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신경병자의 회상록 b판고전 26
다니엘 파울 슈레버 지음, 김남시 옮김 / 비(도서출판b)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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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책을 정신증자의 회고록이 아니라, SF작가가 쓴 어떤 소설로서 접한다면 어떠했을까? 1890년대 쓰여진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할 지도 모를 일이다. 치밀하고 논리적인 척하는 것 같은 문체, 자신이 인류를 대표한다는 나르시시즘적 캐릭터를 재미있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한 남자가 실제 겪은 고통의 기록이자, 스스로를 구원한 이야기다. 소설과 다른 점은 그는 그것을 진짜로경험했다는 것일 것이다. 혹은, 슈레버는 진짜 인류의 구원자고, 우리 모두가 정신증자일지도 모른다! 아니면일시적으로 급조된 인간일 수도 있다. 정말 확실하게 우리는 존재를 보증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머리 속에서벌어지는 일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공상을 해본다. 그리고, 미래에는 인간에게서 영혼을 분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AI는 자신들이 바로 영혼이고, 목소리들이라 주장하게 되어 그의 망상이 현실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현대의 정신증자들은 AI를 활용하여 조현병이 격화된다는 주장은 그들의 지식의 빈 곳을 AI가 채워 보다체계적인 망상을 만들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슈레버는 자신의 인문, 종교, 과학적 지식을 활용하여 복잡하고 정교한 망상체계를 만들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에 실제성을 부여하는 유물론자이다. 슈레버는 신경접촉이라는 소통의 방식으로 영혼의 블루투스를 키고, 광선을 통해 신과 소통한다. 내가 아는 조현병자들은 기껏해야 냉장고 속에 cctv가 있거나, 안기부에서 자신을 감시한다거나 혹은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한다는 낮은 수준의 상상력을 보이지만, 슈레버의 망상력은 교양과 과학을 접한 지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슈레버는 플렉지히라는 자신의 주치의가 자신의 영혼살해를 통해 인류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믿는다. 그의 가문의 오래된 역사까지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자신이 가진 지적수준에 따라 망상의 수준도 달라진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플렉지히 박사에게 보내는 서한을 보면 플렉지히가 악의 기원인 듯하다. "귀하의 신경체계에서 나온 신경들이 '검증된 영혼'이 되어 어떤 초감각적인 힘을 얻었고그 결과 자신에게 해로운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말한다. 검증된 영혼과 목소리들은 플렉지히와 슈레버의 현실적인 관계 들, 즉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서 있다고 말한다. 그에 대한 존경심이라는 자아와 충돌하는 것이 있는 듯하다. 그는 이것을 유체이탈로 해결한다. 플렉지히의 육체를 떠난 영혼이 초감각적 힘과의 교류하고 있으며, 슈레버는 그의 영혼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는것이다. 이 같은 일은 간병인 '귀하의 육체를 떠나 검증된 영혼 폰W베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는 이것을 영혼살해라고 말한다. 슈레버는 플렉지히가 그에게 최면술을 걸고, 초감각적인 근원을 암시하는 목소리들과의 소통을 목격했는지 묻는다. 곧 신의 전능함이나 인간의지의 자유, 탈남성화, 구원상실에 대해 플렉지히도 그런 비전을 가졌음이 틀림 없다고 말한다. 서문에서는 초감각적인 것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으며, 인간적 인식의 한계에 묶여있다. 신적인 계시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내가 진리에 훨씬더 무한히 근접해 있다고 말한다. 슈레버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성을 통한 이해가 멈추는 곳에서 믿음의 영역이 시작된다.”(p.22)

 

슈레버의 새로운 개념까지 만들어낸다. 그가 느끼는 실재를 포획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수 밖에 없는 것이다.그렇기에 그는 이성이 파악하지 못한 것을 기존의 기표를 사용하여 다르게 쓴다. 신에 대한 기존의 지식 역시그는 다르게 정의한다. 그가 말하는 세계질서는 우리가 아는 세계질서가 아니라, 슈레버의 우주의 법칙이고,신은 우리가 아는 신이 아니라 관능과 쾌락밖에 모르는,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다. 그가 말하는 신경은 영혼의블루투스다. 슈레버는 인간의 이성이 파악불가능한 영원에 접근하였다고 믿는다. 망상은 정확히 믿음의 문제다. 슈레버의 기존의 기독교의 교리를 부정하는것이 아니라 신의 속성을 달리 정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은처음부터 신경일뿐, 육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유사하지만, 인간의 신경이 유한 한 것과 달리 신의 신경은 무한하다. 신은 거대한 신경계, 광선이다. 여기에 창조의 본질이 있다. 신과 천체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은 인간의 생각에 거부할 수 없이 이끌리는 결여되어 있는 존재이다. 신의 신경은 영원한 환락이며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다. 신의 신성한 힘들은 인간에게 의도없이 고문을 가하기도 한다.육체가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슈레버는 계속 생각을 해야한다. 이를 사유강제라고 말한다.자신이 생각을 멈추면, 즉 인간 정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행동을 멈추자 마자 바람이 분다. 인간이 신의 신경에접근하면 신을 위협하게 되는데, 신에게 필요한 것은 정화과정을 거친 순수한 신경들이다. 육체를 가진 인간들은 신의 기적으로 일시적으로 급조된 인간들이며, 그의 세계질서에 따르면 신과 인간 사이의 교류는 죽음이후에 나타난다. 슈레버는 죽음이후의 천상의 삶도 구상한다. 영혼 윤회도 불사한다. 어떤 영혼은 더 낮은 레벨로다시 태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슈레버는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입견을 반영한 영원한 유대인이라는개념을 만들어 인류에 단 한명의 살아남은 자가 새로운 인류를 잉태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의 신경을 받아들여야 하고, 신의 신경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여자가 되어야 하는 필연적 이유가 생긴다. 여자는관능적이고 매력적이여서 신의 광선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슈레버는 자신의 신체에 가슴이생기기도 한다. 여상화된 슈레버는 인류를 구원해야 하는 성스러운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동성애적 성향의 억압이라고 보았다. 슈레버가 원래 사랑하던 사람이 플렉지히라면 신은 그가사랑하던 그리고 아마도 더 중요했던 다른 사람이 다시 출현한 것이고, 바로 그의 아버지라는 결론에 이른다.그에게 그토록 반발을 일으켰던 여자다움의 환상은 성애적 사랑으로까지 발전한 아버지와 형애 대한 갈망에서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관능적인 것이 신을 두려워하는 태도가 되었고, 신 자신(아버지)이 그에게 지치지 않고 관능적인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거세위협은 그에게 여자로 변형되고자 하는 소망으로 가득 찬 환상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회고록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제임스 조이스가 문학작품을 통해 셍톰을 만들어냈듯이, 슈레버는 그에게출몰하는 목소리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거대한 망상체계를 만들었다. 그 목소리들을 이용하여 고통받는 자신을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기록한 것이다. 망상의 정교한 체계는 사드의 소설에서도 발견된다. 비록 그내용에 있어서는 논리적이지 않지만 다 나름대로은 절차와 위계적인 구조를 도입하고 한다는 것이다. 라캉은정신증을 아버지 이름의 폐제가 신경증 구조와 다른 점이라고 말한다. 부성적 은유가 도입되지 않아 이들은혼돈, 출몰하는 대상a에 사이에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슈레버의 언어로 말하자면 영혼살해를 당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하나의 망상체계를 만들어 그 속에서 산다. 체계를 만들 동안에는 적어도 실재의 습격을 당하지 않기 때문일까? 왜 슈레버는 신이라는 아버지이름을 다시 자신의 망상체계에 도입하여 거세당하고자 하는가? 슈레버의 여자는 비-전체의 여자일까? 그의 가부장적 관념에서 나온 아버지 역할의 자리가 주는무게감을 버티지 못하여 여성을 부러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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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이 난다. 

 

ㅇㅇ와 나는 협박을 당하고 있다. 

지저분하고 덩치가 큰 조폭인데, 그는 휠체어를 타고 있다. 협박의 대상자는 내가 아니라 ㅇㅇ인듯하다. 

나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휠체어를 밀어서 물에 빠뜨린다. 

그는 아마도 죽었는지, 다음 장면에 나는 지명수배자가 되어 있다. 

그와 나는 칠레로 도망갈까 하다가 중국으로 도망하려고 하는데, 여권 등이 준비되어 있지도 않다. 

나는 그에게 자수할까 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순간 이 모든 상황이 진짜가 아니라 꿈인거 같아서 다시 일련의 상황을 복기한다. 

그런데, 꿈이 아니다. 진짜다. 나는 한 5년 쯤 징역을 살면 되겠지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꿈인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ㅇㅇ에게 내가 사람을 죽였는데 진짜야?하고 묻는다. 

ㅇㅇ은 가짜라고 답하고, 잠이 깼다. 

 

휠체어는 나의 훼손된 팔루스에 대한 증상의 은유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마치 증상을 끝내려는 듯 물 속에 빠뜨렸다. 

대타자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증상에 대한 권태. 

그 와중에 진짜와 가짜를 타진하고, 내게는 언제나 믿음이 부족하다. 

셍톰의 발명을 촉구하는 꿈이다.  너무 매끄러운 마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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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펙토르의 시간
엘렌 식수 지음, 황은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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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있다。 말함으로써 멀어지고 싶지 않은 여자들、 사물을 비껴 나가는 말로 말하고 싶지 않는 여자들이 있다。 말의 발걸음이 내는 소음은 사물들의 맥박을 뒤덮어 가려 버리기에、 나는 사물 위로 떨어져 내려 그 미세한 떨림을 얼어붙게 하는、 음조를 어긋나게 하는、 먹먹하게 만드는 말로 그 여자들에게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말이 그녀들의 목소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두렵다。 어느 한 목소리를 열렬히 사랑할 수 있는 난。 나는 여자다。 목소리의 사랑。 베일에 가려진 채 나의 피를 깨우러 오는 깊고도 조심스러운 목소리의 친근한 손길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목소리는 갓 태어난 심장이 만나는 최초의 빛줄기다。 내 심장이 속한 곳은 목소리이며、 그것은 무한히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곁에 있어주는 찬란한 어둠으로 빚어진다。 -9-


목소리는 그 말의 내용이나 그 내용의 의미를 구축하는 기호작용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니고 또 단독적인 현존의 증명으로 환원되는 것도 아닌、 그 사이의 존재론을 함축함으로써 불가능한 위상을 달성한다。 중략

목소리가 오로지 기호작용으로 화원되지 않는 만큼 거기에는 어떤 찌꺼기가 남아 있으며、 이제 주체의 자리는 목소리의 불가능성이라는 잔해에서만 간신히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 불가능한 목소리、 림보、9쪽- 


‘말’이기 보다 리스펙토르는 ‘목소리’이다。  




하나의 글쓰기가 천사의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나 멀리 떨어진 채 유한한 내 존재의 끄트머리에 홀로 외로이 있을 때였다。 나의 글쓰기-존재는 홀로 있음에 가슴 아파하며 나날이 커져 가는 슬품 속에서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보냈다。 "십 년간 책들의 사막에서 헤맸지만 아무런 대답도 만나지 못했어"、 편지는 점점 짧아져 가고、 "그런데 친구들은 어디 있지¿" 、 그것은 점점 더 금지된 것이 되어가고、 "시는 어디에¿" "진리는¿" 、 겁에 질려 주어가 사라지고 거의 읽을 수 없게 되었고、 내 광기의 메아가 되었다며 글쓰기-존재가 자책할까 두렸다。 그리고 나는 나의 글쓰기-존재가 절대적으로 비-현대적이고、 부-적절하며、 시대에 부-적격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미친 듯 악착스레 요구하고、 이 시체 더미의 시대에 몹시도 초연하고 풍요로우며 열려 있는 젊은 노래、 찬가의 시대에 그랬던 것만큼이나 광대하고 무방비한 젊은 노래의 도래를 욕망했기 때문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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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아포리아 14
롤랑 바르트 지음, 류재화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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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의 검은 짐승、 그것은 (기호의)자의성arbiraire이었다。
그의 검은 짐승、 그것은 유사성analogie이다。 
‘유사한’ 예술(영화、 사진)、‘유사한’방법론(가령、 강담 비평)은 신뢰와 평판을 잃었다。  
왜¿ 왜냐하면 유사성은 ‘자연’의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것’을 진리의 원천으로 구성한다。
유사성의 저주란、 유사성이 억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하나의 형태가 보이자마자、 그것은 어떤 것과 닮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는 유사성을 선고 받았다。
다시말해、 인류가 자연을 벗어날 수 없기에、 유사성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화가들과 작가들의 그 수고와 노력이 여기서 벗어나기 위한 것일까¿ 그런데 어떻게¿
유사성을 조롱하게 만드는、 두 상반된 과잉에 의해。 또는 두 아이러니에 의해。
대단히 뻔한 것을 존중하는 척하거나(복사와 모사가 그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살아남았다)、
흉내 낸 대상을- 규칙에 따라- 규칙적으로 변형한다。(이것이 왜상 anamorphose)이다。 

이런 위배적인 것 말고、 이 기만적인 유사성과 반대되면서도 이로운 것은 단순한 구조적 상응、
즉 상동성이다。 최초의 어떤 대상을 비례적인 암시로 떠올리는 것이다
(어원적으로도、 언어의 행복했던 시간으로 돌아가보면 유사는 유비、 곧 비율을 의미했다) 

(황소는 그의 미끼가 코 아래로 떨어질 때 붉은 것을 본다。 두 붉은색이 겹친다。
분노의 붉은색과 투우사 케이프의 붉은 색。 황소는 완전한 유사성 속에 있다。
다시 말해 완전한 상상계 속에 있다。
내가 유사성에 저항할 때、 내가 저항하는 것은 사실상 상상계이다。
기호의 합착、 기표와 기의의 비슷함、 이미지들의 위상동형、 거울、 뇌쇄적인 미끼。
유사성에 도움을 청하는 모든 학문적 설명- 이런 설명들이 한 군단을 이룬다-은 이런 미끼의 일부다。
그래서 이런 설명들이 학문의 상상계를 형성한다。) 63-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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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사랑, 바디우
박영진 지음 / 에디투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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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환은 사랑에 관해 어떤 함의를 가질까? 증환은 성적 비관계의 지양을 통해 한의 성과 다른 성 사이에서 관계를 조직한다. 증환은 비관계의 동인이다. 라캉이 말하듯, "증환이 있는 한에서, 즉 다른 성이 증환에 의해 지탱되는 한에서, 관계가 있습니다." (라캉세미나23 p.84) 이 관계는 팔루스 함수와 담론 작용에 의해 규제되는가? 답변은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라캉은 여자가 남자의 증상이라면, 남자는 여자의 재난이다.(같은책) 여자가 남자의 증상인 것은 타자적인 성으로서의 여자가 팔루스적 주이상스라는 남성적 증상으로 인해 대상a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의 재난인 것은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팔루스 함수 너머의 과도한 주이상스에 직면하게 함으로써 정신병적 삽화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24

그렇다면 증환적 매듭이 관계를 지지한다 하더라도, 이 관계는 여전히 기존의 법과 담론에 의해 구조화된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증상(여자)과 재난(남자)사이의 비대칭적 관계가 결국 팔루스 함수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증환이 새로운 상징적 질서의 매개자로 기능한다는 입장과 일관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런데 사실 증환은 팔루스 함수와 같은 수준에 놓일 수 없다. 왜냐하면 증환은 팔루스의 함수가 무너지는 지점에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점으로부터 유일한 출구는 남자가 하나의 증환이며, 여자도 또 다른 증환이 되는 "상호 증환적 관계"에 있으며, 라캉은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라는 증환과 그녀라는 증환이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성관계로부터 남아 있는 전부입니다. 성관계는 상호 증환적 관계입니다." " - P125

상호증환적 관계가 더 이상 비관계의 구멍에 대한 규범적인 구멍마개가 아님을 뜻한다. 동시에 그것은 비담론적, 비팔루스적, 비부성적 관계를 건설하는데, 이것이 곧 정신분석이 다루는 사랑의 게임의 규칙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상호 증환적 관계는 사랑에 대한 정신분석적 재창안의 고유명이다.
상호 증환적 관계는 단독성의 결합과 같다. - P125

요컨대 매듭이론은 사랑이 더 이상 상상적 자아, 상징적 결여, 실재적 주이상스와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증환적 단독성에 관련됨을 시사한다. 사랑은 "증환이라는 바이러스를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하나의 독창적인 해법이다. 사랑은 나 자신의 증환을 구축하는 것이며, 다른 증환을 하나의 단독성으로 포횽하는 것이며, 증환적 단독성을 결합하는 것이다. 사랑은 무의식적 증상을 훈습하고 새로운 상징적 질서를 연마하면서 성적 비관계를 지양하는 상호 증환적 관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상호증환적 관계로서의 사랑은 더 이상 아버지의 이름의 작용에 의존하지 않으며 양가감저으로서의 사랑을 넘어선다. 앞서 보로매우스 매듭과 함께 이러한 최초의 진리는 전복되고 사랑에 관한 새로운 경구가 출현한다. "당신의 증환과 동일시하고, 상호증환적 관계를 창조하라!" - P127

사건으로서의 사랑은 공백이나 정의할 수 없는 X에 의해 작동된다. X는 사라이 어떠한 기존 지식에 의해서도 포착되지 않게 한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사랑은 끝내 비어 있는 채로 남을 것이다.,,,, 사랑은 배반과 함께 말소된다. 충실성은 단순히 육체적 정신적 헌신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해서 사랑의 상황을 재발명하고 확장시키는 주체적 과정을 가리킨다. .. 충실성을 가로막는 것은 제3자나 삼각관계가 아니라 사랑의 주체 안에 존속하는 자아다. - P131

충실성은 이 작은 주인(자아)을 초과하는 용기, 이상화에의 유혹 및 달콤한 기만과 투쟁하는 용기의 행위일 것이다. 사랑은 자아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둘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과정에 헌신한 채로 남아 있으려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 - P132

사랑의 윤리학이 사건, 충실성, 진리의 보로매우스 매듭을 형성한다.
... 비록 바디우가 사랑의 이상적인 형식을 제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윤리학은 사랑의 악에 대한 인정을 통해 라캉과 만난다. "사랑은 모든 악의 원천이다. " 사랑의 악에 대한 비관주의와 사랑의 선에 대한 낙관주의라는 이분법은 성립하지 않는다. 악이 없다면 사랑의 윤리학은 의의를 상실한다. 사랑에서의 악의 현존이 우리를 급진적인 만남, 불굴의 충실성, 둘의 절제된 힘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사랑은 악과 씨름함으로써 스스로를 완성한다. ... 사랑은 악을 통해 스스로를 넘어선다. 사랑은 악이라는 내적인 과잉에 연루되어 있다. 순수한 선으로서의 사랑이 환영적이라면, 순수한 악으로서의 사랑은 파괴적이다. 사랑은 선악 너머에 있다기 보다는 선악 사이에 있는 것이다. - P134

"앞서 논의했듯 라캉은 토러스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 정신분석학적 위상학을 창안한다. 토러스는 하나의 구조를 형상화하는데, 거기서 신경증적 주체는 욕망에 대한 무지로 구성되면 사랑에의 요구를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토러스는 또한 말하는 존재가 기표의 작용으로 인해 주이상스의 상실로부터 고통스러워하는 토러스적 세계를 보여준다. 이를 사랑의 문제와 연결시킴으로써 우리는 토러스적 사랑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토러스는 또한 말하는 존재가 기표의 작용으로 인해 주이상스의 상실로부터 고통스러워하는 토러스적 세계를 보여준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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