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 The Yellow Se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 속의 거침없는 폭력은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러웠다. 마치 격렬하게 파도치고 있는 황해의 적막함이랄까? 아니면 거칠게만 흐르고 있는 한국사회의 한 일면이 그렇게 여과 없이 표현되어서일 것도 같다. 파괴적인 속도를 보여주는 자동차 추격전은 이 영화의 백미일 것이다. 차들의 과격한 충돌 속에 묘한 대리만족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살고자 하는 광기와 죽이고자 하는 광기의 충돌은 두 명의 천재적인 연기자들이 연기력과 맞물리면서 더욱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우아한 표현 뒤에 숨겨진 영화의 잔혹한 진실이 묻히는 것은 아니다. 나홍진 감독은 전작인 ‘추격자’보다 영화를 더욱 우울하게 형상화했고, 가증스런 현실의 이면을 집요하리만치 추적하고 있었다.
  영화 ‘황해’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병적 증후군을 형상화하고 있다. 영화는 소수자 영화이면서 소통부재의 현실을 담은 영화다. 거기에 ‘사랑과 전쟁’이란 TV 드라마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부부의 소통문제가 담겨 있었고, 또한 어느 부부의 오해로 붉어진 비극이면서, 밑바닥으로 내몰린 중국동포의 처절한 생존기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얽히면서 희생과 배신을 당연시 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냉소가 깔려있다. 어떤 것도 믿을 수 없는 현대인의 고독한 소외감을 표현하듯, 영화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인간의 절박함이 그대로 투영됐다. 인간이 너무 외로워 보였다.
  난무한 폭력 속에서 인간미는 어느 곳에서 찾을 수 없었다. 이익과 배신이 다반사였고 신뢰는 자취를 감추었다. 믿을 곳은 하나도 없었고, 위로 받을 공간은 하나도 없었다. 배신에 대한 대가는 언제나 복수극이었으며, 용서나 화해는 돋보기를 들이밀어도 볼 수 없었다. 새로운 사실주의인 것처럼 모든 것이 희망찬 것은 하나도 없고 비극으로만 치닫고 있었다. 영화 속의 도끼는 이상하리만치 관객의 시선을 끌었고,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영화 속의 세상은 정의라곤 하나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흉흉했다. 그것은 한국사회의 감춰진 이면의 폭로일 것이다. 정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관계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관계인 부부 관계의 소통부재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소통의 단절 속에 배신이라는 믿음이 거세지면서 발생하는 인간파멸의 모습은 남의 모습 같지가 않았다. 한국 사회 주변에 언제나 일어나는 볼썽 사나운 모습이다. 여기에 인간 목숨을 거래하는 장면이 시장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가치 하락 수준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목숨 하나만 제거해주면 모든 것이 풀릴 것이란 이야기에서 생명경시를 느낄 수 있지만 인생의 밑바닥까지 하락한 연변의 조선족인 ‘구남(하정우)’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거라도 해야 모든 것이 풀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는 사람을 죽이러 황해를 건넌다. 불법으로 말이다.
  ‘구남(하정우)’은 모든 것이 빼앗긴 조선족이다. 그가 보여주는 모든 것은 무엇이든 해서 괴로운 현실을 탈피하고자 한 어느 조선족의 비애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밑바닥에 떨어진 자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현실의 우울함을 벗어나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해야 할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기준이 도덕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리다. 생존이 위기인 상황에선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자를 죽이라는 청부에 그냥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자괴감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삶의 안정이 거세된 자의 비애가 그를 통해 형상화되고 있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에겐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그는 결국 버림받았다. 사회적 약자에겐 너무 익숙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세상의 밑바닥으로 몰아가는 '면가(김윤석)'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었다. 그에겐 돈 이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인정사정 봐주질 않았고, 배신과 살인을 밥 먹듯이 했다. 그런 그를 야멸차다고, 아니면 냉혹하다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런 기준을 가슴에 담지 않는 자에겐 필요 없는 제약일 뿐이다. 차리리 그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런 인간은 현실에서 엄연히 존재하며, 사람들의 도덕적 평가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 만큼 강한 자란 사실이다. 그런 그에게 세상은 어쩌면 관대한지 모르겠다. 그를 통해 얻는 이익을 위해 타인의 불행을 조장하는 행위는 영화 속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가 도끼를 들고 밤거리를 돌아다녀도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는 현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사회인지도 모른다. 
  

 

 그런 ‘면가’에게 ‘구남’은 한 번 이용하고 버릴 무가치한 존재로 보인다. 그것이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다. 특히 ‘구남’을 만났을 때,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빙긋이 웃으면서 죽이고자 달려드는 그의 미친 존재감은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자신을 악용한 자가 자신을 삭제시키려 달려드는 상황, 부조리하지만 한국 사회엔 이제 익숙한 상황이다. 그 속에서 쫓고 쫓기는 장면은 차라리 우화였다. ‘구남’ 자신이 읊조린 것처럼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비애와 자신을 이처럼 만든 자들에 대한 분노는 정당했지만 슬프기도 했다. 그의 복수가 성공한다 해도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있을 수 없었고 고향인 중국 연변으로 가기엔 너무 힘이 없었다. 그래서 황해인지 모르겠다. 영화 ‘황해’의 마지막 장면인 황해에서의 마지막 장면은 바다 같은 세상 앞에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괴롭게 보여준다. 그리고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질식된 이후 은행 창구에서의 어이없고 기막힌 장면은 이 영화의 과격한 정직함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희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현실에 대한 과격한 냉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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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1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novio 2011-01-01 02:06   좋아요 0 | URL
저도 인상 깊게 봤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리뷰를 쓰실 것 같은데 무척 기대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