가 아닌 어둠에 휩싸인 지구를 말했다고 하면서 어둠을 강조할 때 각각의 체험담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각각의 체험담 속에 등장하는 몇 가지 장면과 상황은 정확하게 말해 범죄행위다. 이런 일을 10년 만에 만난 영어회화 학원 동료들에게 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기묘한 장면들은 이런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동시에 서늘하고 오싹한 느낌이 조용히 찾아온다. 작가가 조용히 깔아놓은 상황과 장면들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 오하시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상황은 어디가 현실의 공간인지 분명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이 공간은 누구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작품으로 기존에 작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에 변화가 생겼다. 물론 좋은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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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팡의 소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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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이력을 가진 소설이다. 기자였던 작가를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로 들어서게 만든 작품이고, 91년 제9회 산토리 미스터리대상 가작을 수상한 후 수차례 개고 작업을 거쳐 2005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한국어판 출간 10주년을 맞이하여 전면 개정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가작을 수상한 후 어떤 개고 작업을 거쳤는지 알 수 없지만 가작은 충분히 아쉬운 점수다. 이런 점만 놓고 본다면 가작을 받은 작품과 현재의 작품을 비교해보고 싶은 욕망도 살짝 생긴다. 더불어 그 당시 대상작품이 무엇인지도.

 

살인사건의 시효가 24시간 남은 상태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사건은 15년 여교사의 추락 자살사건으로 마무리된 건이다. 그냥 시효 만료로 끝날 사건이 새로운 정보가 나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시청의 수사팀이 현장에 투입된다. 그리고 그 당시 사건의 용의자들에 대한 정보가 전달된다. 3명의 용의자 중 기타가 먼저 연행된다. 학생 때는 불량학생이었는지 모르지만 현재는 건실한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15년 전 그는 그 사건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던 인물들 중 한 명이다. 이유도 모른 채 불려온 그는 15년 전 그들이 계획했고, 그 계획의 실행 도중에 마주한 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타로, 다쓰미, 다치바나. 이렇게 3명은 카페 루팡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학창 시절을 멋지게 마무리할 계획 하나를 낸다. 그것을 기말고사 시험지를 훔치는 것이다. 교장실에 숨어들어가 금고를 열고 시험지를 베끼면 끝이다. 이 간단한 말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숨겨져 있다. 학교에 숨어들어가야 하는 문제, 교무실과 교장실 자물쇠 문제, 금고를 여는 문제 등. 여기에 밤마다 학교에 머물면서 순찰하는 선생까지 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젊은 열정과 시간은 이 계획을 세밀하게 다듬을 수 있게 만든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획을 짠 카페의 이름을 따 루팡 작전이라고 불렀다.

 

루팡 작전은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공한다.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모두 무사히 지나갔다. 그러다 문제가 생긴 것은 마지막 날이다. 교장실 금고를 열었는데 미네 마이코 선생이 시체로 나온 것이다. 시체를 다시 금고 속에 넣고 그들은 달아난다. 그 이전에 창문으로 뛰어내린 인물이 있다. 누굴까? 이렇게 선생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이전까지 학창 시절 학생들의 멋진 일탈을 그린 청춘물이 미스터리로 변한다. 그리고 금고 속에 있던 시체는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것으로 바뀐다. 경찰 조사 결과 유서의 발견 등으로 자살로 판정난 것이다. 15년 동안 새로운 정보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소설은 기타의 진술을 하나의 큰 줄기로 삼고, 가지들은 경찰들이 채운다. 기타를 비롯한 나머지 두 명은 연행하고 심문하는 것도 이 경찰들이다. 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는 인물은 경시청의 미조로기 계장이다. 연행할 사람과 심문자를 정하는 것도 그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24시간, 현실을 감안하면 불가능한 시간이다. 열정적인 경찰과 기타의 고백은 이 부족한 시간을 채워준다. 그것은 기타의 진술이 투신자살로 끝나지 않고, 이 사건 이후 기타를 비롯한 친구들의 사건조사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오면서 이런 사건의 전문가인 경찰이 더 쉽게 현실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이 사건과 함께 미조로기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이 같이 나온다. 3억 엔 강탈 사건이다. 카페 루팡의 주인이 몽타주의 인물과 닮았지만 증거 부족으로 풀려난 적이 있다. 기타 등은 그를 3억 씨라고 부르면서 그가 범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세 명이 늘 머물고 루팡 작전을 계획한 곳도 바로 그곳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장소와 인물의 관계를 촘촘하게 엮어놓았다. 사소한 만남과 돌발적인 행동이나 대사도 그냥 무심코 둔 것은 아니다. 그냥 읽고 지나간 대사 하나, 지문 하나가 나중에 큰 단서가 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연을 풀어놓으면서 오히려 현실성을 떨어트린다.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운 대목이다.

 

기타와 그의 친구들이 벌이는 모험은 이 소설이 미스터리란 느낌을 지워준다. 15년 전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이 청춘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열정적이고 충동적이다. 아마 경찰들의 심문이나 사건 수사를 지우고, 몇 가지 장면만 손본다면 아주 멋진 청춘 소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을 알려주는 방식만 바꾼다면 완전히 다른 느낌이 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곳곳에 심어놓았다. 청춘의 열정과 충동은 어른들이 보여주는 추악함에 짓눌린다.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들은 이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반전의 연속, 사랑, 열정, 인간관계와 과거로부터의 해방 등은 또 다른 확실한 재미다. 한동안 잊고 있던 거장 요코야마 히데오의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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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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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만 놓고 보면 조금 긴 단편소설 정도다. 160쪽이라고 하지만 그림과 한쪽 면에 많지 않은 글을 생각하면 정말 단편소설 분량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 큰 불만은 없지만 이런 분량으로 나오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너무 비싸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읽고 서평을 쓸 때는 좋다. 얇아서. 책을 모두 읽은 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용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그냥 무심코 지나간 삽화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유를 가지고 삽화들에 좀더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스쳐지나간다.

 

작가는 이 소설을 ‘기억과 놓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과 그의 손자와 아들이 등장하여 잃어가는 기억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노인의 기억은 거대한 광장 크기에서 점점 작아져 작은 텐트로 축소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텐트지만 그 중간에는 노인의 기억만큼 큰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의 변화는 언제나 손자인 노아와 아내가 함께 한다. 노아를 부를 때면 언제나 노아노아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두 배의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개그 코너에서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부르면 정말 느끼하고 밥맛인데 말이다.

 

기억의 공간을 조금씩 잃어가는 노인과 그와 함께 하는 가족의 모습은 현실과 상상이 교차한다. 노인의 머릿속에서 대화가 오고 가고, 현실의 아이는 할아버지와 동행한다. 먼저 죽은 아내를 기억 속에 불러내어 그들의 사랑과 삶을 이야기하고, 기억의 공간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의 수학에 대한 열정은 아들을 지나 손자에게 이어지고, 둘은 원주율을 가지고 놀이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의 공간은 점점 더 줄어든다. 그래도 그의 곁에는 아내와 손자가 있다. 실제로는 아들과 손자가 있는 것이지만.

 

두려움은 그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생긴다. 기억을 놓는다면 두려움도 사라진다. 하지만 기억은 내가 원하는 것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의 퇴행은 그래서 무섭고 힘들고 어렵다. 손자를 잊는 것에 대한 손자의 답변은 정말 멋지다. 다시 친해질 기회가 생긴다고, 자신은 꽤 괜찮은 아이라고. 기발하면서도 아주 따뜻한 대답이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부모의 바람을 벗어난 자식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자신의 바람과 열망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식을 키우다보면 얼마나 이런 경우를 자주 보게 되는가.

 

길지 않은 글이지만 곱씹어볼 대목이 많다. 자신의 바람과 사랑과 삶을 간결하지만 아주 인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아들의 기타를 지나가듯이 물을 때는 순간 뭉클했다. 노골적으로 다루지 않았기에 생긴 감정이다. 아마도 그의 삶에서 오랫동안 걸려있던 응어리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들이 아빠가 되어 다시 그 아들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돌보는 아들에게 하는 말은 우리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같이 걷고, 같이 있어주는 것 말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특별한 무엇인가를 억지로 과장해서 표현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다. 기억과 이별을 아름답게 묶어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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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죽이다 데이브 거니 시리즈 3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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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브 거니 시리즈 3번째 작품이다. <658, 우연히>와 <악녀를 위한 밤>을 읽고 그의 작품을 기다린지 거의 5년이 지났다. 퍼즐 미스터리를 엄청난 가독성으로 풀어내는 존 버든의 작품임을 생각하면 너무 느린 출간이다. 다름 작품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언제나 그렇지만 존 버든의 소설은 두께가 문제가 된 적은 없다. 이번 작품이 오히려 짧은 편이다. 거의 550쪽에 달하지만 지루한 부분을 느낄 수 없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라면 작가가 깔아놓은 트릭의 정체를 내가 쉽게 파악했다는 것 정도다.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이미 사용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범인을 찾아낸 것은 아니지만.

 

이번 소설에서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나는 것은 소설의 중반 이후다. 중반까지는 착한 양치기 살인사건을 다시 조사한다. 그리고 재미난 설정이 하나 있다. 두 개의 프롤로그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파트에서 다시 프롤로그가 나오고, 이때부터 연쇄살인은 아주 빠르게 일어난다. 실제 앞의 두 파트는 이 세 번째 파트를 위한 아주 길고 중요한 기본 그림이다. 물론 바로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부분에서 집중이나 관심이 떨어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때까지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다. 뭔가가 일어날 것이란 기대를 심어주고, 새로운 사실들과 가정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FBI와의 갈등은 또 다른 재미다.

 

2000년 봄 벤츠를 탄 여섯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착한 양치기로 불리는 그는 선언문을 내어 이들이 탐욕 등 때문에 죽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10년 동안 이 사건은 미해결로 남아 있고, 심리학자와 FBI는 선언문을 중심에 놓고 사건을 파헤친다. 여섯 명의 인물들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찾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딱 하나 벤츠를 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말이다. 한때 엄청난 관심을 누린 사건이고, 이 사건 때문에 한 케이블방송이 떼돈을 벌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조용히 묻혔다. 그런데 이 사건을 다시 파헤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바로 킴이다.

 

킴은 10년 전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후 큰 혼란을 겪었다. 방황을 하다 학사 논문을 준비중에 미해결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생각해낸다. 너무 광범위한 것을 줄이다 특정 사건 피해자로 한정한다. 착한 양치기 살인사건이다. ‘그 여자를 막아야 한다.’란 소설의 첫 문장은 바로 킴을 가리킨다. 킴의 기획은 교수의 추천으로 케이블 램TV의 프로그램으로 발전한다. 문제는 여기서 일어난다. 잠자고 있던 악마를 깨운 것이다. 원제인 ‘LET THE DEVIL SLEEP'은 중의적으로 사용된다. 책 속에서는 ’악마를 깨우지 마라‘는 문장으로 더 강하게 다가오지만.

 

거니는 지난 사건의 총격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다 킴의 엄마인 코니 클라크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를 슈퍼캅으로 띄워준 저널리스트다. 딸의 기획을 도와달라는 부탁이다. 킴이 그를 흠모하고 있다고 말하고, 딸의 전 남친이 딸을 괴롭힌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전설의 슈퍼캅은 미해결 사건인 착한 양치기 살인사건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처음에는 비교적 간단하게 생각한 채로. 킴을 도와 몇 가지 도움을 주는 정도였던 것이 하드윅에게 사건 파일을 얻은 뒤로 점점 빠져든다. 선언문을 읽고, 몇 명의 피해자 가족을 만나면서 그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솟아난다.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킴은 전 남친 로비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한다. 경찰에 연락을 해도 제대로 처리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거니가 확인하니 킴이 경찰의 CCTV설치를 거부했다. 로비의 도발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허세를 부린다. 엄마에게 가라는 몇 번의 의견도 묵살한다. 이런 킴의 행동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특히 집안에서 발견된 핏방울과 피 묻은 부엌칼의 등장은 이 이야기의 중심에 킴이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읽는 내내 언제쯤 킴에게 착한 양치기라고 말하는 연쇄살인범이 다가올지 궁금했다. 이 예상은 전혀 내가 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연쇄살인범을 다루는 수많은 소설과 분명히 다르다. 소설 속 첫 살인이 벌어지는데 걸린 시간이나 두 번의 프롤로그뿐만이 아니다. 살인자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과 그 이유까지 다르다. 거니도 확신을 가지고 누가 범인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세운 이론이 맞다는 확신조차 없다. 하지만 그의 놀라운 추리력과 상상력은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다. 프로파일링에 대한 환상을 지우고 원점에서 다시 사건을 수사할 것을 바란다. 그의 의견이 기존의 수사관들에게 통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들이 힘들게 쌓아놓은 수사와 이론을 무너트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통찰력을 가지게 된 것은 직접 수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다른 수사가 모두 이루어졌기에 다른 시각으로 사건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단순히 혼자만의 공은 아니다. 한 사람의 수사관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얼마나 기다려야 다음 이야기가 출간될지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부디 지금보다 짧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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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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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말에 1909년에 출간된 <북유럽 신화, 재밌고도 멋진 이야기>를 읽었다. 이 책은 신들을 한 명씩 한 명씩 이야기로 풀어내었다. 신들의 인명사전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옛 에다를 바탕으로 한 새 에다와 산문으로 써 원전의 느낌을 살렸다. 덕분에 읽을 때는 낯선 이름과 그 운문으로 조금 고생했다. 이 고생과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북유럽 신화는 기억 속에서 조금씩 사라졌다. 영화 <토르>나 <어벤저스>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긴 채 말이다. 그런데 닐 게이먼은 이 북유럽 신화를 사건 중심의 각각 독립된 단편소설로 만들었다. 당연히 엄청난 가독성을 보여주었다.

 

이 북유럽 신화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의 죽음과 노쇠 등이 다루어지고, 각각의 신들이 하나의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신화를 비교하는 것은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이 신화가 들려주는 놀랍고 재밌고 아주 인간적인 이야기를 즐기면 된다. 실제 에다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지 안다면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닐 게이먼처럼 재미있게는 쓰지 못할 것이다. 각각의 이야기 속에 신들의 성격을 아주 잘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북유럽 신화를 다룬 에다를 읽지 않았기에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오딘, 토르, 로키 등의 분량이 실제 이렇게 많은지는 알 수 없다. 특히 이 소설에서 토르와 로키의 분량은 절대적이다. 이들이 경험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니면 사건 속에서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한다. 특히 로키는 대부분의 큰 문제에 직접 간접적으로 엮여 있다. 신들의 황혼이라 불리는 라그나로크의 경우에는 그의 자식들과 그가 일으키는 엄청난 사건이다. ‘로키의 자식들’이란 이야기에서 이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앞으로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보여준다. 그리고 왜 그들을 죽이지 않고 문제를 그대로 안고 갈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이것은 운명이란 이름으로 포장된다 해도 말이다.

 

북유럽 신화를 읽을 때면 토르의 무식함과 과격함과 엄청난 힘에 늘 놀란다. ‘토르의 거인 나라 여행’은 그가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하지 알려준다. 그의 엄청난 식성도 같이. 이 식성은 ‘프레이야의 이상한 결혼식’에서 한 번 나왔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훨씬 대단하다. ‘하미르와 토르의 낚시 여행’에서 거인들보다도 많이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작은 몸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음식이 들어갈지 궁금하다. 물리학적으로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토르에게 일어난다. 폭이 5킬로미터나 되는 솥은 들고 올 수 있을 정도의 힘이란 것에 놀라고, 이 솥을 사용하는 거인들을 아주 쉽게 죽이는 모습에 또 한 번 놀란다. 이 신화를 읽을 때면 이 비과학적인 수치들에 항상 의문을 품는다.

 

토르와 함께 늘 말해지는 뮬리뇨가 로키의 장난 때문에 만들어졌다. 신들이 사랑하는 무기와 도구들이 로키의 장난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신들의 보물’ 이야기가 그렇다. 이것만 놓고 보면 장난꾸러기이자 모사꾼인 로키가 신들에게 좋은 일도 알게 모르게 많이 했다. ‘최고의 성벽 건축가’에서도 로키의 지혜와 희생이 없었다면 아스가르드의 높은 성벽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멸의 사과’에서 로키는 신들을 아주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간다. 불멸의 신들이 노쇠해지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물론 그가 기지를 발휘해 사건이 잘 해결되지만 그가 아스가르드에 아주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실이다.

 

오딘은 이야기의 첫 부분에 등장해서 중심을 잡아준다. 까마귀들로부터 세상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알지만 이것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의 자리가 세상을 둘러볼 수 있는 위치인지도 모른다. 프레이가 그의 자리에서 게르드의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하지 않았든가. 로키의 자식들이 일으킬 문제를 알면서도 그대로 두는 것도 세계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서다. 실제 사건들에서 그가 직접 활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식인 발드르가 죽었을 때를 제외하면 이야기가 끝까지 별다른 활약이 없다. 하지만 최고신의 거대한 존재감은 언제나 이야기 속에서 조용히 흘러간다.

 

신화는 아주 비과학적이다. 동시에 아주 많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구전문학인 경우 원래의 이야기가 어떤 전승되는 과정에서 어떤 가감을 거쳤는지 알 수 없다. 기독교가 북유럽에 전파되면서 원래의 이야기는 더 많이 사라졌을 것이다. 기독교에 맞게 가공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은 학자들에게 맡기면 된다. 과학과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가 나처럼 거슬린다면 새로운 과학 이론 하나를 만들거나 상상하면 된다. 나처럼 거인과 싸우는 토르의 크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면 토르의 힘을 더 크다고 생각하거나 비율이 과장된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럼 이런 신화에 대한 트집은 닐 게이먼의 놀라운 이야기 속에 파묻혀 사라질 것이다. 혹시 닐 게이먼이 <그리스 로마 신화>도 써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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