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테이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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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케네디는 미국 작가인데도 정작 그의 소설에 처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사람들은 프랑스 독자들이었다. 문득 그에게 호기심이 생긴 것은 그런 연유 덕분이다. 프랑스보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더 많이 사랑받는다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떠오르고. 우리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무엇에 매혹됐고, 프랑스 사람들은 더글러스 케네디의 무엇에 매혹됐을까? 물론 나로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대표작 『개미』를 진작 읽으려고 했지만 아직도 손에 잡지 못했고, 더글러스 케네디의 열혈 팬도 아니면서 어쩌다가 국내에 출간된 번역서들을 모두 갖게 되어 『템테이션』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콕 짚어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각 나라 고유의 문학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어느 나라든 독자의 저변을 넓히는 데 순문학은 태생적인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특히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문화를 기반으로 탄생한 프랑스 문학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한마디로 더글러스 케네디는 대중에게 팔리는 글, 즉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적당한 재미와 흥미를 자극하며 술술 읽히는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작가이다. 사실 엔터테인먼트 소설 한 권을 읽고서 순문학까지 들먹이는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지만 『템테이션』이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런 소설로, 무겁고 지루하고 머리 아프게 다가오는 책에 대한 부담감을 떨치고 싶은 독자들의 소구점을 정확하게 공략했다는 생각이 든다. 페이지에 쓰인 대로 즐기기만 해도 좋다!

대형 서점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던 무명의 데이비드 아미티지는 상업 매스미디어의 메카 할리우드에서 말 그대로 ‘자고 일어났더니’ 일약 스타 시나리오 작가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자신을 발견한다. 앞으로 어떤 내용이 전개될까?


하루아침에 스타덤에 오른 많은 스타들이 TV 토크쇼에 나와 눈물을 보이며 고백하곤 하는 이야기가 있다. 각자 사연은 다 다르지만 이야기의 얼개는, 대중의 갑작스러운 사랑에 도취되자 초심이 흔들리고 판단력이 흐려져 자만심으로 오만하게 거들먹거리며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게 됐고, 그로 인한 온갖 부작용으로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들어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다는 고백이 공통적이다. 이 고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록 그때 어리석었지만 그같이 값진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으로 성장할 수 없었으리라는 마무리이다. 한때의 잘못이나 실수가 ‘성장’으로 귀결되지 못하면 아름다운 통과의례로 포장되기는커녕 일말의 감동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데이비드가 밟는 행로도 이 얼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데이비드는 먼저 조강지처 루시를 버린다. 아무도 그의 원고를 알아봐주지 않을 때, 그녀는 연극 무대에서 상연되지도 않을 극본을 강독하는 것만으로 그와 사랑에 빠졌다 할지라도. 그가 가정 생계는 아랑곳없이 서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길 꿈꿀 때, 그녀는 배우의 꿈을 접고 텔레마케터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고단하게 딸과 남편을 먹이고 입혔다 할지라도. 각고의 시간 끝에 데이비드가 마침내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에서 한순간에 “유선방송계의 톰 울프, 비범한 작가라는 소수 엘리트 집단,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풍자 코미디 작가”으로 변신했을 때, 루시는 본능적으로 배신의 기미를 알아챈다. “이제 나를 버리겠군. 이제 나를 버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설령 그녀가 홀로 떠안은 경제적 부양에 대한 책임감에 지쳐서 그에게 가시 돋친 말 “시나리오 하나 못 판 주제에 꼭 프로 작가라도 된 듯 말하는 것 좀 보라지”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할지라도 어차피 그의 배신은 예정된 순서였을 것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제 꿈만 지킨 사람과, 그가 내팽개친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제 꿈을 포기한 사람 사이에는 결국 자괴감, 피해의식, 불신, 의심, 거짓말 같은 것들이 심연처럼 가로놓일 테니까. 그리하여 데이비드는 더는 필요 없는 루시에게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고, 루시는 자신이 더는 필요 없어진 데이비드를 믿지 못한다.


전형적인 전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데이비드에게서 돈 냄새를 맡은 할리우드 유명 인사들이 시시각각 계산기를 두드려 그와의 적정 거리를 셈하며 몰려든다. 샐리 버밍엄도 그런 잇속에 재빠른 여자이다. 데이비드 역시 샐리를 사랑하는 데 자기 성공의 후광이 되어줄, 대형 방송국의 엘리트 중역이라는 샐리의 자리를 무시하지는 못한다. 데이비드는 물론 “서로 통한다는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고 아내의 날선 독설에 깊게 파인 상처를 제 살처럼 핥아주는 운명의 짝, 영혼의 반려자, 혹은 진정한 사랑을 이제야 만났다고 착각하지만 말이다. 데이비드와 샐리는 도식적으로 첫눈에 (자신에게 ‘더 많은 돈’으로 되돌아올지 모르는 상대방의 화려한 이력에) 반하여 할리우드의 공식대로 “현관문을 넘자마자 급히 상대의 옷을 벗겼다”. 첫눈에 반한 남자와 여자가 방문을 열어젖히기 바쁘게 서로의 육체를 탐하면서 옷을 벗기는 장면은 영화마다 너무 많이 등장하여 관능적인 열기를 농밀하게 뿜어내야 마땅한 광경이 클리셰(cliché)나 다를 바 없이 진부해져 버렸다. 이런 클리셰들은 『템테이션』 전체에 골고루 포진해 있는데, 더글러스 케네디가 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한 것이라면 영리했다고 해야 할까?


수백 억 달러 갑부 필립 플렉의 초대는 데이비드 (가짜) 성공의 정점을 찍는 듯하다. 하지만 그 초대에는 구멍 숭숭 뚫린 치즈 덩어리로 유인하는 쥐덫처럼 음험한 조건이 있다. 천문학적인 돈, 전지전능해 보이는 명예, 아름다운 아내까지 전부 가진 남자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단 하나, 데이비드의 작가적 재능을 돈으로 사려 한다. 250만 달러는 데이비드가 무명 시절에 썼다가 팔지 못해 낡은 가방 속에 내팽개친 원고의 저작권과 맞바꾸기에 아깝지 않은 거액인 동시에 필립이 그 저작권을 사들이기에 역시 아깝지 않은 푼돈이기도 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데이비드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려는 필립의 음흉한 음모는, 그가 가지고 싶어 미칠 지경이지만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재능을 가진 데이비드에 대한 열등감, 질투심, 시기심으로 고약하게 뒤틀린 장난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데이비드에게는 거액이지만 필립에게는 푼돈인 250만 달러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원고’는 데이비드의 분신이나 다를 바 없으므로 필립은 데이비드를 사는 데 푼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데이비드 자신이 매긴 자기 가치이다. 스스로를 언제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상품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카리브 해에 있는 사프란 섬, 필립 소유의 “파라다이스”에서 자기 자신을 필립의 푼돈에 팔아넘긴 데이비드가 자신의 다른 원고들까지 필립이 감쪽같이 가로챘다는 사실에 분노했을 때 사실 의아스럽기만 했다. 그 분노의 이유는 자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절망감이나 정체성의 위기의식 때문이 아니라, 마땅히 지불돼야 할 경제적인 대가 없이 필립의 협잡으로 자신을 빼앗겼다는 억울함 때문이다. 데이비드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대신 남아 있어야 할 돈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우여곡절 끝에 필립의 마수를 알아채고 반격하면서 데이비드가 빠뜨리지 않은(어쩌면 절대 빠뜨릴 수 없었던) 행위가 자기 값을 250만 달러에서 300만 달러로 올린 것이라는 사실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300만 달러도 필립에게 푼돈이긴 마찬가지일 테지만 데이비드에게는 그것이 성공이다.


승자는 누구일까? 당연히 데이비드는 아니다. 씁쓸하지만 돈으로 한 인간의 인생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아도 아무것도 잃지 않은 필립의 막대한 자본이다. 데이비드는 자기 자신이라 지칭할 수 있는 시나리오들을 모두 부당한 방법으로 필립에게 빼앗기고도 그의 사기극을 폭로하기는커녕, 고작 300만 달러를 위해 ‘세상이 등 돌렸을 때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준 의리파’로 필립을 포장해 준다. 그리고 자본에 굴복하여 자본의 고물을 얻어낸 것을 실리적인 선택이라고 자랑스러워하며 스스로 의기양양해진다. 그런데 그렇게 ‘멋지게 먹인 한 방’은 그저 데이비드의 착각일 뿐, 무엇으로도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아성으로 건재하는 자본의 위력에 오싹해진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한 것일까? 심지어 더글러스 케네디까지 데이비드의 몰락 원인을 선택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물질적인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는 개인이 자초한 탓으로 돌린다. 그 (가짜) 욕망을 부추긴 것은 필립이 소유한 카리브 해 사프란 섬이 상징하는 물질의 파라다이스이다. 그 섬을 ‘파라다이스’라고 묘사한 것은 데이비드이다. 데이비드의 낙원은 “자가용 비행기, 커다란 창문과 통나무 목재 외관이 단층으로 길게 누워 있는 현대 건축물, 그 건물 양끝의 대성당 같은 탑, 자연 바위로 만든 거대한 수영장, 영화도서관, 집사와 소믈리에, 요트, 7천4백만 달러짜리 마크 로스코 작품, 4천2백 달러짜리 의자, 30g에 160달러짜리 캐비아” 등등이다. 피노키오의 장난감 나라 성인 버전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피노키오에게는 그런 가짜 낙원에 속아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면서 왜 우리는 한없이 이끌리는가? 당신의 파라다이스는 어떠한가? 나는 아직 고고한 척하고 싶다. 데이비드에게 다가왔던 것과 같은 유혹 앞에서 전혀 아무렇지 않은 척 외면할 수 있는 여력이 제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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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러면 아비규환
닉 혼비 외 지음, 엄일녀 옮김 / 톨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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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건 음악이건 컴필레이션이라는 모음집 종류들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다. 여러 작가의 작품집이건 한 작가의 베스트 작품집이건 간에, 대부분의 경우 히트곡의 단순한 모음이거나 유명 작품들 위주로만 꾸며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해당 작가의 다른 작품이 번역되지 않았다든가, 미발표 보너스 트랙이 들어 있다든가 하는 이유)를 제외한다면 가능한 모음집은 잘 사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예외가 있는데 특정 목적을 가지고 새로 만들어진 모음집이라면 절대적으로 환영한다. (가장 쉬운 예라면 영화를 위해 새로 만든 노래가 들어 있는 사운드 트랙 같은 것들이다.)

마이클 셰이본이 기획하고 작가로도 참여한 『안 그러면 아비규환McSweeney’s Mammoth Treasury Of Thrilling Tales』은 위에서 말한 특정 목적에 딱 어울리는 작품집이다. 제목처럼 오싹한 이야기를 테마로 쓰인 작품집이다. 참여 작가들의 면면은 굉장히 화려해 공포, 추리, 범죄, 역사, 판타지, SF 등에서 활약하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관통하는 주제인 오싹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그야말로 ‘장르’ 뷔페 같은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모음집의 가장 큰 장점이겠지만 최소한 읽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물론 그 장점만큼 모든 작품이 다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는 단점은 있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국내판의 제목이기도 한 닉 혼비와 데이브 에거스, 셔먼 알렉시 등의 이야기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책의 말미에 보면 제작 노트가 첨부되어 있는데 이게 꽤 흥미롭다. 함께 실린 그림들과 함께 읽다 보면 이 책의 기획은 숭배하던 문학에 비해 푸대접을 받았던 펄프픽션(값싼 갱지로 만들어진 통속 잡지인 펄프 매거진에 실린 소설로 주로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장르소설이 실렸다)에 대한 재조명이기도 하다. 이 책의 목표는 현재의 유명 작가들이 단편 장르문학을 쓰는 것으로, 과거 위대한 작가들이 위대한 단편을 쓰던 전통을 복구하는 것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외적으로 안타까운 점은 책의 제목은 둘째치고라도 펄프픽션이라는 당시의 분위기를 재현하고자 만든 표지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제작 노트에 있는 그림이 책의 원래 표지인데 검은 줄로 그림을 다 가려놓아서 무슨 그림인지도 알 수 없게 해놓았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에 있어서는 가볍고 통속적인 펄프픽션이라기보다는 유명작가들이 작정하고 써낸 이야기들인지라 힘이 들어가 있는 모습이다. 쉽게 읽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점이 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이런저런 소소한 불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단편집 자체가 너무 반갑고 즐겁다. 단편과 장르를 즐기는 독자이고 단편 자체를 구경하기 힘든 요새라면 가뭄의 단비 같은 책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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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죽이기
아멜리 노통브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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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시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적인 욕망을 그리스 비극의 하나 오이디푸스에 빗대어 설명하는 이론으로 수많은 문학 작품의 근간이 되기도 한다. 남자 아이에게 어머니는 이성이며 사랑의 대상이고 어머니를 얻기 위해 아버지와 같은 위치가 되려 하고 닮아 간다. 하지만 자신의 성기 제거에 대한 위협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게 되고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게 되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극복되는 것이 일반적인 성장의 방식이기도 하다.

아멜리 노통브의 『아버지 죽이기』 역시 제목만 보았을 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따르는 전형적인 소설처럼 보인다. 게다가 뒤표지의 붉은 글자로 된 “모든 사람은 어른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라는 글귀와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작가의 말을 보아도 이런 의심이 더해진다. 아멜리 노통브가 해석하는 아버지 죽이기는 어떤 것일까?

열네 살이 된 조 위프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여러 남자들을 만나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자신이 눈이 맞은 남자를 위해 조를 집에서 내보내게 된다. 쫓겨나게 된 조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마술을 배우기 위해 유명 마술사인 노먼을 찾아간다. 아버지와 같은 노먼과 조가 사랑하게 된 노먼의 여자 친구인 크리스티나를 만나게 되고 가족처럼 살아간다. 18살이 되었을 때 마약 축제에 가게 되고 크리스티나는 마약에 취해 조와 자게 된다. 이후 조는 그들을 떠나 라스베이거스에 와서 부유한 딜러의 삶을 살게 되고 연락이 뜸해 진다. 불법을 저지르다 잡힌 조와 만난 노먼은 조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이는 노먼을 삶에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작가는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가 오이디푸스 식으로 해석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은 뒤집혀 있고 역설적이다. 조는 노먼을 만나기 전에, 이미 자신을 선택하고 사기를 칠 것을 원했던 신비롭고 위압적인 한 남자를 자신의 아버지로 인정했다. 아버지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 아버지에게 선택되는 것을 원했던 것이다. 조가 말했듯이 진정한 아버지는 오래 전 자신을 선택했던 사기꾼이었고 조를 아들로 생각했던 노먼은 철저하게 제 삼자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역설이 되어 버린 이야기는 한 번 더 나아가게 된다. 노먼은 이제 조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하고 조를 계속 따라다니게 된다. 노먼은 ‘아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가 더 큰 괴로움’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 가지만 아버지 역시 아들을 닮아간다. 조와 노먼은 놀랄 만큼 닮아 있지만 서로에게 매혹되지 못했다. 어쩌면 이것이 지독히 현실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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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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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집까지 겨우 세 편만 읽고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영 내키지 않지만, 오가와 요코는 고요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화풍 이야기에서 따뜻한 감동의 밀도를 높여야 한다는 강박을 얼마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나를 완전하게 감싸던 감동의 자연스러움은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서 재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과도한 설정으로 억지 감동을 자아내려는 부자연스러움만 다소 거북하게 아쉬움을 남겼다. 『바다』에 이르러서는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가 충분히 매혹적인 소설인데도 읽는 내내 알게 모르게 나를 불편하게 했던, 그 인위적인 부자연스러움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특히 이 단편집의 표제작인 「바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악기 ‘명린금’의 신기한 이미지로 만들어낸 신비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만 있다. 명린금(울 鳴, 비늘 鱗, 거문고 琴)은 혹등고래의 부레 안에는 날치 가슴지느러미 현을 넣고 겉에는 물고기 비늘을 빽빽하여 붙인 상상의 악기이다. (명린금의 기본 재료로 왜 하필 ‘혹등고래’를 선택했을까 궁금해서 찾아봤다. 혹등고래는 고래들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아름다운 노래로 암컷에게 구애한다고 한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딱 한 사람, 이 악기를 발명한 ‘꼬마 동생’이 유일하다. 해변에서만, 그것도 바닷바람이 불어야 명린금이 소리를 낸다. 번역본 표지의 환상적인 그림은 명린금을 부는 소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일 게다.

명린금의 존재가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이 단편에서 아쉬운 것은 명린금이 아니다. 작가 인터뷰에서 오가와 요코도 꼬마 동생과 명린금의 생생한 이미지가 떠올라 이 단편을 썼다고 말했다. 단지 명린금이라는 특별한 장치를 마련했다면 다른 인물이나 배경은 과도한 설정 없이 좀더 일상적으로 자연스러워야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무슨 사연인지 결혼을 약속하기까지 좀처럼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이즈미 씨, 완벽하지만 수상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어색하게 환영하는 이즈미 씨 가족과의 인사 자리, “독이 있을지 모르니까 주의하시구려” 하고 의미심장한 귓속말을 건네는 치매 할머니, 거대한 몸집으로 사이다를 마시는 꼬마 동생의 존재(왜 하필 ‘사이다’일까도 곰곰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모르겠다) 등 애매한 미스터리만 뭉게뭉게 피워 올리고는 이야기는 뜬금없이 꼬마 동생의 명린금 연주로 끝나버린다. 아무에게나 들리지 않는다는, 순수하게 믿는 자에게만 들린다는, 너무나 모호하고 감상적이고 황급한 결말로 말이다.


「향기로운 바람 부는 빈 여행 6일」은 「바다」보다 훨씬 완성도 높은 단편이지만 생의 아이러니로 마련해 놓은 반전이 제법 익숙하여 신선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열아홉에 오스트리아 남자와 사랑한 고토코 씨는 꼭 돌아오겠노라던 약속을 믿었지만, 이런 이야기에서 대개 그렇듯이 그는 제 나라의 가정을 지키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나, 앳되고 어여뻤을 소녀는 예순넷의 뚱뚱한 미망인이 되고, “황색 사탕처럼 맑은 눈동자와 민들레 솜털처럼 부드러운 금발”을 가졌던 남자는 양로원 병상에서 앙상하게 죽어가는 노인이 되었다. 사랑한 사람들은 청춘의 생기로 찬란했으나, 재회한 사람들은 세월에 볼품없이 사그라져간다.


자신에게 등 돌리고 45년 동안 소식 한 번 없었던 남자가 직접 연락한 것도 아니고 양로원 직원의 형식적인 연락에, 알파벳도 모르는 어수룩한 아줌마가 결연하게 낯선 나라행을 결심하고 한달음에 노쇠한 남자의 머리맡으로 달려온 것은, 그를 잊지 못해 미치도록 보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45년이라는 시간은 아무리 대단하게 사랑했어도 그 강도와 밀도 그대로 사랑을 지켜내기에는 너무나 길고 거세고 모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기적이거나, 대상이 변질되어 그렇게 사랑하는 모습의 자신을, 혹은 영원한 사랑을 사랑하고 있을 뿐일지 모른다. 고토코 씨도 세속적인 시간이 파괴하는 첫사랑의 환상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첫사랑과 확실하게 결별하지 못했다. 다른 남자의 아내로 40여 년을 살았어도, 돌아오겠다는 언약은 했지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파약은 없었던 사랑의 약속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못한 미련한 마음이 여자에게는 아직도 미진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제 고토코 씨는, 자신이 사랑했던 “황색 사탕처럼 맑은 눈동자”는 눈꺼풀 아래 숨기고 “민들레 솜털처럼 부드러운 금발”마저 다 잃어버리고서 부스럼투성이 두피만 드러난 노인을 애잔하게 지켜보며 영원히 이별한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남자가 아니라, 부여잡지도 내려놓지도 못한 첫사랑의 감정 자체와 이별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 터. 그러니 병상의 노인이 누구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이드」에는 기억에 제목을 달아주는 초로의 신사와 어린 가이드 소년이 등장한다. 그러고 보니 오가와 요코는 어른과 아이가 순수하게 교감하는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는 수학자와 가정부의 아들 루트,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서는 거구의 체스 마스터와 소년이었던 리틀 알레힌, 『바다』에서는 「바다」의 이즈미 씨 애인인 ‘나’와 명린금 연주자 꼬마 동생, 「병아리 트럭」의 호텔 도어맨과 실어증 소녀. 지금 읽고 있는 알베르토 망구엘의 『책 읽는 사람들』에 따르면 이것은 오가와 요코의 ‘카펫 무늬(예술가의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다루어지는 주제나 특징)’쯤 되려나.


하지만 정작 이 단편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대를 초월한 교감과 신뢰와 우정보다, 구상의 언어로 추상의 기억을 여닫는 열쇠를 만드는, 전직 ‘시인’이자 현직 ‘제목 상점 주인’인 신사의 작업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잊고 싶지 않은, 잊어서는 안 되는, 그리하여 영원히 간직해야 할 기억에 제목을 붙이면 그 기억을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를 마음속에 확보해 놓는 셈이다. 아무리 오래전일지라도, 복잡할지라도, 길지라도 열쇠말만 떠올리면 그 기억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괜히 거창하게 꾸미거나 거드름 피우지 않는 거란다. 평범한 말에 진심이 깃들어 있거든.”


이사벨 아옌데의 사랑스러운 단편 「두 마디 말」에서는 벨리사가 말(言)을 판다. 그녀가 말을 파는 데도 원칙이 있는데 신사의 그 말과 통한다. 판에 박힌 말, 포장된 말, 가식적인 말, 위선적인 말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말, 진심이 담긴 말, 그리하여 “세상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않을 자신만의 말”만 판다. 진심 없이 진심인 양 가장하는 말 혹은 언어는 세상의 모든 미사여구를 다 늘어놓아도 힘을 쓰지 못한다.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미사여구를 덧댈수록 힘을 점점 잃어갈 뿐이다. 평범해도 진심에 명징하게 가닿는 말만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기억도 끌어올릴 수 있는 법이다. 이런 말은 과장된 몸짓과 소리로 웅변하지 않고 그저 귓가에 가만히 속삭이기만 해도 마음속에 또렷하게 각인된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신사는 고독한 여행에 자신만의 관광 가이드로 동행해 준 소년을 위해 그날 하루의 기억을 담은 제목을 선사한다.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다.” 아, 힘이 스르륵 빠졌다. 그때껏 「가이드」를 읽으면서 내 멋대로 키워온 기대에 배신당한 기분이랄까. 물론 영혼이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추억 하나쯤은 있다. 그 문장은 신사와 소년이 서로에게 공명했던 그날의 기억을 불러내는 열쇠말이 될 수 없다. 일반론이랄까, 그 문장은 “시인은 왜 그만두셨어요?”라고 묻는 소년의 말에 신사가 답한 말이기 때문이다. “시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주 많지만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거든.” 신사의 대답에도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제목 상점을 열긴 했지만 그 자체가 사람들의 기억 혹은 추억을 소재로 시를 짓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사람에게는 반드시 시가 필요하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 「버터플라이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이다. 중학생 시절에 타자기를 구경했다. 언니가 상고에 다녔던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실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도 타자기를 떠올리면 아련한 향수와 작가의 낭만에 대한 동경을 품게 된다. 올림피아 타자기를 예찬한 폴 오스터(『타자기를 치켜세움』)도 그렇지만, 미스터리 드라마 <제시카의 추리 극장>에서 추리소설 작가이자 탐정의 역할을 했던 제시카 할머니가 창가에서 타자기를 두드리던 풍경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 속의 타자기는 그리 커다랗지 않았다. 앉은뱅이 찻상 위에 충분히 올라갈 크기였다. 활자 키의 배열도 지금 키보드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 단편과 별 상관이 없는데도 특별할 것 없는 추억까지 잡다하게 뒤진 것은 일본식 타자기의 모양과 크기가 꽤 달랐던 듯해서이다.


오가와 요코는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에 일본에서 사용되던 타자기를 자세히 묘사했다. “책상 위에 설치된 일본어 타이프 기계는 너비가 1미터쯤 되고 철제 판에 활자가 빈틈없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중심부에 사용 빈도가 높은 활자, 예컨대 히라가나나 숫자, 의학 용어에 자주 등장하는 한자 등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한글 자모 24자와 알파벳 26자에 비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합쳐 92자에다가 한자까지 병기하는 일본어를 생각하면 일본식 타자기는 찻상으로 어림없을 만도 하다. 어쩌면 이 단편에 등장하는 버터플라이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가 의대 대학원생들의 논문을 특수하게 취급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어쨌든 의학 분야에 따라 자주 쓰이는 용어가 있고, 그 용어를 만들기 위한 활자는 그만큼 닳고 깨져서 망가지기 쉽다. 게다가 ‘나’는 타이프 사무소의 타자기에 아직 숙련되지 않은 초보 타이피스트이다.


이로써 「버터플라이 일본어 타이프 사무소」에는 하루 종일 타이프 치는 소리와, 간혹 교정을 위해 타이프 원고를 낭독하는 타이피스트의 목소리, 그리고 망가진 활자를 3층 활자 관리인에게 조용히 교환하는 속삭임만 단조롭게 울리는데도 관능적인 에로티시즘으로 숨 막히도록 부풀어 올라 팽팽하게 긴장될 준비가 된 셈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 누구에게도 신체적인 접촉은 없다는 사실이다. 단지 “꽃 속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춰진 꿀 한 방울을 빨아올리기 위해 꽃잎을 흔들며 암술 속에 더듬이를 뻗고 날개를 바들바들 떠는 나비”처럼 활자판에서 글자를 찾는 타이피스트들의 부드럽지만 강력한 손길, “젖빛 유리 저편에서 하늘색 셔츠와 섬세한 납빛 손가락”만 보이는 활자 관리인, 망가진 활자 ‘자궁 질부 미란(糜爛)의 미(糜), 고환(睾丸)의 고(睾), 새살 돋을 질(膣)’을 활자 관리인에게 건네는 나, 그 활자들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고, 숨을 불고, 입술로 덥히고 혀로 핥으며” 고치는 활자 관리인이 있을 뿐이다. 특히 이 단편에서는 수(數)와 체스의 세계에서 매혹적인 의미를 찾아냈던 오가와 요코만의 재능을 한껏 발휘해서 활자에 숨은 에로스로 독자를 미혹시킨다.


「은색 코바늘」, 「깡통 사탕」, 「병아리 트럭」에 대해서는 별로 남겨둘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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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고
    from MI 2018-07-20 21:28 
    어느 영화에 깔린 복선과 설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개연성과 작품성을 비판하는 관객이 있다고 하자. 잘못은 있는가? 누구에게 있는가? 여러 답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반론으로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라고 말하지 않을까?그래서 이런 글을 봐도 어쩔 줄 모르고 고민만 되풀이하게 된다. 몇 가지만 덧붙여 보도록 한다.1 "고요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동화풍 이야기에서 따뜻한 감동의 밀도를 높여야 한다는 강박"과 "인위적인 부자연스러움"그런 강박이 있는지 알 수 없
 
 
 
지상 최고의 맛 - 맛의 비밀을 찾아 떠난 별난 미식가의 테루아 탐험기
로완 제이콥슨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건 외국이건 TV를 보다 보면 절대로 빠지지 않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음식에 관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맛집에 관한 프로그램은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데 맛집에 대한 폐해도 많아 고발 프로그램이 나오기도 하지만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면 눈이 즐거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어디 TV뿐이랴 블로그나 게시판을 둘러보아도 음식 이야기는 빠지는 법이 없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식욕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 중 하나니 말이다.

로완 제이콥슨의 『지상 최고의 맛』은 바로 이 음식에 대한 이야기이며 자연이 만들어내는 맛을 담은 책이다. “테루아를 알면 지상 최고의 맛과 만난다!”는 카피가 큼지막하게 눈에 띈다. 테루아란 무엇인가. 흔히 테루아는 토양과 기후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저자는 테루아의 의미를 끝없이 확장하여 자연 조건과 재배자의 열성 등 식재료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를 통틀어 테루아라 말한다. “자연은 장소마다 서로 다른 거래를 한다. 한 지역을 규정하는 바람과 파도와 빛과 생명의 패턴이 거기서 자라는 동식물 안으로 흘러든다. 그것이 테루아다.”

파나마의 커피로 시작하는 이 책은 굴, 연어와 같이 자연 그대로가 재료인 것들과 초콜릿, 와인, 치즈와 같은 인간의 손을 거쳐 음식으로 탄생하는 것도 있다. 다른 미식 관련 책들과 다른 점은 음식으로 탄생한 재료도 단순한 소개 이전에 자연적, 생태적인 근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조건 자연 그대로의 음식만을 부르짖는 것은 아니다. 초콜릿이나 와인을 만드는 회사를 방문해 회사의 철학과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한 장이 끝나는 마지막에는 소개한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소개 해 주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독특한 점은 사진이 없다는 것이다. 간단한 삽화가 전부인데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건 간에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다.

한 끼를 때운다고 쉽게 이야기하고 짧게는 30분이면 끝나버리는 식사일지라도 음식이 차려지기까지의 과정은 오랜 시간과 정성의 산물이기도 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자란 벼로 지은 쌀과, 배를 타고 나가 잡은 생선, 간단한 콩나물무침마저도 콩을 며칠을 키워 만든다. 이런 재료들을 삶고, 굽고, 무쳐서야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으니 먹는다는 것 자체가 시간과 정성을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패스트푸드라는 것도 먹는 기준에서의 이야기지 재료가 만들어지는 시간이 긴 것은 매 한가지다. 최불암 씨의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한국인의 밥상’을 보고 있자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고 군침이 돈다. 순대를 큼지막하게 썰어 넣고 끓이는 순대국밥, 젓갈향이 가득한 김장김치, 산에서 캔 나물무침,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의 테루아다. 인간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자연을 파괴해야 한다. 하지만 자연이 있어야 인간도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할 터, 삶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들 때문에 내 맛은 물론이거니와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으니 서글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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