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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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집 <블러드차일드>를 읽었다. 나의 취향과 조금 벗어난 작품도 있었지만 다양한 매력을 뽐내며 작가에 대한 관심을 불러왔다. 그 후 이 작품 <킨>을 읽었다. 다 읽은 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 보통은 바로 서평을 작성하는데 가끔 이런저런 이유로 밀리는 경우가 있다. 이번 작품이 그런 작품이다.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것은 역시 <뿌리>였다. 오래 전 미리시리즈로 본 <뿌리>다. 소설은 사 놓고 몇 년 째 그냥 묵혀 두고 있지만 드라마는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쿤타 킨테라는 이름은 잘 기억하고 있다. 두 작품의 출간 연도를 찾아보니 <뿌리>가 먼저다.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1976년 6월의 어느 날 다나는 시간 여행을 한다. 그녀가 간 곳은 1815년 메릴랜드 주의 한 숲속이다. 그곳에서 물에 빠진 한 소년을 구한다. 백인 소년 루퍼스다. 보통의 백인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다나는 흑인 여성이다. 이 시대 흑인은 노예다. 물론 자유민도 있지만 <노예 12년>에서 보았듯이 언제든지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 금방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단발성 시간 여행이라면 문제가 없을 텐데 이 여행이 어떤 이유로 반복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 여행을 한다. 그리고 항상 그곳에는 위험에 처한 루퍼스가 있다. 그녀가 자신의 시대로 돌아오는 것은 반대로 그녀의 목숨에 위험을 느꼈을 때다.

 

시간 여행이라는 SF적 요소에 노예 문제를 결합시켰다. 많은 SF 작가들이 시간 여행을 다루었지만 이 작품처럼 노예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경우는 아직 본 적이 없다. 단순히 노예 문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속에 살아가는 노예와 노예 주인의 감정과 시선을 같이 다룬다. 노예가 하나의 자산이었던 시절에 노예가 낳은 아이들도 주인에게 귀속된다. 이런 상황이니 노예 주인들이 흑인들을 더 가혹하게 다룬다. 누구나 자신의 재산이 사라지거나 줄어들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인들도 한 명의 인간이고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유를 향한 탈주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야기의 핵심에 놓인 두 인물은 역시 다나와 루퍼스다. 왜 루퍼스가 위험에 처하면 시간 여행을 할까? 그 이유는 루퍼스가 다나의 선조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은 시간 여행을 다룬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변주가 펼쳐지는 부분이다. 과거가 사라지면 현재의 나도 사라지는 가설과 평행우주이론 등 여러 가지 설정이 가능하다. 작가가 선택한 것은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 있다는 이론이다. 다나가 루퍼스에게 실망하면서도 그를 계속 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존재 때문이다. 물론 인간적인 동정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어린 루퍼스를 교육해 계몽된 노예 주인을 만들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계획일 뿐이다. 아주 가끔 가서 몇 시간 혹은 몇 개월만 머물면서 기존의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노예 주인이 되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SF 설정 중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 흐름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의 몇 분이 과거 속에서는 며칠, 몇 개월에 해당된다. 다나가 과거 속으로 빠진다는 느낌이 들 때 남편 케빈이 그녀의 손을 잡는다. 같이 시간 여행을 했다. 그러다 둘이 헤어지고, 다나 홀로 현재로 돌아온다. 며칠이 지나간다. 하지만 시간 여행 속에서는 이미 몇 년이 지났다. 케빈이 다시 현재로 돌아와 적응하는 것을 힘겨워한다. 이런 설정은 나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이 비대칭은 왜 설정한 것일까? 몇 번의 시간 여행은 또 왜 설정한 것일까? 문득 하나 떠오른 것이 있다. 바로 루퍼스다. 한 명의 노예 주인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보여주기에 가장 적당한 설정이 시간의 비대칭성이다.

 

보통의 시간 여행을 다룬 작품과 그 내용과 주제가 완전히 다르다. 속도감 놓고 보면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작가가 흑인 여성이란 사실을 감안하고 이 작품을 읽으면 아주 독창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대적 배경도 노예제가 존재하던 남부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주목하고, 긴 장편을 완성했다. 노예제도와 그 시대의 삶, 이것을 바라보는 현대인의 모습 등을 같이 다루면서 깊이를 더했다. 그리고 현재 다나의 남편 케빈을 백인으로 설정한 것도 그 시대와 충돌하게 만든다. 다나가 홀로 흑인 여성으로 떨어졌을 때 느낀 공포와 두려움은 그 시대의 단면을 아주 잘 표현해준다. 어떻게 루퍼스가 그녀의 선조가 되었는지 보여줄 때 예상했던 낭만은 그대로 사라진다. 현실이 남는다. 이런 점들이 이 소설을 더욱 빛나게 한다. 불편함과 두려움의 감정이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을 찾아 읽고, 다른 작품들이 더 번역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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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의 기도
오노 마사쓰구 지음, 양억관 옮김 / 무소의뿔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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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다. 목차를 보고 단편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연작소설이다. 한 인물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연작이 아니라 공간과 사람이 이어지는 연작이다. 첫 작품이자 표제작인 <9년 전의 기도>를 읽고 <바다거북의 밤>을 읽을 때만 해도 연작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그런데 <문병>에서 이어지는 대목을 발견했고, 마지막 단편 <악의 꽃>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렇게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서 하나의 흐름을 찾아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 실패했다. 간단한 이야기는 머릿속에 들어왔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9년 전의 기도>는 혼혈아 캐빈을 데리고 고향에 돌아온 사나에 이야기다. 남편이 그녀와 아들을 버리고 떠났다. 이 분명한 사실에서 시작하여 과거로 돌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만났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하나씩 보여준다. 그리고 밋짱 언니라고 부르는 여자와의 이야기도 같이 풀어낸다. 가까운 과거와 9년 전 과거를 오가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무겁다. 힘겹다. 아이의 특별한 성격 때문에 버거워한다. 여기에 밋짱 언니의 아들이 뇌종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고, 현재와 과거가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어떤 부분에서는 몽환적이다. 슬픔과 불안에 대한 마지막 묘사는 아주 인상적이다. 지금 당장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풀리지 않지만 어느날 밋짱 언니의 9년 전 기도와 더불어 한 올 한 올 풀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바다거북의 밤>은 세 대학생의 여행기다. 잘못된 집을 찾아왔는데 그 과정을 건조하게 그려낸다. 학교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세 남학생의 동행은 결코 친밀하지도 열정이 넘치지도 않는다. 운전을 할 줄 아는 두 명과 못하는 한 명이 같이 움직이면서 무심코 던진 말들이 상처가 된다. 길을 가다 어떤 장소는 기억의 한 자락을 떠올리고 회상에 잠기게 만든다. 이 글을 쓰다 무심코 넘긴 곳에서 잇페이다의 아버지 이름을 보고 또 다른 이야기가 떠올랐다. 청춘과 열정이 가득한 여행 이야기라기보다 어리고 미숙한 충동이 더 눈에 들어온다.

 

<문병>의 대상은 밋짱 언니의 아들 다이코다. 이 단편의 주인공은 다이코의 친구였던 도시야다. 어업으로 성공한 아버지 덕분에 경제적으로 유복한 삶을 살았지만 문화적이거나 세련된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손재주는 좋지만 머리는 나쁜 도시야의 일상을 그려내면서 몰락하는 어촌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코토의 추락한 모습과 이를 옆에서 도와주는 도시야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미련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도시야의 진짜 모습이다. 물론 마코토 덕분에 뒤늦은 바람이 났지만. 후반부에 잇페이다 엄마의 병이 다이코의 병과 나란히 알려지고, 이 문병이 중첩적인 의미를 띈다.

 

마지막 단편은 <악의 꽃>이다. 잇페이다가 전편에서 만났던 치요코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그녀의 불행했던 과거와 욕망들이 나오고, 노년의 현재 삶이 그려진다. 젊은 시절 그녀의 삶이 간단하게 설명되는 사이사이에 다이코가 등장한다. 느리고 둔한 다이코지만 착하고 많은 도움을 주는 중년이다.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라고 집요하게 자신을 향해 말하며 살아남은 그녀다. 그리움이 눈물을 불러오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이코의 완치다. 그녀가 다이코에게 시킨 일 때문에 그가 뇌종양에 걸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답답하지만 이 순수함이 좋다. 이렇게 각 단편에 대한 글을 적다보니 하나의 인물이 보인다. 밋짱 언니의 아들 다이코다. 이들을 모두 연결시켜주는 인물도 다이코다. 이들이 기도하는 인물도 다이코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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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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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가 중 이상하게 읽기 힘든 작가 중 한 명이 줄리언 반스다. 늘 그의 작품을 읽을 때면 쉽게 몰입하지 못한다. 이전에 다른 책을 읽고 이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변함이 없다. 평소보다 더 집중하고 긴 시간을 들였음에도 그렇다. 물론 나의 취향 등과 정반대 의견을 말하는 독자들도 자주 본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힘든데 반스는 재밌고 즐겁다고. 작가의 이름  때문에 사놓은 몇 권의 반스 책들의 운명이 과연 어떻게 될지 괜히 궁금해진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늘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있고, 읽어야지 생각을 하는데도 쉽게 손이 나가지 않는다. 이 책들은 죽음의 영역 속에 있는 것일까?

 

반스의 책을 몇 권 읽었지만 체계적으로 읽지 않았고, 제대로 그 깊이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작가가 관심을 가진 분야가 죽음이란 것도 알지 못한다. 실제 원제에도 죽음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다. 출판사에서 편집하는 과정에 죽음을 넣었다. 여기에 ‘웃으면서’란 단어를 넣어 살짝 선입견을 가지게 만들었다. 물론 책을 읽다 보면 이 ‘웃으면서’란 단어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줄리언 반스가 말하는 죽음에 관한 유머가 그것을 연상시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가족에서 시작하여 가족으로 끝난다. 그 사이를 채워주는 것은 역시 기억과 추억과 예술가들의 죽음이다.

 

이 책이 나의 시선을 끈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제대로 읽지 못하지만 관심이 있는 줄리언 반스라는 작가의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가들의 죽음을 인용한 글들이다. ‘죽음에 대한 유쾌한 한판 수다’라고 적어놓았는데 어떤 대목에서는 크게 공감한다. 기억과 죽음에 관한 많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몇몇은 나의 기억과 경험과 일치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의 에피소드를 두고 자신이 소설가가 된 이유를 설명한다, “똑같은 사건에 대한 세 가지 설명이 서로 어긋난다.” 우리가 소설을 읽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이것이다. 다른 관점, 다른 해석 등이 주는 재미. 이 대목을 읽으면서 소설의 힘에 대한 옛글들이 떠올랐다.

 

죽음과 예술가에 대한 글을 쓰는 동안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인물을 만난다. 그런데 다행이라면 그 책에 나온 예술가와 그가 인용한 예술가가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겹쳤다면 그는 새롭게 글을 썼어야 했을 것이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작가는 쥘 르나르다. 르나르와 그의 부모의 죽음과 관련된 죽음의 기록은 반스의 부모 죽음과 비교되는 부분이 있다. 죽음의 기록은 서로 엇갈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반복되는 글도 바로 이 부분이다. 단순히 예술가들만의 죽음을 다루지 않고 가족을 다루면서 개인적 경험도 같이 나열한다. 이 부분이 공감대를 형성한다. 비록 내가 경험한 것과 다르다고 해도.

 

인생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다행이라면 우리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죽음을 둘러싸고 종교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의 반응도 다르다. 그가 무신론자가 된 이유도 특별하지 않다. 다시 불가지론자가 되었지만 종교의 감정은 전혀 없다. 조금 특이한 부분이다. 조금 더 세밀하게 읽었다면 아마도 내가 가장 재미있어 했을 부분은 바로 다른 예술가들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에피소드들이다. 거장들의 말년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도 깨끗하지도 못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과 별 다른 차이가 없다. 그가 걱정하는 부분이 여기다. 그렇다고 이 걱정에 매달려 암울하게 지내지는 않는다. 유모와 위트 넘치는 글은 그것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든 다음에 차분하게 이 책을 읽는다면 분명히 다른 이해와 해석으로 다가올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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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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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에서 모던 앤 클래식 시리즈로 SF소설을 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이전까지 나온 작품들이 모두 나의 기대를 충족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 장르가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비록 이전처럼 SF문학을 더 많이 읽지 않고 있지만 늘 관심을 두고 있는 장르이다 보니 이쪽의 신간이 나오면 늘 눈길이 간다. 다만 추리소설보다 더 협소한 시장이다 보니 나오는 책이 훨씬 적다. 그래서 아직도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작가의 숫자가 훨씬 적다. 그래서 이 작품집의 작가도 낯설다. 화려한 수상 이력을 생각하면 조금 의외지만 나의 얕은 지식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이 작품집의 표제작 <블러드 차일드>는 정말 화려한 수상 이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SF문학상 세 개를 모두 수상했다. 네뷸러상, 휴고상, 로커스상 등이다. 이 중 하나만 받아도 엄청난 홍보를 하는데 셋이나 받았다. 그런데 이런 화려한 수상 이력을 가진 작품이 겨우 단편선집 <토탈호러>에 실린 것이 전부였다. 한국의 SF 시장이 얼마나 척박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당시 이 단편선집을 읽었지만 나의 관심은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에 가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다른 장편들도 이전까지 딱 한 권 출간되었다. 이번에 읽으면서 검색한 결과다.

 

이 책은 일곱 편의 단편 소설과 두 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재미난 점은 각 단편이 끝난 후 저자의 후기가 덧붙여져 있다는 것이다. 처음 단편을 잡지 등에 출간할 때는 없었던 부분인데 단편집으로 묶이면서 덧붙여진 것이다. 덕분에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게 되었고, 독자나 평론가들의 오독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막은 것도 사실이다. 단편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바와 작가의 후기가 다른 경우(대부분 다르다) 읽었던 이미지가 흐려지고 깨어지는 단점이 있다. 물론 새롭게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장점도 공존한다.

 

<블러드 차일드>는 읽으면서 조금 난해했다. 자세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어 작가가 설명만 가지고 상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류가 알을 먹으면서 젊음을 유지하는 부분과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의 생명체를 위한 숙주가 되는 이야기가 아주 놀랍게 펼쳐진다. 어느 부분에서는 에어리언 시리즈의 한 장면 같은 부분도 있지만 자발적이라는 것과 숙주를 살리려는 노력 등이 세밀하고 탁월한 심리 묘사와 더불어 표현되었다. 왜 이전에 이 작품의 재미를, 깊이를 알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 당시 좋아하던 SF 장르가 아니었던 탓일 것이다.

 

<저녁과 아침과 밤>은 유전적 질환을 소재로 했다. 듀리에-고드 질환(DGD)라고 불리는 이 병은 한 치료제에서 발생했고, 유전된다. 무서운 것은 엄청난 자해와 자살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부모가 죽었던 장면에 대한 묘사는 한 편의 호러 소설 일부를 읽는 것 같다. 장편으로 만들어도 부족함이 없을 소재다. <가까운 친척>은 이 작품집에서 가장 SF 느낌이 없다. 읽다 보면 하나의 가능성이 살짝 엿보이는데 이것이 사실로 밝혀진다. 구약성경을 예시로 삼았다는 부분이 눈길을 끈다. <말과 소리>의 시작은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놀라운 미래의 모습이 나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에 의해 인류가 파괴된 후의 세상이다. 말도 소리도 글도 잃은 사람들 속에서 급박하게 변하는 전개는 한 편의 멋진 묵시록이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종말 이후의 삶을 다루고 있다.

 

짧은 단편 <넘어감>은 놓친 부분이 많다. SF적 요소도 적다. 후기가 없었다면 기억에 남는 것도 거의 없었을 것이다. <특사>는 외계인에게 납치된 사람이 통역사로 등장한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이 통역사가 높은 소득을 얻는다. 통역사를 지원한 사람들과의 대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조금씩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은 점점 규모가 커진다. 장편 속에 하나의 에피소드로 넣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작품이다. 그리고 읽으면서 무수히 많은 외계 침공 영화 등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마사의 책>은 신이 등장한다. 신과의 대화를 통해 인류의 구원을 이야기 한다. 작가의 유토피아 이야기라고 하는데 서구의 신이 가진 오류가 더 눈에 들어온다.

 

단편 소설의 뒤에 두 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긍정적인 집착>과 <푸로르 스크리벤디>다. 전작은 그의 삶을 요약한 듯하다. 물론 그 속에는 그가 어떻게 작가로 성장하게 되었는지가 핵심이다. 후작은 글쓰기에 대한 글이다. 많은 부분 공감한다. 길지 않고 핵심만 실려 있어 글쓰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알려주기 좋다. 그렇다고 아주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두 글 모두 군더더기 없는 글이라 조금 건조한 점도 있지만 작가의 삶을 조금은 엿본 듯한 즐거움을 준다. 한국에 출간된 유일한 단편집이란 부분에 관심이 가고, 더 많은 작품들이 번역 출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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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존 파인스타인 지음, IB스포츠 옮김 / 북스타(Bookstar)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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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 대한 관심이 이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 정보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가끔 신문 스포츠란에 조금씩 나왔지만 제대로 된 정보는 없었다. 그러다 박찬호 선수가 LA 다저스에서 투수로 이름을 날리면서 메이저리그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메이저리그 선수조차 한 명 없었던 시절이었다. 메이저리그에 가장 가깝게 간 선수가 박철순이었고, 그 당시 최고의 투수였던 최동원은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까지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선수가 승승장구한 것이다. IMF시절 국민의 영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이후 수많은 한국 유망주들이 메이저리그로 향했다. 몇 명을 제외하면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조차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명의 한국 선수들이 떠올랐다.

 

최근에 포탈사이트 스포츠란에서 가장 먼저 보는 부분이 해외야구 부분이다. 일본에서 활약하는 선수가 없어진 지금은 메이저리그 소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추신수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최고의 선수들이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대부분 신인이다. 류현진은 부상으로 작년 한 해를 재활로 쉬었고, 지금도 겨우 공을 던지는 수준이다. 곧 올라온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강정호는 작년처럼 좋은 활약을 펼치고, 박병호는 적응하는 단계다. 이대호와 김현수는 플래툰 체제 아래에서 가끔 등판한다. 오승환은 중간 계투라 1~2회 정도 던진다. 좋은 성적을 거두는 선수가 있는 반면 성적이 별로인 선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현재 메이저리거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간 선수들이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는 것에 비하면 천국이다.

 

제목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책 속에 나오는 몇 명의 이름이 낯익다. 처음 읽을 때는 인터넷 검색을 많이 했다. 나의 기억과 비교하기 위해서다. 몇 명은 메이저리그에서 활약을 했고, 어떤 선수는 자주 들락거렸다. 포드세드닉처럼 월드시리즈 영웅이 있는가 하면 겨우 한 경기에 출전한 선수도 나온다. 하지만 현재 이들은 모두 마이너리그 선수다. 한 시리즈의 영웅도 지속적인 성적을 보여주지 못하면 마이너리그로 갈 수밖에 없다. 꾸준함은 메이저리그의 기본이다. 아무리 트리플A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도 나이가 너무 많거나 자신이 속한 구단의 이해와 맞지 않으면 메이저리거가 될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안타깝고 비정해보이는 부분이었다.

 

단순히 선수만 다루지 않는다. 감독과 심판도 같이 다루면서 마이너리그에 관계된 모두를 보여준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메이저리그. 하지만 이 문은 굉장히 좁다. 한국의 유망주들이 이 벽을 넘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선수가 한둘이 아니다. 몇 명은 꽤 오랫동안 메이저리거로 활약했지만 그 누구도 박찬호나 추신수처럼 꾸준함과 대박을 터트리지 못했다. 매년 스포츠란에는 미국 프로야구로 향하는 몇 명의 선수들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의 마이너리그 성적을 알려주지만 어느 순간 사라진 선수도 꽤 많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하는 선수도 많아졌다.

 

매년 마이너리그 선수들에 대한 순위가 나온다. 전체 순위와 팀 순위가 나오는데 이 유망주들은 얼마 지

나지 않아 메이저리그에 올라온다. 너무나도 유명한 유망주의 경우는 시즌 도중 주전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 잠시 올라왔다 가거나 이름이 말해진다. 선수의 숫자가 늘어나는 시기가 되면 대부분 불려온다. 시즌이 끝나고 나면 내년 신인왕 후보로 올라간다. 이런 선수들이 우선인 상태에서 나이가 많고, 탁월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노장들은 그 가능성이 점점 희박하다. 하지만 이들은 존재하고, 이들의 존재가 유망주의 성장을 돕는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 하나는 선수 개개인의 삶과 기록을 간략하지만 깊이 있게 다룬다. 감독과 심판도 마찬가지다.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것을 꿈꾸며 활동하는 그들의 삶은 메이저리그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숙소와 이동방법도 다르다. 최저연봉은 말할 것도 없다. 마이너리그 선수의 경우 비시즌에는 다른 직업을 가진 선수도 상당히 많다. 삶은 그 급여로 버티기 너무 버겁기 때문이다. 추신수가 늘 말한 그 마이너리그의 눈물 젖은 빵 이야기는 이 책 속에 잘 드러난다. 상당한 유망주였지만 이치로의 벽에 막혀 있던 그가 트레이드를 통해 성장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물론 이 책에는 추신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낯선 이름이 많다 보니 가독성이 조금 떨어진다. 하지만 마이너리그 최상위인 트리플 A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이들은 메이저리그에 가장 가깝지만 평생 한 번도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 못한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이들이 받는 월급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아래는 더 적을 것이다. 화려했던 메이저리그 경력을 가진 선수도 마이너리그에 내려와 다시 승격되길 기다린다. 나이가 들면서 포기하는 선수도 있고, 아직도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는 선수도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단지 능력이 부족했기에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단지 그 이유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재미있고 즐겁게 읽을 수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번역이다. 원문과 대조하지 못했지만 투수와 타자가 뒤바뀌어 표현된 곳도 있다.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곳곳에 보인다. 책 뒷장에 나온 선수 중 몇 명이나 이 책을 끝까지 읽었을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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