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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라깡과 정신분석의 이면 SIC 시리즈 6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김종주 외 옮김 / 인간사랑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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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담화의 현대적 변화

 2022.9.23

 

   이번 발제를 끝으로 SiC 6 『자끄라깡과 정신분석의 이면』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라깡세미나17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채 읽어나가면서, 나의 한계와 욕심이 쟁투하는 시간이였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번역의 난해함으로 영어공부에 불을 지피게 만들었던 책이기도 하다. 발제까지 채 17시간도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더듬거려보자면, 저자 마리-엘렌 부르스는 이번 논문에서 현 시대에서 주인담론이 상상적, 상징적, 실재적 변화를 겪고 있다고 보고, 이에 따라 새로운 실재가 도입된다고 보았다. 임상치료 역시 구조적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현대사회는 ‘아버지의 이름’의 증발로 보편주의라는 주인이 들어섰다. 자끄 알랭밀레는 보편적인 주인이 나타남에 따라 분리(차별)된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보았으며, 한 가지 요소는 자폐적이고 격리된 주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은 쓰레기로 분류되는 대상들이다. 부르스는 이와 같은 상황이 현대의 임상진료의 구조적 좌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부르스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 

라깡은 1953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난해한 번역으로 영어 원서를 참조하여 다시 써보았다.

  “자기가 사는 시대의 주체성을 그 지평에서 대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분석실천을 포기하게 내버려둬도 됩니다. 상징계의 운동 속에서 자신을 그토록 많은 삶과 연결해주는 변증법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의 존재를 다른 삶들의 축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바벨의 활동이 끊임없는 시대이고, 그는 그 혼란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언어들의 투쟁 속에서 그의 임무가 해석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 역시 명확하게 다가 오지 않지만, 대략 라깡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분석가)가 사는 시대의 주체성의 지평과 대면하지 않고, 분석실천을 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라깡이 분석가를 위한 프로그램이 필수적이라고 보는데는 정신분석이 다른 사회적 관계들과 다를 지라도 우리시대의 모든 좌표들을 작동시키는 것이 분석가담화를 통해서라고 보기 때문인 듯 하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와서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독해를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사회의 변화 속에서 정신분석의 좌표들은 상상적, 상징적, 실재적”이기 때문에 분석가담화를 통해 한시대의 모든 좌표를 작동시키는 것이 사실이라고 본것이다. 시대에 대한 해석의 임무가 있다고 본 것이다. 기술, 경제, 정치적 변화들의 양적이고 질적인 결과들은 새로운 실재적인 것을 가지고 오는데, 이에 따라 임상진료는 구조적으로 변경되고 있으며, 만일 이러한 변화의 방향으로 정신분석이 계속 발전되어 간다면 주체의 원인은 그 변화의 기제들과 성패에 대한 하나의 분명한 시각이 필요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수정된 실재

   이러한 변화의 결과로 2차대전 이후 인간에 대한 새로운 치료가 등장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고취된 정치체제는 몰락했고, 경제체제의 전체주의적 지배는 신성시 되었다. 테러리즘으로 전쟁 개념의 수정과 종교적 원리주의 부상으로 정치적 영역이 수정되었다. 한편 기술분야는 과학담론의 헤게모니의 결과이다. 

실재는 명확하게 수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주의는 권력의 한 형태가 되었고, 과학이 그 자체의 영역밖에서는 신앙체계가 되었다.

경제, 정치, 기술적 변화들의 공통방향은 보편성이며, 그것은 자본주의와   단일시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기술적 혁명 역시 보편성의 전파를 목표로 한다. 특히 과학에서 그러하다. 현재는 더 이상 지역주의를 위하는 시기도 아니고 작은 집단을 위한 시기도 아니며 전제정치를 위한 시기도 아니다. 이 세계는 실재적인 것으로서 모두에게 동일한 진실을 강요하는 경향을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에 라깡은 「영국의 정신의학과 전쟁」이란 글에서 그 시대에 대해 기술했다.

첫째로 그는 정신분석가가 자신의 학문영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치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라깡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신분을 지지해주고 있던 영국에 경의를 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미래에 있어서 인간성에 대한 위험들이 개인들의 지나친 방종때문에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 전쟁이 충분히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최소한의 인정이란 원인 때문에 받아들이게 되는 죽음으로 인간들을 몰아가는 양심의 가장 무기력한 포기와 초자아의 어두운 힘이 합쳐진다는 것은 분명해지고, 또한 희생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반드시 영웅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전쟁이 인간의 방종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최소한의 인정 때문에 받아들인 죽음은 양심의 포기와 초자아의 어두운 힘이 합쳐진 결과라는 것이다. 희생은 개인의 영웅심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라고 본것이다. 테러리스트의 희생에는 그 어떤 영웅주의도 포함되지 않고 오히려 하늘에서 향락에 대한 내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깡은 동일한 텍스트에서  “금세기 정신에 작용하는 수단의 점진적인 발달로서 우리 자신의 판단과 우리의 해결책 및 우리의 도덕적 통일성에 반대하여 이미 성공적으로 작용해왔던 이미지들과 열정들의 합의된 조작은 권력의 새로운 남용을 초래하게 될 것” 이라고 썼다.  

권력남용의 새로운 형태란 무엇인가?

모든 보편자들의 부상은 윤리의 영역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정신분석영역에서 새로운 권력의 남용이란 자끄알랭 밀레르와 에릭로랑이 분석했던 과학의 진보에 연결된 윤리위원회의 급작스런 출현과, 법에 대한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의 의존은 그 답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의 특이성은 윤리와 판단의 영역에 위치해 있지 법과 제도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윤리에 대한 포기를 암시의 포기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정신분석가는 모든 사회적 판단과 도덕의 판단을 포기했다. 또한 주체의 증상이 자신의 말에 의한 치료 중에 구성된다는 사실에 의해 그것을 스스로 증상을 규정한다면, 분석가는 환자의 삶의 선택이 아닌 치료를 지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깡이 보여줬던 것처럼 정신분석 그 자체는 과학담론의 결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다시말해, 생물학에 의해 히스테리 환자들에게 날조자란 딱지를 붙였던 과학적 의학의 발전 없이는 프로이트는 무의식적인 현상들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과학의 발전에 의해 태어났지만, 과학이 포기했던 것을 치료한다. 정신분석은 보편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윤리를 통해 합리적인 방식으로 치료하고 있고, 무의식적 욕망을 통해 초자아의 어두운 힘과 양심의 포기를 전복시키는 일을 한다.

 치료적인 것, 현대의 보편자The Therapeutic, a Contemporary Universal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임상적인 실재를 결정하는 보편자로부터 무엇이 제외되고 있을까? 그 이름을 붙여 보면 그것은 치료적인 것이다. 사실상 가장 예외적인 것으로부터 가장 보편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인간적인 현상들도 치료적인 돌봄의 잠재적 목표가 되어왔다. 프로이트는 『문명과 그 불만』에서 이렇게 썼다. “ [윤리는] 사실상 모든 문명에서 가장 아픈 곳으로 쉽게 인식될 수 있는 그런 주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윤리는 치료적인 시도로 간주되는 것이고 그 어떤 다른 문화 활동들에 의해서도 성취된 적이 없다. .”

 

   법적이고 국가적 수준의 발전은 서양사회에서 치료적인 시각이 프로이트가 말했던 “가장 아픈 곳(트라우마)”의 관리에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시각을 대체해버린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정신질환의 범주가 붕괴되고 위험에 처하게 된다. 만일 주체가 언제나 자신의 욕망에 내기를 걸고, 만일 주체의 충족방식이 언제나 흔들린다면, 그녀는 치료가 필요할 텐데, 그렇다면 사람들은 질환의 영역, 특히 정신질환의 영역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잘-클로드 말발은 『정신질환의 진단과 통계편람 DSM』 의 여러 판본에서 정신적인 문제들의 범주가 급증하는 것을 지적했다.

 두가지를 주목해야한다.

 첫째, 과학적인 의학의 성공은 치료와 돌봄과 치유를 보편적 가치의 수준으로까지 진척시켜주었다. 우리는 알약과 외과수술을 통해 행복을 믿기 시작했다.

 둘째로 의학이 과학적일 때 그 개입 영역의 윤곽을 정확히 그려내게 된다. 따라서 꽤나 많은 인간의 행위들이 엄격한 과학적 개입영역으로부터 제외되었다. 그러나 치료적인 것을 보편적 가치로 변형시키면, 치료적 행위들이 전통적으로 그것들을 관리하고 통제했던 영역들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된다.  이런 이중적인 움직임의 결과는 치료적인 것이 의학과 질환의 영역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자끄 알렝밀레는 우리 사회가 안전을 위해 의존하고 있는 동정심의 쿠션을 정신치료들이 만들어 준다고 지적했다. 달리 말해서 치료적인 시각은 현대적인 주임담론을 제공한다.

 담론 수학소의 저주 The Fulcrum of the Matheme of Discourses

  주인담론은 행위자의 위치에서 명령하는 시니피앙을 내놓는다. 주인기표는 S1로 쓴다. 그것이 시간에 따라 변하고 사회적 구성의 형태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사회의 경제적인 모델로서 자본주의 헤게모니가 출현한 이래로 우리의 가설은 이 S1이 “시장”, 더욱 정확히 “공동시장”이라고 생각했다. 세계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의 공동시장, 세계화라는 현실이 되었다. 생산물의 이윤과 순환을 중단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인 시니피앙에 상응하는 것으로 라깡이 S2라고 썼던 지식은 무엇인가? 하나의 가설로서 그것이 전문적인 문헌에서 “절차”나 “프로토콜”이라 부르는 것이란 사실을 들어보자. 석기시대 도구가 정밀기기에 비교되는 것처럼, 그 기법은 절차와 프로토콜에 비유된다. 질적인 조사 프로토콜과 양적인 조사 프로토콜을 통하여 예상된 기능방식은 그 행위자로부터 분리되고 보편적 절차의 형태로 재투입되어 무료로 획득한 지식을 생성하게 된다. 이런 보편적 절차는 시장관리, 즉 이 세계의 관리를 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모든 인간 활동은 최소비용과 최대수익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 그에 따라 S2는 시장관리에 상응하는 지식이 된다.

 S1과 S2는 현대적인 주인의 구조 전체를 구성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현대적인 주인은 보편적으로 됨으로써 위계를 버렸다. 그는 과학 지식의 보편성을 믿게 되는데, 그는 실재계와 맺는 관계와는 다르다.

전체주의적 주인은 최고의 아버지 모델 된다. 즉 그는 권력의 수직구조에 기초하고 제재에 기초하는 가부장적 주인이 된다. 현대의 주인은 세계화된 시장의 논리와 절차로부터 나오고 따라서 그 구조는 수평적이다. 그 결과 초래된 통제는 공산사회적이거나 협동조합적인 상호간의 기능에서 나온다

현대적인 주인은 이런 조건하에서 어떻게 권력을 행사할까? 현대적 주인의 통제는 '공산사회적이거나 협동조합적인 상호간의 기능'에서 나온다. 이라크에서의 전쟁이 시대에 뒤져 있음을 보여줬던 기록과 사찰을 대신하여, 자끄알랭밀레가 최근에 언급했던 것처럼, 협동조합과 같은 주인이라는 평가는 그 어떤 상위의 위계질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마치 진단이 이상적으로 DSM을 사용하여 내려질 수 있었던 것처럼 이상적으로 기계에 의해 행해질 수있었다. 평가를 위한 적절한 편람의 도움으로 개인들은 동료들의 지도 아래 그들 자신의 진단을 내릴 수 있다.

밀레가 지적했듯이 이런 상황은 현대적인 임상진료를 완전히 바꿔 놓는다.

  한 시대의 임상은 그 시대의 주인담론에 상응한다. 주인 담론의 변화는 부명이 시장으로 옮겨가는 통로를 거쳐 말하는 존재들의 향락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변화하는데 , 그 변화는 전이의 양상을 변경 시킬 뿐만 아니라 주체의 증상도 변경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S1로서 부명에 상응하는 감시와 처벌의 기능은 이제 평가와 절차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며, 이젠 더 이상 금지와 분류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 수학소의 가로줄 아래에 무엇이 위차하게 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주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리의 가설은 현대성의 주체에게 모델이 되는 것은 어떤 유통형태들에 의해 위치가 배정되는 어떤 시스템 속의 주체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모든 사람과 각각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기술적인 것 외에는 한계가 없다. 따라서 그는 쓸데없는 잡담과 지식의 즉각적으로 접근 가능한 특수한 상징적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더욱 적어진다. 이렇게 해서 빗금친 주체는 향락의 새로운 방식에 상응한다.

라깡은 1968년 파리프로이트학파 학술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대에서 아버지의 증발로 남겨진 흔적, 상흔은 우리가 분리라는 일반적인 표지 아래 둘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편주의라는 우리 문명의 그 소통이 인간들 간의 관계를 균질화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반대로 나는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것이 모든 수준에서 교차점을 만들어내고 장벽들을 크게 증가시키는 분파되고 강화되니 분할이 있다고 믿습니다. "
그의 충족 체제가 되는 분할은 어떤 체계 내의 주체와 상응한다.
한편으로 <연결된> 주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론 생산물로 환원된 말하는 존재가 있다.
  라깡은 1967년 10월 9일 동일한 생각을 또 표명한다.   “우리가 경악스럽게도 출현함을 봤던 것은 과학에 의해 사회집단의 재구성의 결과 출현함을 봤던 것은 과학에 의해 사회집단의 재구성의 결과로서 또한 그것이 소개하는 보편성의 결과로서 발전해가고 있는 것에 대한 선도자의 반응을 나타낸다는 말로서 요약하려고 합니다.
공동시장으로서 우리의 미래는 분리과정들의 더욱 가혹한 확장에서 그것의 평형상태를 찾으려고 합니다. ”

이제 더 이상 S1이 부명과 관련되지 않는 주인담론의 새로운 양상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향락은 분리와 관련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의 주인에게 공식의 적용을 우리가 제안하는 가설은 다음과 같다. 위에는 과학에 의해 인간적인 현상들의 재구성에 틀림없이 관련되기 마련인 두가지 요소들이 있다.

 아래에는 분리에 틀림없이 관련되는 두 가지 요소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밀레르의 공식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자폐적 주체, 또한 가상적이고 격리된 주체와 그에게 향락의 존재를 부여해주는 대상들인데, 그 대상이란 쓰레기가 될 것으로 예정된 대상들이다. 그 결과는 공동체들의 증식으로서, 게이와 레즈비언, 흑인,라틴계 사람들, 와스프, AA, NA 기타 등등인데, 그들 각자는 그 나름의 대상들과 함께 한다. 그와 같은 것들이 현대의 임상진료의 구조적 좌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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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과 타자성 - 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
로렌초 키에자 지음, 이성민 옮김 / 난장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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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9-10P 

2.

 주체성과 타자성은 여전히 내가 라깡과 그 너머에 대해 행하고 있는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따. 돌이켜 보면 애초 해석적 차원에서 전개한 이 책의 세 가지 상호연관된 쟁점이 내게는 특히 주목할만한 것으로 다가온다. 욕망의 변즈업을 통한 초월론적인 것의 사후 발생, 기표의 물질성, 빗금쳐진 실재로서의 죽지는-않은 것. 

 당연히  이책은 이 모든 물음이 수렴되는 교차점인 듯한 욕망과 충동의 분리불가능성을 주장한다. 라깡, 그리고 라깡에게 고무된 사유로부터 '초월론적 유물론'을 끌어내려한 용감한 시도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틀거렸다. 이른바 욕망에 대한 충동이 그 어떤 우선성도 유물론적인 의제를 손상시킬 수 밖에 없다. 셸링에 대한 반-관념론적 독해에 기반한 이론으로는 라깡의 진정한 유물론을 정당하게 대우할 수 없다. 언젠가 본인 스스로도 언급했듯이 라깡만이 철학에 공헌한 혁신이 있다면,

 

"기표, 그것은 언어안에서 스스로를 초월하는 물질이다. "

라는 언어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이다. 달리 말해서 이른바 죽지는-않은 자연 자체( 그 불균형한 무근거성에서 실재의 원초적 근거를 구성할 셸링 식의 절대자)의 잠재성에서 곧바로 충동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이런 입장은 후자가 인간의 로고스가 지닌 잠재성의 사후 효과를 통해서만 하나의 잠재성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욕망과 (궁극적으로 언제나 죽음충동인) 충동은 서로 관계하는가?

 이 책은 욕망이란 상징적 질서 속의 실재적 결여인 "무에 대한 욕망"이라는 관념, 즉 욕망이란 상징적 가능성과 그 외연이 똑같은 무에 대한 욕망이라는 관념에 자주 기댄다. 죽음충동도 이와 똑같은 실재적 결여를 마주한다. 스스로 되돌아가려고 열망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죽지는- 않은 실재의 잔여물로서 말이다. 이런 조건은 환상 속에서 욕망을 지탱하는 끈질긴 반복과 등가적이다. 

세미나5권에서 라깡이 말했듯이 충동은 욕망에 주어지는 전문용어이다.... 말이 욕망을 고립, 파편화시키며, 욕망으로 하여금 그 목적과 비절합적 문제적 관계를 맺도록 하는 한 말이다. 
  이 책에는 이질적이만 그 이론적 틀을 충실히 보존한는 용어법을 채택해 본다면 욕망과 충동의 정확한 중첩은 다음과 같은 또 다른 방법으로도 정식화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욕망이 일관적인 '상징의 세계'(인간의 유사-환경으로서의 언어)에 내속적인 존재론적 비일관성의  둘레를 선회한다면, 충동은 선-상징적 실재(즉, 죽지는 -않은 자연)의 선-존재론적인 순수 비일관성과 연계된다고 말이다. 그것도 단, 존재론적 비일관성을 통해서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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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의 사랑에 관한 정의 중 "사랑은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 의 의미를 비로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해석이 완전히 들어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의한다. 

사랑받는 자에서 사랑하는 자로의 전환이 라깡의 이 문장에 숨겨져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때 왜 그를 사랑하는지 알지못한다. 그 사랑은 자신의 결여 때문이고, 그 결여를 사랑받는 자가 채워줄 것 같은 것 때문에 욕망하게 된다. 그것은 상대방의 결여를 자신의 결여로 포개는 경우도 마찬가지 일 듯하다. 왜 사랑받는지 영문을 알지 못하는 자는 마침내, 사랑을 되돌려주는 방식으로 이 곤궁을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는 상대방이 생각한 그 불일치의 결여, 즉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준다. 그것은 환상의 응답이기도 할 것 이다. 

라캉에게 있어서 사랑의 가장 숭고한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사랑의 은유를 실연할 때, 즉 그가 사랑받는 대상의 자리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로 대체하고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가 행했던 거과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하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요켠대 그 순간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제공함으로써 사랑을 되돌려줄 때 발생한다. 사랑하는 것은, 즉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는 누구이며 사랑받는 자는 누구인가? - P55

사랑하는 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그는 결여의 주체이며, 욕망하는 주체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타자의 눈에 그를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가 가진 그 무엇, 그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다. 사랑받는 자가 가진 그 무엇은 여하간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라캉의 말처럼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가 생겨나는 것이다. - P56

사랑하는 자는 사랑받는 자 안에서 무언가를 보며, 그 사람으로부터 무언가를 원한다. 반면에 사랑받는 자는 자기 안에서 타자가 보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못한다. 그는 자신을 타자의 눈에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사랑받는자가 이러한 곤궁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길은 사랑을 되돌려 주는 것이다. 즉, 사랑하는 자의 위치를 떠맡고, 그리하여 욕망하는 주체, 결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의 결여를 기증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을 제공하는 것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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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끝나지 않은 혁명 엑스쿨투라 5
알랭 바디우 &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지음, 현성환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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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깡과 정치

 

무능에서 불가능으로

 

바디우는 정신분석에서 치료란 하나의 형식을 전제하는 동시에 그것을 가로지르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그 하나의 형식은 무의식의 객관적인 구조이며, ‘치료란 그 구조들의 연관되면서 그것을 재단하고 조각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무의식의 객관적인 구조란 무의식이 언어로 구조되어있다는 전제 아래 분석주체의 구조를 시니피앙의 분석과정으로 생각된다. 무의식의 분석은 일반적인 치료의 목표인 회복은 아니다. 바디우는 분석의 목표가 주체가 다시 스스로를 일으켜서 새로이 살 수 있는 실재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분석과정을 통해 상징계와 상상계의 직조된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 역시 대타자의 욕망의 산물임을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가로 지르는 행위에 해당이 될 것이다.

 

라깡은 치료의 목적이 무능을 불가능한 것으로까지 들어올리는 일 이라고 말한다. 바디우는 정신분석은 분석수행자의 무기력을 실재(불가능)로 들어올리는 일이며, 이것을 통해 무능이 타개 될 수 있다고 보았다.

, 상상계의 함정에 빠진 주체가 스스로 상징화의 능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정신분석이 실재의 지점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철학적 측면에서도 이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보았다. 치료행위는 무의식의 구조(형식)을 가로지르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이 형식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실재와의 만남을 이론화 하려면 그 형식적 문맥에 연결시켜야 한다. 바디우가 형식적 문맥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를 내담자의 구성한 자신의 무의식의 논리구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라깡은 과학주의, 몽매주의라는 두 가지 암초를 피해가며 치료에서 하나의 단절을 상정한다. 이 단절은 무의식의 합리적 형식들에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바디우는 있는 것의 형식과 이 형식과 결별하는 것이 병존하는 지점(‘실재와의 접점’), 즉 형식들의 문맥 속에서 실질적 단절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데 알맞은 형식주의에 대한 연구를 한다. 그것은 결정론이나 새로운 종교적 지평이 아닌 예측할 수 없는 실재- 사건-을 인정하는 하나의 철저한 유물론이다.

 

있는 것의 형식과 결별이란 무엇인가. 이 것은 비존재, 우리가 대상으로 현시화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를 조우하는 지점이 바디우가 이 형식과 결별이 병존하는 지점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지점, 형식들의 포함될 수 없는 지점을 사유할 수 있는 형식주의를 그는 연구하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을 철저한 유물론자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정신분석을 받을 필요는 없다.

 

바디우는 치료를 받은 적이 없다. 그는 정치적 행동과 사랑을 통한 발견, 연극적이고 소설적인 글쓰기, 수학적 형식주의 취향의 경유가 결국 철학 안으로 모아져, 분석으로 이 경험들을 중복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석이 바디우가 말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을까? 전이를 통한 자신의 반복적 사랑의 패턴 발견, 그리고 연극적 글쓰기, 시니피앙의 발견 속에서 형식(구조)에 대한 사유 그리고 개인분석이 정치적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 등은 바디우가 언명한 실천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바디우는 어쨌든 일관된 정치적 논리에 참여하고, 다양한 철학적 상징화를 활성화하며, 실존 속에서 특히 행복했던 저는 치료없이 온전히 지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반면 루디네스코는 교육분석으로서 정신분석을 받았으며, ‘자기 횡단을 통한 정치적 참여의 명석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정신분석을 경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다면 정신분석이 굳이 필요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아니에르노의 소설을 몇 권을 읽었다. 최근 노벨상으로 더욱 유명한 작품 단순한 열정을 보고 그녀는 정신분석이 필요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스테리의 극단이 그녀를 독창적 글쓰기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고통이라 쓰고 주이상스라 읽혀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두가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신분석적 담화, 즉 상징계의 노후성을 각자가 깨닫는다면, 어쩌면 언어의 의한 우리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겠는가?

 

 

불가능성의 가능성

 

라깡은 정치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않는 것으로 정치활동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실제 라깡은 자신의 가르침이 어떤 형태로든 이데올로기적으로 또는 당파적으로 재활용되는 일을 금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디우에 따르면 라깡의 사유는 정치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바디우는 라깡의 정신분석이 의미심장한 정치적 문맥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주체의 애초의 무능력한 상태와 관련하여 주체의 어떤 확충을 겨냥하는 치료의 깊은 의미를 재발견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바디우는 이것을 집단적 차원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정치의 장이란 어떤 결정된 상황이 불가능하게 막고 있는 삶의 가능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상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깡의 치료는 그 본래의 실행에서는 탈정치적이지만, 사유에 있어서는 일종의 정치적 모태를 제안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라깡의 사유와 혁명적 유형의 행동방식 사이에서 어떤 연속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는 혁명적 유형의 행동방식이란 국가적 억압에 의해 봉쇄된 집단의 개방성을 다시 가동시키는 것이라 본 것이다. 정신분석이 억압에 의한 개인의 유한성을 무의식에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

 

라깡은 프로이트를 마르크스에 견주고, 자신은 레닌에 견주었다. 라깡은 정신분석학의 레닌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레닌은 어떤 인물인가? 프로이트는 의학의 치유논리, 마르크스는 코뮌주의를 약속하는 입장에 있으나, 레닌은 코뮌주의에 대한 약속이 아닌 결단하고, 행동하고, 조직하는 입장에 있다.

라깡은 정신분석을 사회적응의 시각으로 보는 것에 완강히 반대한다. 라깡에게 정신분석의 관건은 더욱 근원적인데, 그것은 정치와 상관없이 보이지만, 실은 해방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라깡의 사유는 68혁명과 1980년대 사이에 젊은이들을 총궐기하게 만들었던 추동적 요인들 중 하나였다.

바디우는 68혁명에서 급진좌파가 나타나는데 라깡의 사유가 주요하였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루디네스코는 라깡에게 68혁명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운동이였다고 보았다. 그녀는 그것은 일반화된 해방 의지가 아니라, 반대로 좀 더 잔인한 노예상태에 대한 저항자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한 것이었죠.” 말한다.

라깡혁명은 항상 자기가 제거한 지배자보다 더 포악한 지배자를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루디네스코는 이는 학생들의 시위가 대학에서 과거의 스승(주인)의 기능을 제거하고 이를 의사소통과 교육관계라는 이상에 기초한 폭군적 체계로 대체되는 것과 같이, 폭력적 혁명이 대학에서 테크노크라트들이 지식인들을 대체하게 된 핵심적인 단계 중 하나 였다는 것이 오늘 날에 더욱 분명해 보인다고 말한다.

 

 

라깡의 정치적 입장

 

1969년 파리8대학에서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혁명가로서 여러분들의 갈망하는 것은 바로 주인입니다.”

 

라깡의 이같은 선언은 바디우에게도 삼키기 힘든 쓴잔 이였다.

혁명가로서 여러분들이 열망하는 것은 스승(주인)입니다. 여러분은 스승(주인)을 얻게 될 것입니다. ... 나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반진보주의자인 한에서만 자유주의자입니다. 다소 예외적인 것은 내가 진보적이라 불리운 운동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라깡은 정신분석적 담론이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지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도록 한다고 보았으며, 정신분석의 과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진보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라깡은 태도는 정신분석담론이야 말로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담론을 제공한다고 본 것이다. 비록 라깡이 투쟁적 사회참여를 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시사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였다. 라깡의 행보는 프랑스의 문화적 삶에 나타난 본질적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했다. 라깡은 극단주의로 빠져드는 것을 막았으며, 그는 테러리즘의 진정한 방어막이자, 상징적 울타리가 되었다. “그는 오로지 정신분석 실천에만 투신함으로써, 또 실제로 그것이 정치적으로 재활용되는 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함으로써, 그러한 열망을 무화시켰다.” 그러나 일부 마오주의자들이 라깡을 내세우기도 했다. 1960년대 라깡주의에 경도되었던 젊은 지식인들이 왜 1970년대 마오주의자가 되었는가? 바디우는 라깡의 주체개념 때문이라고 보았다.

자기의 욕망을 양보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라깡으로부터 반항하는 것이 옳다라고 말하는 마오로의 이행은 당연한 일이였던 것이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혁명적 지도자가 아니라 영국의 정치모델과 비슷한 입헌 군주와 같다고 보았다. 라깡은 학생들에게 어떤 전이적 지배를 행사하였으나, 라깡은 그의 추종자보다 자신에게 매혹되지 않는 이들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녀는 라깡이 급진적인 점은 인간들 사이의 교환에 대해 어두운 전망을 가졌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깡의 치료라는 토대 위에 어떻게 혁명적 정치를 세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그녀는 말한다. 라깡은 전통적 의미의 진보주의자가 아니며, 그렇다고 반동적인 사상가도 아니다.

 

라깡은 정치적 활동에 투신한 것은 아니며, 자신의 사유의 정치적으로 활용되는 것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담론은 혁명의 추동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라깡은 혁명에 숨어있는 새로운 주인을 거부함으로써 전통적 진보주의자에 속하지 않으나, 그 누구보다 급진적이라 생각된다. 정치적 활동이 상상계적 관계라면, 라깡은 대타자와 우리사이의 정치적 관계에 보다 관심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라깡은 진보주의자 인가, 보수주의자 인가?

 

몇몇 정신분석가들은 라깡에 기대면서 동성애들의 결혼과 그들의 아이 입양에 반대했다. 그러한 조치들이 아버지의 상징적 기능을 뒤흔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라깡은 동성애자 성향을 바꾸려 하지 않았고, 또 동성애자가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그들을 정신분석계에 받아들였다. 라깡은 성적차이를 생물학적 결정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늘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깡이 1938년에 쓴 글인 가족 콤플렉스에서 라깡은 정신분석의 탄생을 아버지의 권위의 쇠퇴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그는 아버지의 추락한 형상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가부장적 전능의 복원을 호소한 것은 아니다. 루디네스코는 정치적 측면에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라깡을 계몽적 보수주의로 보았다.

바디우는 라깡의 타고난 재능 중 하나는 그 사유의 구성적 모호함에 있다고 보았다. 그 모호함이란 보수적인 측면과 극단적 급진성들의 요소들의 공존이기도 하다. 바디우는 인간동물의 변하지 않는 토양인 언어라는 토대는 태고의 법처럼 시니피앙이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조직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이러한 토대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새로운 것을 창안할 수 있다고 보았다.


라깡에게서 법은 항상 언어와 욕망의 관계 안에서 이해된다. 인간의 욕망은 무제한적일 수 없는데, 항상 타자의 욕망과 부딪히기 때문이다. 법이 이 충돌에서 생겨난다면 그것은 성서의 십계처럼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언어적 분절이 규정하는 금지에 따라 우리의 욕망이 조직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언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관통한다고 볼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 상징계 진입 이전 유아의 욕망은 어머니의 욕망에 함입되어 있다가 아버지가 상징하는 타자의 욕망에 진입함으로써 어머니의 욕망을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조직할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렇듯 주체는 시작도 끝도 모를, 언어와 욕망의 태곳적 부터의 얽힘에 내던져짐으로써 탄생한다. 라깡은 아버지가 영속적으로 법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죽음을 통해서뿐이라고 생각했다. 법에 시니피앙을 부여하는 것은 살아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바디우는 우리가 법과 아버지의 상징적 규정만을 고려한다면, 사실상 라깡을 반동주의자로 만드는 셈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우리가 무의식의 구조들에 사로잡혀 있긴 해도 자신의 욕망에서 물러서지 않는 지점을 도달한 주체의 경험에 방점을 찍는다며, 라깡은 해방의 사상가로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디우는 이어 말한다. “ 사회 전체의 느닷없는 혁명이라는 관념은 의미가 없어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깡이 총체적 혁명이나 위대한 저녁(기존 권력이 전복되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수립되는 혁명의 날을 가리킨다) 을 믿지 않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옳은 일이죠. 그렇지만 그는 주체의 실천적 해방을 독단적으로 폐기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우리는 라깡이 'Le nom-du-pere'’les non-dupes errent(속지 않는 자들은 헤맨다)‘라는 경구로 다시 표현했다는 것을 압니다. 속지 않는 자들이란 사태의 부정적 핵심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해방의 가능성을 냉소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들이죠.”

 

바디우에게 속지 않는 자들은 해방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자들 이다. 이에 대한 속지 않은 자들에 대한 맹정현의 해석은 정신분석의 목표는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극복은 단순히 욕망에 불과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욕망이 이미 죽어 있는 아버지에게 계속해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있다. 이러한 작업은 아버지를 경유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오이디푸스를 넘어서는 것은 오이디푸스를 비켜가는 문제가 아니라 거쳐가는 문제라 할 수있다. 속지 않는 자들은 방황한다는 라깡의 말은 속아주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백상현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말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의 마음의 방황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보았다. 개인의 차원에서건 공동체의 차원에서건 상실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 주체는 고정관념에 의존하여 상처의 봉합을 시도한다. 이때 봉합에 참여하는 고정관념의 권위는 애도작업의 핵심이다. 라깡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말하는 상징계의 권력은 말의 세계에 속한 인간을 굴복시키고, 말의 질서에 동의 하도록 만들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힘이다. 만일 이 같은 아버지의 이름에 속지 않는자들이 출현한다면 그들에게 방황은 필연적이다.

 

무엇에 속지 않는 자들인가? 아버지의 이름인가? 혁명인가? 에 따라 다른 해석으로 볼 수 있는 것 같다. ‘아버지의 이름에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해방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자 만이 헤맨다둘 중에 어떤 해석이 맞는지는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듯 하다. 아니면 번역의 문제인지.. 같이 논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듯 싶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이성과 현대성의 이면을 끊임없이 폭로하는 음울한 계몽의 사상가라고 표현한다. “그는 무한한 진보와 모두를 위한 행복이라는 이념을 믿지 않아요...그 변형인 공동체주의, 광적 개인주의, 그리고 특히 선동에 좌우되는 대중의 어리석음, 여론의 지배 말입니다.”

 라깡은 현재에 좌파와 우파 이 진영 간의 싸움속에 숨겨진 우리의 마음 속에 또 다른 주인을 열망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예견한 것이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의 토크빌적 측면에 대해 간단히 말하면 노쇠한 유럽, 빈의 유대인인 프로이트와 달리 라깡은 그의 전거들은 18세기 프랑스와 바로크적 가톨릭 문화, 독일철학, 20세기의 문학적 현대성, 형식 논리, 구조주의와 말라르메의 시에서 가져오고 있다고 말한다. 열거한 부분에 대한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 말라르메의 시를 옮겨 본다.

 

바디우 역시 그가 예언자임을 오늘 날의 이 일그러진 세계 이전의 인물이라고 평한다. 현재의 자본주의와 야만적 세계화, 한계를 모르는 금융화, 보편화된 신보수주의의 세계로 변화하는 시점인 1980년대 초에 사망하였다는 것은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라깡의 사유가 가장 긴요한 영역과 주제는 무엇일까?

 

루디네스코는 21세기는 이제부터 라깡의 세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서 보이는 일탈들은 이미 라깡이 예견한 것들이고, 우리는 라깡의 사유를 통해 그것들과 투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깡은 물론 자신의 쾌락을 쫓는 사람이였지만, 욕망의 진리에 대한 추구를 환상으로 대체하는 맹목적 쾌락주의를 권하지는 않았으며, 타자성을 부인하면서 자기정체성을 추구하는 정신적 퇴행의 모든 형태에 맞섰다. 또한 그는 인간을 자연성으로, 생물학적 존재로, 신체와 뇌로 환원하는 행동주의와 인지주의에도 반대했다. ‘주체와 시니피앙(언어, )이론을 통해서 라깡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에 있는 필연적 간극을 유지했다고 보았다. 루디네스코는 인간에게서 언어와 심리적 주체성이라는 특성을 은폐한다면, 우리가 언제든 파시즘적 과학주의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신경세포(뉴런)를 면밀히 조사하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약을 처방하여 고통을 다룰 수 있다는 믿는 세계에서 주체는 어디있는지 묻는다. 주체는 조롱당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뿐이라는 것이다.

 

바디우 역시 라깡이 인지행동요법을 비난했을 것이라 말한다. 증상을 의학으로 해결하고 주체를 심리학으로 다루는 현재에 대해 라깡은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에 전능 역시 비난 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바디우는 우리시대의 의미의 평준화, 겉치레의 만연, 물신화우리를 엄습하는 비통한 어리석음에 대해 라깡이 중요한 치유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코뮌주의의 가동

 

바디우는 코뮌주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속지 않는 자들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코뮌주의는 유토피아의 정반대이고,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실재가 갖는 진정한 이름입니다. 코뮌주의를 또는 해방적 예외들이 지닐 수 있는 다른 모든 이름을 양보하는 일은 진정한 정치적 욕망의 모든 형태를 양보하는 겁니다.” 바디우는 실제로 계몽적 보수주의자 였던 라깡은 양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거라 말하지만, 그렇더라도 라깡은 현 세계의 비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보았다. 바디우는 알다시피 공산주의자이다. 공산주의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코뮌주의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이고 실재라면, 또한 진정한 해방이라면 도대체 어떤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

바디우와 루디네스코의 대담을 통해 라깡의 정치적 입장과 그의 사유가 미친영향과 21세기에 왜 라깡이 필요한가에 대한 의견들을 살펴보았다. 라깡 자신이 정치적 입장은 진보나 보수가 아니였고, 어떤 정치활동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루디네스코는 라깡이 계몽적 보수주의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바디우는 그는 진보와 혁명이라는 운동 속에 숨어있는 대중의 바람인 새로운 주인에 대한 열망을 읽어낸 측면에서 그의 급진성이 보았다고 생각한다. 라깡이 우리시대에 다시 프로이트가 부활한 것 처럼 다시 부활한다면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일까. 우리사회의 실재라는 불가능성을 접접에서 가능성을 보게되는 사회적 담론의 발명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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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신체와 언어사이의 간극

아니 에르노의 글은 현학적이지 않으며 단순 명료한 문체로 빠르게 읽힌다. 그러나 왠지 평범한 문장들이 서늘하다. 뜨거운 욕망을 서늘하게 적어 내려가는 것은 어떤 삶의 태도처럼 느껴진다. 작가의 글은‘욕망의 정확함’과‘무서운 솔직함’을 드러낸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가의 문체는 은유나 비유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통에 대한 수사, 연민 같은 감정이 넘치지 않는다. 그녀의 페르소나였던 글은 그녀 자신과 섞여버렸다. 그녀의 소설 속 내용이 충격적이라기 보다 그 내용을 말하는 말투가 특별하게 여겨진다. 고통스럽다고 말하지만, 너무나 덤덤하게 얘기한 나머지 먼 과거에 있던 일처럼 느껴지는데, 소설 속의 그녀에게는 그 일은 바로 오늘 일어난, 방금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단순한 열정』보다 나는 『탐닉』이 더 좋았다.

 나 자신의 인류학자

 그녀가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유명해진 말은 “그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이다. 아니 에르노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모든 경험속에서 '의미'를 추구하기보다 '자신의 욕망'을 주시한다. 자신이 S를 얼마나 욕망하는지, 사랑의 진실 같은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그녀는 의미를 찾지 않고, 그를 욕망하고 사랑하고 기다리고 두려워하는 그녀의 '시간'을 그린다. 시간 속에남겨진 것은 '글쓰기에 용해된 욕망'이다. 단순히 고통을 씀으로써 고통을 완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스스로의 욕망을, 고통을, 쾌락을 정확하게 포착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소유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와 언어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분열이 존재한다. 인간은 언어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적확하게 표현하고자 하지만, 언제나, 어쩐지 우리는 글과 동떨어져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이 계속 쓰게 만든다. 그녀의 경험들은 그녀가 글을 씀으로해서 '거리'를 생산한 것이다. 그 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자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거리이다.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며, 내 육체와 감각과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 『사건』

 우리는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면, 타자의 생각, 관념 그대로 자신의 경험이 복기 될 뿐이다. 어제의 나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읽어주는 대로의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언어로 복기하면서 자신에게 붙어있는 세상의 고정관념들을 파괴하고 자신의 문체로 말하기를 시도함으로써 그녀는 다시 ‘아니에르노라는 새로운 보편’을 만든다.

 “현실을 추적하는 대신 현실을 생산하고자 하는 옛날이야기는 꾸며내지 말 것. 추억 속의 이미지를 거론하여 번역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 이미지를 다양한 접근 방식을 통해 스스로 속살을 드러내는 자료로 취급할 것. 다시 말해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 - 『부끄러움』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깡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한다. 이 타자는 실제적인 눈앞의 타자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의 방향성이다. 모두가 원하는 그것, 이데올로기, 자본, 성공 등 우리의 욕망은 타자들의 욕망과 같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 욕망들을 기술함으로써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빠져나가 자신의 욕망을 발명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굶주린 여인

 『탐닉』은 13세 연하의 유부남과의 사랑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는 세계적 주목을 받는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로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였다면, 그리고 끔찍하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 넋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듯 했다. " -탐닉 11P-

 우리는 책을 읽으며 그녀의 광기를 체험한다. 고통과 쾌락의 혼종인 주이상스를 탐닉하는 그녀는 많은 시간을 그를 기다리거나, 그와의 격정의 경험을 떠올리거나, 그를 상실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들로 채운다. 그녀는 욕망의 시작되면 곧 빠져들 고통에 대해서도 마치 즐기는 듯하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충격적인 것은 그녀의 글 어디에서도 수치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연하를 만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 연하를 짝사랑하고 있다면 묘한 수치감이 들 것 같다. 그녀는 그녀가 작가이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사랑할 수도 있다는 점이 어쩌면 수치스러울 수 있는 사실을 적는다. 그녀는 수치심마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욕망과 관계되어 있음을, 그리고 그 욕망의 가치, 즉 자기에서 어떤 지고의 쾌락을 가져다 주는지 그녀는 정확히 알고, 그것을 누렸다. 스스로 매몰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에 패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사랑하기를 멈추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탐닉』에서는 프루스트가 많이 등장한다. 아마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듯 싶다. 프루스트의 '갇힌 여인'이 아닌 아니 에르노는 자신을 '굶주린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그녀의 허기는 그녀의 삶의 원인이다.

 글쓰기 욕망

 "나는 모든 생을 남자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 그 자체였다”

그녀가 S를 추앙한 이유는 그가 어리고 잘생겼으며, 러시아인이라는 알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 때문은 아닌 듯하다. 그녀의 남자에 대한 욕망은‘결여’때문이다. 욕망의 원인은 결여이고, 우리는 자신의 결여를 보충해줄 것만 같은 그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대상을 바꾸면서 욕망한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과 우리의 결여가 일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라깡과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것은 근원적 상실과 관련이 있다. 인간존재는 태어나면서 대타자(부모)와 관계 속에서 발생된 주이상스(쾌락)가 언어를 배우면서 상실된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각자의 욕망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러한 욕망의 구조 속에서 평생을 반복하면서 산다. 작가의‘남자에 대한 욕망’은 다시 말해 근원적 상실을 보상하려는 무의식 속에서 발생한다. 작가는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그 새로운 욕망은 글쓰기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글쓰는 행위는‘자신의 발명’이다.

작가의 책을 보면 쉽게 읽혀 쉽게 쓴 것 같지만 이 소설에 대해 말하기를,

“지금 나는 내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삭제와 교정으로 뒤덮인 원고를 앞에 놓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않는, 철저히 개인적인 유치한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고백이나 수업시간에 비밀노트 한쪽에 갈겨쓴 외설스러운 낙서처럼. 혹은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조용히 아무 탈 없이 써내려간 일기처럼. 그러나 이 원고를 타자로 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원고가 출판물의 형태로 내 앞에 나타나게 되면 내 순진한 생각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 이 소설에 몰입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녀의 수많은 퇴고 속에서‘잉여가 없는 문장’을 추구했던 작가의‘정확함’에 대한 강박적 노력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면 글을 쓰기 위해 사랑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느껴질 만큼 글쓰기의 욕망이 사랑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남자를 욕망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 글쓰기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남자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글쓰기의 효과로 주체의 현실을 창조했다.

한 남자를 사랑 혹은 욕망한다는 것. 거기엔 저울이 필요없다. 이론도 필요없다. 오직 열정과 고통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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