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는지 난 시작부터 영화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연극적인 구성으로 영화를 구성해서인지 연기자들의 과장된 연기는 이질감이 느껴졌고, 인도적인 느낌보단 차라리 서구적인 세계로 이루어졌던 배경과 연기자들의 행동은 상습적인 인도적 성향을 생각했던 나에겐 또한 낯설었다. 그리고 배경음악 역시 과다한 감정을 전달하고 또한 거칠기에 영화로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아마 독특한 구조와 성격을 갖고 있기에 그런가 보다 생각은 했지만 영화는 내가 본 이상한 것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 영화의 내부적 심리엔 바꿔야 한다는 열정이 숨쉬는 영화였다. 연극적 구성을 갖고 있는 영화의 구성 속에서 상징으로 가득한 오브제, 그리고 과장됐지만 뛰어난 연기력이 어우러진 예술성이 높은 영화란 생각이 든다. 또한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사회적 의미와 인간적 의미 두 가지를 통해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영화란 점도 고려대상이 된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난 이 영화가 인도 영화인지 몰랐다. 나에겐 거의 미지의 책을 읽는 상황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처음부터 시작된 역순행적 구성으로의 이야기는 조금은 당황스럽고 묘한 기운을 느끼기조차 했다. 아마 낯설기 방식이 나에겐 보다 좋은 집중력을 이끌었다.
인도라는 사회의 암담함과 그것을 지양하고 새로운 문명사회로 가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는 듯이 보였다. 영화는 시초부터 단순한 서사이지만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눈과 입이 문제인 여자아이는 사회성의 부족으로 미래의 자립의 위기를 안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좀 거친 선생이 찾아온다. 그의 철학은 오늘날의 언어학에서도 다루는 이야기이다. 언어를 알아야 소통을 하게 되면 그를 통해 사회성은 물론 자립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아마도 언어문화와 관련된 그의 생각은 어쩌면 계몽주의에 대한 의지로도 비쳐질 수 있다. 그의 수업 방식은 철저히 사회화를 추구하게 된다. 그의 방식은 분명 사회의 폭력성을 느낄 만큼 폭력적이었다. 어쩌면 강제적이라도 뭔가 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감독이나 인도인 전체에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어를 알아야 소통한다는 의미는 거꾸로 언어를 모른다면 야만의 사회를 헤맬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인식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 점이 감독이 지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야만의 시대 속에서 살고 있기에 계몽을 통해 개발의 시대로 가야 한다는 무언의 강조점이 그것일 것이다.
감독의 그런 의도가 지향하는 사회는 서구이지 동양은 아니었다. 영화의 오브제들은 거의 모두가 서구를 상징하고 있었다. 인도인의 의상은 그렇게 많지 않았고 집과 거실의 오브제들은 거의 서구를 상징했다. 인도의 종교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집안에서 믿는 종교가 십자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모습에서도 오브제를 통한 인도인의 묘한 모습을 던져준다. 대학 총장과의 첫 대면이 재즈 음악이 흐르는 파티장이었다는 것은 서구적 인도 만들기의 대표적인 구성이었을 것이다. 감독의 의도에 따른 공간의 상징성은 대학에서도 느낄 수 있고 집에서도 느낄 수 있고 재즈 음악이 흐르는 파티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동생 결혼식에서 볼 수 있는 모습 역시 인도적인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인도에 대한 무지가 크지만 그래도 인도 같지는 않았다.
마지막의 엔딩 장면에서 가장 분명했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스승이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다는 말과 함께 촛불을 키며 주인공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밤에 향한 곳은 성당이었다. 힌두교도 불교도 아닌 성당으로 가는 많은 인도인의 모습에서 감독은 계몽적 근대화로의 강한 진출을 주장한다. 아마도 춘원 이광수의 ‘무정’을 영화로 보는 것만 같았다.
이런 사회적 맥락 속에서뿐만 아니라 인간적 측면에서도 영화에서 흐르고 있는 보편적인 내용은 우릴 감동시킨다. 바로 인간의 신뢰와 도전, 그리고 역경을 뛰어넘는 성공이다. 이에 더하며 타인을 위한 노력 역시 이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다. 시작부터 헬런 켈러 재단과의 연계를 드러낸 진술에서 잠깐이나마 연상되긴 했지만 좋은 스토리와 인간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내용은 아무리 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일 것이다. 인간이 패배하지 않는 모습을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입과 그에 따른 신화를 계속 재생산함으로써 보다 우아하고 의욕적인 삶을 살려는 우리들의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영화의 아름다움은 무척 즐겁기도 하다. 무엇보다 12년 만에 대학을 졸업해서 지적인 인도인이 된 제자와 알츠하이머 병으로 인해 자신의 과거를 모두 잊게 된 스승을 위해 그를 가르치려는 제자의 마음가짐은 주고 받는 교환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도전이자 인간적 내면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다의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큰 즐거움이다. 다양한 상상과 다양한 의미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창작자가 창조한 작품에 대해 독자들의 자의적 해석이 있기에 그 예술작품의 가치는 계속 유지된다. 이런 방식이 진부하고 과다한 의미 만들기, 더 나아가서 창작가의 의도완 다른 방향으로 갈지라도 그런 것에 구속되지 않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효용론적 관점에서도 정당화된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런 작품들이야말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아마도 ‘B.L.A.C.K’은 많은 다의성으로 인해 좋은 인상과 즐거움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