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넘브라의 24시 서점
로빈 슬로언 지음, 오정아 옮김 / 노블마인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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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여전히 종이책은 많지만 그것에 대한 관심은 줄었노라고. 나이가 어릴수록 책보다는 디지털기기에 관심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할 듯싶다. 터치 한 번에 웹사이트, 동영상, 게임, 디지털로 된 책까지 휙휙 바꿔볼 수 있으니 무겁고 빽빽하게 글자가 들어찬 책에 관심이나 있을까. 서점도 마찬가지다. 값싸고 편한 온라인 쇼핑은 동네 서점을 멸종시켰고 대형 서점만 남아 있는 것이 현대의 우리 모습이다. 몇몇의 사람들은 종이책은 죽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나 역시 종이책을 훨씬 더 사랑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어떤 모습일까? 특히 유행에 민감하고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흡수하는 우리나라―최신  기술 자체를 흡수한다는 것이 아니라 최신 기술로 생산된 제품을 흡수한다는 것, 그에 반하는 것들은 빨리 사장시켜버리는 것은 우리만큼 빠른 나라가 있을까―에서만큼은 서점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낯선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서점이라는 말 자체가 향수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

로빈 슬로언의 『페넘브라의 24시 서점』은 어쩌면 이런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 자체도 트위터 회사의 매니저로 일하면서 이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하니 오늘날 서점의 이야기로는 딱 맞지 않은가. 실제 이 이야기는 오래된 고서점과 구글러와 컴퓨터라는 디지털로 대표되는 이야기가 맞물려 펼쳐진다. 이렇게 배경만을 놓고 보자면 현실에 너무 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싶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판타지에 더 가깝다.

평생 <용의 노래 연대기>라는 한 권의 책만을 읽은 클레이 재넌은 디지털 회사에서 실직 후 우연한 기회에 '페넘브라 24시 서점'의 구인광고를 보고 야간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손님도 오지 않는 이 서점이 왜 24시간 문을 여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점 뒤쪽의 책을 한밤중에 헐레벌떡 달려와 빌려 가는지 궁금해 하던 주인공은 서점의 규칙을 어기고 비밀의 책을 열어보게 되는데, 책은 수상한 암호 같은 글들로 가득 차 있었다. 컴퓨터의 3D 모델링 언어를 이용해 이 암호를 해독해 냈지만 이 일을 계기로 500년 동안 영업을 해 오던 페넘브라 서점을 불은 꺼지고 주인은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재넌은 친구들과 행방불명된 페넘브라 씨, 그리고 500년에 걸친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아날로그적인 활자와 디지털의 이야기가 맞물려 있지만 뒤로 갈수록 판타지 어드벤처 같은 이야기가 펼쳐지며, 그 시작만큼은 흥미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비밀결사처럼 보이는 단체의 암호 해독을 통해 영생을 뒤쫓는 이야기와 그 진정한 의미가 밝혀졌을 때의 그 허탈함이라니, 활자가 가지는 의미를 안다면 이런 뻔한 클리셰였던가 하고 씁쓸한 맛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재미있다. 먼지가 훌훌 날리는 고전적 암호로 가득한 고서와 디지털 북스캐너가 등장하는 이야기라니, 우리는 지식에 관한 한 아날로그 최후의 보루인 종이책과 최첨단의 기술 사이를 모두 경험하고 있는 즐거운 세대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활자의 발명만큼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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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샤일로에서 본 것 - 미국 남북 전쟁 소설선 아모르문디 세계문학 2
앰브로즈 비어스 지음, 정탄 옮김 / 아모르문디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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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욕망의 발현이다. 그 욕망의 시작은 한없이 복잡하지만 드러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종교전쟁이나 영토분쟁, 자원전쟁처럼 겉으로 드러난 목적은 한없이 단순해 보인다. 미국에서 벌어진 내전인 남북전쟁(The Civil War)도 마찬가지다. 노예해방이라는 거룩한 목적을 가진 전쟁으로 단순히 알려져 있지만 그 내면이 가진 욕망은 역시 복잡하다. 실제로 노예제를 지지했던 남부에서조차 노예를 소유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노예제에 대한 우월함과 부유함의 상징에 대한 도전에 반발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남부의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조차도 노예제도는 남부의 자존심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을 터, 이것이 훼손되는 것을 전쟁을 통해서라도 막으려는 사람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실제로 노예해방 이후에도 흑인들에 대한 대우가 거의 변함이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물론 외적으로 드러난 그 의미만큼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복잡한 욕망이건 단순한 외면이건 전쟁의 모습은 어느 것이나 똑같다. 참상이다. 부모형제를 잃고 연인을 잃고, 자신의 신체마저 잃어버리는 비극 이외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목적이 숭고해도 그 과정은 참혹한 모습들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쟁이다.

미국 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남북전쟁은 노예해방전쟁이라는 단순한 이면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것도 마거릿 미첼이라는 작가가 아닌 비비안 리의 스칼렛 오하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이처럼 전쟁은 그것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끝도 없는 비극일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화의 배경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앰브로즈 비어스는 낯선 작가다. 그는 저널리스트이며 작가였고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신념과 개인적인 사정으로 군에 자원입대하여 남북전쟁을 겪었다. 이 전쟁은 비어스가 일생에 겪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어스가 쓴 단편들은 공포와 남북전쟁에 관한 이야기들로 전쟁에 대한 것 뿐 아니라 공포에 관한 이야기들도 그가 겪은 전쟁의 생생하고 공포스러운 체험이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말년에 멕시코 내전에 종군기자로 참여했다가 행방불명된다. 『내가 샤일로에서 본 것』은 비어스가 쓴 남북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들이기에 그 생생함이 더하다. 소설이기보다는 전쟁의 단면들을 기록한 수기에 가깝다. 실제로 이야기 속에는 전쟁에 대한 참상들과 더불어 전쟁 자체의 아이러니함과 인간의 비이성성에 대한 냉소적 풍자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런 냉소도 전쟁이라는 비현실적인 참혹함에 이성을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연민에 가깝다.

“허! 과연 그 무엇이 이들을 홀려 전쟁이 지원하게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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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연애수업 - 31편의 명작 소설이 말하는 사랑과 연애의 모든 것
잭 머니건.모라 켈리 지음, 최민우 옮김 / 오브제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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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작품들이 사랑을 주제로 즐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를 제외하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사랑 때문에 즐거워하고 아파하고 눈물 흘리지 않았을까? 사랑은 그런 것이다. 천국과 지옥을 들락날락하는 것. 회사에서 연애하고 직장에서 연애하고 모든 것이 연애로 통하는 우리나라 TV 드라마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일 터, 사랑이 없는 삶은 무미건조한 것뿐이라는 말도 어쩌면 영 틀린 것이 아닌 것이다. 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전부터 현대의 소설까지, 비록 사랑이 주가 되지는 않더라도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축이었으며 사랑과 연애는 종교, 이념, 법률보다 위에 있다. 사랑이여 영원할지니.

『제인 오스틴의 연애수업』은 두 남녀 작가인 잭 머니건과 모라 켈리가 엄선한 31편의 고전소설을 통해 입체적이고 생생한 소설 속 인물들의 실전을 통해 사랑과 연애를 이야기한다. 고전이 달리 고전일까, 현대의 모든 사랑의 클리셰는 고전으로 발견할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 서로의 사회적 지위가 사랑을 방해하거나―『오만과 편견』, 아들의 연인을 질투하고 갈라놓으려는 엄마나―『아들의 연인』, 불구가 된 남편 대신 섹스 파트너를 찾거나―『채털리 부인의 사랑』, 바람둥이와 불륜을 저지르고 버림받아 자살하거나―『보바리 부인』처럼 고전에는 온갖 사랑과 연애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약간은 억지스러워 보이기는 해도 남성들의 캐릭터를 통해 사랑을 이야기하려는 부분도 있다. 헤밍웨이와 멜빌의 소설에서 마초적이고 알코올 중독자이며 집착하는 캐릭터들 역시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 등장한다. 흰 고래에 대한 집착이 여성과의 관계로 어떻게 치환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고래잡이 남편을 둔 여자라면 다른 작살잡이도 많다는 친절한 충고까지 해준다. 이처럼 몇 작품에서는 무리하게 사랑으로 모든 것을 끼워 맞추려는 억지가 돋보이기도 한다. 채털리 부인은 억제된 성욕의 분출보다는 섹스 후에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에 촛점을 맞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은 『제인 오스틴의 연애수업』이다. 원제의 경우 <Much Ado About Loving>으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Much Ado About Nothing, 헛소동>의 패러디임에 분명하고 연애소동쯤으로 번역이 될 듯하다. 책이 잘 팔려야 하는 출판사의 절박한 처지가 이해되기는 하지만 책의 제목마저도 요즈음의 유행이 되어버린 강좌나 강의 식으로 철저히 따르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긴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이 제목이 오히려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소개되는 고전들에는 모든 연애의 모습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연애가 전부는 아니다. 목차를 쭉 훑어보고 반드시 해당되는 책을 먼저 읽을 것을 권한다. 그렇지 않으면 해당 작품에 대한 바보 같은 인상이 심어질 우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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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 - 치열하게 살고, 장렬하게 죽은 명작 속의 인생들
서지문 지음 / 이다미디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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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삶이요, 식사라고 일갈하던 시대도 있었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독서는 아주 고풍스러운 취미가 된 것이 사실이다. 이를테면 우표수집처럼 말이다. 어쨌거나 비디오와 하이퍼텍스트가 넘쳐나는 시대에도 고전적인 독서는 취미로의 명맥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우아한―쫌스러워 보이는 취미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독서를 취미로 인정하고 본다면 꽤나 즐거운 취미임에는 틀림없다. 맛나게 끓여낸 차나 과일을 옆에 두고 작가의 세계로 풍덩 하고 빠져 드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까?

『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은 저자가 스무 편의 영국소설을 소개하며, 시대를 관통하는 이 소설들에 드러난 삶의 모습과 시대와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국의 소설인 이유는 당시 영국의 18~20세기는 오늘날 서구를 만든 근대화의 과정과 부작용에 대응하는 인간의 저항과 몸부림의 시대로 당대를 투영한 이 시대의 소설들이 현대의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근대화의 과정 속의 영국의 모습과 삶은 오늘날 '현대화'도 대체된 우리의 모습과 놀랄 정도로 닮아 있다. 저자 역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책의 구성은 평범하다. 책의 리뷰, 줄거리, 작가 소개로 스무 편의 소설이 이어진다. 중간에 영국 소설에 대한 해설이 첨부되어 있는 것을 뺀다면 다른 책과의 차별점은 보이지 않는다. 소설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소설 자체를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독서 이후에 보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

독서는, 비슷한 고전적인 취미인 음악 감상과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문화적인 취미와는 비슷하지만 반대로 몸을 써야하는 스포츠 같은 취미와는 다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전정보가 해가 될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자전거 도로의 경치가 좋고 길 상태가 좋다는 것이나 특정 자전거 메이커의 탑승 소감 같은 사전정보는 스포츠 같은 취미를 즐기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독서나 영화 감상 등에서는 이런 정보가 도움이 될까? 『Y의 비극』의 내용은 이렇고 결말은 이렇더라, <올드 보이>의 주인공은 이래서 갇혀 있더라 같은 사전정보를 알게 되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작품의 리뷰를 사전에 읽는 것은 자신만의 독해를 방해할 위험이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독재자에게는 자신이 꿈꾸던 『멋진 신세계』의 이야기일 수 있지 않을까? 『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은 좋은 독서 길잡이일수 있겠지만 책을 직접 읽으려는 독자에게는 책이 우선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전거를 탄 소감을 백번 읽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직접 타봐야 얼굴에 맞는 바람이나 발의 느낌을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독서도 마찬가지로 읽으며 느껴야 한다. 모든 취미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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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뮈스 -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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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학교 다닐 때의 무조건적인 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피상적인 것들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경우인데 이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차라투스트라가 조로아스터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에라스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에라스뮈스라는 이름을 듣게 되면 『우신예찬』이라는 연결고리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에라스뮈스가 누구인지, 『우신예찬』이 무슨 책인지도 모르지만 어쨌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에라스뮈스가 아닌 에라스무스라는 기억이겠지만 말이다.

르네상스는 14세기에서 시작하여 16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하며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예술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종교 중심의 사상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사상인 인문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는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시기였지만 인간의 정신에는 그 어떤 것보다 충격의 시기이기도 했다. 에라스뮈스는 이 폭풍 같은 시기에 신본주의의 경직된 사고방식을 시정하려 함으로써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이 책은 에라스뮈스의 평전으로 그의 삶에서 사후의 평가까지를 보여준다. '광기에 맞선 인문주의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은 에라스뮈스의 출생부터 시작한다. 로테르담 사제와 의사의 딸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에라스뮈스는 어린 시절을 수도원에서 보냈다. 에라스뮈스는 라틴어에 몰두했으며 시인에 대한 꿈을 키웠다. 신부 서임을 받고 주교의 비서로 보내던 그는 이후 파리대학에서 신학연구에 몰두한다. 에라스뮈스는 『격언집』과 『대화집』 등의 저작을 통해 고전정신을 의욕적으로 유통하려 했다. 이후 『우신예찬』은 이런 에라스뮈스 인본주의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하다. 『우신예찬』을 통해 유익한 어리석음이 진정한 지혜라는 것, 이에 반해 망상에 빠진 지혜는 완전한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 책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상식적 풍자로 경쾌한 필치를 보였으나 면죄부, 기적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 수도사의 질투 등과 같은 기성 종교에 대한 비판도 포함시켰다.


“에라스뮈스가 가는 길은 중도 또는 중도라고 보는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타협자가 아니었다.”―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에라스뮈스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쪽에서 비난을 받았다.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주체 모두에게 비난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양측 모두 에라스뮈스를 거부할 수 없었는데 그와 같은 온건하고 지적이며 중도적인 세력들은 종교적 증오를 뛰어넘는 완충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에라스뮈스는 타협이 아닌 보편적인 자비로움을 외친 인문주의자였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닐 지라도 광기로 얼룩진 중세의 혼란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지키고자 애쓴 고독한 인문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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