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조안 해리스 지음, 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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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 로셰(Vianne Rocher). 이토록 달콤하고 부드럽고 근사하게 혀를 굴릴 수 있는 이름이라니. 조안 해리스의 『초콜릿』을 읽는 동안 그 매혹적인 이름에 미혹되어 있었다. 한때 잠깐 소설이라는 걸 쓰는 흉내를 냈을 때 무엇보다 내 머리를 쥐어뜯게 한 것은 이름이었다. 인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언제나 곤혹스러웠다. 아무 이름이나 막 가져다 붙일 수는 없는 노릇, 인물을 상징하되 예쁘고 세련된 이름을 욕심껏 찾아도 나중에 다시 그 이름을 불러보면 유치하고 낯간지럽고, 어딘가 모르게 그 이름에 곱게 발라놓은 화장이 덕지덕지 들떠버린 느낌이 든다. ‘비안 로셰’라는 이름은 말맛도 신비하고 아름답지만 그 의미도 충분하다. 비안의 성(姓) ‘로셰’는 익숙하다 싶었는데, 오톨도톨한 공 모양의 초콜릿을 금박지로 하나하나 감싸서 수북하게 쌓아 올린 페레로 로셰 광고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셰(Rocher)는 바위 모양의 초콜릿을 이르는 프랑스어이다. 초콜릿 가게 겸 카페 겸 공방의 주인인 비안에게는 이보다 더 달콤하게 어우러지는 성이 또 어디에 있을까.

『초콜릿』에는 비안이 프랑스의 작은 마을 랑스크네-수-탄으로 몰고 온 바람이 겨울의 찬 공기를 몰아내고 봄의 따뜻한 공기를 덥히며 산들거린다. ‘바람’은 비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어이다. 비안은 여태껏 한곳에 오랫동안 머무는 일 없이 유럽과 미국을 방랑했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지는 않았지만 (비안이 고백하길) 분명 마녀였던 엄마와 함께 바람이 바뀔 때마다, 카드 점괘에 검은 옷의 사제가 나타날 때마다 이동했다. 그렇게 흘러든 랑스크네에서, 이제 딸에서 엄마가 된 비안은 자기 딸 아누크와 정착하고 싶다. 엄마를 따라 이방인으로 이곳저곳을 가난하게 기웃거리던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자신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성장의 역사가 연속적인 추억으로 아로새겨지는 공간을 선물하고 싶다. 실체는 없지만 비안과 엄마를 끈질기게 따라붙으면서 위협하던 검은 옷의 사제와도 도망치지 않고 맞설 것이다.

마녀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꽁꽁 숨겨진 슬픔을 들여다보는 능력, 어두운 무채색 마을에 환한 유채색으로 아기자기하게 단장한 초콜릿 가게 ‘천상의 프랄린’,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회색 토끼 ‘팡투플’, “나는 자네가 무슨 바람에 실려 왔는지 알아. 나는 자네를 보자마자 알아봤어. 자네가 마녀라는 걸 신부가 알까?(아르망드 부아쟁의 말)”까지, 『초콜릿』은 비안의 신비로운 정체를 둘러싼 몽환적인 동화풍 분위기 속에서 극단적인 대립 구도로 소설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킨다. 이를테면 비안 로셰 vs 프랑시스 레노 신부, 비안이 도착한 사육제 vs 레노 신부가 떠난 부활절, 초콜릿 가게 vs 교회, 집시 vs 랑스크네 주민자치위원회, 엄마 아르망드 부아쟁 vs 딸 카롤린 클레르몽, 아내 조세핀 보네 vs 남편 폴-마리 뮈스카…… 등등. 이야기도 사육제 마지막 날인 2월 11일부터 부활절 다음 날인 3월 11일까지 비안과 레노 신부가 상반된 시선으로 거의 번갈아 서술된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 대해 경보를 울린 그들은, 랑스크네의 중심인 생제롬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위치한 초콜릿 가게와 교회에서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앙숙처럼 대립한다.


레노 신부는 하필이면 사육제에 랑스크네로 섞여든 비안이 불길하기만 하다. ‘사육제’는 가톨릭 축제이긴 하지만, 씨앗을 뿌리는 신(神) 사트르누스를 기리는 고대 로마의 이교도 제전에서 기원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꺼림칙한 사육제가 끝나면 곧바로 신성한 부활절까지 40일 동안 금욕해야 하는 사순절인데, 그 여자는 일부러 교회 맞은편에다가 나약한 신도들을 유혹하기 위해 초콜릿 가게까지 떡하니 차렸다. ‘초콜릿’은 이교도들이 광란의 제전에서 사악한 환희와 황홀한 타락을 탐닉케 하는 악마의 유혹이나 다름없는데 말이다. 이쯤 되면 미식을 위한 모든 음식, 쾌락을 위한 모든 에로스, 평상심을 방해하는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에 대한 금욕과 절제와 고행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마녀를 좌시할 수 없다.


비안은 엄마와의 떠돌이 생활 중에 언제나 그들을 위협하며 쫓아왔던 검은 옷의 그림자를 레노 신부에게서 발견한다. ‘검은 옷의 그림자’는 자유로운 모험가이자 영원한 여행자인 그들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침입자로 간주한다. 그들은 도덕적 관습과 종교적 규율에 몰개성적으로 순응해 공동선의 질서에 따라 조화롭게 통제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험한 바람을 불어넣어 개인으로서의 욕망하는 자아를 일깨우고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불순분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안이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정착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위협을 느끼고 왠지 모를 두려움 속에서 초조해하는 쪽은 검은 옷의 그림자, 즉 레노 신부로 역전된다. 사제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사랑의 포용력을 오히려 비안이 발휘해 레노 신부를 가엾게 굽어본다. 레노 신부가 비안을 추방하기 위해 무슨 짓을 꾸며도 비안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행복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신념에 따라 초콜릿 가게를 열고, 딱딱하게 경직된 사회적인 육체 속에 갇혀 상처로 곪아가는 개인적인 정신에 가닿는다. “빨대로 마시는 소돔과 고모라”일지언정 사람들에게 ‘천국의 행복’을 선사한다면 비안을 초콜릿을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비안 로셰와 프랑시스 레노의 싸움에서 승리는 당연히 덜 초조해하는 쪽, 덜 두려워하는 쪽에게 돌아간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로 서로와 싸웠을까? 그들 역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비밀 하나를 붙들고, 그 진실과 어떻게 대면하고 용서하고 화해할까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쩌면 너무나 달라서 어떤 시공에서도 교차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들 삶의 태도는 바로 그 인생의 숙제를 풀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선택한 최선의 방식일지 모른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들이 서로에게 첫 열쇠였을지 모른다.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징그럽게 닮아 있다는 것을 서로 첫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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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이야기 샘터 외국소설선 8
존 스칼지 지음, 이원경 옮김 / 샘터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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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성공한 작품의 후속작이 나오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성공한 전작의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야기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작가나 독자 모두에게 즐겁지 않은 일이다. 전작의 성공을 놓지 않고 싶어 하는 작가나 후속작을 애타게 기대하던 독자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의 후속작 이야기가 나왔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기대 반, 걱정 반이라고 할까. 후속작 『유령 여단』과 『마지막 행성』 3부작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 듯 보였으나 결국은 외전이라는 이름으로 『조이 이야기』까지 등장해서야 그 긴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걱정과는 달리 후속작 역시 전작들과는 다른 분위기로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 『조이 이야기』는 외전이라는 이름답게 전작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보통 짧게 끝나기 마련인 에필로그를 한 권의 책으로 써낸 듯한 느낌으로 SF라기보다는 성장소설에 가까운 느낌이다.

『조이 이야기』가 성장소설에 가까운 이유는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노인의 전쟁』 3부작은 좋은 SF기도 하지만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져가는 이야기이기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의 전쟁』의 첫 구절은 이렇다. “75세 생일에 나는 두 가지 일을 했다. 아내의 무덤에 들렀고, 군에 입대했다.” 젊은 육체로 태어난 존 페리의 이야기다. 『유령 여단』에서는 조이의 친아버지인 샤를 부탱과 조이, 샤를 부탱의 DNA를 가진 특수부대원의 이야기였으며 『마지막 행성』에서는 존 페리의 죽은 아내의 DNA를 가진 제인 세이건의 이야기이며 페리와 세이건, 그리고 조이가 가족을 이루며 끝맺음을 한다. 이제 에필로그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등장할까.

가족이 된 페리와 세이건, 조이는 허클베리 행성에서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우주개척연맹으로부터 새로운 식민지 행성을 개척하고 지도자가 되는 것을 제안받고 떠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기대에 부풀어 도착한 곳은 전통적인 의미의 평범한 개척지가 아닌 우주개척연맹이 외계종족과의 전쟁을 위해 미끼로 사용하기 위한 행성이었다. 페리와 세이건은 행성과 개척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리저리 애써 보지만 개척연맹에게 제지를 받게 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샤를 부탱의 딸이기도 한 조이에게 한 가지 일을 맡기는 것이었다.


『조이 이야기』로 『노인의 전쟁』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끝맺음을 했다. 에필로그로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이야기를 왜 또 냈을까 하는 의심은 책을 읽으며 말끔하게 사라졌다. 복잡한 이야기를 가진 가족들이 『조이 이야기』를 끝으로 이제 평범한 개척민이 되었다. 각각 다른 독특한 이야기로 즐거움을 주었던 시리즈가 끝나는 걸 보니 아쉽기도 하지만 그만큼 즐거움도 컸다. 혹시라도 『조이 이야기』를 처음 보려는 독자가 있다면 얼른 책을 덮으시라. 시리즈의 시작은 『노인의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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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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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나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과 1939~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을 목격했다. 그의 생애 두 번째 세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나치스가 오스트리아에 집권하면서 1934년 츠바이크는 영국으로 망명한다. 이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영국, 미국, 브라질 등 망명지를 떠돌다가 영국에서 만난 두 번째 아내 샤로테 알트만과 함께 1942년에 자살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종전했다.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를 다 읽고서야 이 소설이 츠바이크 사후에 출간된 유고작이자 미완성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생애 마지막까지 조금씩 써나갔지만 미처 완성하지 못한. 별다른 설명이 없었더라면 미완성작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만큼 지금 남겨진 그대로도 충분하지만 츠바이크는 아직 더 해야 할 말과 이야기가 남은. ‘왜 이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은 ‘어떻게 죽었을까?’로 이어졌고, 비로소 책날개에 짧게 요약된 츠바이크의 생애에 관심을 가졌다. 츠바이크가 들려주는 다른 사람들의 일생에는 관심을 기울였는데도 정작 그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았구나, 깨달은 순간 “부인과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문장이 눈에 박혔다. 그리고 이 소설에 배어 있는 절망의 무게에 새삼 압도됐다. 그것은 한 작가가 삶을 끝내기로 결정하도록 몰아붙인 절망이나 다름없을 테니.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트리아의 작은 산골 마을, 무서운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의 참담한 그림자는 여전히 악몽처럼 끈질기게 따라붙는 전후 시대. 크리스티네 호프레너는 우체국 여직원으로 병든 노모를 부양하면서 가난하고 고단하게 생존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의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을까? 전쟁에게 빼앗긴 이전의 단란하고 풍요롭고 행복한 가정생활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려받지 못한다. 전쟁 중이라 인내했던 가혹한 노동과 궁핍한 살이만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전쟁 이전의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던” 열여섯 살 소녀 크리스티네는 전쟁 이후의 “성냥 한 개비, 커피콩 한 알, 밀가루 반죽 부스러기까지 계산해야 살 수 있는”, 그리하여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스물여섯 살 여인 크리스티네로 활기와 감성과 욕망을 잃은 채 박제되고 말았다.


전쟁의 군홧발이 짓밟고 지나가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니, 크리스티네 혼자 모두가 감내하는 고통을 억울해하며 유난 떨 것 없다고 말할 것인가? 츠바이크는 코웃음 치면서 크리스티네에게 신데렐라 초대장을 보낸다. 그리고 전쟁의 군홧발은 사람을 가려서 짓밟는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크리스티네는 부유한 이모의 선심으로 스위스 최고급 휴양지의 화려한 호텔에 초대받는다. 그곳은 공포를 몰고 오는 포화 소리조차 먼 데서 성가시게 들려오는 멍멍이 소리로 심드렁해할 것처럼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라곤 조금도 드리우지 않았다. 오로지 번쩍번쩍하고 으리으리하고 휘황찬란할 뿐이다. 그곳은 ‘너무 비싸!’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계어인 줄 아는 부유층만 받아들인다. 당연히 전쟁, 가난, 고통, 근심, 슬픔, 좌절, 절망, 노동 같은 단어들은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 이모의 초대였더라도 그곳을 지배하는 부의 질서에 따라 동등한 사람으로 환영받으려면 크리스티네는 ‘우체국 여직원’에서 ‘부유한 상속녀’로 변신해야 한다.


궁기에 찌든 조카의 꾀죄죄한 입성이 창피한 이모는 산 채로 생기 없이 박제되어 있던 크리스티네 호프레너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진주 목걸이를 두른 고혹적인 여인 크리스티아네 폰 볼렌으로 변신시킨다. ‘크리스티네’에게 금지되어 있던 모든 활력과 욕망과 쾌락이 ‘크리스티아네’로 분출된다. 하지만 크리스티아네의 지극한 행복감은 크리스티네의 것이 아닐뿐더러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드레스는 이모가 ‘빌려준’ 것이고 우아한 진주 목걸이도 가짜이다. 진짜 크리스티네의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그토록 불완전한 변신을 위해 크리스티네가 자기 자신을 버렸다는 게 진정한 불행의 시작이다.


세상의 모든 드라마는 신데렐라를 꿈꾸지만 자기 자신을 버린 신데렐라는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데렐라가 편입되고 싶었던 상류층 사회의 고질적인 위선과 가식과 허영보다 재투성이 아가씨의 기만과 욕망이 더욱 지탄받는다. 열두 시의 마법이 계속되든(언제 들킬지 몰라 애면글면 마음을 졸이든) 깨지든(숨기고 싶었던 정체가 만천하에 까발려지든) 끔찍한 상처를 받는 것은 신데렐라의 가면 속에 숨은 재투성이 아가씨뿐이다. 그런데도 재투성이 아가씨가 신데렐라에서 악녀로 추락하면 결코 훼손돼서는 안 될 무엇이 지켜졌다는 안도감에 희열을 느끼다니 우습다. 상류층 사회의 위선과 가식과 허영은 아스라이 멀어지고 재투성이 아가씨의 변신을 모욕적인 침입으로 매도하며 누구의 무엇을 대변하고 있었을까?


크리스티네는 신데렐라에서 재투성이 아가씨로, ‘폰 볼렌’에서 ‘호프레너’로 바닥없이 추락한다. 이 추락의 속도와 충격은 재투성이 아가씨에서 신데렐라로, ‘호프레너’에서 ‘폰 볼렌’으로 높이높이 비상했던 것보다 더 급격하고 엄청나다. 이제 그녀는 당연히 ‘크리스티아네’일 수 없지만 원래 ‘크리스티네’로 돌아갈 수도 없다. 똑같은 전쟁을 겪었지만 자기 세계에는 참혹하기만 했던 전쟁이 한없이 관대했던 또 다른 세계를 이미 엿봤으니까. 크리스티네의 정체가 탄로 났을 때 그녀의 추방에 앞장서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모이다. 가난한 불륜 드레스 걸에서 우아하고 정숙한 귀부인으로 변신한 이모는 덩달아 자기 정체까지 드러날까 봐 안절부절못한다. 게다가 재력을 과시하며 조카를 변신시켰던 값비싼 옷과 장신구들도 도로 거둬들인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나댄” 크리스티네를 탓한다.


하지만 크리스티네가 상류층 호텔에서 추방당한 것을 자기 자신을 버린 개인의 어리석은 기만과 분수없는 욕망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하지만 그녀가 자기 자신이길 고집했더라면 애초 호텔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신데렐라’여야 한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판타지이다. 상류층 사회가 베푸는 아량인 것 같지만, 그것은 ‘부(富)로 신분이 재편되는 불가침의 영역을 감히 욕망하지 말라’는 오만한 폭언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크리스티네가 자기 자신만큼은 지켰어야 하는 것은 그게 가장 덜 상처받는 길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네는 이전보다 더 초라하고 남루하고 비참한 우체국 여직원의 생활로 돌아온다. 그러나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 삶의 기반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법이다. 그녀는 이전 삶의 방식을 놓아버리고, 돈뿐만 아니라 그동안 절제했던 감정과 욕망까지 마음껏 발산하려 한다. 전쟁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서 그녀처럼 좌절하고 분노하는 연인 페르디난트에게 위안을 구하며 새 삶을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크리스티네처럼 사회의 불합리함에 눈떠도, 페르디난트처럼 분노를 터뜨리게 하는 원인을 여러 쪽에 걸쳐 조목조목 짚어낼 줄 알아도, 현실은 그들에게 새 삶의 기반을 마련할 돈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그 기반이 어째서 돈이 되어야 하느냐고, 삶의 가치는 다른 것에서 구해야 한다고 되묻는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지 않고 제 주제에 걸맞지 않는 욕망을 탐하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가진 자의 논리에 이미 세뇌당한 것일지 모른다.


츠바이크는 비루한 삶을 연명하고 싶지 않아 함께 자살하려던 두 연인의 ‘우체국 현금 절도 계획’까지 써놓았다. 츠바이크가 더 살기로 마음먹었더라면 이후에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까? 안타깝지만 왠지 크리스티네 혼자만의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기묘한 설렘과 초조감으로 세운 페르디난트의 우체국 현금 절도 계획은 언뜻 두 사람 모두에게 타당한 듯싶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크리스티네가 안아야 할 위험부담이 너무 크고, 실패 시에 페르디난트가 빠져나갈 구멍은 확실히 마련되어 있다. 그 점에 대해 페르디난트는 자신이 아닌 크리스티네가 우체국 여직원인 이상 그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으며, 선택도 책임도 그녀의 몫이라고 못 박는다. 비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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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톨의 밀알 - 개정판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5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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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우리에게 가난과 고통, 내전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우리가 아프리카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고전영화 속에서 보이는 노예의 이미지거나 팔다리가 앙상하고 배만 불룩 튀어나온 아이의 모습뿐―그나마 가장 나은 경우는 스포츠 선수일 것이다―인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이런 상황은 지형이나 기후와 같은 대륙의 근본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주의 때문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대륙을 입맛대로 나누어 경제적인 수탈을 가했고 간신히 독립한 후에는 냉전의 영향으로 생긴 정치적인 갈등은 아직까지도 이어져 여전히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국가들이 적지 않다.

이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아프리카와 판박이처럼 꼭 닮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식민지 독립투쟁의 모습이다. 제국주의 지배자의 모습이나 피지배자의 모습들은 국가나 지역이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 군상들이 닮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시아건 아프리카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다르지 않다. 세계 2차 대전 이후에도 식민지를 반환하지 않은 영국에게 키쿠유족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마유마유 반란이며 영국은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해 수많은 케냐인들이 사망하였다. 응구기 와 시옹오의 『한 톨의 밀알』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케냐의 독립투쟁과 그 중심에서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낯선 이름을 가진 작가의 먼 나라의 이야기지만 그 내용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백인정권에 대항해 단결을 호소하며 피의 저항을 하던 키히카는 어느 날 무고의 집에 숨어든다. 키히카는 자신을 숨겨준 무고에게 함께할 것을 권유하지만 무고는 키히카의 목에 걸린 현상금 때문에 배신하게 된다. 키히카의 여동생인 뭄비의 남편이기도 한 키뇨코도 비상사태 이후 수용소로 끌려갔지만 아내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 때문에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고 집에 돌아오지만 아내인 뭄비는 치안대장이 된 키란자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키란자는 짝사랑하던 키히카의 여동생인 뭄비를 지켜주기 위해 백인의 편에 선 것이었다. 결국 조직은 키히카를 죽게 만든 배반자로 키란자를 지목한다.


『한 톨의 밀알』은 진실을 고백하면서 갈등은 해소된다. 하지만 현실도 그럴까. 일제시대에 순사로 동족을 때려잡던 인간들은 여전히 높은 자리에서 호위호식하고 있으며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그때나 지금이나 삶이 고달프다. 어디 그뿐일까. 군사정권에서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죽은 사람들의 가족은 피눈물을 흘리지만 권력에 붙은 배신자는 그 달콤함을 맛보고 있다. 가족이나 사랑을 위해서가 변명도 우스울 정도다. 오로지 개인의 탐욕을 위해서 행동했고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제 바로잡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한 톨의 밀알이 뿌린 피를 쓰레기들이 빨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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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날 무렵의 라 트라비아타
이부키 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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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 여름이 끝났다. 여름 내내 남편이랑 다른 대문으로 귀가하는 연애를 하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결혼 이전에는 바깥에서 만나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같이 있으려고 내내 어디를 갈까 고민했다. 그때는 그게 성가셔서 빨리 결혼하고 싶었다. 결혼은 헤어지는 시간 없이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온종일 둘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말이니까. 그랬는데! 내가 워낙 집 안에 틀어박히는 기질이기도 하지만, 데이트를 하려고 집을 나섰다가도 금세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여름이면 더워서, 겨울이면 추워서……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이제 부부니까 목적 없이 거리를 헤맬 필요 없는 이유, 혹은 핑계가 무수히 떠올랐다. 그래, 우리에겐 둘만의 공간이 있잖아. ‘맞아, 맞아’ 맞장구치며 집으로 돌아오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애초에 헤맬 목적으로 집을 나선 건데. 그렇게 집이 없는 연인의 달달한 연애가 고플 때 이부키 유키의 『여름이 끝날 무렵의 라 트라비아타』가 내 손에 들어왔다. 이 소설은 서른아홉에 다시 사랑하고 연애하는 여자와 남자의 해피엔드를 이야기한다. 상처를 간직한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부드러운 마음의 속살을 내비치며 소박하게 다가선다. 책장을 넘길수록 서로에게 조금씩 더 각별해지는 그 친밀감은 사랑이라고 주장하지 않아도 사랑으로 녹아든다. 편안하고 따뜻하고 아름답다.

나이에 따라 사랑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분명 선호하는 사랑의 형태와 방식은 달라지는 것 같다. 좀더 어릴 때는 감각적인 밀어를 핑퐁처럼 주고받는 ‘밀당’의 짜릿한 긴장감 같은 것을 기대했다. 내 사랑은 조금이라도 더 특별해야 한다는 치기도 있었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죽고 못 사는 사랑만 보였다. 나와 내 주변 지인들의 경험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 현실 속의 사랑은 그다지 극적이지 않다. TV와 스크린에서 선남선녀들이 달콤하게 주고받는 사랑의 대사들은 실제로 재현하기에는 낯간지럽고 느끼하다. 부모들은 다 고슴도치이니까 제 자식의 흠보다 남의 자식의 흠이 더 크게 보여 한두 가지 불만들을 갖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연인을 갈라놓는 장애물이 되지는 않는다. 사랑을 모방했던 시절을 지나니 이젠 ‘그저 그런’ 사랑들이 모두 진짜 사랑이라는 것을 알 듯도 하다.

어쩌면 스가 테쓰지와 후쿠이 키미코의 사이는 그렇고 그런 불륜으로 비칠지 모른다. 테쓰지에게는 ‘펜딩(pending)’ 중인 아내 리카가 있으니까.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특별한 병명 없이 몸에 이상 증세가 갑작스레 찾아온 김에 요양 차 어머니가 살림하던 집과 유품을 정리하러 온 테쓰지와, 우연히 그 일을 도와주게 된 키미코는 사랑의 ‘사’ 자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신이 진심을 내비쳐도 안전하다는 신뢰가 어느새 그들을 감싼다. 테쓰지는 키미코의 진심을 ‘중졸의 모르면서도 아는 체’라고 무시하지 않고, 키미코는 테쓰지의 진심을 ‘고작 목이 돌아가지 않는 정도로 수선이나 피우면서 모든 문제를 아내한테 떠넘기고 혼자 현실도피나 한다’고 오해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진심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자기 욕망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 상대방의 진심 그대로를 배려하고 아끼는 것은 굳이 사랑이라고 이름붙이지 않아도 사랑일 것이다. 그러니 키미코의 표현대로라면 ‘초엘리트’인 ‘최고급품 멜론’ 테쓰지와 ‘중졸’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킨코 참외’ 키미코일지라도, 리카의 표현대로라면 (사회적) ‘레벨이 높은 은행원’ 테쓰지와 ‘레벨이 낮은 아줌마’ 키미코일지라도 어찌 그들이 위화감을 극복하고 자연스레 영혼의 짝꿍으로 서로에게 다가들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또 하나, 테쓰지의 어머니가 남긴 ‘곶의 집’. 작고 한적한 해변 마을에 있는, 이 사랑스러운 집은 테쓰지와 키미코의 해피엔드를 예비하고 있는 공간이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말들을 장황하게 끌어다 댔지만, 사실 이 소설에 급격히 열광하게 된 이유는 ‘곶의 집’에 반해 버렸기 때문이다. 키미코가, 테쓰지의 아내 리카가 ‘자신이 번 돈으로 새 물건을 사서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쓰레기’로 취급한 곶의 집과 그곳에 가득 찬 유품들을 보고 “이 집은 여자들이 동경하는 보물투성이에요” 하며 흥분했을 때 나도 덩달아 들떴다.


“키가 큰 그 건물은 3층쯤 되는 것 같았지만 정작 안에 들어가면 2층짜리였다. 방은 천장이 높아서 천창이 넉넉했고, 서양식 저택인가 했더니, 웬일인지 마당과 맞닿은 툇마루가 있었다. 일본풍이라고도, 서양풍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신기한 건물이었다.” (49p)


“곶의 집 입구는 (…) 천창에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바닥의) 먼지를 청소하면서 키미코는 서서히 드러나는 문양에 눈길을 빼앗겼다. 거기에는 선명한 색깔의 타일이 깔려 있어, 먼지를 한 번 훔칠 때마다 조개와 물고기의 모자이크 문양이 나타났다. 한구석에 몇 명 정도 되는 사람의 이니셜이 있고, 문양이 군데군데 일그러지거나 생뚱맞은 색깔로 배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이것은 이 집 주인이 친구들과 직접 만든 것인 듯했다. (…) 바닥은 온갖 색깔로 가득했는데, 벽에는 연필 그림의 액자 하나만 걸려 있어 흑백의 느낌이었다. (…) 하나는 미와시 풍경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 집 정원에서 차를 마시는 여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왠지 화과자 가게의 포장지 안쪽에 그려져, 끝부분은 찢어지고 희미한 좀 자국까지 나 있었다.” (53~54p)


“시트를 벗겨내자 업라이트 피아노가 나타났다. 두 번째를 벗기자 소파였다. 세 번째로는 대화면 텔레비전과 오디오 기기가 나타났다. 네 번째는 흔들의자였고, 마지막으로 한쪽 벽면 전체의 천을 벗겨내며, 테쓰지는 어깨로 숨을 몰아쉬었다. (…) 한쪽 벽 전체에 천장까지 책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안에는 빽빽이 책과 레코드, CD 등이 꽂혀 있다.” (41p)


“당신, 이 집을 정리하려면 1년이 지나도 안 끝나요. 그게, 이 집 수납장 봤어요? 나는 어제 갈아입을 옷을 찾느라, 미안하지만 좀 여기저기 열어봤어요. 어마어마한 양의 물건들이 있어요. 그 모든 게 다 최고급품이었고요. (…) 주방에 있는 멋진 식기와 유리잔들은 어떡할 거죠? 수납장에 들어 있는 훌륭한 올리브오일과 발사믹 식초는요? (…) 유리잔 보셨어요? 설거지할 때 손가락으로 문질렀더니 예쁜 소리가 났어요. 그런 맑은 소리를 들어본 건 처음이에요. (…) 눈 크게 뜨고 보시라고요. 이 집은 여자들이 동경하는 보물투성이에요.” (42~45p)


“페리에 같은 미네랄워터와 리큐르를 보관해 두는 장소를 꼼꼼히 살펴보니 리몬첼로가 있었다. (…) 주방 한구석에 나무상자가 쌓여 있었다. (…) 역시나 화이트와인이 들어 있었다.” (68p)


“이 집의 정원에는 바다 쪽으로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그것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약하게 만들어, 정원에 늘 부드럽고 기분 좋은 공기가 흐르도록 해주었다. (…) 황폐했을 때는 눈에 띄지 않았는데, 이 정원은 지금 여름 화초가 한창이었다. 하이비스커스와 부용에 섞여, 하얗고 노란 작은 꽃들이 수없이 피어 있었다. 청소의 마무리로 나무들 근처의 잡초를 뽑으려고 그 옆으로 갔다. 쪼그려 앉으니 상쾌한 향기가 났다. 주변을 둘러보다 그것이 자신의 발치에서 풍기는 것임을 깨닫고 땅바닥에 코를 바싹 가져가보았다. 청량감이 전해지는 향기가 났다. 바로 앞의 잎사귀를 움켜쥐자 박하향이 났다. 민트네, 하며 키미코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민트 옆에, 또 낯익은 풀이 무리지어 피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이파리를 훑고 나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이탈리아 요리의 샐러드 같은 냄새가 났다. 바질 같았다. 감탄하며 일어나 풀숲을 바라보았다. 아마 여기에는 잡초에 섞여 다양한 허브가 자라고 있는 듯했다.” (54~55p)


길게 인용하긴 했지만, 곶의 집이 주인에게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느낄 수 있다. 한 여인이 생전에 마지막 거처로 정하고, 집과 정원의 구석구석을 알뜰살뜰 가꾸고 집 안으로 물건 하나하나 허투루 들이는 법 없이 정성을 쏟아부은 집인 것이다. 세상의 냉정한 시선에 움츠러든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기에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공간이 어디에 있을까? 사치스러운 최고급 휴양지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결국은 이렇게 다시 ‘공간’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테쓰지의 어머니만큼 나는 정성을 쏟아 우리의 공간을 사랑했을까? 어림없는 소리, 라는 것을 나는 안다. 워낙 살림에 젬병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 집은 의식주의 실용적인 용도에만 철저하다. 게다가 우리가 욕심껏 사들인 책들과 각종 취미를 위한 물건들이 제멋대로 쌓여 있는 창고의 역할도 겸한다. 공간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만 미처 함께 살고 있는 공간까지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우리 탓이다. 테쓰지와 키미코는 끝까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 말은 평생 삶의 가장 은밀한 공간을 공유하자는, 그 공간을 같이 아름답게 가꾸자는 사랑 고백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깨달아지니 더는 집 없는 연인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 이젠 집을 가꾸면서 사랑도 더 크고 넓게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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