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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먼 여행 ㅣ 아시아 문학선 2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7월
평점 :
소설에 감정적으로 함몰되면 짙은 여운을 온전히 표현할 길이 없어서 감상에 갈피가 사라진다. 추상적인 느낌을 분명한 언어로 표현하려고 아무리 단어를 골라도 애초에 내가 교감한 느낌과는 미묘하게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 그 간극을 메워보려고 용쓸수록 나 자신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중언부언 문장들이 꼬여간다. 이쯤 되면 답답한 마음으로 지금 이 느낌 그대로 가능한 한 오래 기억할 수 있길 바라면서 체념하게 된다. 앞서 읽은 소설이 그러했다. 로힌턴 미스트리의 『그토록 먼 여행』을 읽으면서는 빡빡하게 짜인 책장을 200여 쪽 넘기기까지 적이 안심했다. 감정의 밀도가 치솟는 소설을 연달아 읽는 일은 생각보다 피로하다. 잘 쓰인 소설이되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할 수 있는 소설은 그럴 때 읽기에 더없이 훌륭하다.
사실 568쪽 중 198쪽은 『그토록 먼 여행』을 마지막 책장까지 넘기느냐 마느냐의 기로일지 모른다. 1900년대 인도 현대사가 낯설고 이국적이라거나, 조로아스터교가 역사 속에 사라진 고대 종교가 아니라 그 명맥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하다거나, 하는 것은 제쳐두고, 거기까지 내내 사소한 갈등을 벌이며 일상을 견디는 노블 가족과 코다다드 아파트 이웃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단조롭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격렬한 사건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대하는 욕심과 아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꿈의 괴리에서 빚어지는 충돌은 한국이나 인도나 별다를 바 없어서 독자의 눈길을 계속 사로잡기에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진다. 그러다가 198쪽부터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의 삶에 RAW(인도비밀해외정보국) 스파이와 거액의 비자금이 등장하면서 기지개를 켜고 몸을 곧추세워 ‘이제 어디 한번 본격적으로 읽어볼까’ 싶은 마음이 동한다.
『그토록 먼 여행』은 1971년 인도의 이야기이다. 우리나라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1979년 살해되기까지 실질적으로 18여 년에 걸친 박정희 유신정권의 독재 체제 아래에 있을 때, 인도도 정치적 고위 권력층의 잇속에 따라 총리 암살, 전쟁, 종교 갈등 등으로 혼란스러운 격변기였다. 1971년 인도는 자와할랄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 총리 체제에서 서파키스탄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기 직전이다. 동파키스탄의 독립(방글라데시)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인디라 간디가 착복하는 비자금 600만 루피가 이 이야기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다.
작가 로힌턴 미스트리처럼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파르시 집안의 가장인 『그토록 먼 여행』의 주인공 구스타브 노블은, 친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왔건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버려 원망하던 친구 지미 빌리모리아에게 편지를 받는다. 지미는 RAW 요원이라는 것을 털어놓고 자신이 보내는 소포를 대신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문제는 구스타브가 비밀스러운 접선을 통해 집으로 가져온 그 소포가 인디라 간디의 비자금 중 일부인 100만 루피의 돈 꾸러미라는 것이다. 인도 화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100루피짜리 100장씩 100다발인 그 빳빳한 지폐 더미는 “어마어마한 액수”로 묘사되어 있고 은행원인 구스타브는 돈벼락의 감회를 이렇게 표현한다. “정말 훌륭해. 24년 동안 이런 냄새를 맡으면서 은행에서 일했지. 절대 물리지 않아. 놀라운 일은 5루피짜리 돈다발과 10루피짜리 돈다발의 냄새가 다르다는 거야. 액수에 따라 고유의 냄새가 있어. 나는 이 100루피짜리 냄새가 제일 좋아.”
이쯤 되면 거액의 비자금을 둘러싼 고위 권력층과 스파이와 개인의 추악한 욕망이 맞부딪쳐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이야기가 스펙터클하게 펼쳐질 것 같다. 그러나 너무 큰 기대는 금물. 작가가 선한 주인공으로 내세운 구스타브는 신실하고 성실한 가장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작별 인사 없이 훌쩍 떠난 일도 배신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아무리 하늘에서 돈벼락이 뚝 떨어졌다 한들 친구를 등지고 가로채어 야반도주할 사람이 아닌 것이다. 단지 지미의 차명계좌를 만들다가 직장을 잃어 가족을 굶기게 될까 봐 두려울 뿐이다. 소시민의 코미디랄까, 돈방석은 우습게도 가시방석이 되어버린다. 스릴 넘치는 액션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 에피소드는 구스타브가 어쩔 수 없이 은행에 돈을 1만 루피씩 입금하다가 100만 루피를 채 입금하기도 전에 지미가 사기 및 공갈죄로 구속되는 바람에 다시 출금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구스타브가 그 일을 들켜서 직장을 잃는 일도 없다. 단지 구스타브가 그 일을 들킬까 봐 내내 전전긍긍할 뿐이다.
전두환 정권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은폐하려고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면서 국민을 바보로 여기고 엉터리 조작을 일삼는 일이 1971년 인도에서도 공공연하게 자행된다. 적어도 로힌턴 미스트리의 소설 속에서는. 인디라 간디가 대표하는 권력층의 부정부패가 순식간에 일개 공무원인 지미의 개인적인 탐욕에 의한 사기로 조작된다. 600만 루피를 요구하는 인디라 간디의 목소리를 지미가 흉내 냈고, 인도국영은행장이 그 성대모사에 감쪽같이 속았다니, 지미가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는 대단한 성대모사 실력을 뽐내는 예능인이 아니고서야 그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가? 하지만 법을 매수하고 언론과 결탁한 최고 권력자는 이치에 맞든 어긋나든, 근거에 합당하든 부당하든 상관없이 형식적인 성명을 발표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만이 아니던가?
자와할랄 네루와 인디라 간디에 대해서는 『세계사 편력』 덕분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 그 책을 처음 읽고서,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가 옥중에서 딸에게 읽히려고 세계사를 직접 써주다니 그 딸은 참 좋겠다고, 그 딸이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나라를 이끌다니 멋지고 굉장하고 흐뭇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부터 딸 인디라 간디를 거쳐 외손자 라지브 간디까지 한집안의 30여 년에 걸친 통치는 무슨 왕조도 아니고 마냥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로힌턴 미스트리에게 네루-간디 가문은 부패 권력의 온상이다. 그들이 이룬 업적이 대단하다손 치더라도 그것으로 나머지 허물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란 엄격한 윤리 의식과 사명감을 요구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그건 싫고 재임 기간 동안 권력을 남용하여 물욕을 채우기 위해 국민을 속였다면 마땅히 심판받아야 한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그토록 먼 여행』이 정치소설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인디라 간디에 대한 배신감이 나를 흥분시켰다. 사실 100만 루피는 인디라 간디의 실체를 목격한 지미가 한 나라의 총리도 전쟁 자금을 빌미로 600만 루피나 해먹는데 그중에 약간은 눈감아주겠지, 하고 홧김에 빼돌린 돈이다. 지미의 행동도 지탄받아야 하지만, 인디라 간디를 위시한 권력층이 그 100만 루피까지 악착같이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더욱 씁쓸하다. 그들이 100만 루피를 회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미에게 누명을 씌워 체포하고 언론에 발표한 후 고문한다. 친구를 살리고 싶으면 하루빨리 지미에게 건네받은 100만 루피를 1루피도 모자라지 않도록 은밀하게 되가져오라는 협박이다. 돈벼락 앞에서도 박봉을 받지 못하게 될까 봐 겁내는 소시민의 간은 콩알만 하지만, 돈에 눈이 멀어 친구를 모른 척할 만큼 비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용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토록 먼 여행』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벽이 등장한다. 어느 떠돌이 화가가 사람들의 노상 방뇨로 지린내를 풀풀 풍기며 모기떼를 불러들이던 코다다드 아파트의 벽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세상의 모든 신(神)을 그리기 시작한다. 화가가 벽을 성화(聖畵)로 채워 나가자 사람들이 한둘 모여들어 자기가 믿는 신 앞에 꽃을 바치고 향을 피워 올린다. 사람들이 오줌을 내갈기던 그 벽은 성스러운 기원의 장소로 거듭난다. 소설의 마지막은 ‘넘치는 하수구의 지독한 악취, 부서진 수도관, 깊게 팬 도로, 들끓는 쥐, 산처럼 쌓인 쓰레기, 열린 맨홀, 박살 난 가로등’을 고쳐달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뇌물만 뜯으려는 공무원’에게 신물이 난 시민들의 가두시위로 끝난다. 그런데 열악하고 비참한 생활환경의 개선을 요구했던 시위는 코다다드 아파트에 이르러 성스러운 벽을 철거하려는 공무원들과 격렬하게 맞선다. 그저 그림이 그려진 벽 따위에 실질적인 이익이 달린 처음 목적을 간단히 내팽개치고 벽 하나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철옹성에 은신한 인디라 간디들이 알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