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코레오그라피(coreography)에 대해 알게되었다. 아이린 슬기 안무영상을 보다가 너무 놀라워서, 다른 것들도 찾아보니 그 춤의 장르가 아닌 안무를 뜻하는 단어였다. 앰비규어스의 안무영상도 즐겨보고 있다. 박자와 디테일한 움직임들.

춤을 잘 추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루브보다  락킹, 텃킹 같은 움직임들이 멋있다.

 

이 책은 저자가 썼듯이 '안무와 철학의 대화'이다. 아직 책의 도입부인데 읽기가 만만치 않다.

책의 부제는 '퍼포먼스와 움직임의 정치학' 이며,

저자는 안드레 레페기 미국 공연예술학 교수라고 한다.

안무에 대해 그냥 느끼면 되는 것이지 이것을 대해 뭔가 더 깊이 알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상투적이지 않은 이 문장들은 시간을 내어 천천히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아직 책의 도입부, 2번 읽었는데 줄을 긋느라 진도가 안나간다.

버릴 문장이 없는 책을 만나면 두근 거린다. 모든 문장에 줄을 긋고 싶은 책이 내 기준 좋은 책이다.

새로운 춤의 세계와 정치학, 철학을 저자가 어떻게 엮어낼까. 기대된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은  리뷰 전에 쓰는 글인데, 책에 대한 기대감같은 것도 가끔은 읽기 전에 쓰고 싶을 때가 많다.

 

 

멈췄다, 이어지기, 이것을 트렌드라 부르든 경련이라 부르든 딸꾹질하는 듯한 시퀀스가 안무에서 점점점 늘어나고 있는 점은 무시하기 어려워 보인다...... 오늘날 안무된 움직임을 딸꾹질로 여기는 것은 비평적인 불안감을 조성한다. 운동미학적 더듬거림의 분출때문에 춤의 미래가 위협받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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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꿈은 이사를 갔다. 이사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지금 사는 집보다 깨끗하고 넓었다. 창문에는 파란 커튼이 달려있다. 파란커튼은 동그라미로 잘려있다. 잘려진 동그라미로 본 것은 옆집의 거실이였고, 옆집에는 김동률이 살고 있었다. 김동률과 옷을 잘 차려입은 남자들 3명 정도가 식사 준비를 하고 TV를 보고 있었다.

훔쳐보는 나는 원래 전에 살던 사람이 그 집을 훔쳐보고 있었음을 직감했다.

 

왜 이런 꿈을 꾸었을까?

나는 훔쳐보면서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논리를 구성하기 위하여 전에 살던 사람이 파란커튼에 구멍을 뚫었다고 무의식의 논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김동률은 좀 뜬금없다. 그의 팬이기는 하지만

김동률의 은폐한 제 3자가 있을 수도 있고

파란커튼의 구멍

무의식의 균열과 닮아 있기도 하고,

 

그냥 꿈해몽으로는 이사는 좋다.

 

무의식은 사유하고 있기는 하나, 그 사유가 의식의 사유보다 정교하지 않으며, 여기서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 되어 있다의 무의식일 것이다. 무의식의 사유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전의식적 꿈인듯도 싶다.

이사라는 반복적 테마는 정신분석을 시작하기 전에도 가끔 꾸었던 꿈이다.

 이사는 큰 변화다새로운 변화를 꿈을 꾸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존재의 집을 바꾼다는 것.

집만 바꾼다고 사람이 바뀔까?

때로는 집만 바뀌어도 사람이 바뀌기도 한다.

이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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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0-10-17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름만 보고도 ‘두근‘ 했네요ㅋ김동률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어서일수도?^^*

바람의_피부 2020-10-17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그러네요
 

하얀색의 계단을 올라가니 막다른 골목이 나온다

하얀골목어귀를 세번쯤 돌아가는 빛의 반복,

세번의 시도끝에 다시 미로의 모서리를 돌수 있었다.

하얀 그 남자가 서있다.

나는 그 남자의 앞으로 나아가고 싶지만 걸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남자와 나는 더 좁혀질 수가 없다.

이상한 일이다.

남자는 종이장같이 얇은 모습이다.

지난 번 꿈에 침대에 앉아있는 종이장의 얇은 남자이다.

흰도화지를 오려서 만든 남자.

종이남자가 태워지는 것이 이 꿈의 시리즈의 종말이 될 것 같다.

그 하얀미로는 새로 등장한 꿈의 장소인데,

더 이상 꿈은 전개되지 않은 채 시간은 15:30분에 깼다.

5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아직도 멍한 머리에 정신이 흐리게 깨어 있다.

쉬자는 의견도, 책을 읽자는 의견도, 일하러 나가자는 의견,,

수많은 의견이 미로에 갇혀서 무질서하게 떠돈다.

미로를 나가는 방법으로 써나간 이 글 뒤에 나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아마 꼬인 다리를 풀고, 다시 커피 한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한강이나 양재천의 숨은 냄새를 맡으러 나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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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과 승화사이

라깡의 인간학 리뷰

     

 

 

 

큰사물의 중력

 

라깡은 우리는 충동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언어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충동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부모, 가족, 사회를 관통하는 명령의 형식을 띤 규범의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큰 사물, 주이상스를 가두리치는 그 언어가 명령어, 현실원칙의 법과 같은 대타자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초과하는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고 말한다.

충동을 억압하는 언어는 왜 필연적으로 초과할 수 밖에 없는가?

충동의 차원이 어차피 언어로 번역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서로 다른 시스템이기 때문에 대타자의 명령어가 충동에 영역에서는 외국어이기 때문이지 않은가.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하다.

큰 사물의 영역이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악마로 간주하는 현실원칙은 억압하려고 하면 할수록 초자아는 비대해지고, 비대해진 초자아는 제 발에 걸려 큰 사물의 영역에 질질 끌려가게 된다.

이러한 사례로 저자의 강의에서 칸트와 안티고네의 사례를 들고 있다.

 

안티고네의 강박, 크레온의 히스테리

 

칸트의 정언명령 기표들은 그 자체로 물신화 되면서 주체의 안정을 위협하고 주이상스의 지역으로 세계를 밀어넣는 초과의 사건을 발생시킨다.”

쉽게 말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면의 명령은 고통의 감정을 가져온다. 인간의 그 명령대로만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정언명령에 필연적으로 고통을 가져오고, 고통이라는 정념에 의해 실재와 조우할 수 밖에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로 소포클래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사례로 든다.

안티고네는 오빠 폴뤼네이케스의 시체를 매장할 것을 크레온에게 요구하지만, 크레온은 국가를 반역한 자의 시체는 처리할 수 없다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게 된다. 크레온의 법과 질서에 대한 집착은 결국 몰락에 원인이 되고 만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경고를 무시하고 오빠를 매장하러 갔다가 결국 자살하고, 안티고네를 사랑한 크레온의 아들과 그 아들을 사랑한 아내 역시 모두 죽고, 국가는 몰락하게 된다.

안티고네의 주이상스를 향한 집착과 현실원칙을 고수한 크레온의 집착. 이 둘의 집착은 주체에게 몰락을 선사한다. 안티고네는 죽음을 욕망하는 강박으로 보이고, 크레온은 법과 질서에 집착하여 모든 것을 잃는 모습이 히스테리적으로 보인다.

 

자아. 이드, 초자아 - 쾌락, 현실원칙 - 무의식, 전의식

일대일 대응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주이상스의 영역인 충동의 영토와 현실원칙에 의해 보존되는 자아의 영토는 기이한 국경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의 형식을 한 국경선이며, “이것이 충동에 대한 억압의 장벽으로서의 법-기표연쇄의 본질라고 말한다.

 

목자의 차원과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위로

 

이러한 뫼비우스의 국경선을 따라서 정신분석의 실천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정신분석 실천에서 분석가는 목자의 차원에서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지난 10년간 인문학 언저리에서 내가 의지할 사상적 멘토를 찾아다니고, 실망한 궤적을 돌아보면,

목표는 한 가지 였다. 불안한 나를 규정해 달라는 외침.

큰사물은 불안을 야기한다.

 

불안과 내 영혼을 교환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떠한 사상과 이데올로기도 나를 해석하는데는 퍼즐 맞지 않았다. 심지어 그 모든 공부를 개인적 탐사에만 골몰하는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지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 개인의 영역에서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이 삶이 이어진다는 것이 하찮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라깡정신분석을 공부하게 되면서, 상상계적 방식으로 삶의 틀을 바꾸는 짓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나를 규정해주지 않는 분석가 함께 정신을 분석하기도 하지만,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에는 내가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존재를 불안하게도 만들지만, 무한성의 개방은 자유의 맛을 느끼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정신분석실천이 목자와 스승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배우고 있지만,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배반의 실천학

 

그럼 목자의 차원이 아닌 정신분석임상에서의 실천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라깡은 장치화된 위반의 실천으로 간주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임상을 장치화된 위반의 실천이라고 할 때, 여기서 위반은 주체의 무의식을 통제하는 상징적 법의 기능이 파생시키는 환상들을 거슬러 횡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신념처럼 매달려있는 무의식의 담화들을 해체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충동을 억압하여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억압되는 구조들을 횡단하여 충동의 가장자리까지 접근해 가는 것이 문제이다. ”

정신분석실은 환상의 소각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충동을 어떻게 방어하는가? 다시 묻는다.

 

충동, 주이상스가 출몰했을 때, 나는 충동을 어떻게 방어하는가? 충동을 그 자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무질서, 다형성, 파편성이 그 특징이라고 할 때, 나는 그 것을 어떻게 알아보고 방어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초자아의 명령과 마찬가지로 충동, 큰사물의 영역 역시 초자아 만큼이나 그 명령어가 뚜렷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자신을 파괴할지라도 충동의 맨홀에 빠지는 방식으로 초자아의 명령을 무시하고 충동에 매번 한 표를 던지는 행위의 반복. 대상a(죽음충동)에 대한 집착은 강박증이 도덕의식에 집착하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강박증과 마찬가지로 히스테리 역시 충동의 수로에 갇힌 채 소외된 쾌락탐닉의 희생양이라는 분열적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충동과 손을 잡으면 잡을수록 억눌린 초자아는 윤리의식은 주체에게 고통을 가한다. 그러나 그것의 반복된 수동성임을 인지하였을 때,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는 반전은 가히 충격적이다.

결국 주체()는 자신을 벌 주는 변태적인 방식의 쾌락에 골몰하게 되는 것 같다.

충동을 효과적으로 방어 할 수 없을 바엔 수용하고 즐기고자 하지만, 아침의 후회 또는 이를 망각하는 기제의 발명은 이 충동과 손잡은 방식 역시 수동적 사태라는 굴욕감을 가져다 준다.

 

이와 관련하여 주체의 무의식에 자리한 충동과 그를 향한 덧없는 방어인 이 같은 억압의 대립구조를 라깡은 원초적 윤리라고 부른다.”

 

언어와 행위의 불일치. 언어로써 충동은 억압하지만, 행동으로 초자아에 방어하는 이상한 한 쌍의 코미디. 그런 의미에서 은밀히 한편을 맺었던 충동마저도 배반할 수 있는 배반의 실천이 나에게 필요하다.

프로이트의 승화와 라깡의 승화 개념의 차이

 

고정관념으로서의 승화

 

인간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반사회적 속성을 사회가 허용하는 형식, 예를 들자면 예술로서 승화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는 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다. 큰사물, 주이상스와 같은 개념과 달리 승화라는 개념은 이미 고정관념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에 대해 무슨 더 할 말이 있을까라는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지, ‘대상에 대한 관계의 문제(124P), 대상과 승화(126P)는 유독 어렵게 느껴진다.

 

프로이트 승화 : 허용된 대상으로 대체하는 승화

저자는 충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또는 충동이 자리한 장소의 중핵으로 접근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면 충동을 둘러싼 대상의 관계 개념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충동의 본질은 언제나 쾌락의 향유이다. 그러나 충동의 거친 속성을 방어하기 위해 자아는 대상이 필요하며, 대상은 도구 언어/기표이다. 승화는 이와같은 대체가 적절히 일어났을 경우를 가리키는 개념이며, 이것이 프로이트가 규정한 승화라고 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앞서 라깡은 충동을 억압하기 위해서 언어라는 도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충동을 둘러싼 대상이 언어라는 것은 충동을 억압하기 위한 언어라는 도구는 규범적 언어이고, 여기서 충동을 둘러싼 대상 즉 언어는 앞선 시간에 언급되었던 충동을 대리한 기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충동을 대리한 기표가 사회가 허용하는 기표로서 대체된 것을 승화라고 보고 있는 것인가. (다른 차원인 것인지 혼란스럽다.)

 

저자가 인용한 라깡의 말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승화가 억압된 것이 회귀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없이 만족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으며,

성적 리비도는 대상들 속에서 만족을 찾는 것인데, 어떻게 그 만족의 대상을 구별해 낼 수 있을지 프로이트는 당혹스러워로 할 것이라고 모순을 지적한다.

 

억압 없이 만족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성충동을 의미하며, 이것은 충동이 증상의 형식으로 출현하여 무의식의 만족을 얻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승화가 억압 없는 만족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은 충동이 의식의 차원에서 만족될 수 있음을 뜻하며, 프로이트는 충동의 대상이 사회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대상으로 교체 되는 과정에서 만족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즉 충동을 만족할 만한 대상으로 교체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라깡의 승화: 큰사물의 영토의 개방

 

위와 같은 프로이트의 승화개념은 개인이 집단-공동체 내부에서 안정적이며, 직접적인 대상을 발견하여 성충동이 만족되는 구도를 상상하게 만든다. 개인은 성충동과 일탈의 장소이며, 공동체는 이에 대해서 만족의 길을 열어주는 이상적 체계라는 관념이 그것이다.

그동안 개인의 성충동에 방어적 문명시스템을 구축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방어의 개념은 억압없는 만족으로서의 승화는 사회적 승화의 개념과는 대립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개인의 성충동을 공동체가 만족을 길을 열어준다는 의미는 언뜻 이해가 어렵다.

가족시스템을 만들어 개인의 성충동을 해결한다는 의미일까?

개인은 성충동과 일탈의 장소이기 때문에 집단, 공동체 속에서 개인의 충동이 사회적 만족의 대상으로 교체되는 사회적 승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라깡은 인간은 충동에 대해서 주변을 맴도는 방식으로만 만족한다고 말하며, 이러한 우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에는 억압의 속성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는 충동을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억압없이 직접 만족할 수가 없다.

히스테리 또는 강박증적인 증상으로 밖에 무의식은 만족을 느낄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무의식의 과정은 충동을 그 자체가 아닌 대상으로 매개로 할 때만 가능한데, 대상은 충동을 은폐하는 동시에 충동의 우회적 만족을 가능하게 하는 가상물(대리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대상a가 나오는데, 충동을 은폐하거나 우회적 만족을 가져다 주는 대상은 대상a(소타자)이고 이것은 가상물이며, 자아의 모습을 결정하게 되며, 소위 인간은 욕망 그 자체라는 의미가 이것이라고 말한다. (충동에서 떨어져나온 대상a와 이 소타자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갑자기 혼란스럽다)

 

 

승화의 차원에서는 대상은 상상계적인 작업, 특히 문화적인 작업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상상계적이라는 표현은 자아의 동일시와 관련되며, 대상이 충동을 우회적으로 만족시키는 대체의 기능을 하는 동시에 상상계적 기능을 한다는 표현은 대상이 욕망의 만족과 관련이 있으며, 주체의 자아-이미지를 결정함을 의미한다.

주체는 자신의 충동을 우회적으로 만족시키려고 대상을 취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족과 동일시의 이 같은 과정은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이기도 하다.“ (인간은 욕망 그 자체라는 의미와 같은 내용인가?)

 

라깡은 승화의 대상-동일시적 차원을 환상의 도식으로 설명한다.

충동을 대상으로 매개한다는 의미는 욕망의 대상을 대체한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끝없는 욕망을 대상을 추구하면서 주체를 소외시키는 환상의 도식을 저자는 소개한다.

 

$a 이 수식은 주체가 상상계적 대상에 사로잡히면서 스스로 소외되는 과정을 표상한다. 주체는 그이 욕망의 대상인 a, 즉 작은 타자에 리비도를 투여하는 방식으로 상징계 내부에서 자신의 위치를 할당받는다.”

 

승화는 단지 주이상스의 만족이 아니라 주이상스적 주체가 사회공동체 내에서 자아를 실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개념으로 대상의 속성상 억압이 없을 수 없다.

현대인이 충동의 대상에 사로잡혀 소외되는 현상이다. 충동의 대상은 욕망의 모습으로 우리는 끝없는 욕망의 대상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으며, 그것이 가진 대체적 속성, 즉 허구적인 속성을 알아채지 못한채 압도당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진정한 승화란?

 

가장 이질적인 것으로서의 충동을 어떤 대상의 매개도 없이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네 이웃은 가장 낯선 자이며, 프로이트가 낯선 것Fremde"라고 했던 주이상스의 영역이다.

낯선 것, 큰사물, 외밀성이라고 불리던 내 안의 낯선 이웃에게 어떻게 환영할 것인가.

 

우리는 억압없이, 대상없이, 매개없이 충동이 현전한다면 카오스가 소환되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욕망에 대상에 속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백지가 아니라 이미 촘촘한 격자로 새겨진 몸이다. 이제 커서를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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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착란

 

트럭을 타고 흙먼지가 날리는 길을 가고 있다.

별안간 눈앞에 축늘어진 시체들이 동그란 원을 그리며 늘어져 있다.

검은색에서 살색 흰색까지 인종별 그라데이션을 한 벌거벗은 남자들의 시체

그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손은 뒤로 묶은 채이다.

 

캐치!

꿈속에서 외치고 나는 잠이 깬다.

도망다니던 꿈을 잡은 듯 나는 외친 것이다.

 

곧이어 다시 잠든 꿈에서 언어의 착란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다시 잠이 깬다.

 

아주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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