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당하고 싶은 여자
우타노 쇼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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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작가가 유명해지면 좋은 점은 과거에 출간된 작품까지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들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기는 하지만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로 유명한 우타노 쇼고도 꽤나 많은 작품들이 출간되었다. 작가는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덕분에 서술 트릭으로 유명한 작가로 알려졌지만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신본격의 대표적 작가다. 최근의 작품이었던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를 보면 말 그대로 추리소설만을 위한 무대를 설정하고 그에 걸맞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본격의 놀이터라고 주장하는 느낌이랄까. 이런 그가 1992년에 발표한 납치 미스터리라는 이 소설 『납치당하고 싶은 여자』는 우타노 쇼고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줬을까.

하루하루를 파리만 날리느 심부름센터를 운영하는 구로다는 경마 빚까지 지고 있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미모의 재벌가 유부녀가 나타나 상상하지도 못한 의뢰를 한다. “저를 납치해 주세요.” 구로다를 깜짝 놀라게 한 그녀는 유명 커피숍 체인점의 사장인 다카유키의 아내인 사오리로 최근 남편의 애정을 시험해 보기 위해 이같은 가짜 납치극을 하려는 것, 돈에 궁했던 구로다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이고 가짜 납치극을 계획한다. 구로다는 사오리를 빈 친구의 맨션에 가게 한 후 협박전화를 걸어 아내의 납치를 알리고 현금을 요구한다. 남편인 다카유키는 경찰에 신고후 구로다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 현금을 마련해 연락장소에 가지만 구로다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다카유키의 누나를 속여 아들의 몸값을 가로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고 사오리에게 알리기 위해 맨션에 온 구로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가짜로 납치된 사오리가 살해된 것이다. 영락없이 살해범으로 몰리게 된 구로다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오면서 사건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응답하라 1991, 출판사의 시대의 유행을 반영한 소개 문구―과연 이런 문구가 효과가 있는지는 뒤로 하고라도―처럼 이 이야기는 과거의 소설이다. 카폰과 삐삐, 전화사서함 서비스라는 이미 구석기 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소재들이 트릭으로 등장하는 까닭에 현재의 눈으로 보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시대를 감안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수많은 고전 추리소설들도 사랑하니까. 하지만 시간의 흐름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작가의 작풍이다. 이 이야기는 트릭에 대한 집중이라기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다. 자신을 납치해 달라는 미모의 여성과 가짜 납치극이 실제 살인 사건으로 벌어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힌다. 거창한 책 소개글처럼 충격적인 결말과 허를 찌를 정도의 반전―책이 출간된 당시라면 결말과 반전이 조금 더 이야깃거리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은 아니지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최근작인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보다는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에 더 가까운 작품으로 과거의 우타노 쇼고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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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정신 -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
강창래 지음 / 알마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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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은 정적(靜的)이다. 책의 모습부터 책을 읽는 행위 자체까지 나서지 않는 조용할 수 밖에 없다. 한 장 한 장 켜켜이 쌓여 있는 책의 모습부터 눈으로 읽어 가는 느낌까지도 정적이다. 한 권의 책을 스마트폰 쓰는 것처럼 휘리릭 넘기며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정적인 재미는 무엇보다 동적이다. 책은 조용한 모습 뒤로 격렬한 힘을 감추고 있다. 강창래의 『책의 정신』은 이런 책의 이면, 책이 가진 흥미진진한 숨겨진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랑스대혁명 이전의 금지된 베스트셀러에는 세 종류의 책, 정치적 중상 비방문, SF, 포르노소설이 있었다. 오늘날 고전으로 회자되고 있는 계몽사상가들의 책은 당시에는 전혀 인기가 없었는데도 프랑스 대혁명의 한 원동력으로 평가된다. 민중의 승리이기도 한 프랑스 대혁명의 기반에 계몽사상가들의 책이 과연 영향을 미쳤을까? 오히려 당시에 베스트셀러이기도 했던 포르노그래피가 더 큰 영향을 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계몽사상가들 역시 포르노그래피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을 썼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포르노그래피와 진지한 논문을 구별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포르노그래피는 남성들의 인습적 도덕과 전통적인 종교의식을 허무는데 큰 공헌을 했을 것이다. 이후 영국에서는 포르노그래피를 외설적인 이유로 규제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프랑스의 경우를 본받은 것이라 하겠다. 얼마전 한 작가의 에세이에 장정일과 마광수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 둘이 외설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탄원 서명을 해달라는 요구를 받고 '왜 이런 사람들을 위해 내가 서명해야 하나' 하며 고민하다 결국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자신을 크게 희생하고 서명했다는 이야기다. 그의 에세이는 당시의 자신의 결정을 크게 자화자찬했지만, 현재의 외설적인 TV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또한 흥미로운 이야기로는 시대의 지배구조와 타협하며 살아남은 고전들에 대한 것이다. 바로 ‘소크라테스의 문제’가 그것인데 소크라테스가 글 한줄 남기지 않은 이유로 생긴 문제다. 현재의 소크라테스에 관련된 이야기는 플라톤에 의해 남겨진 것인데, 문제는 실제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후대에 의해 기록된 『논어』, 『성경』 역시 마찬가지 문제를 가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책은 재미있다. 그 증거는 현실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레미제라블』은 뮤지컬의 힘으로 많이 읽혔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영화화 이후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책의 힘인가? 뮤지컬이 아니었다면 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이 빵을 훔친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며 ‘레-미제라블’이 아닌 ‘레미-제라블’로 기억되었을 일일지도 모른다. 『위대한 개츠비』는 제목 그대로 위대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쯤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영상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독서 자체로 재미있다. 저자는 첫머리에서 독서운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 매우 공감하고 있다. 독서는 애초에 ‘즐거운’ 것인데 왜 운동을 장려하는가? 독서는 운동으로 재미를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고전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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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글 쓴 남자, 안개 속의 살인
시마다 소지 지음, 이윤 옮김 / 호미하우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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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에야 어느 분야에서건 장르를 규정짓는게 우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마저도 모호할텐데 단일 장르에서의 구분은 오죽할까. 일본 추리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격 추리소설이 쇠퇴하고 사회파가 득세하더니 신본격이 등장하고 하드보일드에 코지 미스터리까지 장르는 세분화되어 있지만 사실 한 작품을 어느 장르 안에 우겨넣기에는 현대 소설의 복잡함이 이를 거부한다. 작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리라. 자신의 작품이 어느 한 장르에 구속되어 있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고, 그래서 작가는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캐릭터 속에 녹여 낸다. 이것은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독이 될 수도 있고 달콤함이 될 수도 있다.

『점성술 살인사건』,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시마다 소지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미스터리와 함께 융화시켜 풀어내는 작풍을 가진 작가지만 신본격의 거장이라는 평답게 절묘한 트릭과 미스터리가 논리에 의해 해결되는 이야기를 그리는데 탁월하다. 특히 우울한 탐정 미타라이 기요시와 이와 반대되는 캐릭터인 요시키 다케시 형사 시리즈는 '시마다 소지의 작품이란 이런 것이다'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개인적으로 트릭 계열 추리소설의 팬이기 때문에 신작인 『고글 쓴 남자, 안개 속의 살인』에서는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궁금했다.

안개가 자욱한 밤, 순찰을 돌던 경관이 고글을 쓴 남자를 목격하고 그의 고글 속이 피처럼 붉게 물든 것을 발견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그냥 지나치게 된다. 하지만 마을의 담배가게 노인이 살해되고 현장에 남겨진 노랗게 물든 5천 엔 지폐와 고글을 쓴 남자가 목격되면서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된다. 한편 인근의 마을에서는 국책사업인 원자로의 연료를 생산하던 회사의 사고로 직원이 피폭당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한다.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아 보이던 이 사고에 고글을 쓴 남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수사 끝에 그를 체포하여 감금하지만 다른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피로 물든 고글을 쓴 남자를 보았다는 목격정보가 나오게 되자 사건은 해결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고 고글을 쓴 남자는 도시괴담처럼 번지게 된다. 두 사건은 과연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고글을 쓴 남자는 과연 사고의 망령일까.


미타라이 기요시나 요시키 형사를 기대했지만 새로 등장한 캐릭터는 다나시와 사고시 형사 콤비다. 좋게 말하면 리얼하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런 매력이 없다. 미타라이 기요시의 예리함도, 요시키의 매력도 없는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캐릭터라 작가가 이야기의 신비함을 더하기 위해 일부러 캐릭터를 완화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트릭과 해결이라는 측면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느낌이 달랐다. 시마다 소지의 작품이 이야기의 환상적인 측면을 표현하는데 강점이 있는 작가이긴 하지만 평가 그대로 신본격 추리소설을 읽고 싶은 독자에게는 조금 아쉬울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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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 창비세계문학 16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한정 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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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본에 대한 이미지에는 성(性)적인 부분이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서양 쪽 사람들이라면야 닌자, 스시, 섹스 정도겠지만 일본에 대해 익숙하다면 일본의 성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개방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호불호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처럼 성을 꼭꼭 숨기고 추잡한 짓을 하는 것과 드러내 놓고 하는 것의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 다만 일본의 성(性)은 우리처럼 터부시되는 것이 아니며 그런 인식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열쇠』는 탐미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널리 알려진 일본의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70세에 발표한 작품으로 가장 원초적인 성(性)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터부시되는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56세의 남편과 45세의 아내의 섹스 이야기가 둘의 일기에, 서로 훔쳐본다는 전제로 쓰인 것이다. 이 정도라면 평범한 듯싶지만 남편의 제자와 아내의 이야기, 이를 묵인하고 부추기며 흥분하는 남편이라면 다를 것이다. 논란이 되긴 했지만 이 작품이 1956년에 쓰인 것이니 일본이라는 나라의 성(性)에 대한 인식은 역사가 깊다.

대학교수인 남편은 아내가 섹스에 적극적이지 않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지만 음욕이 누구보다도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자신이 그 욕망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내를 만족시키기 아내와 무리한 성관계를 지속한다. 아내는 유교적인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 조신하고 기품 있게 행동하려 하지만 가슴 속에 숨겨진 욕망에 몸을 떨고 있다. 아내는 남편의 섹스에 전혀 만족하지 못한다. 이런 성적인 갈등 관계에 딸과 결혼할 예정인 남편의 제자가 등장하게 된다. 제자와 점점 가까워지는 아내를 보는 남편은 질투를 느끼게 되지만 그 질투는 비뚤어진 성적판타지로 나타나게 된다. 남편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욕망이 더 커져버린 아내는 제자와 관계하며 자신의 음욕을 채운다. 뿐만 아니라 제자와 결혼하기로 한 그들의 딸은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기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가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열쇠』는 인간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인 성(性)을 가장 비밀스러워야 할 일기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비밀스러워야 할 것들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일기는 서로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여 있고 남편은 제자와 아내를 묵인하고 딸은 오히려 둘의 욕망을 도와준다. 남편과 아내, 제자의 관계는 흔한 에로물이 될 수도 있고 예술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의아한 것은 딸이다. 왜곡된 인간의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기 위해 등장시킨 것일지는 모르지만 결국 드러나지 않은 딸의 속내는 알 수 없어 아쉬웠다. 제목이기도 한 『열쇠』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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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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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외국 작품을 읽을 때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분명히 우리말로 쓰인 것인데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해가 쉽지 않은 철학서나 인문서도 아니고, 번역을 거치고 편집자가 어루만진 글일 텐데도 읽기 힘든 문장을 볼 때마다 번역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혹시나 다른 번역자에 의해 번역된 같은 책을 가지고 있다면 비교해 보라, 번역에 따라 두 책이 전혀 다른 책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같은 문장을 번역해도 느낌이 상반되는 경우도 있을 뿐더러 단어 하나 때문에 전혀 다른 문장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쯤 되면 문장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질 것이다. 어쨌거나 평생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알기는 힘들 터, 어쨌거나 평범한 우리들은 번역자에 평생 기댈 운명인 것이다.

이윤기라는 이름은 소설가보다 번역자로 익숙하다. 『그리스인 조르바』, 『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등의 작품으로 그의 소설보다 더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는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기는 것에 대한 에세이다.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번역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니 그는 천생 번역가인 듯  싶다. 하지만 이 번역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책을 읽다보면 쉽게 드러난다. 기계적으로 외국어를 우리말로 치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다듬어 걸맞은 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윤기는 ‘단순한 물리적 변화’ 아닌 ‘화학적 변화’라 이야기한다. 또한 번역가는 모든 것에 능숙해야 한다. 언어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중세 철학에서 독일제 권총인 루거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장미의 이름』의 오독과 오역을 지적한 한 독자의 글은 번역가가 가진 숙명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번역서가 다른 나라의 것보다 못한 것을 알았을 때의 참담한 심정이 독자에까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신화에 대한 이윤기의 애착과 네 번째 장인 ‘우리말 사용 설명서’는 현재의 우리말과 그것을 바라보는 번역가로서의 시선이 느껴져 흥미롭게 읽었다.


흔하게 하는 말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이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말이 절반 정도만 맞았으면 좋겠다. 번역은 온전히 창작이어서는 안 되고 죽은 언어로 글자만 바꾸어놓은 것이어서도 안 된다. 번역은 류신의 말처럼 시소게임이거나 외롭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쪽으로 기울거나 조금만 헛디디면 그대로 떨어져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원문의 뉘앙스와 맞는 역어를 찾는 시소게임, 그 중심을 잡기가 얼마나 어려울까. 나같이 평범한 독자는 그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번역은 한마디로 ‘말의 무게를 다는 것’이다. 저울의 한쪽에 저자의 말을 얹고 한쪽에는 번역어를 올려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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