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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 - 오래된 책마을, 동화마을, 서점, 도서관을 찾아서
백창화.김병록 지음 / 이야기나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백창화는 3천여 권의 책으로 처음 어린이 도서관을 열었다. “모두가 감동하면서 책을 함께 읽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그동안 애지중지 소장했던 책들을 남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지만, 무심한 사람들은 “(도서관이라면서) 책이 이거밖에 없어요?”라고 그녀의 포부에 돌멩이를 던졌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분통을 터뜨렸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집에 책이 많으면 좀 내놓으시지. (…) 그 많은 책을 혼자 싸안고 있는 걸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백창화의 분노는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당신의 책을 내놓으라고 종용한 것은 아니잖아요? 지레 뜨끔하여 미약하게 항의해 보지만 그런 나 자신이 구차스럽기만 하다. 그녀의 도서관이 타의가 아니라 순전히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책을 남과도 나누고 싶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된다. 어떤 물욕이든 마찬가지이겠지만, 내가 집착하는 것은 단 하나도 내주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책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빠듯한 예산 내에서 마음속으로 열두 번도 더 찜한 이후 겨우 구매 목록에 올려 내 품으로 들인 책이다. 옷도, 가방도, 신발도, 화장품도 모두 포기하고 때론 식욕까지 억제하며 사들인 책인지라 그에 대한 집착은 도저히 내려놓을 길이 없다. 책장에 다 꽂히지 못한 채 집 안 구석구석 쌓여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 책을 남의 손에 들릴 수 없다. 책에 대한 애정이 그녀가 나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책에 대한 소유욕을 과감히 밀쳐두다니 그녀가 놀랍고 대단하게 여겨진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은 자기 책을 선뜻 내놓지 않는다고 억울해하거나 자기 책을 혼자 독점하는 짓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난할 자격이 그녀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지 책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은 이제 도서관을 넘어 책마을을 꿈꾸는 백창화, 김병록 부부가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영국의 도서관, 서점, 동화마을, 책마을을 돌아보면서 책마저도 디지털화되어가는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일깨운다. 자발적인 의지로 사재를 털어 책과 사람이 더불어 행복한 공간인 도서관을 꾸린 열정은 유럽의 책공간을 여행하는 동안에도 숙을 줄 모른다. 오히려 유럽과 비교될수록 백창화는 한국이 처한 아날로그 책 문화의 위기가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른다.
장서 수보다 칸막이 좌석 수를 자랑하는 도서관의 열악한 환경, 인터넷의 발달과 거대 자본의 독식으로 사라진 동네의 작은 서점들, 그리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 이런 문제들은 사실 어제오늘 제기된 담론이 아니다. 하지만 ‘처음 만나는 이를 경계하지 않고 낯선 이가 불편하지 않은 공간에서 책을 통해 따뜻한 이웃과 아름다운 삶을 나누길’ 열렬하게 꿈꾸는 그녀의 진심과 맞닥뜨리고 나면 그 간절함에 함께 조바심치게 된다.
유럽도 종이책이 근간을 이루는 전통과 문화의 몰락을 근심하고 있지만, 그녀가 느끼기에 유럽은 여전히 책의 천국이다. 유럽에는 아직도 책 읽는 전통이 살아 있고, 유서 깊은 도서관이 건재하며 새로운 도서관도 조성되고, 도시의 골목마다 작은 서점들이 반기고, 그들이 대대로 사랑한 동화와 작가들의 흔적을 마을 단위로 보존하고 계승한다. 게다가 책이 예술과 문화가 집중되어 있는 도시가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리 잡으면서 쇠락한 농촌까지 되살리는 책마을이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다.
백창화는 사람들이 점점 책을 읽지 않는 이유를 ‘결핍’에서 찾는다. 여가를 보낼 만한 거리가 책 이외에 달리 없었던 시절과 달리 TV, 컴퓨터, 인터넷, 게임기, 스마트폰 등이 책을 대체하고 있는 현실만 탓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욕망하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은 책이 넘쳐나다 못해 발에 채는 세상이다. 책은 더 이상 사람들의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지금 내가 이렇게 책에 집착하는 것은 나도 그 목마름을 알기 때문이다. 서점이라곤 구경도 못해 본 어린 시절, 책 읽고 싶은 갈증을 해소해 줄 만큼 책이 충분했던 적이 없었다. 처음 책에 대해 흥미를 느낀 것도 내가 가지지 못한 책을 가진 친구를 질투했기 때문이다. 다 읽기나 할지 장담하지 못할 만큼 책을 바리바리 싸안고 있는 것은 그 시절의 결핍이 아직도 나에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또한 결핍은 그리움을 낳는 법이다. 내가 풍족하게 가지지 못한 것은 그만큼 소중해지고, 그것과 관련된 기억은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져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리워진다.
백창화는 풍요롭다 못해 낭비되는 물질의 세례 속에 살아가는 21세기 아이들에게 ‘결핍 없이도’ 책을 읽히려면 ‘책이 있는 추억’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가 아이들이 책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할 수 있도록 책과 함께 뛰노는 책마을을 꿈꾸는 이유이다. 또한 이것이 유럽의 책공간을 탐방하면서 그녀가 찾은 대안이다. 유럽의 모든 책마을이 성공적인 것도 아닐뿐더러 그녀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현실적인 여건들이 녹록지 않지만 그녀는 끝내 희망을 부여잡는다. 그녀의 용감한 첫 행보가 행복한 책마을의 건강한 초석이 되길 바란다.
책과, 책이 있는 공간과, 책을 읽는 사람에 대한 백창화의 열렬한 애정에 절로 전염되지만, 『유럽의 아날로그 책공간』이 ‘책공간’이라는 전문적인 주제에 좀더 집요하게 접근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프롤로그」 중 「그렇게나 먼 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으려 하나」라는 제목 아래에는 ‘무엇’에 대한 언급 없이 여행 코스를 선택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닥친 어려움과, 그 여행에 동행해 준 사람들에 대한 소개와 감사의 표시, 그리고 배낭여행의 팁 등만 풀어놓았다. 본문 속에서도 이 책의 주제와 별 상관없이 여행 중 겪은 우여곡절에 대한 소회가 길게 이어지곤 했는데, ‘책공간’ 자체에 집중했던 나에게는 그 내용이 읽기의 흐름을 방해했다. 유럽의 책공간을 찾아 떠난 여행의 모든 것을 담으려 했던 저자의 욕심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으로 ‘다이제스트 세계 명작’에 대한 실망을 토로하면서 “심지어 다섯 권인” 『몬테크리스토 백작』에 대해서도 성토하는데, 그녀는 알까? 알렉상드르 뒤마가 “그의 문하생들에게 작품의 일부를 나눠 쓰게 했다(『한 권의 책』(최성일), 136쪽)”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나의 놀라움과 배신감도 다르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완역본을 옹호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에 읽은 ‘다이제스트’의 흥분과 감동이 완역본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지는 않는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로 인해 내가 걸작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내 유년은 그것으로도 충분히 풍족했으니. 더구나 ‘세계 명작’이라는 이유로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일찍 읽고서 더는 읽지 않아도 된다는 자만에 빠진 걸작이 얼마나 많던가. 이번 기회에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