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
카린 랑베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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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수리공마저도 금지된 집에 사는 여자들 이야기다. 집주인인 여왕이 있고, 네 명의 여자 세입자들이 있다. 이 집의 월세는 아주 저렴하다. 조건은 단 한 가지. 절대 집 안으로 남자를 데리고 오지 않는 것이다. 이 집에 있는 수컷은 딱 하나, 바로 고양이 장-피에르 뿐이다. 이 집에 사는 모든 여자가 사연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역시 중심에 있는 여자는 줄리엣이다. 그녀의 삶을 엿보면 참 지루하다. 사랑을 꿈꾸지만 그 대상을 만나지 못하고, 데이트 사이트를 들락거리면서 이상형을 꿈꾼다. 현실에서 적극적 노력이 부족하다. 이런 그녀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차분하게 펼쳐진다.

 

천 명의 남자와 연애를 했다는 발레리나 출신의 집주인이자 여왕은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많이 늙었다. 세월의 힘 앞에는 미모도 어쩔 수가 없다. 이런 그녀가 자신의 입주자에게 내건 조건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남자 금지다. 그리고 실제 이 집에 사는 여자들은 줄리엣을 제외하면 다들 나이가 어느 정도 있다. 다 큰 아들이 있거나 멀리 있는 딸을 만나길 바라는 여자도 있다. 옛 연인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여자도 있다. 남자를 포기했다는 표현보다 남자를 멀리하고 있다는 것이 더 어울리는 여자들이다. 작가는 이들 개개인의 사연과 외로움을 아주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집에 사는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남편의 바람, 갑작스럽게 사라진 연인, 어릴 때 받지 못한 부모님의 사랑 등. 나이 든 여자들은 어느 정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술은 마시고 ‘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어!’라고 외친 주세피나처럼 아직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남자라는 동물에 질려 있거나 새로운 만남을 두려워할 뿐이다.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서 그녀들의 숨겨져 있던 욕망들이 하나씩 밖으로 표출되는데 억눌려 있던 남자에 대한 열정과 갈증이 생각보다 더 강하다. 그런 점에서 줄리엣의 솔직한 표현이 오히려 약해보일 정도다.

 

작가는 아주 짧은 문장으로 상황과 감정을 표현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글쓰기인데 왠지 이 소설은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원래 문장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번역상의 문제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이야기의 구성이나 소재 등도 그렇게 신선한 편은 아니다. 다른 곳에서 본 듯한 것들이고, 마무리도 예측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량이 많지 않다 보니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더 깊숙이 다루지 못한 것 같다. 내가 놓친 것일 수도 있지만. 홀로 서서 자신의 삶을 즐기는 여자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 소설 속 여자들은 사랑을 갈구한다. 포기와 그녀들의 삶이 어느 정도 맞기도 하고,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도 보여준다. 어쩌면 일부 현실적인 여자들의 바람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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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 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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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이란 단어를 볼 때마다 니체가 한 말이 떠오른다. “심연을 깊숙이 보고 있으면, 심연 또한 너를 본다.”란 문장이다. 어느 날 이 문장을 읽고, 악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을 읽을 때면 늘 머릿속에 담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이 심연을 다루지 않는다. 자기성찰을 위해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심연은 말한다. 그리고 자기 성찰의 4단계로 고독, 관조, 자각, 용기를 다룬다. 이에 책은 4부로 나누어져 있고, 각 부는 그 내용에 맞는 용어로 풀어져 나온다. 이 글은 한 신문사의 자기수련에 관한 연재로 1년 동안 이어져 왔던 것을 책으로 낸 것이다.

 

고독. 현대인을 풀이한 말 중 하나가 대중 속의 고독이다. 이때의 고독과 이 고독은 의미가 다르다. 혼자만의 시간을 자발적으로 갖자는 의미다. 이것을 위해 저자가 선택한 것은 순간, 생각, 현관, 인내, 침묵, 실패, 동굴 등이다. 이 단어들은 자신의 경험과 더불어 그가 생각하고 해석한 것으로 풀려나온다. 그의 전공이 고전문헌학이라고 하는데 이 지식이 함께 다루어진다. 원어의 의미를 풀어내면서 조금 색다른 느낌을 준다고 해야 하나. 어떤 대목에서는 옛 기억을 떠올려주었는데 특히 현관이 그랬다.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문지방이란 단어와 그것을 밟지 마라는 말이 아련하다.

 

관조. 쉽지 않다. 있는 그대로 나를 발견하기라고 말하는데 자신의 바르지 않는 마음으로 보게 되면 편견과 선입견 등이 개입한다. 묵상, 단절, 숭고, 사유, 관찰, 오만, 심연 등으로 풀어져 나온다. 심연을 다룬 장에서 니체를 발견하려고 했지만 보이지 않고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가 그 중심에 있다. 조금 의외다. 여기서 나의 시선을 끈 것은 관찰이다. 단순히 본다는 것을 넘어 안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관찰이 부족한 것은 그냥 보기만 할뿐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보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내면도 마찬가지다.

 

자각. 어느 순간 찾아온다. 하지만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오지 않는다. 괴물, 임시 치아, 가면, 갈림길, 멘토, 진부, 자립 등으로 표현한다. 임시 치아란 단어가 나와 의외였는데 바다거북이의 카벙클을 예로 들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만들어지는 임시 치아인데 저자는 이것을 ‘편견과 상식, 전통과 관습, 흉내와 부러움이라는 알을 깨는’ 것으로 풀었다. 깨달음도 이런 것이 없다면 그 단단한 벽을 깨고 넘어갈 수 없다. 나의 삶에서 가장 부족한 것 중 하나가 이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알을 깨기 위한 강력한 도구로써.

 

용기. 참 어렵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생긴다. 머릿속에서는 안다고 생각하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는 것. 바로 용기 부족이다. 옮음을 양심을 용기 있게 행동을 옮기는 것이라고 풀었을 때 사회적으로 나는 용기가 부족하다. 귀차니즘에 몸을 맡기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면 저자가 말하는 옮음을 생활 속에서 조금씩 왜곡한다. 바로 앞에 나온 착함의 경우는 핑계를 대면서 더 심해진다. 잊고 있던 것들이 글을 읽으면서 되살아났다. 가끔 이런 책을 읽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항상 문제는 여기서 멈춘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내면은 이런 글들로 조금씩 살찌고 넓어진다.

 

저자가 종교학과 교수라 종교적인 내용으로 글을 도배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기우였다. 바쁜 현대인의 일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잠시나마 돌아볼 수 있는 분량으로 잘 편집되어 있다. 강조할 부분은 큰 글로 한 면을 할애했다. 앞에서 무심코 읽은 글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역할을 한다. 또 고전문헌학자란 부분이 글 속에서 언어학적 해석으로 풀려나온다. 모두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흥미로웠다. 한 학자의 자기 성찰을 다루다 보니 나의 것과 가끔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배우는 것이 더 많다. 흔한 자기계발서보다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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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가족
전아리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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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전아리 소설 몇 권을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문장들이 좋았다. 하지만 읽을수록 캐릭터에 집중한 이야기에 조금은 질렸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전아리 소설의 발랄함과 유쾌함은 살아있지만 하나의 틀처럼 굳어져 가는 부분이 느껴졌다. 많지 않은 분량이라 빠르게 읽을 수 있었지만 와~ 재미있다! 라는 느낌은 없었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심리 묘사 등이 치밀하지 못하고 작위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좌충우돌하는 로맨틱 코미디가 될 것이다. 나에게는 딱 그 정도였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각각 다른 화자를 내세워 상황을 설명하는 식이다. 요조숙녀 같은 언니 서혜윤이 매춘을 하다가 동영상을 몰래 찍혔고, 이것으로 협박을 받는다는 것이 시작이다. 혜윤은 약혼자가 있고, 모두가 마더 테레사와 비교할 정도의 정숙함을 가지고 있다. 이런 딸이 어플로 남자를 만나고, 매춘을 하고 동영상까지 찍혔다니 보통 일이겠는가. 아빠 서용훈은 자신의 해결사를 동원해 이 남자를 해결하려고 하고, 동생 혜란은 컴퓨터 도사인 친구 진환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아빠의 해결사가 남자의 회사를 찾아가는데 그냥 사라졌다. 만만한 협박범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의외의 일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그 남자와 언니가 짜고 문자를 보냈다는 것이다.

 

남에게 보여지는 자신과 실제 자신의 모습이 다른 혜윤에게 고진욱은 신선한 존재다. 그리고 고진욱은 고아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부모가 그를 용납할 리가 없다. 몰래 달아나도 되는데 어렵고 힘든 선택을 했다.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할 것이란 섣부른 믿음을 가지고. 이 계획은 아빠의 해결사에게도 들키고, 동생 혜란에게도 들킨다. 결국 혜란이 먼저 숨은 곳에 도착해 진욱을 데리고 나오는데 이때 실수가 하나 있다. 이 실수가 나중에 또 다른 사건을 만든다. 하지만 진환과 함께 세운 혜란의 계획은 진환의 배신으로 금방 끝난다. 여기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재미가 없다. 작가는 여기서 이 둘을 헤어지게 만들려는 음모를 꾸민다. 후반부는 이 음모와 앞에 말한 실수가 엮이면서 재미를 만든다.

 

뛰어난 외과의사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서용훈이 사업에 더 재능을 보여준 것이나 현모양처의 모범 같은 엄마 유미옥의 미국 시절 연인 등은 이야기의 뼈대에 살을 붙여준다. 자수성가한 아빠나 고상한 엄마 밑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준 딸의 일탈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에 깊은 설명을 생략하고, 간단하게 성욕으로 처리한다. 늘 함께 아침을 같이 하지만 식탁에서는 그 어떤 대화도 소리도 없다. 가족끼리 충돌도 없다.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면서 조용히 산다. 둘째 딸 혜란이를 제외하면 말이다. 혜란은 자신이 가진 부를 숨기지도 않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렇게 나쁘게만 보이지 않는 것도 이런 솔직함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네 가족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그 사이에 가끔 고진욱과 이진환이 등장한다. 아주 비현실적인 이 가족에게 인간미를 심어주는 인물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리고 엄마 유미옥을 통해 보여주는 미술계와 상류층의 모습은 텔레비전에서 보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어떻게 보면 작가가 살을 너무 많이 쳐냈다는 생각이 든다. 많지 않은 분량과 빠른 전개 등은 가독성을 높이지만 강한 여운을 남기지는 않는다. 두툼하고 무거운 내용의 책을 읽다가 지치면 가볍게 읽을 수 있을 테지만 꼭 읽어야지 하는 생각은 이제 들지 않을 것 같다. 가족의 민낯을 보여주지만 마무리는 너무 자주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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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셀레스트 응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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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디아는 죽었다.’란 첫문장으로 시작한다. 리디아에 대한 정보를 책 소개글을 통해 만났기에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문장이 주는 의미를 깨닫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단순히 한 소녀의 죽음이 아니라 그녀의 죽음을 통해 한 가족의 꼭꼭 숨겨져 있던 감정과 심리들이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가장 친숙하고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가족의 실제 모습들이 아주 낯설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앞부분을 읽을 때는 일본 소설에서 가족의 무서움을 표현했던 작품들이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이 가족들을 표현할까 하는 의문과 함께.

 

리디아는 중국계 아빠와 미국계 엄마의 혼혈아다. 1남2녀 중 장녀다. 그녀의 외모에는 동양인의 느낌이 많이 없다. 그녀는 가장 사랑 받는 아이였다. 이런 아이가 죽은 것이다. 물론 다른 아이가 죽었을 때도 부모의 마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을 테지만 리디아의 경우는 정도가 더 심하다. 그녀가 사라진 후 호수에서 시체를 찾았는데 정상적인 외모는 아니었다. 이때부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평화로워 보였던 한 가족의 각각 다른 속내와 바람과 욕망과 억압과 외로움 등이 엮이면서. 어느 대목을 읽을 때는 한국의 엄마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리디아는 엄마의 가장 큰 기대를 받고 있다. 엄마 메릴린은 의사가 되려다가 아빠 제임스를 만나 오빠 네스를 임신하면서 학업을 중단했다. 메릴린은 가정교사인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엄마가 바란 것은 그녀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하버드에 갔을 때만 해도 이 바람은 옳았다. 하지만 그녀가 선택한 남자는 중국계다. 아직 1950년대였던 이 시기에 서로 다른 인종 사이에 결혼은 아주 낯설었다. 인종차별이 없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그 차별이 존재하는 현재에 비해 더욱 심했던 시대다. 제임스의 교수직도 이 때문에 날아갔다. 보스턴을 떠나 오하이오 주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들이다.

 

리디아의 죽음에 대한 비밀이 하나의 큰 축을 이룬다면 다른 축들은 이 가족의 과거와 현재 모습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불편했던 것들도 바로 이 가족의 과거와 현재의 삶들이다. 자신이 이루고자 한 바를 딸 리디아에게 투사한 엄마와 자신이 하지 못했던 것을 아들과 딸에게 바라는 아빠의 모습이다. 메릴린이 엄마의 죽음 소식을 듣고 옛집을 다녀오면서 자신의 꿈을 떠올렸다. 그녀가 공부하던 당시에 너무나도 높은 장벽이었던 여의사를 주변에서 만나게 되면서 그 욕망은 더욱 커졌다. 자신의 꿈을 위해 가족을 떠날 결심을 할 정도였다. 이 꿈은 셋째 한나를 가지면서 비록 사라졌지만 리디아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제임스와 메릴린은 젊을 때 자신들이 하지 못한 것을 자식들에게 투사하면서 대리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리디아는 엄마가 다시 떠나는 것을 바라지 않아 엄마가 바라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 초기에는 잘 따라가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뒤쳐진다. 엄마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것이 리디아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다. 이와 비슷한 스트레스를 받는 가족이 또 한 명 있다. 오빠 네스다. 네스가 있음으로 인해 리디아는 작은 숨이나마 쉴 수 있다. 그런데 오빠가 하버드에 합격하면서 집을 떠날 생각에 들떠있다. 입학 전 교육에 가서 연락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삶은 더욱 힘겹다. 네스에게 하버드는 탈출의 출구다. 그래서 리디아는 오빠의 합격 통지서를 숨겼던 것이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진짜 모습을 숨긴다. 속마음을 절대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니 서로가 알 수 없다. 제임스는 조교와 바람이 나고, 메릴린은 딸이 죽은 이유를 파헤치고자 한다. 자살이라는 경찰의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 살인자를 찾고자 한다. 딸의 방에서 단서를 찾고자 하지만 그녀가 늘 바라던 것만 보았기에 그 어떤 진실도 찾지 못한다. 오빠 네스는 리디아와 함께 다녔던 잭이 수상하다. 잭의 좋지 못한 소문을 생각하면 유력한 용의자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그가 동생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집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이 준 욕망에 휩싸였던 순간들이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이 소설은 가족 개개인의 과거와 현재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욕망과 희망을 낱낱이 파헤친다.

 

이 작품 속에서 또 하나 중요한 설정이 있다. 그것은 인종차별과 성차별이다. 제임스와 그의 아이들이 겪는 것이 인종차별이라면 메릴린이 겪었던 것은 성차별이다. 인종차별은 제임스와 아이들이 백인사회에 융화되지 못하고 겉돌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다. 제임스가 자라면서 친구를 제대로 사귀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투사한 것이나 부모의 바람에 짓눌리고 친구들의 놀림을 받으면서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것 등이 바로 이 인종차별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단순히 인종차별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 리디아에게는 기회가 있었지만 스스로 차버렸다. 그들 자신이 다가가서 어울리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그 결과로 가족 안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쌓이는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 수 없었다. 집을 떠나는 것이 가장 큰 희망이다. 마지막 결말에 가서 그 산산조각난 가족의 모습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아름답게 마무리한 것은 지극히 미국적인 마무리다. 약간의 여운을 남겨두었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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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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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이 낯설다. 그런데 그녀가 쓴 드라마나 영화는 낯익다.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 내가 이름을 알 정도의 작품들이다. 한때 최고의 드라마라는 말을 들었던 <연애시대>도 썼다고 한다. 이 이력만으로도 충분히 눈길이 가는데 이번에는 미스터리물이라고 한다. 약간 반신반의하는 느낌이 든다. 한국 미스터리 드라마를 보면서 몇 번이나 실망을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에 나온 몇몇 유명한 작품은 아직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전 작품들은 너무 느슨하고 뻔했다. 이런 기억들을 가지고 책을 선택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연애시대>다.

 

할아버지가 죽은 후 늦잠 자는 버릇 때문에 강무순은 깊고 깊은 두메산골 아홉모랑이 마을에 남겨진다. 홀로 남은 홍간난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서다. 삼수생 무순이는 새벽잠이 없는 할머니의 등살에 시달린다. 일찍 일어나라고. 그렇다고 쉽게 자신의 생활습관을 바꿀 수 없다. 둘의 대립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다 무순이가 하나의 지도를 발견한다. 자신이 어릴 때 그린 보물지도다. 그때 그린 그림을 지금은 해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물이 있다. 바로 홍간난 할머니다. 할머니는 종갓집 홍살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챈다. 할 일이 없어 무료했던 무순은 보물을 찾으러 떠난다.

 

여섯 살 꼬마가 묻어둔 보물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힘들게 파낸 통 속에는 십오 년 전 물건들이 들어있다. 다른 것들은 별 것 아닌데 손으로 깍아 만든 자전거 타는 목각 인형이 눈에 들어온다. 보통의 공산품이라면 그냥 버릴 텐데 직접 깍아 만들었다. 그리고 종갓집에서 아주 잘 생긴 소년을 만난다. 종갓집 아들로 입양된 유창희다. 이쁘게 생겨 무순이는 꽃남이라고 부른다. 보기만 해도 흐뭇한 마음이 생기는 외모다. 이 꽃남이 잘 그린 스케치북을 가져온다. 15년 전 사라진 유선희가 그린 것들이다. 평온한 산골 마을에서 오래전 사라진 소녀들을 찾기 위한 탐정 활동이 시작한다.

 

15년 전에 한 마음에서 네 명의 소녀가 동시에 사라졌다. 무순이도 할머니를 따라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것이란 말을 듣는다. 도대체 왜 이 네 명의 소녀들은 사라졌을까? 그것도 같은 날에. 이런 사건은 전국의 시선을 끌기 충분하다. 마을 사람과 경찰은 이 소녀들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사건은 미궁으로 빠진다. 무순을 할머니에게 이 사건을 듣는다. 그녀가 어릴 때 부모가 속닥였던 그 비밀을. 네 명의 소녀들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특별한 공통점이 없다. 이 네 소녀는 종갓집 딸 유선희, 엄마를 위하던 황부영, 날라리로 소문났던 유미숙, 목사의 딸인 조예은 등이다.

 

시작은 15년 전 미스터리를 해결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유선희의 조각을 보고,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앨범 등을 통해 동창을 찾아가고, 그들의 기억 속 유선희를 만난다. 언제나 그렇듯이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자신들의 바람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조각들이 유선희의 실체에 조금 더 다가가게 한다. 동시에 같은 날 사라진 세 명의 기억과 추억도 같이 다룬다. 이 기억들은 남겨진 가족들의 몫이다. 조예은의 아빠는 저수지에 빠져 죽고, 엄마는 매일 밤 산에서 딸과 영적 소통을 한다. 황부영의 엄마는 삶의 의욕을 잃었고, 유미숙의 부모는 집문을 닫고 세상과 담을 쌓았다. 종갓집은 포기한 듯 조용하게 보낼 뿐이다.

 

이 평온한 마을의 이면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많다. 이것을 파헤치는 사람들이 바로 강무순과 홍간난 할머니다. 이 둘이 보여주는 콤비는 아주 흥겹고 손발이 짝짝 맞는다. 15년 동안 그 누구도 풀지 못한 미스터리를 이 콤비가 해결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에 입이 싼 할머니 덕분에 민란(?) 같은 것도 일어난다. 어디선가 시체가 나타나 마을과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기도 한다. 그리고 각 장 사이에 주마등이란 이야기를 넣어 15년 전 진실 중 하나에 다가간다.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 있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 바로 이 주마등이다.

 

사실 미스터리로의 완성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 의외의 인물이 범인이지만 범인을 찾기 위한 긴장감이나 추리가 그렇게 돋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가의 문장과 문체다. 통통 튀는 문장과 간결하고 함축적인 묘사 등은 전혀 무게감을 느낄 수 없다. 가독성이 좋아 빠르게 읽힌다. 읽으면서 인터넷 소설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이런 것보다 더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것은 역시 무순과 할머니 콤비의 대화와 행동 등이다. 처음 예상한 것과 다른 이야기였지만 15년 전 사건을 통해 한 마을의 속내를 잘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인간의 심리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면 무거웠을 테지만 아주 묵직하고 멋진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도 살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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