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 P12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 나는 시간이 구부러지고 접힌다거나, 평행우주 같은 다른 형태로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론적인 얘길 하는 게 아니다. 그럴 리가, 나는 일상적인, 매일매일의, 우리가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를 보며 째깍째깍 찰칵찰칵 규칙적으로 흘러감을 확인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초침만큼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 게 또 있을까. - P12

에이드리언은 원칙이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관념에 근거해 우리에게 사유를 인생에 적용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도록 촉구했다. - P22

그들은 사춘기의 우정이 갖는 막역한 속성과, 기차에서 마주치는 이방인들의 야수적인 행태와, 싹수가 노란 여자의 유혹에 대해 우리 대신 겁을 먹었다. 그들의 그 노심초사는 우리의 경험을 얼마나 까마득하게 앞서 있었던가. - P24

병적인 불신은 사춘기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며, 성장하면서 벗어던져야 할 것으로 믿는다는 듯이. 선생들이나 부모들은 자기들에게도 어린 시절이란 게 존재했음을 짜증이 날 정도로 들먹이면서, 그러니까 내 말을 들으란 식이었다. 그것도 다 한때야, 라고 그들은 우기곤 했다. 언젠가는 그런 데서 벗어나게 될 거야. 현실이 뭔지, 현실성이 뭔지, 인생으로부터 깨우치게 될 테니까. 그러나 그때 우리는 소싯적의 한 순간이라도 그들에게 우리 같은 때가 있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투항해버린 연장자들보다는 우리가 삶-그리고 진실과 도덕과 예술-을 더 확실하게 포착했다고 믿었다. - P25

"카뮈는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했어."
"윤리학과 정치학과 미학과 실재의 본질과 그 밖의 다른 모든 걸 빼면 말이지." 앨릭스의 재기어린 반격엔 뼈가 있었다.
‘단 하나의 진실한 문제. 다른 모든 게 걸린 근본적인 문제인거지." - P29

인생엔 문학 같은 결말은 없다는 것, 우리는 그것 또한 두려워했다. - P30

진정한 문학은 주인공들의 행위와 사유를 통해 심리적이고,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진실을 드러내야 했다. 소설은 등장인물이 시간을 거쳐 형성되어가는 것이니까. 어쨌거나 필 딕슨 선생이 우리에게 해준 말에 따르면 그랬다. 그리고 이제까지 소설과 무관하면서도 그에 준하는 삶을 산 사람은 -롭슨을 제외하면-에이드리언이 유일했다. - P31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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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큰 아름다움은 인간의 손안에 받쳐질 수 없는 법이다. - P287

어떤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나는 늘 앎과 알지 못함의 사이에 난 틈에, 정보와 이해력 사이에 난 틈에 버려진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다. - P288

지식과 본능이 다툼을 벌이면 늘 본능이 승리한다. - P288

아마도 나는 그 노래를 열 살 또는 열한 살이던 해에 내가 끼고 살던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들었던 것 같다. 그 나이는 언어가 고착되는 나이, 시와 노래 가사와 주술적인 기도가 혈관 속 혈액의 솟구침과 통합되는 나이다. - P291

이제 나는 나이가 들어서 사랑하는 많은 사람을 장례 지냈고, 상실은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일 때가 너무 많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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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여전히 집을 떠나기를 거부하고 있었고, 나는 주위를 폐허로 만들고 있는 그 장소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을 이해하려고 몸부림쳤다. 나는 그 집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집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머무르려는 어머니의 뿌리 깊은 이유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 그 이유들 앞에서 내 논거들이 전혀 먹히지 않는지도 마찬가지로 알아차렸다. 그 집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헤아리려 노력하던 나 역시 어느 새 그 집에 대한 내 사랑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건 하나의 이해였고, 그 이해는 곧 어머니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었다. - P250

죽음을 향해 가는 삶에 대해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다. - P255

애벌레가 약간 움직이고, 마침내 나는 깨닫는다.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웃자란 피부를 찢고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으로부터 기어서 달아나는, 삶의 다음 단계에 도달하기 전의 휴지 상태일 뿐임을. 그것은 새로운 생물이다. 심지어 그것은 다시 시작하기 전에 다시 시작한다. - P259

우리 인간은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생물이다. 우리는 모든 증거에 맞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통함과 외로움과 절망은 비극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 비극적인 것들은 세상의 바른 길들이 제공하는 지면, 다시 말해 우리 존재가 굳건히 디딜 단단한 지면을 만들어 내는 즐거움과 침착함과 안전함의 불운한 변이에 불과하다고. 우리는 동화 속에서 우리 자신에게 말하고 있고, 어둠은 선물 비슷한 것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 - P261

우리가 늘 느끼는 것에는 그 자체의 진실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진실은 아니다. 어둠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 약간의 선량함을 숨기고 있다. 예기치 않던 빛이 반짝이기를, 그리하여 가장 깊은 은닉처에서 그것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면서. - P262

손윗사람들을 보살피는 건 유아를 키우는 것과 같다. 모든 생각과 행동의 배경을 살펴야 하고, 일어날수 있는 문제를 살피고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최악의 문제,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닥쳐오면 멈출 방법이 없다. - P265

돌봄의 결말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 돌봄의 결말은 큰 슬픔이라는 것. - P267

이윽고 나의 아름다운 시어머니도 세상을 등지셨다. 나는 매일 시어머니를, 그리고 내 부모님을 생각한다. 그분들의 뚜렷한 특성-내 아버지의 흔들리지 않는 낙천주의, 내어머니의 불손한 위트, 시어머니의 심오한 관대함-은 나와 세상 사이에 얇은 막을 형성해 주었는데, 이제 그분들 자신이 손에 만져질 듯 존재하는 부재가 되었다. 그분들이 저세상으로 떠남으로써 나는 모든 것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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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여기서 살아가기 위해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매일 가르쳐 주고 있다.
너무 많은 움직임의 소용돌이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게 있기.
조용히 하기.
귀 기울이기. - P181

모두들 알다시피 안개는 소리 없이 낀다. 하지만 시(詩)에서 그러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용히 내려앉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안개는 분주하다. 그것은 귀찮게 쫓아다니는 고양이와 할퀴는 참새를 마찬가지로 감춰 준다. 그것은 날카로운 나뭇가지를 무디게 만들고, 구부러진 잔가지를 펴 주며, 섬세한 녹색 그늘 속에서 모든 나무를 더 부드러운 모양으로 만들어 준다. 숲 깊은 곳에서 안개는 어린 가지와 실처럼 가느다란 줄기를 따라 보석들을 하나하나 깔아 두면서 숨어 있던 거미줄을 꿈의 풍경 속으로 일깨운다. 하늘에서는 어쩔수 없이 아침 해가 타오른다. 하지만 세상은 당분간 안개에 속해 있다. 안개는 감추고 보여 주고 하느라, 우리가 아는 것을 감추고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우리 눈에 드러내느라 분주하다. - P186

"가장 좋은 엄마는 행복한 엄마예요." - P195

유아들은 세상 일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려 한다. - P201

아버지가 말했다. "남자들은 서커스를 좋아하거든. 그들이 서커스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도 알거야."
오.
그건 삶의 끝을 앞둔 사람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아니었다. 그건 하나의 비유, 후한 할아버지로서 잊히지 않고 기억되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 비유였다. 후손에게 기억되려는 하나의 방식, 망각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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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에 대한 어머니의 열망은 이 모든 삶의 혼돈과는 상관이 없다. 너무 부족한 공간과 너무 부족한 돈. 아름다운 뭔가를 만들어 낼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하는 그 모든 것들. 아름다움을 창조해 낼 기회는 우리가 임대해 사는 성냥갑의 문 건너편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다. - P127

안경 없이도 잘 보는 내 예쁜 조카는 오솔길 아래쪽 옷솔버섯으로 뒤덮인 쓰러진 나무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조카가 나무의 움푹 들어간 곳에 거의 숨겨져 있는 무당벌레 한 마리를 가리켰다. "콜로라도에서 하이킹을 하다가 무당벌레 한 떼를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한 곳에 모이는 그 무당벌레 무리를 부르는 명칭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구글을 검색해 봤죠." 조카가 말했다. "그런데 그 명칭이 ‘사랑스러움(loveliness)‘이더라고요." - P152

형제애로 유명한 그 도시 곳곳은 내가 어울리지 않는곳에 와 있다는 은유였다. - P164

땅에 떨어지기 전 끝부분이 말려 올라가고 색이 녹색에서 갈색으로 변하며 불꽃 같은 색으로 시들어 가는 나뭇잎들이 세상이 돌고 있음을, 세상은 거대한 유리 언덕을 매번 더 빠른 속도로 굴러내려가는 커다란 파란 공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 P167

아버지가 나에게 해 준 말은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애정 어린 안심시키는 말, 부모님이 살아 계신 한 항상 나를 위한 자리가 있을 거라는 사실, 내가 그곳에 속한다는 걸 항상 믿지는 못하더라도 언제나 내가 속할 자리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 P170

뭔가를 아는 것의 문제는 그걸 모를 수가 없다는 점이다. 홍관조 둥지 안에 알 두 개가 있음을 안다는 건 홍관조 새끼들의 대략적인 이소 날짜뿐만 아니라, 어제 오후 내가 어미새를 확인한 때와 오늘 아침 둥지가 비어 있는 걸 발견한 때 사이에 쥐잡이뱀이 홍관조 알을 정확히 몇 개 먹어 버렸는지 알게 되는 걸 의미한다.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상실도 상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고 그래서 아무런 고통도 유발하지 않는다. - P174

어떤 일이 부자연스럽지 않고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는 것도 아닐 때 자연에 개입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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