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먼 여행 아시아 문학선 2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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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감정적으로 함몰되면 짙은 여운을 온전히 표현할 길이 없어서 감상에 갈피가 사라진다. 추상적인 느낌을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려고 아무리 단어를 골라도 애초에 내가 교감한 느낌과는 미묘하게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 그 간극을 메워보려고 용쓸수록 나 자신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중언부언 문장들이 꼬여간다. 이쯤 되면 답답한 마음으로 지금 이 느낌 그대로 가능한 한 오래 기억할 수 있길 바라면서 체념하게 된다. 앞서 읽은 소설이 그러했다. 로힌턴 미스트리의 『그토록 먼 여행』을 읽으면서는 빡빡하게 짜인 책장을 200여 쪽 넘기기까지 적이 안심했다. 감정의 밀도가 치솟는 소설을 연달아 읽는 일은 생각보다 피로하다. 잘 쓰인 소설이되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 소설은 그럴 때 읽기에 더없이 훌륭하다.

사실 568쪽 중 198쪽은 『그토록 먼 여행』을 마지막 책장까지 넘기느냐 마느냐의 기로일지 모른다. 1900년대 인도 현대사가 낯설고 이국적이라거나, 조로아스터교가 역사 속에 사라진 고대 종교가 아니라 그 명맥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하다거나, 하는 것은 제쳐두고, 거기까지 내내 사소한 갈등을 벌이며 일상을 견디는 노블 가족과 코다다드 아파트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단조롭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격렬한 사건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대하는 욕심과 아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꿈의 괴리에서 빚어지는 충돌은 한국이나 인도나 별다를 바 없어서 독자의 눈길을 계속 사로잡기에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198쪽부터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의 삶에 RAW(인도비밀해외정보국) 스파이와 거액의 비자금이 등장하면서 기지개를 켜고 몸을 곧추세워 ‘이제 어디 한번 본격적으로 읽어볼까’ 싶은 마음이 동한다.

『그토록 먼 여행』은 1971년 인도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1979년 살해되기까지 실질적으로 18여 년에 걸친 박정희 유신정권의 독재 체제 아래에 있을 때, 인도도 정치적 고위 권력층의 잇속에 따라 총리 암살, 전쟁, 종교 갈등 등으로 혼란스러운 격변기였다. 1971년 인도는 자와할랄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 총리 체제에서 서파키스탄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기 직전이다. 동파키스탄의 독립(방글라데시)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인디라 간디가 착복하는 비자금 600만 루피가 이 이야기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다.


작가 로힌턴 미스트리처럼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파르시 집안의 가장인 『그토록 먼 여행』의 주인공 구스타브 노블은, 친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왔건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버려 원망하던 친구 지미 빌리모리아에게 편지를 받는다. 지미는 RAW 요원이라는 것을 털어놓고 자신이 보내는 소포를 대신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문제는 구스타브가 비밀스러운 접선을 통해 집으로 가져온 그 소포가 인디라 간디의 비자금 중 일부인 100만 루피의 돈 꾸러미라는 것이다. 인도 화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100루피짜리 100장씩 100다발인 그 빳빳한 지폐 더미는 “어마어마한 액수”로 묘사되어 있고 은행원인 구스타브는 돈벼락의 감회를 이렇게 표현한다. “정말 훌륭해. 24년 동안 이런 냄새를 맡으면서 은행에서 일했지. 절대 물리지 않아. 놀라운 일은 5루피짜리 돈다발과 10루피짜리 돈다발의 냄새가 다르다는 거야. 액수에 따라 고유의 냄새가 있어. 나는 이 100루피짜리 냄새가 제일 좋아.”


이쯤 되면 거액의 비자금을 둘러싼 고위 권력층과 스파이와 개인의 추악한 욕망이 맞부딪쳐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이야기가 스펙터클하게 펼쳐질 것 같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는 금물. 작가가 선한 주인공으로 내세운 구스타브는 신실하고 성실한 가장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작별 인사 없이 훌쩍 떠난 일도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아무리 하늘에서 돈벼락이 뚝 떨어졌다 한들 친구를 등지고 가로채어 야반도주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단지 지미의 차명계좌를 만들다가 직장을 잃어 가족을 굶기게 될까 봐 두려울 뿐이다. 소시민의 코미디랄까, 돈방석은 우습게도 가시방석이 되어버린다. 스릴 넘치는 액션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 에피소드는 구스타브가 어쩔 수 없이 은행에 돈을 1만 루피씩 입금하다가 100만 루피를 채 입금하기도 전에 지미가 사기 및 공갈죄로 구속되는 바람에 다시 출금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구스타브가 그 일을 들켜서 직장을 잃는 일도 없다. 단지 구스타브가 그 일을 들킬까 봐 내내 전전긍긍할 뿐이다.


전두환 정권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은폐하려고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면서 국민을 바보로 여기고 엉터리 조작을 일삼는 일이 1971년 인도에서도 공공연하게 자행된다. 적어도 로힌턴 미스트리의 소설 속에서는. 인디라 간디가 대표하는 권력층의 부정부패가 순식간에 일개 공무원인 지미의 개인적인 탐욕에 의한 사기로 조작된다. 600만 루피를 요구하는 인디라 간디의 목소리를 지미가 흉내 냈고, 인도국영은행장이 그 성대모사에 감쪽같이 속았다니, 지미가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는 대단한 성대모사 실력을 뽐내는 예능인이 아니고서야 그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가? 하지만 법을 매수하고 언론과 결탁한 최고 권력자는 이치에 맞든 어긋나든, 근거에 합당하든 부당하든 상관없이 형식적인 성명을 발표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만이 아니던가?


자와할랄 네루와 인디라 간디에 대해서는 『세계사 편력』 덕분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 그 책을 처음 읽고서,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가 옥중에서 딸에게 읽히려고 세계사를 직접 써주다니 그 딸은 참 좋겠다고, 그 딸이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나라를 이끌다니 멋지고 굉장하고 흐뭇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부터 딸 인디라 간디를 거쳐 외손자 라지브 간디까지 한집안의 30여 년에 걸친 통치는 무슨 왕조도 아니고 마냥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로힌턴 미스트리에게 네루-간디 가문은 부패 권력의 온상이다. 그들이 이룬 업적이 대단하다손 치더라도 그것으로 나머지 허물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란 엄격한 윤리 의식과 사명감을 요구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건 싫고 재임 기간 동안 권력을 남용하여 물욕을 채우기 위해 국민을 속였다면 마땅히 심판받아야 한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그토록 먼 여행』이 정치소설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인디라 간디에 대한 배신감이 나를 흥분시켰다. 사실 100만 루피는 인디라 간디의 실체를 목격한 지미가 한 나라의 총리도 전쟁 자금을 빌미로 600만 루피나 해먹는데 그중에 약간은 눈감아주겠지, 하고 홧김에 빼돌린 돈이다. 지미의 행동도 지탄받아야 하지만, 인디라 간디를 위시한 권력층이 그 100만 루피까지 악착같이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더욱 씁쓸하다. 그들이 100만 루피를 회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미에게 누명을 씌워 체포하고 언론에 발표한 후 고문한다. 친구를 살리고 싶으면 하루빨리 지미에게 건네받은 100만 루피를 1루피도 모자라지 않도록 은밀하게 되가져오라는 협박이다. 돈벼락 앞에서도 박봉을 받지 못하게 될까 봐 겁내는 소시민의 간은 콩알만 하지만,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모른 척할 만큼 비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용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토록 먼 여행』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벽이 등장한다. 어느 떠돌이 화가가 사람들의 노상 방뇨로 지린내를 풀풀 풍기며 모기떼를 불러들이던 코다다드 아파트의 벽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세상의 모든 신(神)을 그리기 시작한다. 화가가 벽을 성화(聖畵)로 채워 나가자 사람들이 한둘 모여들어 자기가 믿는 신 앞에 꽃을 바치고 향을 피워 올린다. 사람들이 오줌을 내갈기던 그 벽은 성스러운 기원의 장소로 거듭난다. 소설의 마지막은 ‘넘치는 하수구의 지독한 악취, 부서진 수도관, 깊게 팬 도로, 들끓는 쥐, 산처럼 쌓인 쓰레기, 열린 맨홀, 박살 난 가로등’을 고쳐달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뇌물만 뜯으려는 공무원’에게 신물이 난 시민들의 가두시위로 끝난다. 그런데 열악하고 비참한 생활환경의 개선을 요구했던 시위는 코다다드 아파트에 이르러 성스러운 벽을 철거하려는 공무원들과 격렬하게 맞선다. 그저 그림이 그려진 벽 따위에 실질적인 이익이 달린 처음 목적을 간단히 내팽개치고 벽 하나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철옹성에 은신한 인디라 간디들이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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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와 이발사
에트가 힐젠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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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참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나치, 일본, 이탈리아의 동맹)이었던 나라들과 피해를 입은 나라들의 현재 모습을 본다면 말이다. 가장 큰 전범 국가였던 독일이 그나마 당시의 상처를 헤집어내지 않는 것과는 달리 하켄크로이츠와 별다를 것 없는 욱일승천기라는 전범기를 일본 국민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또는 아무 생각 없이 경기장에서 흔들어대고 있고 홀로코스트로 신음하던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처형하고 있다. 에트가 힐젠라트의 『나치와 이발사』는 이런 우리의 상황에서도 낯설지 않은 책이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 금기의 영역을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모국―독일인지만 유대계이기 때문에 인종 청소의 대상이 되었기도 했겠지만―이기도 한 독일에서 출간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독일의 나치 시기를 풍자와 독특한 설정으로 유쾌하게 그려내었다는 이유로 논쟁에 휘말렸지만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것이 얼마나 역설적인 이야기인가를 보여준다.

창녀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전형적인 유대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독일인인 막스 슐츠와 이발 거장의 아들로 태어났고 독일인 같은 모습을 한 유대인인 이치히 핀켈슈타인은 같은 동네에서 친한 친구로 함께 이발 기술을 배우며 자란다. 의붓아버지에게 강간과 학대를 당하던 막스 슐츠는 우연히 히틀러의 연설을 듣게 되고, 이 연설에 감명을 받는 그는 나치 SS친위대에 입대하게 된다. 이후 별다른 죄책감 없이 유대인을 학살하게 되고 게다가 친구인 이치히와 그의 가족들을 죽이는 일에도 가담하게 된다. 독일의 패전 후 전범이 된 막스는 친구였던 이치히의 신분으로 위장하게 된다. 생긴 모습처럼 유대인의 모습으로 잘 적응한 막스는 반유대주의에 맞서고 유대 국가 건설에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등 누구보다도 더 유대인스러운 삶을 살게 되고 주위의 유대인들에게 존경과 신임을 받는다. 이후 만나게 된 판사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으며 가상의 재판을 받게 되는데 자신의 행위를 시대적 분위기와 생존 때문이었으며 이치히가 된 후에는 누구보다 유대인의 삶을 살았다 털어놓는다.

『나치와 이발사』는 나치와 유대인이라는 금기의 영역을 가벼운 터치로 풍자한 것과 두 삶을 오가는 극단적인 내용 때문에 논란을 일으키게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논란 자체가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우리에겐 이런 삶을 사는 것 자체가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순사가 되어 자신의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을 잡아들이던 친일파들은 현재에도 권력과 부를 쥐고 호위호식하고 있지만 독립운동을 하던 후손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워한다. 소설 속의 삶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 속의 흔한 모습이다. 독일에서는 금기시되는 중요한 일들도 또 다른 전범국인 일본과 그 피해자인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일이다. 또 한 번 역사란 참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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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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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을 읽으면서는 왜 그가 그녀를, 혹은 그녀가 그를 사랑하게 됐는지 납득되지 않아 못내 찜찜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설명돼야 한다는 강박은 얼마나 끔찍한가? 게다가 그 모든 일에 사랑까지 포함시킨다는 것은 또 얼마나 삭막한가?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 같은 소설은, 사랑에 이유가 있어야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나이에 남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어도 사랑임을 깨닫게 한다.

레오폴드 거스키는 알마 메레민스키를 사랑한다. 니콜 크라우스는 레오가 알마의 어떤 점을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오로지 알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녀는 그 ‘얼마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하늘만큼 땅만큼’ 두 팔을 한껏 늘여 최대한 크게 동그라미를 그리듯 형용사와 부사로 애써 치장하는 대신, <사랑의 역사>와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들>이라는 두 책을 이야기한다. 이 책들은 일부분 인용되기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소설 속에서 레오의 책이지만 그의 이름으로 출간되지 못한 책이니까. 그 두 책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는 이유는 알마를 향한 레오의 사랑에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라고 딴죽을 걸며 판단하려는 이성을 압도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서로 무관한 듯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잃어버린 고리’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쓰다가 잠시 멈춘다. 그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막막해졌다. 니콜 크라우스의 책에서 내 머리와 가슴 속으로 스며들며 흩어져 버린, 잃어버린 고리로 단단하게 맞물린 이야기의 조각들을 어떻게 다시 맞춰야 원작의 매혹적인 울림을 조금이나마 더 남길 수 있을까. 80대 노인 레오와 열네 살 소녀 알마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선택이겠다. 하지만 그 조각들을 이렇게 정렬하는 것은 소설 고유의 감성과 감동과 울림을 쏙 빼고 줄거리만 단조롭게 나열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무리 싱거운 기록일지라도 내가 어떻게 읽었나에 대해서는 남겨질 테니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을 테다.


레오는 고독한 노인이다. 폴란드의 홀로코스트로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고 사랑하는 여인 알마마저 미국으로 떠나보낸 후 지금까지 홀로 남겨진. 세상천지에 혼자라는 그 고독의 구렁은 짙디짙어 물리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유령처럼 자신에게 남겨진 목숨의 시간을 부유한다. 그 시간을 레오가 견뎌온 방법은 자기 아이를 가진 채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알마, 그리고 다른 남자의 아들로 살아가는 아이작의 곁을 몰래 서성이는 것이다. 레오의 고독이 사무치는 것은 그의 모순적인 존재감 때문이다. 레오는 자기 존재를 간절히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숨기고, 그가 존재하든 않든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드러내려고 기이한 행각도 마다하지 않는다. 레오가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그리하여 유의미한 존재로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은 오로지 알마를 위한 책 <사랑의 역사>와 오로지 아이작을 위한 책 <모든 것을 뜻하는 단어들>이 유일하다.


7년 전 아빠의 죽음 이후 알마의 가족은 여전히 아빠와의 기억에 매달려 있다. 엄마(샬럿 싱어)는 아빠(다비드 싱어)와 사랑했던 기억 단 하나를 붙드느라 다른 생의 가능성을 전부 포기한다. 알마는 아빠의 텐트에서 아빠의 스위스아미 칼을 만지작거리며 아빠처럼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에 몰두한다. 자신이 메시아라는 생각에 빠져 있는 남동생 버드는 알마에게 끊임없이 아빠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조른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에 파묻혀 죽은 아빠를 따라 죽은 듯이 지내는 애도의 나날이 이어지면서 알마는 아빠를 잃고, 엄마도 잃을까 봐, 그래서 동생마저 잘못될까 봐 두렵다. 알마는 자기도 점점 희미해지는 아빠와의 기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빠라면 그랬을 법한 추억들을 지어내기까지 하면서 엄마에게 아빠의 자리를 대신할 새 애인을 만들어주려고 애끓는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사랑의 역사>는 이쯤에서 공통점이라곤 상실과 단절뿐인, 결코 마주칠 일이 없을 것 같던 노인 레오와 소녀 알마의 만남을 예비하는 역할을 한다. ‘제이콥 마커스’라는 낯선 남자가 번역가인 엄마에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스페인어판 <사랑의 역사>를 영역해 달라고 부탁한다. 알마는 이 남자를 엄마의 새 애인으로 점찍는다. <사랑의 역사>는 이 남자에게만큼 알마의 가족에게도 각별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사랑의 역사>를 선물하고 엄마와 사랑에 빠졌고, 엄마는 첫딸에게 그 소설 속에서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여인의 이름을 주었다. 그리고 알마는 이제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알마의 실존을 확신하고 그녀를 찾아 나선다.


<사랑의 역사>에는 무수한 알마들과, 그 알마들을 사랑하는 무수한 레오들이 등장한다. 각 이야기마다 사랑에 빠진 남자의 감정이 아름다운 상징과 비유, 그리고 고혹적인 환상으로 섬세하게 그려진다. 매혹적인 소설 속 더욱 매혹적인 소설의 단편들은 레오의 히브리어 원작을 스페인어로 옮긴 즈비의 표절 판본과 그 판본을 영어로 옮기는 샬럿의 번역본 중 일부를 인용하는 형태로 감질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를 읽다 보면 사랑의 이유 따위는 망각하게 만드는 레오의 <사랑의 역사>도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솟구친다.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따르면, 읽을 수 없는 책에 대한 환상과 탐욕 때문일 것이다. 니콜 크라우스가 온다 리쿠라면 또 다른 <사랑의 역사>도 기대해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어렵겠지.


레오 거스키와 알마 싱어 사이에 아주 길게 이어져 있는 ‘줄(<사랑의 역사> 속 ‘줄의 시대’에서 인용)’에는 알마 모리츠와 아이작 모리츠가, 즈비 리트비노프와 로사 리트비노프가, 다비드 싱어와 샬럿 싱어가 그 가닥가닥으로 연결되어 있다.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마련한 ‘영원한 농담’처럼 레오 거스키에게서 시작된 사랑이 ‘불타지 않는 텍스트’로 알마 싱어에게 유의미하게 전해진다. 그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나는 그저 ‘줄’을 잡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조금 말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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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병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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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기억이 있다. ‘반드시 읽어야 할 몇 권의 책’ 같은 권장도서 또는 필독도서 목록이다. 책 제목과 저자가 빽빽하게 적힌 이 목록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이름이 하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우리는 그를 대문호라 알고 있으며 누구나 들어 봤을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작가로 알고 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익숙함만큼이나 낯선 작가이다. 많은 집 책장 속에 문학전집이나 오래된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꽂혀 있을 법한 익숙함과 그 익숙함만큼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없을 것 같은 낯섦이다. 이병훈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와 예술, 작품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서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가로 시작해 무덤에서 끝을 맺는 이 책은 그야말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과 그 속에 피었던 작품세계를 들려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했던 가난한 작가였다. 소년 시절에 그의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후 그의 아버지마저 농노들에게 살해당했다. 1849년 지식인들의 모임에서 금서인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편지」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는다. 사형을 언도했다가 극적인 순간에 징역으로 바꾼다는 황제의 연출 덕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간의 징역을 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그에게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남겼다. 『백치』에서 미쉬낀 공작이 사형대에 끌려가기 전의 묘사는 당시의 기억이다.

‘내가 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다시 살 수 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그림자는 간질이 함께했다. 징역 생활 중 악화된 간질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이 간질을 앓는 인물이 유독 많은 것도 그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말년에는 유전병으로 막내아들을 간질로 잃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아이를 잃은 아낙네가 등장하는데 이는 자신의 분신이다.


또한 그는 가난한 작가였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풍족하게 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작가가 된 후에도 작품을 싸게 팔아 연명했다. 게다가 도박에 열중했으며 그 때문에 돈을 위해 글을 쓰게 되었고 평생을 돈에 얽매여 살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며 『노름꾼』은 도박에 대해 쓴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문호라는 막연한 호칭으로만 알고 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좇다 보니 그 역시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니, 평범하다는 말보다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러시아의 평범한 소시민인 그의 고통스러운 삶이 그의 작품이 되었고 작품이 곧 삶이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고달픈 삶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미쉬낀 공작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그의 삶에서 바랐던 선한 세상의 의미였고 그의 예술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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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틀맨 & 플레이어
조안 해리스 지음, 박상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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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반전을 숨기고 있는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특히 조안 해리스의 『젠틀맨 & 플레이어』처럼 반전에 또 반전을 거듭 예비한 소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얻은 교훈 한 가지는 ‘인물, 혹은 범인의 정체가 아무리 궁금해도 절대로 미리 확인하지 말 것!’이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조급한 성질 때문에 추리소설조차 범인을 미리 알아두고서 읽어나간다. 궁금하다 못해 짜증이 치미는 것보다는 그 편이 훨씬 마음 편하고 추리 과정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재미가 반감된다는 것도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젠틀맨 & 플레이어』를 각자 ‘나’의 시점으로 이끌어가는 두 서술자 가운데 한 사람의 정체가 궁금해졌을 때 당연히 책의 뒷부분을 먼저 들춰봤다. 역시 내가 예상했던 인물이군, 하고 착각하는 데에서 멈춰야 했다. 하지만 재차 확인하자는 심산으로 책장을 더 넘기다가 숨이 멎을 뻔했다. 모르는 편이 나았을 것을 알아버린 당혹감에 휩싸였다. 언제나 후회는 뒤늦다, 는 너무나 평범한 상식을 통감했다. 그러니 이 소설을 읽는다면 눈길보다 먼저 내달으려는 손부터 꼭 붙들어 매두길!

『젠틀맨 & 플레이어』는 세인트오즈월드 문법학교라는 영국 상류층을 위한 사립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은 담장이나 울타리, 철책 같은 것 없이 ‘무단출입 금지’라는 나무 팻말 하나만 세워놓아도 함부로 침입하려들지 않는 권위와 명예와 전통을 지닌 학교이다. 학교 안에 있는 사람이나 학교 밖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무언의 약속 같은 것이다. 학교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감히’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고 명예를 실추시키고 전통을 무시하지 못한다고 자만하고, 학교 밖에 있는 사람은 ‘감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모든 드라마는 욕망이 있어야 성립되기 마련이듯 『젠틀맨 & 플레이어』는 이 ‘감히’를 욕망한 아이로부터 시작된다.


어린 스나이드는 아빠가 세인트오즈월드 문법학교의 사택에 살면서 수위로 일하는데도 코앞에 있는 최고의 학교를 두고 멀리 최하의 학교에 다녀야 하는 현실에 좌절한다. 가난하고 난폭하고 불량한 하류층 아이들이 모여 있는 서니뱅크 종합학교에서, 작고 연약한 몸집에 운동감각마저 없는 스나이드는 다른 아이들이 마음껏 괴롭혀도 되는 먹잇감으로 따돌림당한다. 스나이드는 책을 좋아하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책이라는 것을 들고 있기만 해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서니뱅크가 아니라 ‘거대한 도서관을 갖춘’ 세인트오즈월드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이라는 사물은 어린 스나이드가 자신을 서니뱅크와 분리하고 세인트오즈월드와 동일시하는 대표적인 매개체이다. 또한 세인트오즈월드와 서니뱅크가 현재 무엇에 의해 양극단으로 구별되는지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돈’이다.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계층은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세습되고, 스나이드가 서니뱅크 학생이 되리라는 것은 우연하게 가난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우연치 않게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나이드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세인트오즈월드와 서니뱅크가 ‘돈’이 아니라 ‘책’으로 구별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 스나이드는 세인트오즈월드를 동경하면서 ‘무단출입 금지’ 나무 팻말 밖에서 맴돌다가 안으로 한 발짝씩 점점 깊숙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처음의 한 발짝이 어렵지 일단 걸음을 떼면 두 발짝, 세 발짝, 네 발짝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발짝을 더할수록 ‘살금살금’ 걸음은 ‘성큼성큼’ 걸음으로 과감해진다. 단지 여섯 글자(번역어로!)가 적혀 있을 뿐인 나무 팻말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눌렸던 자신이 한심하기만 하다. 하지만 스나이드가 아무리 세인트오즈월드 안에서 진짜 학생처럼 훔친 교복을 입고 성큼성큼 돌아다녀도, 진짜 학생보다 세인트오즈월드에 대해 더 속속들이 알아도, 진짜 학생 리언과 친구가 되어도 진정으로 세인트오즈월드에 속하지는 못한다. 언제든 자기 정체를 들키는 순간 세인트오즈월드의 ‘무단출입 금지’는 발동될 것이므로. ‘무단출입 금지’는 스나이드가 ‘줄리언 핀치벡’이라는 유령으로 세인트오즈월드에 존재할 때만 무력할 것이므로.


줄리언 핀치벡으로 세인트오즈월드를 떠돌았던 어린 스나이드를 회상하는 서술자는 어른이 되어 역시 자기 정체를 완벽하게 위장하고 교사로 부임한 ‘나’이다. 이 소설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재미이자 반전은 스나이드, 혹은 핀치벡이라는 이름은 물론 쓰지 않는 그 ‘나’가 도대체 누구인지 추리하는 것이다. 『젠틀맨 & 플레이어』를 한창 읽을 때는 나도 오로지 거기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돌아보면, 어린 시절에 열망했으나 끝내 거부당한 스나이드가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 정체를 숨이고서야 비로소 세인트오즈월드에 돌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 쓰디쓴 뒷맛과 함께 더욱 흥미롭게 느껴진다. ‘스나이드’까지 알지는 못했어도 ‘줄리언 핀치벡’은 봐준 리언을 위해, 가 명분이긴 하지만, 사실 ‘나’의 반격과 복수는 자신을 무시하고 거부한 세인트오즈월드의 자격을 심판하기 위한 싸움일 것이다.


여기에서 세인트오즈월드와 서니뱅크를 구분하는 것은 ‘돈’도 아니고 ‘책’도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단지 위선과 허위와 가식을 안으로 숨기느냐, 겉으로 드러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세인트오즈월드의 허상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그 아성을 무너뜨리는 데 몰두하지만, 그 필사적인 몸짓에는 어린 스나이드의 그림자가 동시에 짙게, 그리고 슬프게 드리워 있다. 젠틀맨(곧 100학기 수업을 채우는 노교사이자 이 소설의 또 다른 서술자 ‘나’인 로이 스트레이틀리로 대표되는 세인트오즈월드)과의 대결에서 플레이어(스나이드)는 철저한 계획하에 일방적으로 승리한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도망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젠틀맨이 아니라 플레이어이다. 게다가 그렇게 경기장을 벗어나는 플레이어의 뒷모습이 영광스럽다기보다 쓸쓸하고, 과연 플레이어가 이긴 것이 맞기나 한지 미심쩍기만 하다. 스나이드와 세인트오즈월드의 화해 같은 감동으로 끝났다면 너무 교훈적인 결말로 진부해졌으려나, 이것은 가슴 아픈 데자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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