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스트라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미겔 시후코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미겔 시후코는 소설 어디쯤에서 제목 ‘일루스트라도Ilustrado’라는 스페인 말이 필리핀에서 누구를 가리키는 데 쓰이는지 설명했다. 몇 글자라도 끼적이게 되면 그 부분을 정확하게 인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나 당최 못 찾겠다. 따로 표시해 놓지 않더라도 어느 맥락에서 튀어나온 설명인지 기억해 놓으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또 스스로를 속였다. 지금은 어느 맥락이었는지도 어렴풋하기만 하다. 내 나이의 기억력은 의지할 만한 것이 결코 아님을 잊지 말자(나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지금 읽고 있는 책의 몇몇 부분에 황급히 북다트를 끼워두었다). 아무튼 정확한 문장은 생각나지 않지만, 대충 일루스트라도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필리핀을 개혁하려는 지식인’을 뜻하는 말이다. 쉽게 말하면 유학생인 셈이다. 다만 여러 용도로 쓰일 수 있는 개인적인 이력 한 줄이 아니라 좀더 공적인 사명감이 부여되어 있는 지칭이다. 미겔 시후코의 소설은 그 일루스트라도라고 자칭하거나 지칭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심 일루스트라도 둘, 크리스핀 살바도르와 미겔 시후코이다. 크리스핀은 필리핀에서 사랑과 비난을 동시에 받는 국제적인 작가로 뉴욕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자발적인 망명 작가’를 자처하는 그는 자신을 따돌리는 필리핀 문단에 ‘거장의 귀환’을 확인시킬 소설 <불타는 다리>를 야심차게 집필 중이다. <불타는 다리>에는 필리핀의 권력과 돈을 틀어쥔 정재계 거물들의 부정과 부패와 위선을 폭로하는 내용이 적나라하게 담겨질 것이다. 『일루스트라도』는 그런 크리스핀의 의문사에서 시작한다. 호의적인 관심이든 악의적인 관심이든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불타는 다리>는 사라지고 크리스핀은 뉴욕 허드슨 강에서 시신으로 떠오른다. 미겔은 그의 죽음에 대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의혹을 품고 필리핀으로 돌아와 그가 남긴 이름 다섯 개를 좇으면서 스승이자 친구인 크리스핀의 전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이후 내용은 크리스핀이 남긴 책들과 인터뷰, 크리스핀에 대한 비평가의 악평과 지인의 이야기, 크리스핀이 일으킨 소란에 대한 신문 기사와 인터넷 댓글, 미겔의 크리스핀 전기 등에서 인용한 토막글들과 함께 크리스핀의 미스터리를 쫓는 미겔의 여정이 줄곧 이어진다.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중요한 장치 역할을 하는 이 인용들은 크리스핀이 실제 인물이 아니듯이 작가가 전부 만들어낸 것들이다. 『일루스트라도』 전체에 걸쳐 조각조각 해체하여 배치해 놓았는데, 그 덕분에 메타픽션의 분위기는 달아오르고 수수께끼는 깊어진다. 대신 작가가 아무리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배치해 놓았어도,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을 길 없는 독자는 암초처럼 불쑥불쑥 등장하는 인용들에 걸려 넘어지기 쉽다. 이 인용들을 해체 이전의 퍼즐로 짜맞추려는 시도도 공이 많이 들 것이다(나는 잠깐 시도해 보려다가 형편없는 기억력에 의지해 책장을 앞뒤로 수없이 뒤적일 생각을 하니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만 대강 그려보건대 수고만 감수한다면 가능한 작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즉 가독성이라는 것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메타픽션을 좋아한다면 이 정도의 장애물은 유쾌하게 도전해 볼 만한 것이다. 인내심은 다소 필요하지만, 미겔에게 이입하여 이 인용들을 단서 삼아 크리스핀의 삶과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탐정 기분에 빠져들 수 있다.


인용문들 외에 크리스핀이 이름 다섯 개를 남겨놓았다. 딩동 창코 주니어, 마르셀 아벨라네다, 누레딘 반사모로, 마르틴 신부, 둘씨네아. 그 이름들은 익숙하지 않아서 기억하기도 어렵지만, 각각 특정 계층과 유형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꼭 필리핀에만 있지는 않다. 이들은 다른 이름으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 존재한다. 딩동 창코 주니어는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 횡령을 일삼으며 부패를 발판으로 대기업을 세운 총수를 대표한다. 누레딘 반사모로는 소수 종교(필리핀 무슬림) 출신의 입지전적인 야당 지도자로, 종교를 뛰어넘은 정치를 표방하면서 정세를 읽고 줄타기와 힘겨루기에 교활한 정치가를 대표한다. 마르틴 신부는, 의지할 데 없어 종교라도 부여잡는 하층 계급의 쌈짓돈을 착복하여 대저택에서 호의호식해도,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맹신자 혹은 광신도 무리들을 몰고 다니면서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교주를 대표한다. 그러고 보니 다수의 사람을 이용해 먹는, 그래서 추악한 욕망으로 가장 먼저 썩는 경제계, 정치계, 종교계가 다 모여 있구나.


크리스핀이 남긴 이름들 중 이 세 사람은 사실 미겔이 굳이 만나지 않아도 필리핀 언론에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떠들어댄다. 미겔이 크리스핀의 지인들을 만나 그의 발자취를 더듬는 동안 필리핀의 사회적 이슈들은 모두 그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사건들이 어지럽게 난립하다가 서로 도화선으로 작용해, 폭우가 쏟아져 마닐라 곳곳이 잠긴 날의 대시위로 폭발한다. 가정부 살해 사건과 무죄 판결, 그에 분노한 가정부의 연인이 벌인 인질극. 대기업(폭죽 공장)의 폐수 무단 방류와 환경지킴이 세계파수꾼의 시위. 무슬림 과격 단체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폭탄 테러들. 횡령 혐의를 받는 마르틴 신부의 체포. 여기에 댄스 가수 비타 노바 야동(그 야동에는 폭탄 테러가 계엄령을 발동하여 권력을 이어가려는 대통령의 자작극이라는 증거가 담겨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의 실체까지. 모양은 다를지라도 이 정신없는 사건들은 결코 낯설지 않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씁쓸하게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애인이 억울하게 살해되고 그녀를 살해한 자들이 뇌물을 써서 불합리한 무죄로 풀려난) 전후 사정을 참작한다 해도 가정부의 연인이 인질범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없지만, 사람들은 사랑을 잃은 슬픔과 복수로 인질극을 낭만화하여 잘생긴 그에게 열광하며 옹호한다. 대기업이 불법을 자행해도 ‘대기업이 잘못되면 더욱 가난해질지 모른다’는 논리로 대기업을 걱정하고 지지한다(정말 그런가?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 자신이나 걱정하세요!’라고 말하고 싶다. 대기업은 가소로운 당신들을 비정하게 이용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테니. 대기업의 불법도 당신들이 눈감아주고 있으니. 쥐가 고양이 생각을 끔찍이도 해주는 격이다). 사제의 이중생활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신자들은 두 눈과 두 귀를 몽땅 틀어막고 그를 석방하라는 대규모 집회를 벌인다. 그의 거짓에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가 횡령하기 전에 자신들이 알아서 조공했어야 했다는 태도이다.


그리고 마침내 대시위의 날,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오고 대기업의 폭죽 공장이 불꽃 축제처럼 폭발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이 이 소설에서 가장 강렬하고 아름다운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압권이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의 모든 혼란스러운 이야기가 이 장면 하나를 향해 응축됐다가 순식간에 대폭발을 일으키면서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한 불꽃놀이를 벌인다.


“필리핀 퍼스트 코퍼레이션 폭죽 공장이 화염에 휩싸였다. 사방으로 불길이 솟는다. 폭죽이 하나, 둘, 여기저기서 빵빵 터진다. 진짜 폭죽이 하늘로 치솟는다. 녹색, 파랑, 노랑. 펑펑 튀는가 하면 휘이익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그러더니 동시다발로 터진다. 거대한 오렌지색 불꽃이 빗속에서 시들어간다. 무지갯빛으로 폭발하다가 파란 불꽃 덩어리가 인근 비타 노바 광고판을 비춘다. 시뻘건 바람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예수만이 구원이시다’라고 쓴 간판을 때린다. 네온사인 글자들이 부서져 유리가루가 되어 떨어진다. 더 많은 폭죽이 터진다. 그러더니 아예 공장 건물 한 동이 화염 덩어리로 변한다. 허연 건물이 해골처럼 비틀거리더니 강물로 쓰러진다. 화염이 강 표면으로 번져 나가는 것이 마치 휘발유에 불이 붙은 것 같다. 오렌지색과 노란색 불덩어리들이 천천히 번져나다가 오염된 물 위로 솟아오른다. 이제 강이 화염에 휩싸였다. 물이 불타고 있다. 머리칼 타는 냄새, 유황 냄새, 설탕 타는 냄새 같은 게 코를 찌른다. 먹구름 낀 낮은 하늘 아래 화약 연기가 피어오른다. 멀리 수평선까지 동틀 녘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크리스핀을 죽인 범인은? <불타는 다리>는? 크리스핀의 전기는? 여기쯤 책장을 넘기면 더는 궁금해지지 않는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진다. 미겔과 크리스핀이 묘하게도 닮은꼴이라는 점, 그들 둘 다 어느 정도 반골 기질의 일루스트라도라는 점, 그러나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와 그 자손들이 대대손손 잘 먹고 잘사는 우리나라처럼 필리핀도 그런 기득권층이 나라의 핵심부를 장악하며 최상류층을 형성하고, 그들 역시 그 집단에 속한 일원으로 특혜를 누렸다는 것이 자명하다는 점. 그런 점들이 의문사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야기 위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미겔과 크리스핀의 목소리를 자성(自省)의 시작으로 받아들이든, 여유로운 이단아의 치기로 간과하든,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이 소설을 읽은 독자의 몫이다. 결말은 열려 있다. 거기에 작가가 마련해 둔 크리스핀의 반전까지 더하면 결말은 무수히 열려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상한 조류학자의 어쿠스틱 여행기 - 멸종 오리 찾아서 지구 세 바퀴 반 지식여행자 시리즈 3
글렌 칠튼 지음, 위문숙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적당히 나이를 먹게 되면 새 이름 정도는 몇 개는 알게 된다. 학교에서건 TV에서건 다른 사람들에서건 말이다. 간혹 독특한 새들을 알게 되는데 생김새가 특이하거나 신기한 습성을 가졌거나 멸종될 위기에 쳐했거나 하는 경우에 그렇다. 이를 테면 내가 날개가 퇴화해 날 수 없어 다리가 발달했지만 수많은 개체가 인간에게 잡혀 멸종되었다는 도도새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새들이야 그렇다 쳐도 이런 새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류학자라 불리는 사람들인데 우리나라에도 새 박사로 알려진 윤무부 교수가 유명한 것을 보면 어느 나라나 새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상한 조류학자의 어쿠스틱 여행기The Curse of the Labrador Duck』는 멸종된 까치오리를 찾아 5년에 걸쳐 10개 국가의 40개 도시, 44곳의 자연사박물관을 방문한 조류학자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번역서는 유쾌하고 낭만적인 여행담 제목을 가졌지만 원서의 까치오리의 저주(책의 17장의 제목)라는 어쩐지 음산해 보이는 제목을 보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그 저주에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1970년 전후, 커피와 차를 만들던 식품회사에서 끼워 팔던 아이들용 카드의 주제가 멸종된 동물이었다. 그 첫 번째 카드가 까치오리였는데 수집광이었던 꼬마 글렌 칠튼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성인이 된 후 까치오리에 대한 것은 잊고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해설서를 쓰게 된다. 이것을 계기로 저자는 까치오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하고 싶어서 까치오리의 표본을 찾아 세계를 떠돌 궁리를 하게 된다. 태어나기도 전에 멸종해버린, 수집카드로밖에 볼 수 없었고 나이를 먹어도 박제나 표본으로 밖에 볼 수 없었지만 글렌 칠튼은 세상에 남은 모든 까치오리 박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까치오리의 저주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세계를 떠돌고 졸업여행과 제2의 신혼여행을 빙자해서, 아내를 대동하기도 한다. 이 정신 나간 듯한 여행담은 그저 까치오리에 대한 것 뿐 아니라 세계 여러 곳의 도시와 자연사박물관에 대한 흥미진진한 기록이기도 하다. 익살스럽고 좌충우돌하는 그의 여행기를 읽다 보면 박제가 되어버린 까치오리가 저자에게 유쾌한 저주를 내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도새가 그러한 것처럼 까치오리 역시 인간에 의해 멸종되었다. 그리고 박제된 까치오리를 소유했던 사람들 역시 죽음을 맞이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멸종되는 생물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생명의 기원과 질병의 근원을 알려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유전자와 DNA의 연구에는 수많은 돈을 쓰면서도 그것들의 집합체인 한 생명체가 완전히 사라져 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개체만 보존된다면 나머지들은 모조리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 인간일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간은 더더욱 오래 살게 되겠지만 다른 생명체들은 동식물원에서야 구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것이 진짜 저주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경독서 - 감성좌파 목수정의 길들지 않은 질문, 철들지 않은 세상 읽기
목수정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경도, 편견도, 인습도 목수정을 가두지 못한다. 목수정의 자리는 그녀가 이해하는 세상만큼 늘어난다. 그리고 그녀의 세상을 넓혀준 책들이 그녀만의 펄펄한 시선으로 우리를 향해 마구 손짓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나 K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이리나 레인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이름 : 안나 K(결혼 전 이름 : 안나 로이트만). 나이 : 서른여섯. 직업 : 출판사 해외 판권 부서. 취미 : 독서. 이상형 : 자신을 소설 속 낭만적인 여주인공으로 만들어줄 히스클리프 같은 작가. 『안나 K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프로필이다.

이 책은 제목만 들어도 어떤 소설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안나 K, 특히 K라는 이니셜은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강력하게 환기한다. 맞다, 이리나 레인은 『안나 카레니나』를 현대 뉴욕이라는 시공간으로 옮겨와 대놓고 이야기의 커다란 얼개를 톨스토이에게서 빌렸다. 이리나 레인의 안나도 톨스토이의 안나와 같은 행보를 따른다. 그렇다고 뻔한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것은 성급하다. 사람 난 이래 세상에서 완벽하게 새로운 이야기란 없을뿐더러 ‘안나’는 슬픈 일이지만 무수한 시공간에서 무수히 태어났고, 태어나고, 태어날 것이다. 모두 사회적인 제약과 인간적인 한계를 어찌하지 못해 한길로 내몰리겠지만, 그럼에도 무수한 안나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새로운 이야기로 퍼뜨린다. 이리나 레인의 안나도 무수한 안나들과 닮았으되 또 닮지 않았다.

『안나 카레니나』와 비교하자면, 일단 소설의 배경이 19세기 말 러시아 귀족 사회에서 21세기 현대 뉴욕의 러시아 이민자 사회로 바뀌었다. 당연히 새로운 환경에 맞춰 직업, 성격, 취향, 취미, 가족 관계 등 인물들의 세부적인 특성이 다시 부여된다. 안나 카레니나 역의 안나 K에 대해서는 이미 대충 이야기했고, 알렉세이 카레닌 역의 알렉스 K는 50대 초반의 유능한 사업가로 정숙하되 자신에게만 관능을 드러내는 아내를 원한다. 전통적인 관습에 충실하고 남의 이목을 신경 쓰는 그는 젊은 시절에 달리기에 열중했으며 예술품을 수집해 과시하는 것을 좋아한다.


알렉세이 브론스키 역의 데이비드 주커먼은 창작을 강의하는 20대 중후반(많으면 30대 초반)의 계약직 겸임교수로 독서와 글쓰기가 취미이며 소설을 써서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는 어느 정도 낭만적이고 어느 정도 열정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별안간 달아올랐다가 쉽게 식어버리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치기도 부리는 파파 보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러시아 여자들에게 사족을 쓰지 못한다.


콘스탄틴 레빈 역의 레프 가브릴로프는 20대 초중반의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약사로 전통적인 관습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거기에서 일탈할 용기를 내지는 못한 채 영화에서 그 답을 찾으려 한다. 특히 프랑스 영화를 사랑하는 그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이 이상형이다. 현실적인 속물근성과 거리를 둔 채 낭만적인 감성을 공유하고 싶어 한다.


키티 오블론스카야 역의 카티아 자부로프는 안나를 흠모하면서도 ‘여자=현모양처’라는 전통적인 관습에 순응하는 20대 초반의 아가씨이다. 폐쇄적인 러시아 이민자 사회 바깥의 데이비드를 사랑하게 되면서 작은 일탈을 꿈꿔보기도 하지만 데이비드가 안나에게 반해 자신을 배신하자 더욱 움츠러들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현실로 돌아와 단단히 뿌리내린다.


이 네 인물들과 안나가 엮어가는 『안나 K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는 그러므로 『안나 카레니나』와 다르다. 현대적이고 좀더 감각적이며 발랄한 현실 밀착형 이야기이다.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남자가 아낌없이 선물하는 “은쟁반에 놓인 초콜릿을 입힌 딸기, 싱싱하고 풍성한 모란꽃 꽃다발, 불가사리 모양의 은 펜던트가 달린 티파니 목걸이, 초콜릿 수플레 속에 감춘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것들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어 결혼을 결심하고도 의구심을 떨치지는 못하는, 여자의 심리 묘사는 섬세하고 탁월하다.


남자가 다음 데이트에서 안겨줄 선물까지만 챙기고 나서 이별 절차를 밟아야지 마음먹지만 그다음 데이트 선물도 눈앞에 아른거려 어정쩡한 공모의 시간을 암묵적으로 흘려보낸 후 결혼을 돌이킬 수 없게 됐을 때, 여자는 그제야 그 남자와의 결혼을 선택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포기했는지 저울질해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단 결혼하고 나면, 그 결혼으로 향유하는 풍요롭고 화려하고 안정적인 일상은 원래 누려왔던 것처럼 그 달콤함이 밍밍해지고 자신이 포기한 것은 더욱 절실해진다. 이제 그것 없이는 도저히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것과 맞바꿔 24시간 상주하는 베이비시터를 두고 세일 여부 상관없이 마음껏 신상 명품을 쇼핑하며 돈 걱정 없이 안락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런데 여자가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거리는지 생생하게 상기시키는 남자가 있다. 그는 그 강렬한 눈빛을 여자에게서 떼지 못한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결혼할 때는 그토록 재고 따지던 안나가 이번에는 무엇을 잃을지 저울질하지도 않은 채 앞뒤 없이 알렉스와 아들을 두고 데이비드에게 간다. 물론 알렉스와 데이비드를 비교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알렉스도 근사하다. “그가 그녀의 우비를 받아 옷장에 걸고, 옷걸이가 마치 그녀의 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스카프를 늘어뜨리는 모습. 세르주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번번이 공갈 젖꼭지를 들고 나오는 버릇. 받침대까지 단정하게 받쳐놓은 화장대 위의 물 한 잔. 잠자기 전의 입맞춤은 더 이상 뜨겁지 않아도 여전히 다정했고, 폭 끌어안는 포옹, 등에 쓸리는 수염의 기분 좋은 느낌”은 여전히 안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하지만 안나의 요리를 맛도 보지 않은 채 소금부터 찾는 습관, 잼을 듬뿍 떠서 흘러넘치도록 빵에 바르는 모습, 기타 등등은 점점 참을 수 없어진다. 게다가 알렉스는 ‘작가’도 아니다.


사실 안나가 데이비드를 선택한 것은 그의 꿈이 작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작한 문장을 이 남자가 받아서 마무리하는 바람에 남은 말을 꿀꺽 삼키는 느낌은 얼마나 에로틱한지”처럼 안나가 데이비드에게 왜 이끌렸는지 독자들을 납득시키고자 하는, 꽤 멋진 문장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어쨌든 데이비드가 작가를 꿈꾸지 않았다면 안나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안나는 뮤즈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불러일으킨 영감을 받아 남자가 쓴 소설 속 낭만적인 여주인공으로 불멸하고 싶었다. 뮤즈가 되고 싶었던 안나의 노력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안나에게 존 키츠의 「나이팅게일에 부치는 노래」를 바쳤던 시티뱅크의 계약직 직원에게는 문예창작 강좌까지 끊어주고 문학 인사들이 모여드는 술집에 데려가기도 했다. 데이비드가 “나는 당신과 함께 있어야 해. 당신에 대한 글을 써야 해”라고 이혼을 부추기자 안나는 대번에 알렉스 곁을 떠난다.


안나는 왜 직접 작가가 되어 자기 작품 속에서 불멸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남보다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편이 더 확실하지 않았을까? 이 의문에 안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녀는 작가가 아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작가를 사랑할 수는 있었다.” 작가적인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깨달음. 그 자명한 현실 앞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작가를 사랑하는 일이었다고 안나는 말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것 같지만, 어쨌든 그것이 안나의 선택이었다. 꿈도 없고 낭만도 없고 돈과 속물적인 취향만 넘치는 알렉스의 현실을 벗어나 안나는 데이비드의 소설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그러나 “자기 내면에서 오히려 더 생생하게 움직이는 인물들, 상황들, 신화들 앞에서 현실을 부정할 수도 있으며, 실생활보다 책을 읽을 때 그녀의 삶이 더 풍요로웠을지라도” 현실을 마다하고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판타지는 누구에게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안나는 따분하고 무료한 현실을 버리고, 구차하고 구질구질한 현실로 들어갔을 뿐이다.


데이비드는 정작 뮤즈가 되어주겠다고 안나가 그의 변변찮은 공간과 일상으로 밀고 들어오자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부담스러워한다. 그들은 사랑했다. “몇 시간씩 입을 맞출 때도 있었건만 갑자기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하루가, 한 주일이, 한 달이 먹먹할 정도로 길어지고” 데이비드는 곧 향수 가격표를 확인하면서 “나는 당신 남편처럼 해줄 수 없어”라고 선언한다. “그 이후로 선물은 점점 뜸해지고, 식당은 점점 저렴한 곳으로 바뀌었으며, 입맞춤만 깊어졌다.” 그것도 잠시, 데이비드는 안나 때문에 “돈이 마르고” 있으니까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을 틀지 말라고, 뭐든 제발 가리지 말고 일하라고 내몬다. 소설 따위는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


안나는 정말 데이비드를 사랑했을까? “맞아요, 나는 늘 러시아 여자들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라고 안나를 우스개 삼아 아버지와 함께 키득거리는 데이비드 곁에서 머뭇거렸던 것은, 그를 사랑해서라기보다 그때 그녀가 부여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가 그, 특히 그녀를 주인공으로 썼다던 그의 미완성 실패작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안나가 사랑한 것은 데이비드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환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안나는 그의 부모도, 추억도, 옛 여자 친구도, 이제껏 그의 삶을 이루어왔던 어떤 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데이비드가 그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 아예 귀와 마음을 닫아버렸다. 사랑으로 뜨거워졌던 시선이 어느 순간 날카롭고 또렷하고 차가워졌다. 데이비드와 사는 동안 안나가 내내 신경 쓴 것은 자신이 데이비드를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데이비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쩌나,이다.


안나는 여자 유혹용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레프가 자신을 구원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안나는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레프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착각일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이 바뀌어 레프가 ‘타이밍’을 탓하지 않고 용기를 낸다 한들, 사랑의 열기가 가시고 엇비슷한 일상이 이어지면 그들에게도 현실은 범속하고 속물적인 얼굴을 드러낼 테니까 말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안나가 자기 구원의 문제를 마지막까지 남에게 맡기려 했다는 점이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안나에 대해 결국은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해도 안나를 판단하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이성으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도 어느 순간 허방을 짚고 휘청거리며 남에게 기대고 싶어지는 것은 나뿐만은 아니겠지. 언제든 나약하게 무너질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샘솟는다. 나에게도 누군가 연민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산이 울렸다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의미로는 국가는 사람보다 더한 생명체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한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국가의 삶을 함께 누린다. 사람의 몸을 이루는 세포들처럼 말이다. 아프가니스탄이 사람이라면 큰 병을 오래도록 앓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와 중동, 남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내륙에 위치한 국가로 수도는 카불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그 위치 덕에 세계 정세와 더불어 큰 변동이 있던 국가다. 아프가니스탄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탈레반의 국가라고 하면 잘 알아들을 정도로 현대에 와서도 분쟁에 휩싸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알카에다와의 연합으로 인한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현재까지도 유혈이 낭자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과거 푸른 보석의 나라라고 불렸던 영광을 뒤로 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분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 자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할레드 호세이니의 전작인 『연을 쫓는 아이The Kite Runner』와 『천 개의 찬란한 태양 A Thousand Splendid Suns』에서 그 간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6년 만에 출간된 신작 『그리고 산이 울렸다And the Mountains Echoed』에서도 역시 가난 때문에 운명적인 이별을 맞게 된 남매와 가족의 사랑을 더듬어가면서 희생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 이야기는 가족의 이야기이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952년 아프가니스탄, 작은 마을 샤드바그에 살고 있는 압둘라와 여동생 파리는 아버지 사부르와 새어머니와 지독한 가난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사는 것 자체가 힘든 나날이지만 압둘라는 여동생인 파리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는다. 오빠처럼 아버지처럼 파리를 보살피고 아낀다. 이런 가난 속에서 결국 아버지인 사부르는 파리를 카불의 부잣집에 입양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삶 때문에 동생과 생이별을 한 압둘라는 평생을 그리움에 사무쳐 지내게 되며 시간은 무심한 듯 흐르게 된다.

9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각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 준다. 다양한 삶의 모습들, 하지만 결국 이야기는 압둘라와 파리의 이야기인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다. 특히 1장의 동화는 『그리고 산이 울렸다』를 관통하는 이야기다. 가난했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던 가족에게 악마가 찾아와 아이를 잡아간다. 악마에게 잡혀간 아이를 구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겪으며 악마를 찾아간 아버지 아유브는 자신의 집에서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는 아이를 보고 갈등하다가 결국 악마에게 아이를 남겨두고 온다는 이야기다. 사부르는 아이를 입양 보내면서 동화를 떠올렸을 것이고 풍요롭게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행복을 느끼기에는 삶이 너무나 힘들었으므로... 아프가니스탄보다는 훨씬 풍족한 삶을 누리는 우리들이지만 이런 비극이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 역시 비극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