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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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느 날 무심코 엄마 손을 내려다봤다. 코끝이 시큰하게도 내가 알던 손이 아니었다. 내가 어른으로 성장한 시간만큼 엄마 손에는 거역할 수 없는 세월이 불시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내가 철없이 깨닫지 못한 그 세월이 훌쩍 지나도록 가중된 노동의 고된 흔적도 오롯이 아로새겨졌다. 엄마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면 손을 감추느라 여념이 없다. 거무튀튀하게 그을고 까칠까칠하게 메마르고 손마디마다 옹이가 져서 뒤틀린 손이 남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손은 가족을 먹이고 씻기고 입히느라,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집안을 일으키느라, 두 어머니를 모시고 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느라 안 해본 일이 없다. 얼굴에 짙게 팬 주름은 화장으로 옅어지게 위장할 수 있지만, 손에 새겨진 삶의 이력은 감출 수 없다. 자기 손이 그토록 거칠고 앙상해지는 줄도 모른 채 엄마가 고단하게 감당해 온 생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얼굴이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는 손은, 그래서 슬프고 가엾고 마음의 뿌리까지 뒤흔든다.

『16인의 반란자들』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을 사비 아옌이 인터뷰하고 킴 만레사가 그 장면을 흑백사진으로 남긴 책이다. 이 책이 훌륭한 점은 사비 아옌의 인터뷰가 공식적, 형식적, 의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생활에 밀착하여 작가가 한 개인으로 머무는 공간에서 작가의 일상을 뒤따르며 인간적인 면모는 물론 작가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어떻게 문학적인 배경을 형성했는지, 작가가 자기 문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무엇인지, 작가의 문학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인터뷰집의 한계 내에서 충실하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 책이 감동적일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의 손을 담아낸 킴 만레사의 흑백사진 덕분이다. 작가의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포착한 양질의 사진들 중에서도 손 사진은 유난히 마음을 울린다.

작가들마다 특유의 무의식적인 손짓이 그 순간 영원히 멈춘 듯 흑백사진의 어두운 배경 속에서 어렴풋하게 떠올라 망막에 또렷하게 각인된다. 그 손은 반지를 끼고 있기도 하고, 술잔을 들기도 하고, 담배를 쥐기도 하고, 깍지를 끼기도 하고, 얼굴을 쓰다듬기도 하고, 기도하기도 하고, 주름으로 자글하기도 하고, 푸르스름한 정맥이 드러나 있기도 하고, 까만 털북숭이이기도 하다. 어쩌면 별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손일지 모른다. 하지만 엄마 손처럼 작가들도 그 손으로 마침내 자기 문학을 언어로 형상화했을 것이다. 문학의 자양분이 되어준 인생의 모든 일도 그 손으로 기꺼이 겪어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손을 들여다본다고 용한 점쟁이처럼 손 임자의 다사다난한 삶을 단번에 읊어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어떤 손 앞에서 마음이 절로 울리는 경험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리라. 손에는 낙인처럼 지울 수 없는 인생 편력이 올올이 새겨져 있다. 손은 그 삶의 지문을 감추지 못한다.


열여섯 작가들의 손끝에서는 삶의 신념이 거침없이 흘러나온다. 한때 작가 지망생으로 단편 몇 편을 끼적거리곤 했다. 그동안 읽고 보고 들었던 소설, TV 드라마, 자극적인 스캔들의 그림자가 구태의연한 신파로 드리워진.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여기서 한 문장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은 절실하게 쓰고 싶은 이야기가 나에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전하고 싶어 하는지 자각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문학을 선택한 그들은 어떤 형태의 이야기에 담아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가 세상을 변화시키길 기대했다. 그들을 위대한 작가라고 칭송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존재에 미치는 영향력이 문학의 가장 강력한 힘이다. 문학을 읽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움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작가의 충만한 재능이나 기발한 상상력, 화려한 기교에 기대지 않는다. 존재를 울리고 흔들어 변화시키는 것은 문학이 담고 있는 진실, 즉 작가의 진심이다.


작품만 문학적으로 빼어나다면 작가의 삶과 이력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훌륭한 글을 썼다고 그 글을 쓴 사람의 인격까지 훌륭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일례로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나라 신문학과 근대문학을 배우면서 몇몇 작가들의 파렴치한 친일 이력에 대해서는 일말의 비판도 품지 못한 채 그들이 이룩했다는 문학적 성과를 주입받았다. 그러나 작가의 진심이 '약'이 아니라 '독'으로 스며 있는 작품은 아무리 그럴듯한 당의를 입혀놓아도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행간에 스민 작가의 진심이 약인지 독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여기서 '실천'이 중요한 잣대가 된다. 자기 신념을 말이나 글로만 떠벌리는지, 행동으로도 실천하는지는 작가가 이제껏 걸어온 인생을 들여다보면 자명해진다. 『16인의 반란자들』의 열여섯 작가들이 크고 대단한 사람으로 다가온 것은 노벨문학상의 세속적인 권위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책장을 뛰쳐나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맞서는 실천가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나아갈 수 있는 힘은 세상에 반하는 용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상에 길들여지고 안주하여 제자리걸음으로 고꾸라지고 있을 때도 세상의 거짓 논리와 불합리한 이면에 반기를 들어 목청껏 일깨우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느릿느릿하게라도 나아진다고 믿는다. 우리를 현혹하고 기만하는 목소리를 걷어내고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애쓰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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