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같이 아무것도 쓸 것이 없는 것 같은 막막함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한때는 나의 배설물이였던 글들, 그리고 cartel에 참여하면서 쓰게된 발제문들, 많은 메일, 짧은 리뷰들, 그리고 수많은 업무페이퍼.. 

사실 머리속에는 끊임없이 생각이 환유한다. 그 생각들을 지면에 옮기는 작업을 하게되면 아무것도 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머리 속의 쓰레기를 받아 적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무도 그 쓰레기 더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발화하거나 글을 쓰지 않는 이상. 

그 오물을 정화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글쓰기 행위를 통해서이다. 내 손은 오물을 거른다.  생각이 말이 되기 전에 글을 쓰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생각들이 지면에 놓이게 된다. 그 글들은 무의식적으로 발화 속에 섞인다. 나는 내 글을 모방하여 말하는 것 같다. 생각이 먼저 있고, 글이 나중이 아니라 글을 쓰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발화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 말보다 글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맴도는 생각을 쓰면 앞으로 전진하게 되는 것을 느낀다.  그렇다면 글을 많이 쓰면 쓸수록 진전된 생각들을 발화하게 되니, 이것 역시 무의식을 바꾸는 좋은 방도가 되지 않을까. 말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다. 먼저 머리 속으로 정리하고 글을 쓰는지.. 나는 그냥 쓰면서 생각을 한다. 생각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쓰다보면 써지는데, 이렇게 스크린을 마주하기 까지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이다. 

글쓰기에 대해서는 한 가지 또 떠오른 생각은 나의 글과 말투의 갭차이가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말투를 그대로 글로 옮길 수가 없고, 글의 투를 현실로 옮기기도 어렵다. 평소 농담반 진담반의 어법을 사용하지만 글은 제법 진지하다. 여기서 분열의 상황이 드러난다고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그런데 정신분석은 어쩌면 글이 말이 되는 경험과 비슷한 듯 하다. 내 개인적 경험으로는 '하나의 무의식'만 그 공간에 존재하는 듯 했다. 말을 하면서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아의 분열를 하나로 수렴하는 일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 다른 생각은 하기 어려워지는 것과 같이 글이 아니라 말을 하는데도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 마치 자신이 한덩어리와 같이 느껴졌었다. 

지금은 그때의 덩어리가 흩어졌지만, 글쓰기라는 임상이 나에게 남아있다. 다시 쓰기와 읽기에 집중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타자의 부흥 

  라깡의 성도착의 구조를 한마디로 말하면 '대타자 부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은 대타자를 살려내는 부흥의 가공을 통한 주이상스의 소환이 도착증자가 목적하는 바이다 . 

도착증자가 부흥 시키려는 대타자는 상징계 대타자가 아니라, 거세 이전의 빗금없는 대타자A이다. 언어의 거세이전 다형적 충동의 세계에서 유아의 신체는 쾌락이 전부인 신체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주이상스의 대상이고, 이 팔루스와 아이는 자신을 동일시 한다. 이들 사이에 아버지의  개입으로 아이는 더 이상 어머니와 아기는 서로를 쾌락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어머니는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야 하고, 아이는 법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 어머니 대타자도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면서 거세된다. 죽은 대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주체는 아버지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어머니대타자를 주이상스의 화신으로 만든다. 

신경증자의 상실한 주이상스는 유령과 같은 대상a가 된다. 대상a는 알 수 없는 증상으로 돌출될 뿐, 상실한 것의 보상에 관해서는 언제나 실패할 뿐이다.  그러나 성도착자는 상실한 주이상스를 불러내는데 성공하여, 쾌락한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적극적으로 대체하려고 일종의 '설정'을 마련한다. 페티쉬는 대타자주이상스의 절편을 소유함으로써 살아있는 대타자를 소환하기 위한 미끼다. 빼앗긴 주이상스를 소환하려면 죽은 신을 살려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그가 설치하는 무대의 소품은  '스타킹'과 같은 어머니의 일부인 경우가 많다. 그들의 무한쾌락은 어쩌면 대타자의 장난감이 되고자 하는 협소한 쾌락일 뿐이다. 신경증자에게 대타자는 죽은 신이지만, 도착증자에게 대타자는 존재하는 신이 된다.  

신경증자와 도착증자 사이 

   신경증자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한채 욕망 속에 던져진다. 도착증자는 욕망의 환유를 차단하는 기예를 발휘하여 대타자의 주이상스의 자리에 가고자 한다. 

신경증자에게 관음은 수치심을 불러일으키지만 도착증자에게 관음증은 수치심을 초과하는 쾌락이다. 신경증자는 '응시'의 충동은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승화 될 수 도 있고, 불안을 야기하는 공포일 수도 있지만, 도착증자는 관음을 관음하거나, 노출증을 통해서 대타자의 응시를 적극적으로 불러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살아있는 '응시' 즉, '여고생들의 눈들' 인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 신체의 생물성(신체사물의 존재감)'이다. 

  신경증자들도  흔히 '관종'이라 불리는 형태로 응시의 쾌락을 즐기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아버지에 법에 위반되지 않기에 도착증자의 쾌락을 모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증자에게 "도착적이다"라는 말은 수치심을 초과하여 적극적으로 '물신'을 향유하려고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도착증자는 '법'을 초과해야만 그들의 쾌락이 보장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거세되지 않은 대타자가 살아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주이상스는 누구의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살아있는 대타자에 의해 그들 역시 소외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쾌락은 그들의 것이 아닌 대타자의 주이상스이기 때문이다. 라깡적 윤리에 비추어 보면 도착증자의 역시 대타자에 종속되어 있는 비주체적인 존재일 뿐이다. 신경증자도 도착증자도 모두 대타자의 주이상스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대타자라고 해서 그들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대타자는 환상이기 때문이다. 

 라깡은 우리 모두는 '도착증자'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한 바는 우리가 '문명'을 물신처럼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증자들은 대타자의 팔루스를 물신으로 삼는다. " 신경증자는 문명(아버지판본)을 통해 성적인 욕망을 실현하므로 우리 모두가 도착증자(백상현 강의)"라는 의미이다.  팔루스의 차단으로 보자면 성도착자가 월등할 것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성도착자가 세운 물신이 전례없는 새로운 팔루스라면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보는 입장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끊임없이 죽은 대타자의 망령과 살아있는 대타자를 왔다갔다하는 불안속에서 가끔 정박하여 정신을 차려보면 세상이 멈춘듯 적막하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생겨 개괄해 보고자 주문했다. 

광범위한 내용이라 끝까지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틈틈히 읽으면서 페이퍼를 남기고자 한다.  


  










     인류학이란 무엇일까? 

인류학(anthropology)은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은 연구하는 학문은 많다. 인간유전학, 인체해부학, 생리학 등. 그럼 인류학은 다른 학문들의 인간 연구와 어떻게 다른가?

첫째, 인류학에서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신체구조, 기능을 포함한 체질적 측면과 행동방식 및 생활양식을 나타내는 문화적 측면을 대상으로 한다. 

둘째, 인류학에서 다루는 범위는 인간역사의 전시대와 세계의 인간과 문화이다. 

셋째, 인간, 사회, 문화의 모든 측면을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인류학의 분야들과 연구방법은 어떻게 나뉘는가?

인류학은 인간의 체질적 특징을 연구하는 체질인류학과 인간의 문화적 특징을 연구하는 문화인류학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고대의 유물과 유적을 통하여 연구하는 것이 고고학이고, 근대, 현대의 문화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 좁은 뜻의 문화인류학이다. 때로는 인간의 문화적 특징 중에서 언어를 연구하는 분야를 언어인류학이라고 분류한다. 

  • 체질인류학 : 인류의 기원과 진화, 다양성 (해부학분야에서 많이 다루어짐) 
  • 고고학 : 문화의 기원과 진화 (역사학과 다루어짐)
  • 언어인류학 : 언어의 본질, 발생과 변화 (외국어 연구에서 다루이짐)  
  • 문화인류학 : 문화의 복합성과 다양성

     문화인류학의 연구과제는 무엇인가?

문화인류학자들은 현지조사를 통하여 특정한 인간집단의 민족지를 기술하고, 문헌조사를 통해서 민족사를 재구성하며, 민족지와 민족사의 자료를 과학적으로 분류하고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현재와 과거의 세계 여러 민족과 문화를 비교 연구한다. 

문화인류학과의 중심과제는 문화의 개념과 변동을 포함하는 문화이론, 가족과 친족, 사회조직, 정치와 법, 종교, 인성, 언어, 예술, 문화와 환경의 관계 등을 포함한다. 


     현대사회에 대한 문화인류학의 공헌은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어떻게 환경에 적응하고, 무엇이 취약한지 이해하여 미래의 위협적 상황에 지혜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로 문화인류학은 문화상대주의입장에서 보다 관대한 태도로 갈등을 해소하는 데 공헌한다. 


    문화인류학의 진로 

여러 사회 또는 한 사회의 여러계층의 상이성의 이해를 필요하는 직업군에서 필요하다. 문화인류학도는 전문가로서 구비요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론 및 지역의 전문가여야 한다. 


   문화인류학의 방법 / 관점 

  • 총체론의 관점 : 인간을 연구하는 여러 가지 상이한 관점들을 통합시킨다. (사회학, 사회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등)
  • 문화상대론의 관점 : 어떤 사회의 문화라도 그 사회가 처해있는 특수한 관경과 상황이 있다. 
  • 비교론의 관점 : 문화들의 공분모(가족, 친족, 혼인, 정치, 법, 종교 등등)를 통해 문화를 비교한다.  
서론만 대충 훑어보았다. 
목차의 전개된 내용에서 제5장 혼인과 가족을 열어보았다. 
혼인에 대한 이론의 소개, 혼인의 규정, 혼인형태의 순으로 정리가 되어 있다.
인류의 공통적인 부분과 개별적인 부분을 확인하고 조사하는 과정 속에서 일상의 고정관념(의미)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것 같아 좋은 공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이 낯이 익다. 집 어딘가에 있을것은 같은데, 집에 없어서   

도서관에서 빌렸다. 너무 재미있어서, 만약 다시 뒤져서 없다면 살 것이다. 

츠바이크가 쓴 프로이트의 자서전격이다. 프로이트의 사상의 시대적 배경과 프로이트의 개인적인 초상 등,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좀 더 읽어봐야 하겠지만, 나는 아마 이책을 사게 되지 않을까. 

그의 삶의 리듬은 쉼없이 균일하고 끈기 있게 흘러가는 일의 리듬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었다. 75년 동안 한 주 한 주가 제한된 활동의 똑같은 순환주기를 명확히 보여주었으며, 하루하루가 다른 날과 쌍둥이처럼 비슷하게 지나갔다. 대학에 몸담은 시기에는 매주 한 번의 강의 와 매주 수요일 저녁 제자들과 했던 소크라테스 대화법에 따른 학술 심포지엄, 매주 토요일 오후의 카드놀이를 제외하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자정이 될 때까지 일분일초까지도 분석, 치료, 연구, 독서, 이론적 구성에 바쳤다.
이 무자비한 일정표는 빈칸을 알지못하고, 반백년의 길이로 팽팽히 당겨져 있는 프로이트의 하루는 비정신적인 것에 낭비되는 시간을 알지 못한다. 끊임없이 호라동한느 것은 언제나 운동 중인 그 두뇌에게는 심장이 혈액을 순환시키는 것만큼이나 당영한 일이다. 프로이트에게 일은 의지에 따른 활동이 아니라 철저히 본성적인 것, 끊임없이 솟아나는 기능처럼 보인다. - P67

40년 전부터 프로이트는 매일 여덟 건에에서 열 건, 이따금은 열한 건을 분석했다. 다시말해 매일 그 횟수만큼, 매번 한 시간 동안 전율을 일으킬 만한 극단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타인 속으로 집중해 들어가 모든 말에 귀 기울기고 숙고했다. 그러면서 절대 감퇴되지 ㅇ낳는 기억력으로 그런 정신분석에서 얻은 진술을 이전의 모든 진술과 동시에 비교했다. 다시 말해 그는 완전히 타인의 인격 안에 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심리진단을 위해 그것을 밖에서 관찰했다.
(중략)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실제로 영향을 미쳤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거대하고도 지속적인 작업은 반백 년 동안 조수없이, 비서없이, 조교없이 이루어졌다. 그는 모든 편지를 손수 쓰고, 모든 탐구를 혼자 마무리하고, 모든 작품을 혼자 구상했다. 엄청나게 균일한 이 창조적 힘은 겉보기에는 지루한 그의 생활뒤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저력을 보여준다. - P6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엘렌 식수 지음, 신해경 옮김 / 밤의책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쪼개서 읽고 있다. 한번 몰아쳐서 읽을 책이 아니다. 숨을 골라야만 한다. 

아직 읽는 중인데, 읽으면서 책의 내용과는 무관한 것들이 떠오른다. 

무의식을 건드리는 책인듯 싶다. 

우리에게 책은 우리를 꿈꾸고 기다리는 문, 우리에게서 달아나지 않는 타자의 꿈입니다. <<광택>>도 저를 그렇게 기다리고, 저는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 책은 제게 시간을 줍니다. 이것이 글쓰기의 수수께끼 중 하나입니다. 모든 책이 우리에게 시간을 주지는 않거든요. <<광택>>은 그 자체가 시간으로 새겨진 데다, 너무도 풍부하고, 두텁고, 손때 문ㄷ은 순수한 글 물질이기 때문에 시간을 줍니다. - P104

누가(무엇이) 우리를 신경쓰지 않는가/우리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클라리스 리스펙토르가 <사랑>이라는 글에서 얘기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
....눈먼 남자는 우리가 자신을 관찰하는 걸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관찰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살고, 욕망하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관찰되는 관찰자입니다. 하지만 관찰되는 대로, 보이는 대로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눈이 먼 채 껌을 씹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 P111

우리가 꿈의 학교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 도끼날을 다루고 받아내는 동시에 저의 얼굴과 다르지 않지만 적나라하게 보이는, 제 영혼의 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힘입니다. ‘신‘의 얼굴은 우리라는 구조물, 이 사소하고도 거대한 거짓말들, 친정 식구들을 먹일 만찬을 준비하고 자식들에게 저녁을 해주려면 끊임없이 짜내야 하는 사소한 비진실들의 정체를 밝히는, 혼비백산할 현시입니다. 놀람으로써만, 우연에서만, 그리고 산산이 깨부수는 잔인성을 동반하고서만 일어나는 폭로. 진실의 타격 밑에서 우리는 달걀 껍데기처럼 부서집니다. 삶의 경로 바로 한가운데에 나타나는 종말. 우리는 삶을 잃습니다. - P113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이 글쓰기의 정체입니다. 시작하기죠. 행동과 인내와 관련이 있습니다 꼭 목적지에 닿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글쓰기는 도착하기가 아니니까요. 대체로는 도착하지 않기입니다. 우리는 몸을, 걸어서 가야합니다. 우리는 자아를 버려야 합니다. 글을 쓰려면 우리는 얼마나 도착하지 않아야 할까요, 얼마나 멀리 방랑하며 신발을 닳게 하고 즐거워야 할까요? 우리는 밤만큼 멀리 걸어야 합니다. 각자의 밤만큼 멀리요. 자아를 뚫고 어둠을 향해 걸어야 합니다. - P116

작가들은 타자와 관계하는 순간 나타나는 불가항력적으로 위협적이고 또 위협받는 어떤 것, 우리가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것,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무슨짓을 하든 늘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을 폭로합니다. 예컨대, 진정한 인도주의적 봉사를 택한 저들이 다루는 것이 이 불가피하고 끔찍한 과오의 상황, 타인을 구함으로써 자신을 구할 기회가 상실된 상황입니다. 제게 중요한 작가들은 우리가 견딜수 없는 것을 어느정도까지 견뎌야 하는지 압니다. 우리가 이미 어떤 가족 대하소설에 얽혀 부정의 수혜자이거나 희생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족하지요. - P1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