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 - Transformers: Revenge of the F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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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기대가 컸지만 실망도 무척 큰 영화. 확실히 어른이 볼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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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어바웃 타운 - Man About T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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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한 매력이 있어 보이네요. 남자에 관한 슬픔과 애환 등이 엿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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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 Terminator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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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미네이터의 진화가 느껴지고 있다. 영화가 다루는 소재가 인간의 본질적 물음으로까지 향하고 있는 것이다. 화끈한 액션과 볼거리로만 포장돼선 안 되는 것인지 영화는 무척 어려워져 가고 있다. 다른 것과의 차이로 우린 서로 상대를 틀렸다고 윽박지르고 있다.
  자신의 육체를 실험용으로 사용되길 허락하는 어느 사형수의 모습으로 처음 시작하는 영화는 가치있는 인간과 무가치한 인간의 구분으로 시작한다. 터미네이터 특유의 우울한 이미지와 어조는 언제나 이지만 그러나 영화는 과거완 좀 더 다른 시선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그래서 인간인 줄 알았던 한 사내가 사실은 인간이 아닌 T-600 이란 기계인간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기계인들에 의해 초토화된 미국 LA를 본다면 왜 기계인간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기계인간은 자신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냐 하면 그의 생각 (비록 인간의 뇌가 아닌 복잡한 소프트 웨어로 구성된 기계지만)엔 그는 인간이었고 그러고 싶었다. 자신의 내부에 대한, 혹은 자신을 구성하는 기계들을 이해하기 전까지 그랬고, 인간을 위해 싸우는 와중에도 그랬고, 자신의 몸이 기계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그랬다. 그의 마음과 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대하는 그의 주변과 시선이 변한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나서, 그리고 주변의 시선이 바뀌고 나서 자신이 변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기계 본부로 가서 만난 자신을 그렇게 만든 중추 기계와의 대화는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발생한다. 난 누구인가, 그리고 난 누구를 위해 살아가야 하는가 라고. 자신의 고민과 달리 주변은 냉정했다. 극소수의 인간만이 자신을 그들의 편으로 받아들였다. 비록 기계인간에 대한 의심을 버리지 않았고 신뢰에 대한 확신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지만.
마쿠스와 T-600 이란 두 가지 이름의 혼돈에서 그는 자신에 대한 행동을 결정한다. 자신이 다르다고 해서 틀린 존재로 여긴 인간을 위해, 인간이었던 자신을 기계인으로 만들어서 자신과 같기에 동료라고 주장하는 세력을 적으로 상대한 것이다. 그의 선택이 무엇을 근거로 했는지 잘 모르겠다. 자신을 원하지 않은 모습으로 만든 것에 대한 원한이든, 스스로를 인간으로 유지하고픈 마음에서든 그는 인간을 위해 싸운 것이다.
  영화는 마쿠스란 존재만이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마쿠스가 가장 눈에 띈다. 나에겐 이 기계인의 존재가 우리 사회의 이방인들의 모습과 연이어 유추되고 있었다. 아니 우리와 다른 존재이기에 차별 받고 더욱이 추방의 존재로 여기고 있는 요즘, 우리 속의 이방인들은 자신과 한국인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린 어쩌면 이름만 다른 기계인간들과 필연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우리는 과연 옳을까?
  기계인간의 시작은 바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고 소모됐다. 필요는 탐욕을 비추는 거울인지 모른다. 기계를 학대했다고 말하긴 힘들다. 영화에서 기계가 인간에 대해 왜 분노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분노하고 있다. 우린 그들이 마쿠스처럼 우리들을 위해 봉사하길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들을 위해 뭘 했을까? 알량한 직장 구해주면서 너무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불평등한 계약으로 그들을 잔인하게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들이 순애보적으로 희생만 해줬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들이 소나 말처럼, 그리고 돼지처럼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은 아닐까? 아니 그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데도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달라서 틀린 것이 아니라 하찮다고 생각해서 우리 뇌리에 사라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 역시 상대에 의해 틀린 대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린 상처 입게 되지 않을까? 우린 기계보다 나은 것일까? 우린 그들보다 가치있을까? 터미네이터란 영화는 점점 어렵게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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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 - Himalaya, where the wind dwe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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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그런 평범한 직장인인 주인공 ‘최’는 본 기억도 가물가물한 이주민 노동자였던 어느 네팔인의 죽음을 가족에게 알려주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난다. 그는 현재 대기발령 상태이고 아내는 먼 미국에서 자녀들의 교육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그렇다. 그는 가족에게 무한한 책임을 지면서도 누리는 것 하나 없는 기러기아빠였다. 한국에서 남자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는 그에게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먼 여행은 소일거리 여행일 수 있었지만 그에겐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행기로만 갈 수 없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이 있는 네팔의 히말라야 산맥은 정말 험준했다. 극중이었지만 고생이 역력한 모습의 최민식의 모습과 얼굴은 10종 경기 하는 선수처럼 보였다. 최민식이 분한 ‘최’는 영화 전반부의 상당수를 할애하는 죽은 이주 노동자 ‘도르지’의 집까지의 기나길고 힘든 여정에서 고생스런 걸음을 걷는다. 엄청난 고도라서 고산병에 걸릴 것만 같은 주인공 ‘최’는 끝없어 보이는 산과 강, 그리고 돌길을 따라 무한히 걷게 된다. 그의 길안내를 맡은 네팔인의 걸음걸이완 다르게 도시에 찌들어버린 ‘최’의 몸은 마음처럼 황폐해져 있었던 것이다. ‘도르지’의 집에 도착하기 전, 이미 그는 탈진상태여서 걸어서 못 가고 타인의 도움으로 업혀서 집에 도착하고 집에서 치료를 받는다.
  그 집에서 그는 새로운 환경과 문화를 만난다. 형제들이 한 명의 여자를 아내로 삼는 모습이나 자연 속에 유유자적한 그들의 모습은 ‘최’에겐 낯설었다. 처음으로 만난 문화에 당황스러웠지만 그들의 가족엔 한국 사회에 없었던 그 무엇이 있었다. 가족이 돌아왔을 때의 기쁨 가득한 가정이나 떠난 가장에 대한 그리움을 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집과 대비되는 그 어떤 것과 마주친다. 가족간의 신뢰와 사랑, 즉 가족애를 만나게 된 것이다. 자신이 온 이유와 그들 내부의 가족애에 방황하면서 그는 죽음을 알리지 못하고 계속 시간을 끄는 상황만 연출하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보게 되는 자연 속에서의 그들의 자연스런 마음을 통해 도시인으로서 자신이 잃어버린 가족애와 인간미를 보게 된다. 자신의 현재 모습과 대비되면서 인간미 넘치는 ‘도르지’의 가족에게 차마 말을 못하고 주저와 방황을 하게 된다.
  그의 방황으로 ‘도르지’의 죽음이 늦게 알려졌지만 결국 가족들은 알게 됐다. 처음 가족들과 만났을 때의 환대처럼 가족의 죽음을 알려주기 위해 먼 걸음을 한 ‘최’에게 감사함을 전해 주었다. 비록 아내의 안타까움이 ‘최’를 힘들게 했지만 아내로서 당연한 그녀의 모습은 가족의 또 다른 사랑일 것이다. 그 가족들의 슬픔과 애틋함을 본 그는 히말라야의 자연 풍광 속에서 인간들의 관계와 인생, 그리고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 후 자신의 소임을 다한 ‘최’는 홀로 자신의 터전인 도시로 돌아오게 된다. 다행히 그의 귀로엔 처음과 같은 고민은 없어 보였다.
  히말라야와 최민식의 만남은 독특한 장소와 최고의 명배우의 결합을 의미했다. 특히 영화는 독립영화로서의 특성을 듬뿍 갖고 모험적인 내용과 장소를 선택했다. CG가 난무하고 독특한 앵글로 평범함을 괴이하게 만드는 기술이 난무하는 최근 영화에서 이 영화는 보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기술과 주제를 보여줬다. 영화는 빠른 극의 구성을 갖고 있지 않아서 긴장감을 갖고 영화를 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여유 있고 느린 구성들 속에서 관객은 생각을 갖고 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긴 길을 따라 걷고 있는 모습에서 그 끝없는 풍광과 함께 길 위에서의 상징성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유에 대한 가치를 고양시켰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독립영화의 이단아적 특성은 물론 시간에 쫓겨 사는 현대인들에게 여유를 동반한 또 다른 시선과 낭만을 제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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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형제 사기단 - The Brothers Bl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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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룸형제사기단 속에 있는 진실한 가족애는 역설적이지만 흥미로운 소재였다. 서부 초창기 시대의 복장을 입었으면서도 이동수단이 초음속 비행기였고, 일본 여성의 등장 등은 시간과 장소의 뒤틀어짐을 상징한다. 또한 과도한 행동과 과장된 표현들은 우습지만 행동의 의도들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었고, 동시에 영화의 역설적인 매력을 전달해 주었고 마치 색다른 세계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환상을 자아내게 만든다. 영화 속에선 거짓과 진실이 오고 가는 혼란 속에서 인간적이고 감동적이었던 것이 존재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영화를 만든 목적이자 제작자들의 의도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거짓과 진실된 행동을 한 이유였던 상대에 대한 사랑과 배려였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스티븐과 블룸 형제는 서로 가족애와 형제애를 지니고 살았다. 단출하지만 우애가 깊은 둘간의 모습은 현대의 이상적인 가족으로 보인다. 뛰어난 지혜를 지닌 형 스티븐의 리드 하에 둘은 각종 사기 행각을 벌였고 좋은 결과들이 훨씬 많았다. 비록 그들에 의한 희생자에겐 나쁜 결과이겠지만. 그러는 와중에 동생 블룸의 사랑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을 그 누구보다도 이해한 형 스티븐은 새로운 짝을 맺어 주기 위해 다양한 작전을 짜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마지막 시도 후 동생은 형의 그런 의도에 화를 내고 나서 떠나간다. 장소는 Montenegro, 아마도 멕시코의 지명일 것 같다, 그곳까지 동생을 찾아온 형은 마지막 사기행각을 하자고 동생을 설득, 마침내 진짜 마지막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이 때의 사기 상대는 엄청난 석유재벌 상속녀인 페넬로페. 어느 신화에 나오는 이름인 것 같다.
  세상과의 거리감을 두고 은둔한 페넬로페는 매우 기이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과 등지면서도 책을 통해 세상의 모든 거리들을 즐겁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블룸형제사기단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어 주었다. 비록 그녀를 속이려는 의도였지만 역설적으로 그녀에겐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었고, 심지어 사랑까지 덤으로 선사했다. 그래서인지 죄악시되는 범죄에 대한 참여에 무감각했는지 모른다. 비록 사기단을 신뢰했기에 그랬었겠지만 세상으로의 시작은 그다지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작을 통해 변화를 겪었고 자신을 속였던 사기단의 실체에 대해 실망과 고통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그런 실망과 고통으로 다시 그녀가 은둔으로 돌아가긴 힘들었는지 모른다. 무엇보다 그녀는 관계의 매력과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세상으로 나갔다. 자기의 집을 파괴하면서.
  마지막에서 보게 되는 형제간의 우애는 희생과 배려가 아직도 미국에선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리라. 마지막의 고통을 참아야 동생의 행복을 담보할 수 있기에 마지막 사기를 벌인 형, 스티븐의 마지막 모습은 어디에선가 본 듯한 것이지만 그래도 언제나 감동적인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동생의 울음과 사랑의 시작이란 역설적인 종말과 시작의 교차는 희생을 통한 배려의 열매가 열렸음을 의미한다.
  사기라는 제재를 통해 배려와 사랑을 보여준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역설을 통한 감동을 주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보인 장면들은 이 영화가 ‘Sting’과 같은 통쾌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의도로 만든 영화도 아니고. 영화 속에 흐르는 형제애는 통쾌한 결말보다 훈훈하고 인간미가 물씬한 영화로 만들어 주고 있다. 형의 마지막 사기는 그 이전부터 했었던 사기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동생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래서 동생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연극을 선보이면서 혹시나 동생에게 드리워질 위기를 벗어나도록 이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희생의 의미로 확장시킨다. 동생을 위한 마지막 배려는 영화의 핵심코드이며 영화의 가치를 담은 영화이다. 가족간에도 정서적 거리는 물론 생활공간으로서의 거리감이 커지는 오늘날, 영화는 끈질기게 마지막까지 함께 하고 있는 두 형제의 모습과 그들의 사랑과 우정을 통해 지금 우리고 잃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것을 일깨운다. 아마 단순히 피만 흐른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것처럼 서로간에 최선의 것을 다해 줄 수 있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형제이자 가족으로서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음을 영화의 종결 이후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가족끼리 식사라도 같이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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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6-24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재미와 감동을 함께 준 영화였어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당선도 축하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